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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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한 절 묵상 (01112019)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For he chose us in him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to be holy and blameless in his sight. In love

📍말씀 주석

🔹곧 창세 전에
- '창세 전에'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영원전에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공적이나 일시적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주권적 은혜임을 시사하며, 동시에 '창세 전에'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나타낸다(골 1:15-17, Lincoln).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택하사'의 헬라어 '엑셀렉사토'는 '선택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에클레고'의 단순과거 중간태이다. 이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선택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선택이 (1) 하나님 자신을 위한 사역이며 (2)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해 주는 표현이다(Wood).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됨을 시사한다(Lincoln).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본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신 목적을 나타낸다. '거룩하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순결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여 도덕적인 결점이나 죄를 없게 하고 성령의 열매들을 소유하게 하심을 시사하며(갈 5:22, 23), '흠이 없게'는 결함이나 오점이 없는 깨끗한 상태를 가리킨다(5:27).

이런 두 가지 용어는 구약의 희생 제물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LXX 출 29:36, 37; 민 6:14;19:2) 결점이 없는 윤리적 순결성을 의미한다. 이런 윤리적 순결성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사역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안에서 나타난다. 

📍말씀 이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자녀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1. 4절은 먼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구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창세 전'은 모든 우주와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형성되기 훨씬 이전의 어떤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과서/현재/미래라는 3차원에 사는 인간의 시간에 대한 제한된 사고에서 비롯된 유추입니다.

그랜드 오픈 주석은 창세 전에를 시공간에 한정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오는 주권적인 섭리에 의한 결정이었고, 아울러 이 모든 과정에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창조에 참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드러낸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여러 성품(속성) 중에 매우 중요한 것이 '무한성(The Infinity of God)'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시기에 영원하시며(Eternity), 또한  공간적으로도 어디에나 계십니다(무소부재 혹은 편재성, Omnipresence). 결국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는 절대자 하나님의 신비한 속성입니다. 그래서 '창세 전'이 구체적으로 어떤 때 혹은 상태를 의미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입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헬라 사람들이 그냥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는 카이로스(kairos)를 구분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구속사적으로 역사하셨던 시간 곧 카이로스를 신약성경은 대략 88회 정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시공을 초월하여 수직적이지만 크로노스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해되기에 수평적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과거/현재/미래로 연결되는 크로노스로 살지만,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때에 작정하신 섭리에 따라 택하신 자에게 카이로스로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카이로스를 영원한 현재(Eternal Now)라고도 부릅니다.

2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불신자들에게는 그냥 지나간 역사 속의 크로노스이지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죄인을 불러 자녀로 삼으실 때에는 하나님의 시간 곧 카이로스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묶여서 현재로 드러나는 언제나 동시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창세 전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19년에나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주로 다시 오실 때가 모두 하나로 취급되는 동일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서 특정한 사건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는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와 크로노스(인간의 시간)를 잘 설명해 주는 제 블로그의 주진혁 목사님의 글을 꼭 참조하십시오.

https://lbwgl.blogspot.com/2019/01/blog-post.html?m=1

3. 하나님은 언제나 택하신 자들을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십니다. 이것은 어제 묵상했던 것처럼 구원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오해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단일신으로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유일신과 단일신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며, 이슬람과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거의 머든 이단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단일신으로 잘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창조주 하나님깨서 세상를을 만드실 때에 예수님이 그와 함께 계셨고, 성삼위 하나님의 형상를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만물 창조하신 후에 여호와의 신(성령)이 물위로 운영했다고 성경은 거듭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쟁취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 무엇인가를 행하여 신적 요구에 부합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를 악물고 육백개가 넘는 율법의 세부 조항들을 지킬려고 노력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했던 것은 유일신을 단일신으로 오해했던 결과였습니다.

4. 4절은 또한 우리를 '사랑 안에서'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이유는 사랑이라는 자신의 성품(속성)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나 아브라함을 부르심 그리고 성육신도 모두 하나님 안에 있는 존귀한 성품인 참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10-11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This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n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Dear friends, since God so loved us, we also ought to love one another."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그냥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죄인을 부르신 이유는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없는 자'로 여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그 앞에(In His sight)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신 이유는 어제 묵상했던 것처럼 성도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고 인간의 제일 중요한 의무입니다. (웨스트민스트 소요리 제 1번 문답과 해설을 참조하십시오.)

인간이 그 앞에 서기 위해서는 죄를 모두 씻어서 거룩하며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 까닭은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십니다. 주님 십자가의 보혈로 죄가 용서되어 의롭게 되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었을 때에만 자녀로서의 받아들여 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그랜드 종합주석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순결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부르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와 구원이 성삼위 하나님의 영광를 위해서라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진리의 한 부분을 알려줍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성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이것을 매우 잘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성경을 대할 때에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불합리하고 불공평해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가 함께 묶여 있기에, 설명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성경 한구절을 예로 들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암송하는 시편 23:3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의의 길로 곧 거룩하고 흠이 없는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라고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는 곧 여호와 영광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여호와라는 이름은 창조주의 영광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구약을 읽거나 필사할 때에 여호와가 나오면 이를 부르지 못하고 주라는 의미의 '아도나이'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의로운 길로 인고하시는 주체와 목적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정확히 알고 고백했습니다. 결국 모든 성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 곧 그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말씀 적용

4절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옮겼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창세 전 곧 천지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아셨고 택하셨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방의 사도로 부르셨던 하나님의 긍휼을 갈라디아서 1:15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 But when God, who set me apart from birth and called me by his grace, was pleased"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선택되었다는 바울의 고백은 아마도 오늘 엡 1:4에서 창세 전에라는 부르셨다는 말씀의 또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쨟은 크로노스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창조주께서 온 만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카이로스로 오셔서 이미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우리를 부르신 동기가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랑에 힘입어 그 사랑으로 서로 섬기고 나누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 사랑의 부르심은 아무런 노력없이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시고 그 앞에 존귀한 자로 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변하지 않으시는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4절은 또한 아더 핑크 목사님이 하나님을 알자에서 인용했던 아브라함 부스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무한한 영적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은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은총은 우리의 알량한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에 기초한다는 것에 다욱 감사하게 됩니다.

매일 나에게 카이로스의 은혜로 찾아오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랑에 기쁘게 응답하며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자비에 감사하고 형제와 자매들을 향해 동일한 은혜로 대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거듭 생각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절대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을 받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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