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February 23, 2019

교회의 구조적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요?


✳️교회의 구조적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요?

(출처: http://whyjesusonly.com/8091)

📌질문

교회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성도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권력이 남용된다든지 혹은 직분이 낮은 성도의 의견은 전혀 수렴이 안 된다든지 등등...)

교회안의 부조리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은 교회의 구조도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세 1000년 가까운 시간동안 카톨릭 안에 있었던 구조적인 문제나 권력의 남용으로 변질된 교회로 인해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바른 복음을 듣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일까지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구조적인 문제들을 통해 성도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 일들이 발생할 때 성도들은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니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야 될까요?

아니면 바로 잡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할까요? 하지만 바로 잡기 위해 무언가 하려고 하면 또한 그로인해 여러 가지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것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답변

교회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에둘러 표현하셨지만 결국 담임목사(이후 경칭 생략)에게 흠결이 있을 때에 신자 혹은 다른 사역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문제로 이해하겠습니다. 구조적 실업, 구조적 빈곤 같은 용례에서 보듯이, “구조적”이란 단어의 뜻은 혁명 같은 비상수단이 아니고는 도저히 고칠 수 없을 만큼 고착화된 잘못된 체계입니다. 교회에선 결국 담임 목사의 치명적 결함 말고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단순히 조직체계 상의 문제, 상하 소통 부족의 문제, 제직회나 당회의 문제 등등은 처음부터 구체적 사례를 들어 질문해 주실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적절한 답변이 가능할 것입니다.  나아가 사실상 담임 목사가 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선 교회의 제반 문제는 담임 목사 문제라는 등식(等式)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결국 이 질문을 쉽게 표현하면 “담임 목사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하나요?”일 것입니다. (혹시 아니라면 다시 구체적으로 사례를 밝혀서 질문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주제는 이미 이 성경문답 사이트에서 다루었습니다. (# 43 “목사님께 무조건 순종해야 하나요?”  # 51 그 보충하는 글을 참조 바랍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일부 중복되는 내용이 있겠지만 아주 현실적 관점에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발생 가능한 네 가지 상황

이 질문에는 사실상 몇 가지 확고한 전제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적으로 목회자의 자격이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바라는 목회자 상도 예수님의 선한 목자 강해(요10장)에 따라 형성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는 오직 양떼들의 영적 유익에 모든 것을 걸고서 정말로 자기를 희생하며 수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아무 문제가 생길 리도 없고 성도들 또한 진정으로 그 목회자를 존경하고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제기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그러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미 수차례 그 시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전혀 시정이 안 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가 나눠지거나 담임 목사를 해임해야 하는데 너무나 큰 파장이 예상되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문제를 해결하자니 당장 분쟁이 날 것이며, 가만 두자니 아무 죄 없이 순진한 신자들이 계속 피해를 볼 것 같아 정말 진퇴양난입니다. 그럼 이미 정답이 거의 나온 것 아닙니까? 우리말 속담 식으로 절이 떠나든지 중이 떠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또 그 둘 중 하나를 택하기 위해선 현실적으로 각각의 장단점과 파장을 감안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개별 교회의 특수한 사정을 빼고는 신자라면 누구나 그 장단점을 사실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경중(輕重)을 따지기 어렵고 어떤 수를 택해도 성경적으로 잘못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딜레마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확실히 좋은 방안은 없고 나쁜 방안만 남아 있으니 도저히 갑갑한 것입니다. 교회 문제만 아니라면 둘 중하나를 택해 벌써 결말이 나고 말았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불만에 잔뜩 차 있는 상태입니다.   

이 문제는 신자들이 담임목사에 대해서 바라는 조건 내지 모습을 아주 단순화 시켜서 접근하는 것이 판단에 도움이 됩니다. 목사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을 대별하면 아무래도 설교, 교회치리 능력, 인품 셋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치리 능력도 따지고 보면 인품에 좌우되는 문제입니다. 교회를 담임한 경력이 일천(日淺)해 치리가 미숙한 것은 아무 흠결이 되지 않습니다. 또 인품이 좋다면 경험 많은 교회 제직들과 서로 잘 조화 협력하여 교회를 화목하게 이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자들이 담임 목사에게 바라는 것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영적 가르침(설교)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온유하게 성도들과 교제 인도하는 품성(인격) 둘입니다.

또 이 둘을 바탕으로 모든 교회에서 발생 가능한 상황은 넷뿐입니다.
1)설교와 인격 둘 다 좋은 경우,
2) 설교가 나쁘고(비성경적) 인격이 좋은 경우,
3) 설교는 좋은데 인격이 나쁜 경우,
4) 설교와 인격이 둘 다 나쁜 경우가 그것입니다.

당연히 1)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따라서 구조적 문제라는 것은 좁게는 4), 넓게는 2-4 셋에 다 해당됩니다. 

대부분의 한국 신자들이 2-4의 문제가 있음에도 비교적 관대한 이유는 알다시피 몇 가지 있습니다. 성도가 목사를 직접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고 여기고, 그러면 신자가 벌을 받는다고까지는 여기지 않더라도(간혹 그렇게 잘못 배운 경우도 많지만) 주의 종인 목사는 하나님이 직접 벌을 주니까 가만히 놔두면 되고, 교회에서 구태여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으며, 혼자서라도 잘 믿으면 되고, 교회에 목사보고 오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신앙이 뭐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식의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전부 인간적 생각입니다. 그런 사고가 한 두 가지는 빼고 결정적으로 틀렸다든지 나쁜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만 따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를 볼 때 어떤 생각이겠느냐는 데에 초점을 모으지 못합니다. 사실은 교회 문제에서 가장 먼저 따져 보아야 할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쉽게 말해 교회에 2-4의 경우가 발생함에도 신자들이 가만히 있는데도 하나님조차 가만히 있거나 용납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분쟁을 불사하고 당장에 고치려고 나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시도할만큼 시도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한 사람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생명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시는 것을 가장 원하십니다. 구조적 문제가 생기는 것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서 큰 분쟁이 야기되는 것 또한 결코 원치 않습니다. 최대한도로 시정할 노력을 해보더라도 세상 법정에 가져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법적 송사만 금한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 앞에 당신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컫게 하지 말고 또 세상의 비방을 받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분쟁보다는 성도가 떠나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을, 야단은커녕, 오히려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대부분의 신자가 사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남아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되며, 그 목사는 계속 그렇게 할 것 아닌가라는 염려가 자연히 듭니다. 또 솔직히 문제가 생길 때마다 왜 신자만 손해 보아야 하느냐, 목사는 여전히 떵떵거리고 있어야 하는지도 쉽게 납득 되지 않고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고쳐질 전망이 없다면?

구조적 문제에는 또 한 가지 전제가 붙습니다. 최선을 다해 개선하려고 노력해 보았는데도 별무 소득이었을 뿐 아니라, 아무리 판단해도 앞으로도 고쳐질 전망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판단은 각 개별 교회의 사정에 따라 신자 각자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쳐질 희망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교회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분들만 따로 함께 모여서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섣부른 판단을 하여 교회를 빨리 떠났다 해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결코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섣부른 판단이란 장차 목사가 스스로 고쳐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임에도 못 참고 미리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럼 아주 잘 된 것 아닙니까? 처음 염려했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단지 자신이 정든 교회를 떠났다는 것인데 어디에서든 신앙생활을 잘하며 새로운 교제의 장을 열든지, 정 아쉬우면 다시 옛 교회로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문제가 잘 해결되었기에 목사도 다시 너그럽게 받아줄 것 아닙니까?  

따라서 이 논의는 목사가 고쳐질 전망이 없다는 점을 반드시 감안해서 진행시켜야 합니다. 고쳐질 전망이 있다면 구태여 질문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선 4) 설교도 인격도 나쁜 경우는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냥 그 교회를 빠져 나와야 합니다. 고치려 들면 들수록 사태는 더 악화될 뿐입니다. 

남아 있는 신자는 어떻게 하느냐 사실 크게 염려할 것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그 정도의 판단도 서지 않으면 죄송하지만 거의 같은 부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성도 입장에서 말로 권면해선 그들도 어지간히 바뀌지 않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또 사태를 정확히 분별하도록 개인적으로 권면하거나 꾸준히 기도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에서 기존의 교회를 흔든다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설교도 인격도 나쁜 목사가 담임하고 있으면 이미 중세 가톨릭처럼 교회로서의 소임을 다했거나 일시 암흑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란 관점에선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둘째로 설교가 나쁘고 인격이 좋은 경우도 비교적 그 판단이 쉽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설교가 좀 나빠도 인격이 좋으니 그냥 참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참는 것은 이런 저런 이유로 설교의 감화력이 부족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설교가 나쁜 것이 아니라 단지 미숙한 것으로 오히려 1)에 포함되는 경우로 보아야 합니다.  

제가 분류한 2)는 설교가 아주 많은 부분에서 성경적이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단이라면 당연히 모든 성도가 힘을 합해 목사를 해임시키든지 다른 교회로 떠나야 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교회문제를 판단하는 첫 기준은 항상 영적 유익이 있느냐 없느냐 여부여야 합니다. 다른 말로 원칙적으로는 목사의 인격보다 설교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판단이 애매하기는 설교가 확정적으로 완전한 이단이 아닌 것 같은 경우입니다.(이단에 대한 판별기준은 성경문답 #114 “이단 판별 기준은 무엇인가요?”의 글을 참조 바람) 예컨대 기복 신앙의 강조가 지나쳐 아주 많은 부분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경우입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교회를 떠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혹시라도 말씀은 틀려도 인격이 좋으니까 목사에게 말씀드려서 또는 기도하다 보면 고쳐질 수 있으려니 기대하는 것은 아주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때까지 소신을 갖고 확고하게 정립해 놓은 목사의 신앙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실패를 거듭하여 처절한 깨우침이 생기지 않는 한 지금껏 가르쳐온 내용을 번복해서 새롭게 다시 가르치겠다고는 선언하기는 죽기보다 싫을 것입니다.

목사의 영적 자부심은 인격과 별개로 아주 예민하고 고집스럽습니다. 또 그러지 않으면 사실 목사라는 직분을 감당하기 힘듭니다. 목사의 가르침이 정 반대로 돌아서리라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희박한 가능성을 붙들고 있는 셈입니다. 

대신에 그저 성도들 입맛에 맞추어 설교 내용이 왔다 갔다 한다면 오히려 인격까지 의심해보아야 할 더 안 좋은 경우입니다. 특별히 한국인들은 아무래도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목사에게 신앙노선이 틀렸다고 말하면 미운 털만 박혀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최근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에서 프로그램 위주와 구도자 예배 등, 방법상에 문제가 많았음을 담임인 빌 하이벨스 목사부터 인정하고 회개한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의 옥한흠 목사는 은퇴 후에야 교인의 기호에 맞는 설교를 많이 한 것 같다고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만한 것도 아주 잘한(?) 축에 속하지 않습니까? 

설교만 잘하는 목사는?

가장 애매한 경우는 설교는 잘하는데 인격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 역시 논리적 판단이 가능합니다. 지금 앞으로도 고쳐질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고 교인들의 영성에 큰 해악을 미칠만한 결정적인 흠결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성도들의 충고나 권면을 납득 동의하여 스스로 고칠 정도라면 인격에 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좋은 것입니다. 

교인들의 영성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정도이니까 이 또한 교인들이 조용히 교회를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목사도 인간인데 인격적 하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느 정도의 선까지 인정하느냐,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과연 객관적으로 정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 설령 그런 기준을 정했다 해도 하나님의 간섭을 기다리는 것이 옳지 않느냐 등의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성도가 목사를 볼 때에, 목사가 자신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단순히 인간이라고만 이해해선 안 됩니다. 목사는 하나님과 성도를 중간에서 연결하는 역할을 맡은 자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중보나 구약시대 제사장 같은 역할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쉬운 비유를 들면 십계명에서 부모와 같은 입장입니다.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를 나타내는 첫 네 계명과, 수평적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나머지 다섯 계명 사이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윤리입니다. 부모 또한 자식에게 하나님을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사회에 나가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형성하려면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영성 교육과 또 세상에서 그분을 제대로 증거할 수 있는 증험을 비롯해 인격적 감화도 부모에게서 받으라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평신도보다 인간적 우월성이나 하나님 은혜와 권능을 누림에 특권이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복음 안에서 디모데를 낳았다고 했고, 일만 스승은 많으나 아비는 흔치 않다고 했습니다. 목사는 설교만 잘해선 안 되고 인격적 감화도 함께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도덕적 감화가 아니라 자기가 가르친 영적 진리를 증험, 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교육방법처럼 가르친 말씀을 실제 행동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다른 말로 목사의 인격에 관해서 바울이 말하는 영적 아비로서 성도들의 영성에 결정적 해악을 끼쳐선 안 되는 측면과, 순전히 보통 사람으로서 갖는 개인적 흠결과는 구분 지을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상 상식적 판단이 가능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본인은 그렇게 살지도 않으면서 말만 청산유수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은혜가 안 되면 이미 판단이 된 것입니다. 결정적 오해나 판단 미스가 개입되지 않는 한 모든 인간의 상식적 이성은 그런대로 신뢰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신자는 이미 영적으로 민감해진 상태인지라 감으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나아가 내주하신 성령의 탄식이 신자의 영혼을 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판단 미스를 제거하기 위한 객관적 기준들을 들어 보겠습니다. 목사들 사회에서 흔히 하는 말로 목회에 성공하려면 돈, 여자, 말 세 가지만 조심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 셋에 실패하면 목회도 실패 즉, 성도들을 영적으로 양육하는데 결정적 폐해를 끼친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중간자 입장의 목사에 대한 인격적 하자를 따질 때는 바로 이 셋을 기준으로 판단해보라는 뜻입니다. 그 외에 예컨대 성격이 좀 급하다든지, 시간 개념이 약하다든지 등등은 너그러이 봐줄 수 있는 인간적 하자라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돈, 여자, 말이 왜 그리 중요합니까? 자식이 하나님을 배우고 이해하는 통로가 부모가 된다는 것이 단순히 말씀만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선 공의의 하나님, 어머니에게선 사랑의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도록 부모가 자식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입장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실제 형상은 아니지만 신자들이 목사에게서 그 형상을 감지하여 본으로 삼아야 함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니 일반 신자마저 불신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당신이라면 돈, 여자, 말로 넘어져서 성도로 시험 들게 할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분을 대신해서 성도 앞에 서야할 목사는 당연히 그래선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우선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이 바로 하나님과 재물 중에 주인을 하나만 택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죄와는 달리 성적 범죄는 자기 몸 즉, 내주하신 성령님에게 범하는 죄와 같다고 했지 않습니까? 말은 다른 사람의 심령을 죽이는 아주 큰 범죄입니다. 목사는 절대 성도들 사이를 분리시키거나, 심령에 못을 박거나, 심판과 정죄를 선언하는 말을 해선 안 됩니다. 모세처럼 성질이 좀 급해서 하는 실수나 말이 어눌한 것은 문제 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신자만 손해이지 않는가? 

한 마디로 이미 구조적 문제가 될 만큼 말씀과 인격 둘 중 하나라도 결정적 하자가 있다면 신자는 그 교회를 조용히 떠나야 합니다. 이를 두고 신자만 손해 보는 것이라고 단순히 해석해선 안 됩니다. 떠난 신자는 바른 교회를 찾아감으로써 오히려 영적 유익을 얻습니다. 손해라고 해야 그동안 친밀했던 관계와 간혹 기존 교회에서 누리는 기득권인데 영적 유익을 얻는 것에 비할 바가 안 됩니다. 

만약에 자꾸만 기존 교회에 자신의 개인적 유익이 더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그 영적 수준과 인격에 하자가 있다는 반증입니다. 문제는 앞에서도 말한 대로 남은 자에게 계속 영적 폐해가 가해지고 또 그런 목사를 하나님은 왜 그냥 두시느냐는 것입니다.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최근에 직간접으로 일어난 두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설교는 잘하는데 돈과 여자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방송 듣고 매주 새 교인은 오는데 기존 교인은 계속 나갑니다. 아무리 인격에 문제가 많아도 방송만 듣거나 주일날 설교만 듣고 가는 신자들에겐 은혜가 넘칩니다. 그러나 말씀을 머리로만 들었지 목사나 신자가 함께 삶에서 체험하는 은혜는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거기까지 뿐으로 분명 그렇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또 실망하여 나간 신자들로 인해 자꾸만 그 목사의 평판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 은퇴를 앞둔 담임 목사의 후임으로 아주 설교를 잘하는 목사를 청빙하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후보자를 다들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인격적 하자가 조금씩 드러났고 결정적으로는 전에 시무하던 교회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이 교회를 염려하여 이전에 저지른 비리에 대해서 이런저런 통로로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자연히 성도들과 교회에서 청빙절차를 재고하는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를 하나님이 별도로 치리하신다는 말이 잘못하는 목사를 당장에 암에 걸리게 하거나 교통사고를 당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사역에 제약을 두어 더 이상 확장 되지 않게 합니다. 열매가 안 열리게 하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되고 실천되어야 할 교회가 쓰러지는데 하나님이 가만히 그대로 두고 보시겠습니까? 

성도가 교회를 조용히 떠나는 것은 열매가 열리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자꾸 성도가 떠남으로서 목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교회가 바로 선다면 아주 좋은 일이요, 회개는커녕 자꾸 더 떠나면 그것으로도 폐해를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설교만 찾는 교인에게 설교만 좋은 목사로만 남게 하나님이 울타리를 이미 쳐주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선 역설적으로 말해 오히려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께서 잘못된 교회의 열매를 서서히 줄이기에 그 분쟁을 절대 세상 법정으로 확대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교회가 창피를 당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방식과 때에 당신의 뜻에 맞게 바로 잡으신다는 것을 쌍방이 믿지 못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작금 정통교단에 속해 있고 또 그 교단에서 정식으로 안수 받은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라도 내용적으로는 사실상 이단에 빠진 교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떠나야 합니다. 혹 말씀이 아니라 결정적 인격하자로 소경된 인도자로 바뀐 목사도 많은데, 이 역시 그 목사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서 신자가 빠져 나가야 합니다.     

어쩐지 성도가 조용히 떠나라는 것이 당장에는 옳지 않고 비겁한 일 같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고 먼 장래를 바라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국을 감안한 최선의 방안입니다. 실제로 목사와 맞부딪혔을 때에 남은 성도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오히려 조용히 떠나는 것보다 엄청나게 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예수님만이 머릿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도 주님에 의해 함께 깎여지고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목사는 자신이 머릿돌이라고 착각하고 절대 변하지 않으려는 데서 모든 구조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또 그런 교회일수록 담임 목사는 완전히 머릿돌로 뿌리가 견고하게 박혀 있습니다. 그 돌을 빼려고 하기보다 그 돌에 붙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선한 의도로 붙어 있어도 일단 함께 붙어 있는 한 서로가 깎일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밀히 역사하셔셔 신자에 따라선 믿음이 자라고 영적 시야를 넓히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목사가 변할 가능성이 보일 때는 당연히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와 맞부딪혀선, 교회 안의 다른 어떤 직분자와의 분쟁보다 파생하는 폐해가 교회 전체로 볼 때에 가장 크다는 뜻입니다.    

물론 중간자라는 입장과 현실적 측면에서도 담임목사는 당연히 머릿돌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예수님을 대신할 영적 아비로서 그 역할을 대신 맡았음을 철두철미 인식해야 합니다. 더더욱 낮아지고 낮아져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기에 구조적 문제가 생긴 것이니까 신자도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최선의 방안이라는 것입니다. 

상기는 이미 구조적 문제가 생겼고, 또 고쳐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일반적인 방안일 뿐입니다. 각 개별 교회의 특수한 사정은 신자 개인이 알아서 판단해야할 문제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결코 성경적으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목사와 맞부딪히기로 결심해서 맞부딪혀도 됩니다. 단 그 방식은 끝까지 온유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양보 조정이 되지 않고 분쟁으로 치달을 것 같으면 즉시 조용히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미 온유하게 맞선 것으로 남은 신자와 교회에  의로운 경고와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설교나 인격에 ‘전혀’라고 말해도 될 만큼 하자가 없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헌금을 선교나 교회 행사에 너무 통 크게 사용했습니다. 재정적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사례비를 많이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성도의 피땀 흘린 헌금을 행사에 다 소비하면 안 된다고 다른 교회로 떠나는 교인을 봤습니다. 떠나는 교인이나 남는 교인이나 그 목사님 모두에게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교인도 자기에게 맞는 새로운 교회를 찾아가서 자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전 교회도 재정 운용을 조금 더 신중하게 할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격에 하자가 없는 목사이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를 또 뒤집으면 비록 구조적 문제가 있고 고쳐질 전망이 안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그 목사를 진정으로 아끼고 앞으로도 계속 쓰실 것이므로 분명히 강권적으로라도 회개시키리라 기대 내지 믿는다면 계속 남아서 그 믿음대로 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떠나는 것도 반드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바탕에서만 행해야만 합니다. 조용히 떠나면 나쁜 열매나 영향력이 아무래도 적게 맺힐 것이며, 맞서는 것보다 목사더러 회개케 하는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은 그 나쁜 목사보다는 길 잃은 양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 성도도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당장은 나쁜 영향력을 받고 있을지 몰라도 오히려 그런 경로를 통해서 구원하시거나, 다른 경로로 구원해도 나중에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끄시는 그분만의 방식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최종적 문제는 옮길만한 마땅한 교회가 현실적으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안에서도 최선이 아닌 차선의 교회를 택하거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거나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거나 셋 중 하나뿐입니다. 세 번째는 아예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기에, 자신의 신앙 노선과 정서에 맞추어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그럴 만한 여건이 된다면 교회를 새로 설립하면 됩니다. 또 세상의 어느 교회도 완벽하지 않기에 그중에서나마 가장 좋은 교회를 찾는 것이 가장 현실에 적합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구조적 결함은 혁명 아니고는 고칠 수 없습니다. 혁명은 반드시 피를 부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으로 하나님의 방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조용히 떠나는 것이 차선, 아니 최선의 방안이 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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