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이 땅에서의 성화는 가능할까?
정성민 교수의 <현대인을 위한 기독교변증>
2005년 지하철에서 맨발로 다니시는 최춘선 할아버지의 삶이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그의 청빈한 삶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이 되고 있다. 그는 과연 현대판 성자인가?
일반 성도들이 생각하는 성자는 적어도 사도 바울, 성 어거스틴, 성 프란시스코, 마더 테레사 등과 같은 이상형들이다. 일반 신자들에게 있어 성화된 삶을 산다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성자들의 삶을 존경하고 그러한 삶을 동경하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과연 일반 성도들도 성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이 땅에서의 완전한 성화는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성령을 따르는 삶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회심을 하여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중생이라 한다. 중생은 말 그대로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획기적인 체험이자 변화의 기로가 된다.
그러나 중생도 새로운 영적인 삶의 시작에 불과하다. 중생의 경험을 하고 난 후 우리는 그 감격에만 취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자라나며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성화라고 부른다. 성화는 중생 이후에 따르는 자연스런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다. 성령으로 거듭 난 성도는 이제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화된 삶이란 사실 성령을 따르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은총의 삶이기 때문에 너무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영적성장의 바로메타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듯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은 신자는 이제 성장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형아가 되어버린다.
성령으로 거듭 난지 10년이 되어도 아직도 영적인 나이가 1살이라면 문제가 있다. 성숙하지 못하여 교인들은 물론 불신자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 삶을 살 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중생 이후에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중생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구원 사건이라면 성화는 신자의 전 생애를 걸쳐 일어나는 하나의 지속적인 과정이다.
성화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들이 살아가야 하는 거룩한 삶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화는 구원받은 성도의 영적인 상태와 성품의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성화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성도의 인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성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을 향하는 거룩한 삶이다. 둘째는 인격적으로 성숙한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하는 거룩한 삶
하나님은 죄에서 우리를 건지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3)
그러므로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6)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이고, 이러한 성화의 삶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갖고 있었던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화된 삶을 산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성화를 위한 영적 전쟁
바울은 선한 일을 실천하고 악한 일을 피하라고 권면한다. (롬 12:9, 16-17)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일들을 죽이고 (롬 8:13)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한다. (롬 12:1-2) 성화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바울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라고 말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마귀와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엡 6:10-18)
그리스도를 닮는 성화의 삶을 살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열심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는 것을 ‘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죄’를 결단코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눅 22:44)
사도 바울선생도 역시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고 성도들에게 권고하였다.
성화의 과정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영적으로 자라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 음성에 순종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고 중생의 감격도 희미해질 무렵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도가 돌변하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본모습이다. 꾸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렇기에 성화된 삶은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인도하심과 능력이 함께 임할 때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부흥회나 좋은 세미나에 참석하여 감격하고, 소위 말하는 ‘은혜 받았다’는 외침 속에서 한 일주일은 성령을 따라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일주일 후에 전과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하기 쉽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대개 이러한 초기 성화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제 자리를 맴도는 경우가 많다.
up & down, up & down
내 아내는 선천적으로 온순한 사람이지만 성격이 강한 남편과 고물고물한 아이들 세 명을 기르면서 강한 성격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아이들에게 있어서 무서운 엄마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루는 j 교회에서 열리는 ‘어머니 학교’에 참석하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에 감격하였다. 또한 아이들을 믿음의 딸들로 바르게 키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정말 정성을 다하였다.
그런데 마냥 좋아해야할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그런 엄마의 모습에 적응을 못하고 부담스러워하였다. 아이들의 불안함과 부담스러움의 원인은 일주일이 지나자 밝혀졌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내는 또다시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은혜 받고 오면 일주일은 너무나 천사 같아요.”
보통의 사람들은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곤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 초기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 고비를 넘기면 우리는 보다 원숙한 단계로 성화된 삶을 살 수 있다.
보다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라
아내와 16년 결혼생활을 하면서 서로의 성격차이로 인해 너무 힘들었다. 아내는 보수적이고 우직하면서 때론 융통성이 없는 첫째 딸이었고, 나는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이며 때론 융통성이 너무나 풍부해서 어려움을 겪는 막내아들이었다.
결혼 생활 10년차까지 우리 부부는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하여 서로 사느니 마느니 하면서 아주 심하게 싸우기도 하였다.
결혼 10년차가 되었을 때 우리 부부는 최고의 위기를 맞았다. 서로 성격차이로 인해 싸우기도 하였고 아내가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고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남편은 자기밖에 모르는 것 같고, 자신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건강도 잃어가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그녀를 덮쳤다.
아내의 피해의식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아이들 세 명을 제대로 산바라지도 받지 못하고 키웠다. 설상가상으로 아이 셋을 낳고 내가 2년 동안 군복무를 할 때에 혼자서 3명의 아이들과 함께 시댁에서 버텨내야 했다. 아내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이제 아내는 나를 불신하기 시작하면서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복의 기회가 왔다. 우리 가족은 2000년 여름에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는 디즈니 월드로 여행을 갔다. 그 곳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던 신학교 동기부부를 방문하였다. 그 동기는 나의 신학생 동기로서 조지아 주에 위치한 미군 부대에서 군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아내는 또한 내 아내의 신학생 동기였다. 그러니까 우리 두 부부는 캠퍼스 커플이었던 것이다.
그 미군부대의 기숙사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나와 동기는 저녁을 먹고 그냥 잠을 잤다. 그런데 두 여인은 서로 눈빛을 빛내면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까지 둘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어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서로 웃으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말이 통한 것이었다.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다 그렇구나!”라는 결론과 “남자들이 다 그렇구나!”라는 결론을 내린 듯하였다.
그 후로 아내는 조금씩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나 자신도 이제는 신경질이나 혈기를 부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항상 부부싸움을 시키는 그 무엇인가 영적인 것을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아내가 화를 내면서 나에게 접근할 때, 그녀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일단 들어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후 서로의 감정이 식은 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다. 그런 식으로 1년을 지내니까 부부싸움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1년을 통해 우리 부부는 위기에서 벗어나 보다 성숙된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성화 초기의 단계에서 한 걸음 진전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보다 발전된 성화의 단계를 방해하는 마귀의 세력을 이기라
성화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마귀의 부추김과 급한 마음이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짜증나게 하고 괴롭혀서 우리로 하여금 신경질이 나게 만든다. 이제 마귀가 나에게 접근할 때 나는 감지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 혈기를 내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 때를 잘 넘기면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이 성급하게 신경질을 내거나 화를 내는 것을 될 수 있으면 자제한다. 왜냐하면 조금만 있으면 후회할 것이니까 말이다.
서로 싸우고 싶은 충동이 일 때에 1-2시간만 잘 넘기면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 그 시간에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정 힘들면 속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면 된다. 그것도 안 되면 차라리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된다.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가서 기도하거나 친한 친구를 불러서 담소를 나누면 된다. 아니면 맛있는 것을 사먹어도 보라. 마귀가 역사하는 시간을 지혜롭게 넘겨야 한다. 하지만 믿음으로 넘겨야 한다.
성화의 완성을 향하여
손양원 목사 (1902~1950)는 1908년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7년 선교사 f. j. l. 매크레이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923년 도쿄[東京]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 1925년 경상남도 성경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한평생을 문둥병 환자를 위해 살았다. 특별히 ‘신사참배’에 불복함으로 6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8.15 광복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되었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인 1948년 10월 27일 그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동시에 잃고 만다. 공산주의자가 그들을 총살해 버린 것이다. 그는 애양원에서 부흥회 인도하는 중에 이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태연하게 부흥회를 끝까지 다 인도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그의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다음과 같은 9가지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 감사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왔으니 하나님께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쩌면 이렇게도 귀한 보배 사역을 나에게 맡겨 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하신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
넷째, 두 아들이나 순교했으니 하나님께 감사,
다섯째, 누워서 죽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복인데 끝까지 전도하다가 총살로 순교 당했으니 하나님께 감사,
여섯째, 미국을 가려고 준비 중이었던 두 아들을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보내주셔서 내 마음을 안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시킨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덟째, 두 아들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 들이 생길 듯이 믿어지니 하나님께 감사,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의 진리(眞理)와 사랑과 신애(信愛)를 찾는 기쁜 마음과 여유 있는 믿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이와 같은 내용의 답사가 계속되는 동안 장례식장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위에서 언급한 일곱 번째 감사제목처럼 손 목사는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사형수 안재선을 살리려고 각계에 호소하여 결국 그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그를 자신의 양자로까지 삼았다.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아들 둘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모습, 즉 원수 사랑이 완전한 성화의 진면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종교들의 창시자들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비범성 중의 하나가 “원수사랑”인데, 손양원 목사는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비범한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손 목사의 비범한 사랑은 신앙의 눈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숭고한 성화의 삶이다.
천국을 향한 북극성
손양원 목사의 삶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만 동시에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과연 우리도 저런 성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성도라면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긴 한데 그것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성경에서는 흠 없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권고하지만 내 인격의 수준에서는 너무나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어려운 과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일까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길수도 있겠다. 하지만 완성된 성화의 삶을 살진 못하더라도 그 성화된 삶을 향하여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태도 자체가 중요하다. 성화된 삶이란 성도에게 하나의 목표이자 지향점이다.
항해할 때나 길을 잃고 헤맬 때 우리는 북극성을 찾아야 한다. 북극성을 바라보고 우리의 현 위치를 점검한 후 나아갈 방향을 잡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고 그 성화된 삶을 닮으려는 노력을 하며 살아야 한다. 설령 우리가 이 땅에서 완전하게 성화되지는 못할지라도 영원한 세계에서 완전해질 것이다.
성화의 결론
이제 성화에 대한 두 가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그 첫째는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계속해서 성장해야 한다.
중생의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며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거두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죄의 유혹을 물리치려는 영적인 노력이다. 죄에서 자유하려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죄를 지속적으로 짓는 자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일 3:4-6)
이런 면에서 단지 거듭나는 중생의 체험과 날짜만을 강조하며 구원받은 이후의 성화의 삶을 간과하는 구원파는 회개해야 한다. 구원받은 신자들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16)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화에 관한 두 번째 결론은 성화는 “좀 더 성화되었느냐” 아니면 “덜 성화되었느냐” 라는 영적 성숙의 정도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인격과 영적인 성숙에 관해 지나치게 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화는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의존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이루는 상대적인 성화는 어쩌면 한 순간에도 무너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을 때에 얻게 되는 절대적인 의로움의 은총인 칭의의 은혜를 함께 누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성숙의 문제에 있어서 자만할 이유가 없다. 십자가 없이는 성화도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때때로 당하는 영적인 실패 때문에 낙심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성화란 나의 인간성과 성품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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