Tuesday, August 18, 2015

칼빈의 핵심 교리 / 정준모 박사

칼빈의 핵심 교리 / 정준모 박사

1.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은 칼빈의 신학과 삶의 핵심 주제며 교리이다. 그의 여러 문헌과 작품 속에서, 칼빈은 다각적인 측면에서 경건과 그 결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경건은 칼빈 신학의 하나의 공통된 주제라기보다는 그의 신학 전반의 방향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총체와 구원 지식에 필요한 핵심 교리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고 읽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책으로 간주하였다.

경건에 대해 언급한 후 칼빈은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하여 설명한다. 참 종교를 결정짓는 것은 경건이다. 칼빈은 경건을 외형적인 모습에 나타난 어떤 형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진실한 경건, 참된 신실함으로 표현되는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우리의 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만큼 그분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그의 의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에 대한 거역이 죽음보다 더 악하다고 여기고 두려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종교나 경건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위엄과 긍휼을 찬양하는 자리에서도, 칼빈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능력들을 통해 종교가 발생되고 이런 능력들이 경건에 대한 우리의 좋은 스승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경건을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포함된 경외라고 부른다.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스며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경건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는데, 그 첫 번째 발걸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시고 다스리시고 양육하시는 우리 아버지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회개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인 경건은 거룩함 속에서 평생 성장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칼빈은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맺게 되는 열매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경건의 의무를 다하는 것과 모든 인간을 향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 그리고 전 삶을 통하여 거룩함과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십계명에 대한 논의에서도 칼빈은 십계명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사랑과 경건을 실행할 의무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참된 경건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경건은 교회에 관한 정황 속에서 순수한 교리로부터 얻게 되는 믿음 있는 삶을 내포할 수 있다고 칼빈은 생각한다. 결국 칼빈은 이 개념을 성경의 전반적인 계시로 이해하면서도, 단지 경건의 교리만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보여주었다.

경건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그 어떤 것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너무나 필수적인 것이어서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지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이며, 경건이 완성된 곳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경건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경건의 개념을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일컫는 포괄적 개념으로 보았고 경건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경건은 사랑, 경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그리고 경배의 원천이라고 인식하였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

칼빈의 신학의 초기 집합체인『제 1차 신앙교육서』 2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을 다룬 칼빈은 같은 책 3절에서 “그런 경건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칼빈은『기독교강요』1권의 주제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단히 눈부신 극장으로 본 칼빈은 이 세상을 주께서 그의 영광의 놀랄만한 광경을 보여 주시는 극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나 귀신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그 분의 영원함,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그리고 긍휼과 같은 것들을 충분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인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그들의 무지와 아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일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근거한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하는 영광들과 죄로 인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상세하게 다루는 데 다섯 장을 할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자에게 선생과 안내자로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의 명저인『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창조 사역 가운데 거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도록 돕는 것이고 그러한 창조 사역에 어울리는 감사가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신앙교육서』 3절의 마지막 문장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문장이며, 모든 신학 문헌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묻는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앙,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지식으로 표현한 칼빈은 마음과 심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을 생각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에관한 참된 지식은 비록 말씀으로 알게 되지만 실제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건에 관한 관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경건이라는 용어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 아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죽은 지식에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즉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을 삼켜 버릴 거대한 심연과 같다고 꼬집은 칼빈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3.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자유의지

인간 본성과 그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며 염세적인 견해를 가진 칼빈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처절하게 묘사한다. 그는 인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관하여 그 어느 개혁자들보다 너그러운 자세를 취하였지만, 『신앙교육서』에서는 이러한 인문주의적인 영향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은 죄와 반역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셨던 모든 타고난 능력들을 박탈당하였으며, 단지 영혼이 결여된 육체만을 음미하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은 지성과 의지뿐만 아니라, 손상되어 부패해 버린 신체적인 능력에도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어떤 방향으로 우리가 눈을 돌리든지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더럽고, 저속하고, 혐오스러운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에 관하여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으며 여전히 인간의 부패로 잔존하는 모든 것은 무서울 정도로 추할뿐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죄의 결과로 영혼의 모든 능력은 죄로 점유되었고 저급한 욕망이 인간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가증한 불경건이 인간 이성의 아성을 점령해 버렸으며, 교만이 그 마음의 은밀한 장소까지 침투해 들어갔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전통적으로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 등이 전 인류가 아담으로부터 범죄를 저질렀으며 모든 인류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최종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죄의 독성에 빠져서 오직 죄의 열매만을 맺게 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맨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거울에서처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반영했을 것이지만, 죄로 지워져 버린 이 형상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음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회복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 안에서 강화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창조보다 이 두 번째 창조 즉,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훨씬 더 풍성하고 강력하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될 여지를 갖게 된다고 칼빈은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칼빈의 사상은 성경적이며 매우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죄인의 의지가 노예 의지이며, 이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도움을 받기 전에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가장 어두운 색채로 죄악의 실체를 묘사하는 칼빈은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모습을 첨가시켜서 자유 의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칼빈은 자유 의지에 관해서 적극적인 입장을 갖게 된다. 타락된 상태의 관점에서 자유 의지를 바라본 칼빈은 “육체에 속한 인간은 전 영혼이 한결같이 죄 속에 거한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이 자유 의지와 노예 의지를 모두 갖는다고 말한다. 칼빈 자신은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하거나 간단하게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의 근본 입장은 명확하다. 원래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았던 인간은 바람직한 구별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원하기만 했다면 자유 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따라서 아담은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오직 자신의 의지로 자기가 넘어지는 것을 알고 바로 설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왜곡되어 버렸던 것은 처음 인간이 지녔던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와 같이 칼빈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부인함으로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결정론에 빠질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이 노예 의지를 부인함으로 운명론에 빠질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예의지를 모두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즉 칼빈은 인간에 관한 결정론이나 운명론을 모두 거부한 반면, 그는 분명코 한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른 한 측면에서는 노예의지를 인정하였다.

4. 십계명과 삶

칼빈은 전통적인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율법관을 따르지 않고, 사도 바울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율법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그의 『신앙교육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율법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삶을 정확히 측정할 목적으로 당신이 친히 부여하신 규정 혹은 표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참된 의로움과 인생의 길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율법의 요구들을 성취할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은 죄인된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어거스틴의 말을 따라서 칼빈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하나님에게는 무익하다고 본다.

율법은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우리를 지속적으로 훈육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악을 버리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권고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는 점에서 그 유익성을 찾는다. 율법은 우리가 어떤 열매를 거둘 수 있으며 또한 그것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보게 하며, 우리의 행동을 제어한다. 이런 통제는 건전한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율법은 이미 성령이 성도들의 마음에 사역하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

십계명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데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표준이다. 칼빈은 십계명을 아는 사람이 온전하게 성경을 안다고 하였다. 칼빈은 율법에 대하여 다음의 세 가지 이해를 가진다. 우선 하나님은 영적인 율법 수여자이시기 때문에 율법은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이해되고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점에서 십계명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율법의 심장, 영혼, 생명, 목적, 마침, 그리고 성취라고 하면서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진술한다. 따라서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련 속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부가적으로 율법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모세의 마지막 네 권의 책들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강력하고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칼빈은 십계명을 우리의 전 삶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행하여야 할 것에 관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은 계명을 주시면서 그 계명의 근거로 이스라엘의 해방을 상기시키셨는데,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의 주인이심을 밝히면서 그 자유를 누리는 길이 계명에 대한 순종임을 언급하며 율법과 자유의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되는 바이다. 그 점에 있어서 칼빈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도록 훈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파악하려고 노력할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우리의 판단은 점점 흐려지기 쉽다.

특히 어렵고 명확하지 않은 윤리적 결정들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매우 혼란스럽고 당혹스럽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이 문제에 관해서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율법의 개념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율법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거기에 기록해 놓으셨다. 우리가 알아야 될 모든 사항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칼빈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동시에 취하여 작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분의 형상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회복되기 위하여 우리가 아들로서 입양되었다고 칼빈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의 정신, 생명, 목표, 그리고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율법은 모든 부분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참으로 율법의 모든 교리, 명령, 약속은 항상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최고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본질이시며 완성이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토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의 삶을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보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받을 모델과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5.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자유

칼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칭의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자유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인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밝힌다. 이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고 칭하시는 자유이며, 그리스도께 종노릇하는 자유이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곧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건한 삶의 기초이며 그분이 부여하신 은혜의 결과로 우리는 회개와 중생의 삶을 갖는다고 말한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순종을 통하여 얻으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나게 함을 뜻하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가 두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칭의는 전적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 자신을 장식하는 것이다. 칼빈은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의인으로 선언됨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의미는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무엇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의 어떤 세력에 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명저인『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칭의 교리를 정립하려고 시도하는 칼빈은 기독론적 차원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분명하게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관점에서 칭의로부터 진정한 자유가 파생된다고 보았던 칼빈의 사상은 그의 율법에 대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칭의와 자유의 관계를 오랫동안 생각하였던 칼빈은 양심이 칭의에 의하여 죄책에서 자유롭게 될 때에, 칭의의 중심적 의미는 분명하게 된다고 이해한다. 그는 진정한 경건에 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이런 자세는 반드시 믿음의 중요한 행동인 기도로 이어진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롭다. 칼빈은 그 근거를 바울의 율법 폐지에 대한 언급에서 찾는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바울이 말하였을 때, 그것은 칼빈에 따르면 우리가 그 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율법의 엄격한 요구들과 그 요구들로 말미암은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따라서 폐지된 것은 율법의 규칙이 아니라 절대적인 완성을 위한 요구를 통하여 얻게 된 자유에 반대하는 요소이다. 이제 믿는 자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양심의 끝없는 속박이 주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서 ‘양심의 자유’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를 오랫동안 속박시켰던 율법에 복종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법적인 요구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대항하고 있었던 그 속박은 벗어졌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모든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의 자유에 근거하며 그 자유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은 율법 아래뿐만 아니라 복음 아래서도 요구된다. 그러나 양쪽에 대한 순종에는 차이가 있다. 복음에 대한 순종은 더 이상 율법의 명령들에 대해서 요구되는 엄격하고 혹독한 복종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인 순종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순종에 의하여 율법의 요구들을 충족시키셨다. 그래서 순종에 대한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충족되는 것이다.

자유는 자율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진정한 주인을 찾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예속된 자유임과 동시에 섬기는 자유다”라고 한 루터의 말을 반복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섬김’ 그 자체이며 섬기는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는 순종 안에 거하는 자유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가 자발적이어야 하듯이 복종 또한 기쁨의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랑과 감사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면 믿음의 순종이 아니다. 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열망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기쁨의 순종은 단지 그들이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제 진정으로 자유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 결국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지적이며 자발적인 순종을 할 수 있다고 칼빈은 강조한다.

6. 선택 교리
 
선택과 예정은 칼빈의 교리들 가운데 가장 강조되지만 또한 오해되는 것들 중 하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증거하는 수단이다. 선택은 자주 귀중한 하나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보여준다. 칼빈은 예정을 하나님의 주권의 틀에서 이해하였다. 선택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예정되었다는 근거를 가진다. 칼빈은 선택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되고 인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의 선택 교리는 성경적으로 바울의 신학적 입장을 철저히 따른다. 또한 그는 바울의 주장처럼 선택 교리를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는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순전한 관대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오직 주께서 그의 영원하신 선택에 의하여 당신의 자녀와 하늘나라의 상속자들로 예정하셨던 사람들 속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고 보았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으로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인 예정은 각 개인에게 적용된다.

예정 혹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는 칼빈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리로서 『신앙고백서』, 『제네바 신앙교육서』, 그리고 『기독교강요』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칼빈은 이 교리를 중요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틀림없다.

‘이중예정교리’는 인간 이성에 의하여 이해될 수가 없는 오묘한 진리이며 인간 이성에 장애물과 같은 개념이다. 칼빈은 이러한 어려움을 인식하고 예정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에 대해서 주님 자신의 가장 합리적인 이유로 그들에 대한 각기 다른 행동을 우리에게 감추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간파하려는 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였다. 사실상 인간은 자신의 지혜의 지극히 경미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심판들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선택과 유기 사이의 평행 관계를 생각하는 일부 신학자들과는 달리, 칼빈은 누가 선택되었고 유기되었는지에 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이런 입장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약속들을 신뢰하는 것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곳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 대해서 칼빈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는 은혜에 집중된다. 그가 우선 강조하는 사항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그분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믿는 자들에게 불확실성과 혼돈이 아닌 위로의 원천이 된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원과 선택에 대해서 확실한 입장을 가지지 못하였다. 칼빈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그들에게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영원부터 정하셨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단지 비참한 근심과 걱정으로 우리를 초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는 모든 곳에서 그는 ‘그리스도’라는 주제가 우리의 선택을 반영하고 명확하게 해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을 다루면서 다시 우리에게 그리스도만을 돌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감추어져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이며 가장 진지한 것이며, 서약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거울 안에서 보여주는 생명을 숙고하며 믿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가장 진지한 것과 서약을 붙들고 있다.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있다.

7. 믿음과 이신칭의

칼빈의 <신앙교육서>에 따르면, 그는 선택교리를 살펴 본 후에 바로 믿음의 주제로 돌아간다. 그는 믿음을 역사적 사건들과 근본적인 교리들에 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에 대한 가슴의 확신으로 보았다. 하지만 무지가 아닌 지식에 근거하는 믿음은 약속들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또한, 믿음에 관한 지식은 뇌보다도 가슴의 문제이며, 이해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질의 문제기 때문에 이 지식은 특별하다. 지식으로서의 믿음은 인간의 감각적 인식을 통한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넘어가며 일어나야 하는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지성과 의지를 모두 강조하였지만 지성보다는 의지를 더 강조하였다. 그는 신앙에서 의지의 역할을 중심에 두고 지성의 역할을 주변에 둔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 믿음은 성령의 행위인 동시에 인간의 행위이며,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복음에 있는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에 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믿음의 영구한 대상’이시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은 확인되며, 제시되고, 완성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모든 신적인 자비의 부요함을 제공해 주시는 믿음의 지속적인 대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특별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음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에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이 자비롭게 나를 향하시고,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하실 것이라는 지식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직 은총 위에서만 사람의 심장이 쉼을 얻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은총의 약속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외적인 유일한 서약이 되신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주어진 진리의 약속에 기초된 지식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하는 이 지식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져서 견고하고 확실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 또한 믿음의 창시자요 저자이신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접착제 역할을 하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롭고 언약적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효과적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묶어주도록 하는 끈으로, 이것은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이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확신이 우리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믿음의 확실성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일체에 있다. 칼빈은 종종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신비적인 결합’이라고 한다.

칼빈은 칭의를 간단히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호의 안으로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받으시는 수납’으로 정의한다. 선한 행위에 대한 토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들어오는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깨끗함을 받아 죄 용서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감 있게 서게 된다”고 그는 더욱 완성된 정의를 내린다.

칼빈에게 칭의는 단지 법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의인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칭의는 죄의 사면과 전가로 구성된다. 따라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수납되는 것이며, 용서받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는 것으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놀라운 선물들 중의 하나는 양심의 평화와 조용한 기쁨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칭의를 복음의 가장 위대한 선물로 보았다.

8. 기 독 론

니젤(Niesel)의 명저인 『칼빈의 신학』에서, 그는 칼빈 신학의 특징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으로 보았다. 그는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고, 목표이며, 목적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칼빈은 “우리는 그리스도가 성경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두 직분(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가르쳤던 초대 교회처럼, 칼빈도 『신앙교육서』에서 두 직분만 가르쳤다. 그러나 1539년의 『기독교강요』 두 번째 판에서는 『1541년 신앙교육서』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사역을 덧붙였다.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은 그가 교회의 영원한 지배자이며 옹호자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귀와 세상과 육에 대한 모든 투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며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식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은 그의 자기 희생과 죽음으로 이루신 죄에 대한 유일한 만족과 중보의 간구하심을 의미하는데, 그는 지금도 제사장의 직무를 계속하고 계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최종판에서 “대속적인 죽음의 희생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제사장의 직분은 오직 그분께만 속해 있다”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죄 사함, 하나님의 진노의 소멸,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하나님의 긍휼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선지자로서의 세 번째 직분을 강조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때에 선지자로 오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언하시고 모든 것을 계시하실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주권적인 대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 직분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세 직분에 모두 적용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직분들은 모두 우리의 선을 위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서로 교제하며,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은사를 받으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직분에서 얻어지는 개인적인 유익은 우리의 주인과 교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학자가 되도록 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참된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모든 저서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그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십자가에 완전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래도 구원의 성취를 재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보고,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희망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본질을 분리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가 씻겨졌고 죽음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부활을 통하여 의가 소생되었고 생명이 살아났다 말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죽음으로 죽음의 권능이 소멸되어서 우리 안에 효험이 있게 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권세를 넘어서 승리를 얻도록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때, 올바르게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9. 기도론

(1) 기도와 믿음

칼빈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기도에 큰 비중을 둔다. 역사적으로 유명하였던 기도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 중에서도 칼빈이 기도에 대해서 논의한 글은 그 중심에 위치한다.

기도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는 믿음이다. 즉, 기도와 믿음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기도가 전적으로 믿음과 관련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자신의 부족을 확실히 깨닫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부족의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의 가련함을 도울 수 있는 어떤 구원의 손길을 찾게 된다. 즉, 그는 창조주이신 주님을 찾음으로써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고 또한 하늘의 모든 보화를 열어주실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총체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묵상하며, 그의 전 기대는 그 분께 의존하며, 그의 모든 소망은 그 분께 집착하고 그분 안에서 쉼을 갖게 된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주요 훈련은 기도하는 것이며, 이것은 신앙의 참된 증거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믿음은 진정한 기도의 기초가 되는 동시에 필수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칼빈은 성경의 약속은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연료와 같다고 하면서 성경을 좋아하였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소망을 나타내는 신앙이며, 살아있는 신앙의 표현이자 호흡과 같아서 거룩한 교리에 대한 지식이 내 몸에 살아 움직이는 표가 된다. 기도의 중요성 때문에 칼빈은 기도에 원칙과 형식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논한다.

또한 기도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필수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기도가 칼빈의 경건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경건은 예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기도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기도와 믿음은 모두 그 초점과 목표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이러한 풍부한 요소들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마치 엄청난 보화가 땅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믿음의 눈을 통하여 보게 되며, 그 보화들을 기도를 통하여 파내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경우에서 기도와 예배의 의미를 찾는다. 여기서 그는 고넬료가 연단 받을 때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렸다고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칼빈은 진심으로 열렬히 예배에 몰두하였던 고넬료가 거기에서 신앙의 힘을 얻었다고 추측하였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 간청해야 한다. 또한 기도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놀라운 평화와 안정을 갖게 된다. 기도는 살아있는 신앙 표현이며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는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필요한 것들을 받으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기도의 필요성과 규칙

칼빈의 기도의 필요성과 기도의 규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대하심이 기도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식에 있어서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들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반드시 그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우선 믿음의 강건을 위하여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해야 할 여섯 가지 이유들은
첫째로,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일도록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하나님께 알려 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기도로 응답해 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섯째로,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로, 우리가 연약한 때일수록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지켜 주신다.

칼빈은 기도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행해지는 일종의 약속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소원, 기쁨, 하소연을 포함한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들을 내어놓을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이며, 우리 마음의 순수한 감정의 작용인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는 우리의 ‘선택적인 행동’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그 명령은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약속과 함께 온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은 모두 기도의 동기와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거절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될 것은 ‘기도하지 않는 죄가 가장 나쁜 죄’라는 것이다.

기도의 규칙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신자들을 위하여 적절한 기도의 규칙들을 열거하고 논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합당하게 대화하기 위하여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자세를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 의존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의 탄원을 불타는 열성으로 아뢰어야 한다. 전심으로, 진지하게 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합당한 기도의 전제 조건은 통회하는 심령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영광과 가치에 대한 생각은 일체 포기하고 겸비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고백적인 응답이다. 신자가 먼저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 또한 모든 기도는 죄의 고백과 용서의 간청이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런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경외가 수반되어야 한다. 복음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회와 믿음으로 기도하는 모든 이에게 인자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자는 철저하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능력과 기도에 온 정신을 바쳐야 하고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정신을 모으기 어려울 때는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마음과 생각이 주를 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훈련이며,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이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성화의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 일정한 시간에 기도할 것과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도 인내로 간구할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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