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1. 도입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엡 1:4-6)을 이루시기 위한 계시의 방편과 도구로 선용되고 있습니다(창12:1-3, 신 7:7-8).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른 한편에서 하나님의 계시사(啓示史)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계시(revelation)란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서의 영원하신 경륜(economy)이 세상 역사 속에서 언약과 성취의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사건은 계시사로서 앞서 일어난 출애굽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계시의 점진성/연속성/통일성의 원리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사건은 출애굽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그 본의를 발견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 둘의 관계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신 아브라함 언약(창 12:1-3, 15:13-17)의 구체적 성취라는 관점에서 그 당위성(must)과 연속성(continuity) 및 실현성(feasibility)을 확인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에 담긴 중요한 4요소는 ①자손언약, ②땅 언약, ③왕권 언약, 그리고 ④열국의 복의 근원입니다. 이런 사실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해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대리적인 왕들을 세워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심으로 저들도 하여금 열국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오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직분을 담당케 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담긴 하나님의 자기 선언적 성격을 띱니다(출 19:5-6). 이런 상호 보완적이고 의존적인 언약적 계시진행의 맥락 속에서 출애굽 사건을 통해 자손언약이 성취된 것이며, 다음 단계로 땅 언약의 성취를 향한 가나안 정복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정복 계시사건에 담긴 구속사(계시사의 핵심사상이 구속에 모아짐)적인 의미를 살펴봅니다.
2. 전개
첫째로 가나안 정복은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 성취에 이은 땅 언약의 성취의 일환일 뿐 아니라(창 12:1, 13:14-15), 맹세적 보증으로 맺어 주신 횃불언약식의 구체적 실현에 철저히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창 15:13-17, 18-21절). 여기서 횃불언약식이란 아브라함이 땅 언약의 성취에 대한 확고부동한 징표(이미 자손언약의 성취와 관련해 하늘의 뭇별들로 징표를 보여 주셨음 : 창 15:5)를 보여 달라는 요청에 기꺼이 응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추가로 보증해 주신 표적적 언약식입니다(창 15:8-17). 횃불언약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①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400백년간 고난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②4대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③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④가나안 귀향은 동시에 가나안 지경에 관영한 죄를 심판하시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횃불언약식은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 및 땅 언약과 관련해 보다 구체적인 성취에 대한 맹세의 보증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나안 정복은 출애굽의 구원사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실질을 가나안에서의 정착된 삶과 신정왕국의 정체성 속에서 현재적으로 누리게 된다는 관점에서 말입니다.
이제 가나안 정복은 요단강 도하사건을 통해 그 구속사적 의미가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요단강 도하는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요단강 저편에 놓인 하나님 나라로서의 가나안 땅 또한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의 구속사적 성격을 총체적으로 표상하는 요단강 도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지시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며 강권하십니다(수 1:1-9). 이스라엘 열조에게 행하신 모든 약속을 지켜 행하실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을 상기시키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적 순종에 불충하면 상응하는 대가가 지불될 것을 경고하심으로 여전히 시내산 언약에 따른 순종의 요구가 동일하게 적용됨을 봅니다( 7-8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수혜자로 하여금 자율적 순종을 촉구하는 것을 통해 은혜의 은혜 됨을 강조하고 확증하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 1세대에게 적용된 동일한 원리에 근거해 2세대를 인도하실 것에 대한 확증인 동시에 경고성 발언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홍해에서 그랬듯이 맨 땅처럼 건넙니다(수 3:14-16). 그러나 두 사건 사이에는 도하(渡河)의 성격상 방법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홍해도하 때에는 먼저 길을 내고 건너가게 하셨습니다(출14:16). 출애굽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여호와 신앙에 대해 거의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애굽의 이교도적 생활과 우상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출 32:1-4).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유아적으로 다루셨습니다. 그러나 요단강 도하 때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38년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을 만한 많은 증거를 실제적으로 보고 듣고 경험한 상태였습니다. 많은 훈련과 연단을 통해 시행착오도 겪었습니다. 비록 저들의 신앙여정에 여전히 실수와 실패의 요소들이 반복될지라도 결코 출애굽 당시 1세대가 소유했었던 유아적이며 이교도적인 믿음의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성숙했습니다. 여호와 신앙에 대한 믿음도 자랐습니다. 그래서 때마침 강둑이 넘칠 정도의 물이 흐르는 요단강을 직접 도하할 것을 명령하십니다(수 3:15). 믿음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미 홍해에서 보여주셨던 대로 말입니다. 이로 인해 요단강 도하 사건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될 가나안 정복사건이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결정적인 근거와 더불어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싸우시는 성전(聖戰)의 의미 말입니다. 후에 요단강에서 돌 열 둘을 취해다 ‘영영한 기념’으로 삼게 했던 사건 속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수 4:1-7). 요단강을 도하했던 믿음의 행보는 곧 이어 수행하게 되는 전쟁 역사상 전대미문의 여리고성 함락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재확인됩니다.
요단강을 마른땅같이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즉각 가나안 정복사역에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십니다. 도중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게 하십니다(수5:14). 곧 하나님의 현현 하심입니다. 그 분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신발을 벗게 합니다(수 5:15). 이는 여호수아의 사역이 모세의 사역의 연장이며 언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동일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의 성과 왕과 용사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수6:2). 구체적 전략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승리가 이미 보장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좇아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번씩 육일 동안 여섯 번 돕니다. 제 칠일에는 일곱 번 돌고 큰 소리로 외침으로 간단히 점령합니다(6장). 말씀이 현실화됩니다.
여리고 성 함락의 구속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나안 정복역사는 하나님의 성전(聖戰)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군대장관이 되셔서 직접 전쟁을 수행하십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이고 절대적인 신뢰의 믿음을 발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며 아울러 생명적 활동을 전개시켜 나가는 근본 원리가 됨을 결정적으로 시사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승리로 기록된 여리고 성의 함락은 이후 오직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한 가나안 정복역사의 계시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시(豫示)사건입니다. 이런 성전(聖戰)의 방식으로만 가나안은 정복돼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은 총체적 관점에서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갈 2:20). 이는 약속의 말씀을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행함과 더불어 일하고 행함을 통해 온전케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약 2:2).
여호수아서 기자는 이런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하심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해 가면서 땅을 분배받았을 뿐 아니라, 일부 남은 지역은 제비뽑아 도면상에서 분배함으로 사실상 가나안에 대한 땅 언약이 성취됐음을 시사합니다(수 18:1-10, 21:43-45). 저자는 이스라엘 열조에게 주시겠다던 온 땅을 다 주신 것으로 설명합니다(43절). 저자는 여호와께서 그들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고 설명해 이를 뒷받침합니다(44절). 이는 이미 신명기서를 통해 출애굽 2세대들에게 확약한 바 있는 내용입니다(신 12:8-10). 다시 말해 시내산 언약이 가나안 정복사역을 통해 예비적이기는 하지만 가시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후에 열왕기서 기자는 다윗과 솔로몬의 신정적 통치하에서 안식의 구속사적 의미가 담긴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실현됐음을 강조해서 기술합니다(왕상 4:24-25, 5:4). 이런 설명은 당시 통일 이스라엘 왕조가 누리고 있는 국가적 평안과 안식의 도래가 철저히 시내산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의 구체적 성취와 밀접히 연관돼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사실상 안식사상은 창조이래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으로 곧 구속사의 절정인 하나님 나라 사상과 밀접히 연관돼 있습니다(창 2:1-3, 눅 6:5, 계 21:4). 이런 의미에서 당시 열왕기서 기자는 사실상 다윗과 솔로몬 치하에서 통일 이스라엘의 왕조의 정체성이 신정적 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가장 극명하게 현시하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왕상 4:25, 미 4:4).
여호수아서 기자는 모든 하나님의 선한 일(약속)들이 하나같이 성취됐음을 기록합니다(수 21:45). 이는 비록 일부가 도면상으로 분배됐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신적 기원과 신실하심에 기초하고 있기에 식언하실 수 없습니다(민 23:19). 마침내 성취될 것입니다. 결국 이 사실은 다윗과 솔로몬 통치 때에 사실로 판명됩니다. 위로 단에서부터 아래 브엘세바까지를 포함한 가나안 전 지역이 통일 이스라엘의 점령지에 예속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왕적 치세의 극치가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왕상 4:20-25).
둘째로 가나안 족속의 죄의 관영(貫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아브라함의 횃불언약에서는 이를 아모리 족속의 ‘죄의 관영’이란 표현으로 묘사합니다(창 15:16). 아모리 족속이 가나안 족속을 대표해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죄의 관영이라는 관용어적 표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노아 시대에 죄로 말미암는 시대적 상황이 그랬습니다(창 6:5-7).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고발할 때도 그랬습니다(창 18:20-21). 신약의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 같이 이 시대의 종말론적 심판을 예견하면서 동일하게 노아 및 롯의 때와 방불할 것에 대해 기술합니다(눅 17:26-30, 마 24:37-39). 이는 결국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죄의 관영이 하나님의 심판을 필연적으로 자초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의 구속사적 성격은 한편으로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인 동시에, 다른 한편은 아모리 족속으로 대변되는 가나안 족속의 죄가 관영하기를 기다려 심판하시기 위한 의도가 내포돼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관영한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적 집행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의 정황적 근거를 사사기에서 엿보게 됩니다. 삿1:1-7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도면상으로 남겨진 가나안 땅에 대한 정복역사 기록의 초반부가 소개됩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연합해 가나안 정벌에 나섭니다. 이때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이라는 왕을 잡아 수족의 엄지를 끊는 기사가 나옵니다(6절). 아도니 베섹은 이 사건을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끔직한 범죄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적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과거에 칠 십인 왕을 잡아 수족의 엄지를 자르고 그들로 자신의 상(床) 아래서 짐승처럼 먹을 것을 줍도록 행한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7절). 이는 가나안 족속들의 죄가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입니다. 아울러 가나안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당위성을 설명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관영한 가나안 족속의 죄를 징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가나안 정복의 성전(聖戰)을 감당하게 됩니다.
3. 결론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맹목적이며 일방적인 부당한 처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구속의 경륜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신실히 성취해 가시는 섭리적 차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곧 출애굽 사건을 통해 성취된 자손언약에 이은 땅 언약 성취의 일환으로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안 지경은 저들의 관영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을 통해 대리적으로 시행된다는 의미가 더불어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를 통해 죄의 결국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을 초래케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일관되게 경고합니다. 횃불언약식에서 “아모리 족속의 죄가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6)고 천명하신 대로 말입니다. 이 말은 가나안 정복사건이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와 함께 가나안 족속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역설적으로 암시하는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출애굽의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출 12:40-41).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단행하셨으며 동시에 가나안 정복의 나팔이 울려 퍼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역사와 관련된 두 가지 구속사적 의의, 곧 아브라함 언약으로서 ‘땅 언약 성취’와 ‘심판의 당위성’의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세상역사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출 19:5). 만사와 만물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경영됩니다(롬 11:36).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오늘도 하나님의 남은 구속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져 갑니다. 오직 계시의존적이고 섭리의존적인 신앙만이 올바른 성경적 신앙관인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의 본질에 깊이 접촉돼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비로소 여호와 신앙이 정체성과 정당성이 성립될 뿐입니다. 당신의 신앙관은 총체적인 관점에서 과연 성경적인가요 아니면 전통적인가요(마 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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