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1, 2016

휘브리스(교만) /정용섭 목사 (매일묵상에서...)

휘브리스(교만)
/정용섭 목사 (매일묵상에서...)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누가복음 1:51-53)

마리아 찬송은 눅1:51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라고 했다. 기독교 교부들은 교만을 죄의 본질로 여겼다. 대표적으로 어거스틴이다. 그에 따르면 죄는 헬라어 '휘브리스'가 가리키는 교만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선택한 이유는 자신들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뱀의 유혹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자기를 높이려는 열망이 강했다는 의미다.

교만은 보통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이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난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을 때 교만해진다. 로마 황제는 대표적이었다. 로마만이 아니라 제국의 왕들은 다 그랬다. 이집트 파라오들이 영생불사를 꿈꾸면서 피라미드를 건축한 것도 결국 교만을 뿌리로 한다.

교만은 생래적이어서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흔하게 나타난다. 건축 현장에서 내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다. 어떤 목수가 옆에서 일을 배우면서 도와주는 사람을 데리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보조자가 약간 틀리거나 다른 박자로 일을 하면 목수는 여지없이 핀잔을 줄 뿐만 아니라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교만한 행동이었다. 

운동을 하는 테니스장에서도 교만한 사람은 여지없이 교만하다. 종교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교만(휘브리스)은 존재론적인 힘으로 인간을 지배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결국 휘브리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죽어야 죄에서 벗어난다는 바울의 진술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죽기 전에는 교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그걸 최소화할 수는 있을 뿐이다. 

자기를 최소화하는 것이 곧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를 비천한 여종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이런 삶의 태도를 죽을 때까지 수도승처럼 유지한다면 마리아와 같은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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