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We know that anyone born of God does not continue to sin; the one who was born of God keeps him safe, and the evil one cannot harm him."
신자라면 누구나 죄 문제로 인해 많은 갈등을 겪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국 안된다고 여기는 그 길로 가고 있는 자신을 볼 때면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마저 들기도 할 것입니다. 분명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또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것이 미움일 때면 ‘과연 내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18절)는 본문의 말씀은 우리를 더 크게 낙심케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로서 난 신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신자라고 하면서 여전히 범죄하는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로서 난 신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는 내용은 3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6절의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는 말씀과 9절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을 거듭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 하여 범죄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일단 하나님께로 나서 범죄하지 않는다면, 즉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즉 범죄하지 않는 자신의 의로서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보면 인간의 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신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선을 행할 수 없는 불의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악 가운에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바울 자신까지도 죄로 인해 애통해 하며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바울과 요한은 서로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이 그럴 수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사도 요한이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다른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죄짓지 않는 것, 즉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말씀에서 벗어나고 흠이 되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악한 생각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죄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17절의 내용에 대해 말씀을 드린 바 있지만, 17절에서는 죄를 둘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에 두 종류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어떤 죄는 사망에 이르고, 어떤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든 사망에 이르는 죄만 범하지 않으면 천국 간다는 뜻도 되지 않겠습니까?
죄는 다 같습니다. 17절에서도 모든 불의가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범죄함에서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죄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에서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의 죄를 없게 하였기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3:5절에서도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사망에 이르는 죄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상관이 없는 자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를 못한 채 살아갑니다. 죄의 결과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결국 날마다 죄에 머물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죄가 무엇인가를 알며, 자신에게서 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애통하게 되고 예수님의 피가 은혜가 되어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였음을 감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범죄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망에 이르는 죄에 있지 않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범죄치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자신의 연약함과 불의함과 의를 행할 수 없는 무능함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망에 처한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을 자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를 사망에 몸에서 건져주실 분은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고, 예수 안에 있는 자를 사도는 죄가 없는 자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서 범죄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킨다’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신자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말한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도록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 안에 있는 신자가 누리고 있는 안전입니다.
하지만 악한 자로부터 지켜주신다는 것을 어떤 죄도 범하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신자란 죄와 싸워서 이기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고 예수께로 나오는 자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단 역시 신자로 하여금 죄의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죄인가를 보지 못하게 하고, 죄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의 선행으로 죄를 해결하도록 독려하는 존재가 사단입니다. 이런 사단으로부터 예수님은 신자를 지키십니다. 죄 가운데서 다만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 있기에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것만이 ‘죄 없다’ 여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자로 살아갑니다. 또한 범죄 하지 않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 안에서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구원의 확실성 또한 예수님이 신자를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도록 지키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참 좋으신 분’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복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상 육신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복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복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마시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http://onlycross.net/words/1john/1john-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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