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8, 2018

선교란 무엇인가?

선교란 무엇인가?

/ 송용조 박사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선교단체협의회

Ⅰ. 서론
 
선교의 고전적 어의는 타문화권 전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란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포괄적이며 애매한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선교는 '선교'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선교에 관한 문제가 실제의 선교사역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무엇이 선교인가 하는 선교의 개념 정립에 논쟁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는 말이다. 선교란 무엇이가에 대한 분명하고 단순한 해답이 가능했던 시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 같다. 오늘날 신학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배경에 따라 나름대로의 선교개념을 가지고 선교를 말하고 있다.

선교에 대한 옛날의 정의를 고수하는 입장을 취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현대의 포괄적인 선교 개념을 옹호하는 자들이 있다. 선교의 고전적 개념은 너무 좁기때문에 우리가 처한 삶의 정황에서 선교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렵게 한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넓어진 선교 개념으로는 우리를 추수꾼으로 부르신 주님에게 불순종하게 될 위험성이 따르게 될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를 듣는다.
   

엇갈린 선교관, 즉 혼란된 선교 개념 때문에 선교에 대한 교회의 실제적인 노력은 더욱 더 모호한 것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선교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야기된 갈등과 혼란은 위험한 수위에 까지 이른 감이 든다. 타문화권 전도만을 선교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가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을 선교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같이 혼란된 선교 개념을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도록 성경적인 선교관을 제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선교론들이 다 성경에 근거를 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선교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외면하고서는 선교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더욱 활기 차게 선교를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진양이나 복음주의 진영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포괄적 선교 개념을 세계에 대한 교회의 역동적이며 기능적인 관계를 선교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의 성경적 근거를 다시 찾아 보기위해 선교 공동체인 교회와 세계 만민과의 관계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경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Ⅱ. 선교의 성경적 근거
 
'선교'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용어이다. 선교는 라틴어 동사 mitteer(보내다. 파견하다)라는 단어의 어원으로 하고 있다. 영어로 선교를 의미하는 mission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파송되는 것을 뜻한다. 영어의 mission(선교)와 missionary(선교사)는 라틴어 mitto에서 유래된 말인다. 그 의미는 '보냄을 받은자'라는 뜻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에 복음을 듣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복음전도자를 파송하신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들과 활동들을 할 수 있지만, 궁극적 목표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적 의미로 '복음'이란 말은 사도들의 설교인 기쁜 소식을 말한다. 초대 교회의 전도 (Kerygma, 케리그마)에는 메시야이신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및 승천, 성령 강림, 예수의 재림, 회개와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확신, 그리고 성령의 은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스데반, 베드로, 바울 등이 전한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 복음은 예루살렘, 안디옥, 에베소, 고린도, 로마와 그 변경 여러 곳에 전해진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의 메시지이며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오늘도 이 복음을 확신하고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선교 사역에 협력하는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구약 성경은 구속의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어 이 구속의 예언을 들을 수 있게 해주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갈 4:4).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인간의 삶에 동참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대속의 역사를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그가 영광의 주가 되심을 알려주셨다.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대속을 성취하셨다. 부활과 더블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적 승리는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 발용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세상에는 어떤 교회도, 어떤 선교 운동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바이어하우스(Peter Beyerhaus)가 예수님의 부활을 선교의 기초로 말한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죄와 사망이 정복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든 족속들에게 침투해 들어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명령을 받게 되었다(마 28:18-; 막16:15; 눅24:44-49; 요20:21-23; 행1:8). 

예수님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높임을 받으셨다(빌2:8-11). 영광의 위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파하도록 제자들을 성령의 은사와 능력으로 무장시켜 주셨다. 사도행전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알려주는 선교 역사의 첫 장이라 할 수 있다.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 세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적이다. 능력 있는 복음증거 (행2:37-41, 4:33), 사죄의 기쁜 소식(행2:38), 하나님의 치료(행3:1-11)악령의 권세들을 제압하는 승리(행4: - 5:)가 있었다. 요한복음이나 사도행전에는 구원의 은총을 표현하는 말로 대치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하는 구속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그렇게도 자주 쓰여진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란 말이 요한 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겨우 몇 번만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이 이방 세계로 들어가면서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인 용어로 들릴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도들은 다른 왕 예수를 전한다고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행17:7-8).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인 것이거나 경제적인 것이 나라는 정치적인 것이거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됨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변증이 필요하였던 것이다(롬14:17).

신약성경이 의미하는 하늘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인격과 삶이 변화되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몸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증보자가 되신 것 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모든 사람사이에서 그리스도를 믿어 순종케 하는 일에 봉사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의 남은 고난을 그 몸에 채우도록 위임받고 파송팓은 종의 공동체이며 선교 공동체이다(골1:24).

Ⅲ. 성경적 의미의 선교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의 은혜를 알지 못하여 아직도 그를 주와 구주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족속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 하려고 문화적인 경계를 넘어 가서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 들이는 활동을 선교라고 말한다. 교회의 선교적 과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위임받은 구원과 심판의 완성을 위하여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위임받은 구원과 심판의 완성을 위하여 재림하실 것이다(행17:31). 이것은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이며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나심이다(딤2:13).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승리로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때 교회는 그의 선교적인 목표가 최종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알게 될것이다(고전15:24). 

그러므로 교회는 온 세상온에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온 세상이란 말은 동일 문화권, 유사 문화권, 타 문화권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누가 전할 것인가'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막16:15).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또는 구속적 통치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선교신학에서 깊이 다루어지고 있다.

선교의 성경적 근거를 원만하게 이해할 때 선교의 정의들이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 위에 설정된 것인지, 아니면 부분적인 본문에 의존하여 내린 정의인지를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적인 선교관은 성경의 일관된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와 선교적인 기독론과 교회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화란 선교학자인 베르쿠일(Johannes Verkuyl)은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 그것을 점점 더 잘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 곧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일에 관련된 활동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자인 휘체돔(Georg F. Vicedom)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 전체의 견해를 따라서 볼 때 하나님은 단 한 가지 의도, 즉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도만 가지고 있다. ... 선교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다".

선교를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선포하는 일에 관련된 활동으로 볼 때에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따르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구원을 개인적으로 적용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회/정치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선교 역사가 말해 주듯이 경건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나라 사상을 개인 주의적으로 해석하여 그 나라에로 부름 받은 사람들만을 얻으려고 했었다. 반면에 그것이다. 미국에서는 사회복음(social gospel)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있었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20세기 중반부터 표출되기 시작한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 간의 선교 신학 논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에큐메니칼 측은 선교의 수평적 차원에 치중한 나머지 수직적 차원을 상실한 것으로 비판을 받았다. 복음주의 측은 선교의 수직적 차원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수평적 차원인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선교의 목표가 복음화(Evangelization)냐 인간화(Humanization)냐의 양극화 현상은 양 진영의 선교관을 보다 성숙한 단계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쌍방이 건설적인 비평을 받아들여 선교의 수직적(하나님과의 관계) 및 수평적(인간과의 관계)차원을 균형 있게 유지하기 위한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을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의 회심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난 아직도 선교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일방성과 편협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양 진영이 꼭 같다. 

이런 상황을 열두해 두고 여러가지 선교에 대한 정의들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적 의미의 선교관을 원만하게 반영하는 정의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지 심각한 숙를 요청한다. 우리가 경험한 선교에 대한 양극화 현상과 첨예한 논쟁은 복음주의 진영이나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다 같이 선교의 수직적 및 수평적 차원을 균형있게 포괄하는 총체적 접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오늘날 일부 극우적인 근본주의자들과 선교의 고전적 의미에 의도적으로 집착하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총체적 선교관'을 받아들인다. 총체적 선교관이란 선교를 전도와 사회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전도의 우선성과 열정은 유지하면서 역사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선교의 수직적 차원인 복음화와 수평적 차원인 인간화를 다 포괄하는 수정되고 넓어진 복음주의자들의 선교 개념이다.

전도(지상명령에 근거한)와 사회 활동 및 봉사(사랑의 계명에 근거한)를 이분화하지 않고 하나의 명령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개개인이 생존하고 있는 사회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구원을 개인의 영적 차원이나 사회/정치적 범주에 맞추어서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양극단으로 기울게 하는 편향된 시각을 갖지 않도록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선교의 성경적 근거에 관한 총체적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균형 잡힌 선교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의 선교적 교회를 섬기는 우리들의 사명이다.

전도와 사회적 책임 간의 긴장과 이로 인한 소모적인 양극화 현상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개도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포함한다는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Ⅳ. 선교에 있어서 사회적 책임
 
문제는 전도와 사회적 책임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다. 복음전도를 사회 활동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선교에 있어서 우선 사항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과 결부되기 때문에 우선 사항들에 대한 추상적인 논의는 가능하지 않다.

로잔 선언문(1974)은 "복음 전도와 사회/ 정치적 활동은 둘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의 일부이다."라는 진술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선교에서 복음 전도가 일차적인 것이다"라는 진술을 덧붙이고 있다(6항).

1982년 그랜드 래피즈에서 열린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에 대한 협의회'는 전도의 우선성을 확인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라는 바로 그 사실은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전제로 하며, 그들이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은 복음 전도와 훈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둘째로, 복음 전도는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 ... 모든 인류에게 최고로 또한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원하고 영적인 구원이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복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마닐라 대회(1989)의 선언문도 유사한 진술을 담고 있다. '복음 전도가 우선적이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복음, 곧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와 구세주로 받아들일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복음 전도의 우선성만 재 강조했을 뿐이지,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는 규명하지 않고 있다. 

그랜드 래피즈 협의회(1982)는 이 관계에 대해 세가지 사항을 분명히 했다. 첫째로, '사회 활동은 복음 전도의 결과이다.' 둘째로, '사회적 활동은 복음 전도에 이르는 교량역할을 할 수 있다.' 셋째로, '사회 활동은 복음 전도의 결과와 목표로서 그 뒤를 따르며 또한 그것의 교량으로서 복음 전도에 선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의 동반자로서 그것에 수반된다. 그것들은 가위의 양 날 혹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이러한 동반자 관계는 실상 결혼 관계와도 같다.' 그리스도인의 세상 에서의 섬김은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 둘다를 포함한다는데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일부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선교에 대한 이러한 포괄적인 개념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잠재적으로 기독교 선교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고 제자 훈련을 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그들의 우선적인 임무들로부터 빗나가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정치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선교를 타문화권 전도로 이해하는 전통적 선교 개념을 그대로 간직할 것을 촉구한다.

선교는 증거와 섬김을 위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선교를 모델로 해야 한다. 선교사들의 사역이 전도 외에 다른 것들에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선교를 전도로만 한정하는 것은 교회의 선교 사역에 균형을 깨뜨리게 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선교 사역이 전도, 제자훈련, 교회 개척, 의료 봉사, 교육 사업, 지역 개발, 성경 번역, 사외 사업등 여러 가지를 포함하면서도 그 모든 활동이 항상 복음화를 그 목표로 삼아 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복음화를 통해서만 효과적인 인간관계를 위한 진정한 근거가 이루어 질 수 있다.

선교에 전도와 사회적 활동 둘을 다 포함 한다 할지라도, 강조점이 복음 전도에 있지 않으면 교회의 선교 사명 수행에 심대한 손상을 끼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것이 선교의 목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선교가 다양한 사역들을 포함하면서도 전도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총체적 선교' 또는 '전도와 사회적 활동 간의 동반자 관계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전통적 선교가 지향한 모든 족속으로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일에 손해를 깨쳐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며, 죄와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에 따라 선교의 동기, 목표, 그리고 방편이 달라지게 된다. 전통적인 선교 개념과 실천적의 옹호자들도 선교를 전도로만 보지 않고 전도를 위해 교육, 의료, 농업 개발, 사회 참여, 정의 구현, 사회 봉사, 문서 선교 등을 선교 활동에 포함시키고 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우선해야 할 사항이 다를 수 있지만, 어느 시대 어떠한 환경에서도 모든 족속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삼고 활동해야 한다.

선교를 '하나님이 이 세계 안에서 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일' 또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로' 그 개념을 넓혀버릴 때 선교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할 것이라는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구두 전달과 사회적 활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전도와 사회적 활동을 서로 관련이 없는 별개의 일로 보지 말고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본다면, 선교의 포괄적 정의를 받아들여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Ⅴ. 맺는 말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심과 행하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행동으로 설명되었으며, 예수님의 행하심은 그의 말씀을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말씀과 행하심은 하나의 증거 사역으로 결합되어 있었으며, 상호 지지했다. 말은 사람의 행동으로 구체화 될 때까지는 추상적인 것으로 남게 되고, 행동은 말로 해석될 때까지는 모호한 체로 남아 있게 된다. 말이 없는 행동은 명료성이 없으며,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행하심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으며, 예수님의 행동은 그의 말씀을 가시화시켰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 또한 예수님의 선교를 모델로 하여 말과 행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선교와 전도를 다른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 전도도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고, 선교 또한 말과 행동으로 지구상의 모든 족속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전도가 의미하며 목표하는 것을 떠난 선교란 있을 수 없다. 전도가 아닌 선교는 진정한 선교가 아니며,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본질을 상실한 교회이다.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문화권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들을 권하여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며, 그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전도 와 정의의 실현에 참여켜 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Donald A. McGav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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