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3, 2018

이사야 55장(정용섭 목사)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 정용섭 목사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오늘 설교 본문인 이사야 55장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이런 문장을 읽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 참석하고, 충성 봉사하라는 말씀이구나, 하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지요. 또 그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우리의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우리의 삶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라거나 여호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고 부른다는 말이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신앙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신앙에도 수준이 있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준은 분명히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에도 수준이 있고, 테니스 실력에도 수준이 있듯이 말입니다. 이 질문에 직접 대답하기 전에 우선 이사야 선지자가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선포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찾고 부르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바벨론 포로 신세에 떨어진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기원전 587년을 전후로 해서 몇 번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지금 몇 십 년을 지낸 상태입니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인 자신들을 특별하게 지켜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날벼락처럼 나라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과 다윗 궁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성전과 궁 안에 있던 값진 집기들도 모두 강탈당했습니다. 유대 공동체가 완전히 파멸되었습니다. 유대 지도급 인사들은 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나머지 유대 백성들은 초토화된 유대 지역에 남아서 바벨론 관리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한 뒤에 이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무능력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팽배해졌습니다. 유대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여전히 여호와 신앙을 붙들고 있었지만 대다수는 포기, 냉소, 무신경으로 떨어졌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개인적으로 그런 상황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꾀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봐야 별로 잘되는 일이 없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냉담 상태에 들어갔다가 급기야는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종교에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문명이 자신들의 문명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였고, 능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던 제국이었습니다. 페르시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천하무적이었습니다. 지금의 미국과 비슷했습니다. 그런 나라의 학문, 종교의식, 문화 등은 식민지 백성들의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찾거나 부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신앙이 없어도 바벨론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선포한 제2 이사야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금이 바로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이고, 여호와가 가까이 계실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의 말을 유대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동의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무기력한 신으로 판명된 여호와를 찾고 부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입니다. 어떤 프로 축구팀 감독이 5년 동안의 시합에서 전패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축구팀이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선수들은 각각 다른 팀에 가서 축구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서 옛날에 선수였던 한 사람이 나타나서 옛날 감독을 모시고 다시 대표 팀을 꾸리자고 주장했습니다. 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지금 이사야의 입장이 이와 비슷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민족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그를 다시 찾고 부를 수 있을까요? 씨가 먹히지 않는 주장입니다.

이사야는 무엇을 근거로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여호와를 찾으라고 외친 걸까요? 새롭게 부상한 신흥 제국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결국 패망시키고 유대가 다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선지자들은 국내외 정세를 늘 주목했습니다. 그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제 정세를 안다고 해서 모두가 이사야처럼 말씀을 선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일제시대를 돌아보십시오. 처음 강제 합병되었을 때는 적지 않은 지도급 인사들이 독립을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노력이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제치하에서 살아남아야만 했습니다. 일제가 대세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제 밑에서도 그런대로 살만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힘이 떨어지는 걸 어느 정도 눈치 했지만 일본이 망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친일행각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단지 국제정세만 보고 여호와를 찾으라고 선포한 게 아닙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영혼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사야가 볼 때 유대인들은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 헛된 것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헛배가 부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헛것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헛것은 아무리 소유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할 뿐입니다. 이사야가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외면하고 바벨론 문명에 푹 빠져버린 유대인들의 삶이 바로 헛된 일이었습니다.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 바벨론 문명이 아무리 화려해도 참된 양식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배부르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속에 함몰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길들여졌습니다.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영혼의 질식 상태입니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에 편승하거나 숭배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의 물질 숭배적이고 자기 숭배적인 자본주의는 2천5백 년 전 바벨론 문명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게 옳은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영혼이 잠든 것입니다. 앞으로 2천년 후에 우리 후손들은 지금 대한민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바벨론 시대의 유대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이사야의 메시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이사야가 너무 극단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 유대의 모든 신앙적 전통은 사라졌습니다. 이미 나라가 망했습니다. 자기 민족을 지켜주지 못하는 신은 능력이 없는 신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벨론 체제에 적응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바벨론에서도 나름으로 살만 합니다. 잘만하면 여기서도 출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의 전통보다 더 세련되고 합리적으로 멋집니다. 누가 옳을까요? 바벨론 문명을 거부하는 이사야입니까, 아니면 거기에 적응해서 살려고 하는 유대인 대중들입니까?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즉 옳은 것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그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지난 구약의 역사가 그랬고, 신약의 역사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당시에 인정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된 것으로 나타나는 일이 많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분명한 잘못이었고, 갈릴레오 같은 과학자들에 대한 종교재판도 잘못이었고, 마틴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도 잘못이었고, 마녀 사냥도 잘못이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면죄부까지 교회 이름으로 팔았습니다. 이것이 왜 잘못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소수입니다. 오늘도 이 시대정신과 신앙행태가 왜 잘못인지를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양식 아닌 것을 위해서 은을 달아주고,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서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 전통에 선 남은 자들일까요? 아니면 시대의 흐름에 적당히 편승한 사람들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기독교 영성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의 생각으로 삽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독단, 자기 확신, 자기 연민이 강하게 됩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때뿐이고 자기의 생각대로 밀고 나갑니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겠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생각을 오해하면 자칫 광신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말하든지 자기는 아무 상관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광신적인 신앙을 보셨지요? 참된 신앙과 광신을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경계가 명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광신의 위험보다는 불신의 위험에 더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완고한 고집대로, 또는 세련된 가치관대로 사는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설교 앞부분에서 여호와를 찾고, 부르라는 이사야의 메시지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이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 대답을 이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기존질서에 길들여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당시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그들이 망각했던 종교적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 문명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긴밀하게 결탁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문명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으면 유대의 종교적 전통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바벨론 문명으로부터의 해방은 위험한 일입니다. 사회 안전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시대정신으로부터의 탈주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당장 바벨론의 모든 체제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지금 학교도 그만두고, 직장도 때려치우고, 모든 소유를 다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바벨론 문명과 체제의 억압과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만은 기억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벗어나야 하는지는 각자가 알아서 판단해야 합니다. 아무도 그 경계를 대신해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지 당시 유대인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종교적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호와를 통한 생명의 깊이를 알게 되면 바벨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고 외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벨론 포로 시절의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상황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선포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찾고 불러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3절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영혼이 산다는 말이 멀리 느껴지는 분들이 계신가요? 그렇다면 본문 1절을 다시 읽으십시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이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영혼이 산다는 말은 이 세상의 수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원천적 자유의 세계입니다. 그게 구원의 세계입니다.

이사야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생명으로 변화되셨습니다. 바로 그분으로 인해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율법으로부터, 도덕법으로부터, 업적의(義)로부터, 모든 바벨론의 질서로부터,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여호와를 찾고 부를 때입니다. 모든 목마른 자들은 여호와께 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가십시오. 그를 배우십시오. 그를 진심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은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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