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15, 2016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주기도문 강해 / 김세윤 박사

마태복음 6장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여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를 누가판과 마태판을 비교해 보면, 마태 판에는 "우리의 빚들을(ta; ojfeilhvmata hJmw'n)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고, 누가는 "우리의 죄들을(ta;" aJmartiva" hJmw'n-복수)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 이렇게 복수를 쓴 것은 단순히 크게 '죄의식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누가는 왜 '죄들'이라고 하고 마태는 '빚들'이라고 했나? 원래 빚들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원래 용어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언어를 반영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판의 두 번째 부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 모두를 용서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도 이 청원 두 번째 부분에서는 "빚"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마태의 "빚"이라는 언어가 원래 언어이고 이 청원에 첫 부분에 누가가 '빚' 이라는 언어를 의미상 '죄' 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고 또한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보았음을 말한다. 이것은 죄의 엄중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을 유대인적 숙어에 익숙치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서를 쓴 누가는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금전적 재무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문제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누가는 '죄'라는 말로 풀어서 우리에게 써 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태의 빚이라는 말이 원어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다음 누가와 마태의 차이는 무엇인가? 두 번째 부분에 마태는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해 준 것 같이" (ajfhvkamen) 이것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는 "우리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이렇게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동사의 시제가 다르다.  또 마태는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해 준 것 같이"에 비해 누가는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이렇게 접속사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제일 불편한 것은 완료형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었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할 때 우리의 어감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모범으로 내세운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의 빚을 용서해 주십쇼".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것 같이 되어 있다. 누가 판에서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하나님도 용서해 주십시오". 마치 우리의 우리 이웃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용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 같은 어감을 준다. 그래서 사실은 상당히 주기도문을 해석할 때 원래의 뜻을 잘 모르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다.

유대교적 배경을 금세기에 가장 많이 연구한 요한 예레미야스는 셈족 언어를 가장 잘 아는 이 분은 여기 마태복음의 ajfhvkamen을 완료형을 원형으로 보고, 이것을 아람어로 번역해 보면 완료형은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이것은 동시성의 완료형(perfectum co-incidentie)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뜻은 마태 판으로 하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죄 용서를 청원하는 것에 대한 부수적인 서약이다. 그러면 왜 이런 서약이 붙는가?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해 준 것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즉 이웃사랑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이웃사랑은 마태복음 5장 38절부터 이웃을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비는 자로서 저자가 나에게 나를 험담하고 나를 못살게 굴어서 내가 저자를 언제가 손을 봐주어야겠다는 그 마음을 품고  이웃에 대한 원한, 복수심을, 증오심을 품고 "하나님이여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저자는 내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죄는 내가 꽉 지고 있기에 그 죄 말고 다른 죄만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를 빌려면 동시에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합니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죄의 용서의 효과가 나에게 있는데 나는 죄용서 안받겠습니다. 저 이웃에게 원수 갚겠다는 그 죄만은 용서받지 않겠습니다라는 태도와 같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서문과 결론의 서문에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식으로 하지 말라. 중어부언하지 말라 하신다. 왜 이유는 하나님께서 너의 처지를 다 알기 때문에 그 서문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을 강조하는 서문이었다면 이 주기도문 끝에 마태복음 5장 14-16절 "너희가 사람들이 너희에게 지은 죄를 용서해 주면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요. 너희들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넣음으로 죄용서 청원을 하이라이트하고 그 청원에 뜻을 새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용서 받음과 우리 이웃에 대한 죄용서함이 이렇게 구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이웃에 대한 죄 용서 없이 하나님에 대한 죄 용서 받음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하나님에 대한 우리 공로를 내세워서 그 반대 부분으로 하나님께 죄용서 받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이라면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자들로서 그것을 실천하지 않겠다고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 용서를 비는 것이 헛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비유로 이 설교를 강력하게 하신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다시 한번 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의 끝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은 주기도문 끝의 구절과 같다. 이 비유가 주기도문의 청원에 대한 설교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 의하면 10000 달란트 빚진 자를 왕이 빚을 탕감, 용서해 주었다. 10000 달란트는 예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내는 1년 세금이 200 달란트 밖에 안되었다. 그것을 보면 10000 달란트는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장정의 하루 품삯)은 100일 일한 것에 불과하다. 10000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이웃에게 조그만 빚을 탕감하지 않으면 그 죄에 대한 탕감이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 죄 아담적 실존의 죄에 대한 용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욕하고 손해 입히고 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죄에 대한 10000 달란트와 100 데나리온 정도의 중함과 경함의 관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10000 달란트에 해당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용서를 빌면서 겨우 100 데나리온 밖에 안되는 이웃의 우리에 대한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참용서가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를 받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죄 용서가 우리를 통해서 이웃에게 나타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죄 용서의 은혜를 이렇게 가로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용서가 우리 이웃으로 전달되게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주기도문을 우리가 다시 번역한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었듯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겠나이다"

이 청원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의 각 청원이 청원일 뿐만 아니라 서약임을 잘 보여준다.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은 '오늘 우리의 생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청원만이 아니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양식에 의해 살겠습니다. 우리가 아담적 존재로 살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힘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의 열매를 우상화 하지 않겠습니다'는 서약을 동시에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그 앞의 "하나님 나라가 오소서"라는 청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는 서약을 동시에 담고 있다.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나도 이웃에게 죄지은 자에게 죄를 용서해 주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는 청원은 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서약부분을 늘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소서"라고 해 보았자 허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온다고 할 때는 우리 성도들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의 적극적인 제자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적 경건주의의 소극주의가 아니고 신앙생활하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기껏해야 음식가리고 손닦고 그릇 닦는 것으로 경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많이 빠진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세 가지만 안하면 된다. 1.술 안마시고 2.담배 안피우고 3.제사만 안지내면 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이다. 그러면 담배 안피우고 술 안마시고 제사 안지내는 사람이 천만이 아니라 4천만 국민 전부가 그래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샬롬이 안 일어난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실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에도 담겨있지만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요구에도 담겨 있지만 예수께서는 실제로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너희들이 손닦고 그릇닦고 음식 가리는 일은 열심히 하는데 실제로 더러운 것은, 우리를 부정타게 하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즉 부정한 음식을 먹었나 안먹었나 그런 것이 아니고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배설물을 일차적으로 말하나 그것은 무엇을 비유하는가? 우리의 안에 있는 심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거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거부, 이웃에 대한 증오심과 무시함 이것이 다 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어렵게 하고 우리와 이웃을 어렵게 한다. 그것이 우리를 부정케 하는 것이지 먹는 것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제자도의 요구는 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헌신과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을 의지하는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우리가 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빌어야 한다. 아담적 살려고 하는 우리의 실존을 자제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 빌어야 한다. 우리가 아담적 실존으로 빠지는 그 죄를 항상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웃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받아야 한다. 나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줄 수 있는 힘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할 때 우리에게 샬롬이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구체적으로 부가 비교적 공정하게 재분배되고 그렇게 되면 사회정의가 일어나고 그렇게 되면 관계들이 원만해져서 평화가 증진되고 스트레스도 없어져서 몸도 건강해 지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구체적으로 실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가 변화되고 공동체가 변화되고(누룩의 비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덕을 입는다(겨자씨의 비유).

Monday, November 28, 2016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들                                                                                                                        

이인규

이스라엘에서 고대부터 중요한 농산물을 수확하는 나무가 셋이 있는데,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이다.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풍성한 구원을 상징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 80:8-14)

예레미야 선지자는 귀한 포도나무가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는지를 묻는다. 표준새번역은 이를 들포도나무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번역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렘 2:21)

이것은 이사야서 5장과 동일한 의미가 되는데, 좋은 열매가 없다면 5장5절과 같이 울타리를 걷어 짓밟힘을 당하게 될 것이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사 5:2)

포도나무는 오직 그 과실이 중요한 것일 뿐이며, 곧게 자라거나 굵게 자라지 않으므로 건축자재로서 부적당하다. 열매가 없는 포도나무는 불에 태우는 땔감이 될 뿐이며, 이러한 표현은 곧 심판을 상징한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겔 15:2-4)

구약에서 포도나무를 이스라엘로 비유한 것도 결국 믿음의 유기체적인 연합을 뜻하며, 수확하는 포도열매는 풍성한 구원을 상징한다. 에스겔서 본문에서 불에 태우는 포도나무 가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땔감으로 비유된 것이다.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가 이단들에게 오용되어지고 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은 포도나무를 사람이라고 비유풀이를 하고, 어떤 이단들은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 감람나무를 모두 이스라엘로 비유풀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구원파나 하나님의교회같은 이단들은 마태복음 24장32절의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해석하여 무화과나무에서 나오는 잎사귀를 1948년 이스라엘 독립으로 해석하여 한 세대 안에 예수가 재림하신다는 시한부종말론적인 해석을 주장하게 된다.

성경에서 포도원의 일은 포도를 성공적으로 수확하기 위한 많은 단계와 과정으로 표현되었으며, 도둑(렘49:9)과 멧돼지(시80:13), 여우(아2:15)등의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벽을 세웠으며 망루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곧 구원으로 비유된 것이다.

또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 포도나무를 그의 메시야적인 사역과 비유하였으며, 마20:1-16, 마21:28-32, 막12:1-11에서는 유대인들을 불의한 소작인으로 비유하신다.
특히 유대교 문학에서 포도나무는 메시야를 상징하는데,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1-5)

요 15:1-5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다. 그리고 예수와 연합한 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유하여,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저절로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기체적인 관계로 비유한다.

이 포도나무의 비유에 대해서 혹간은 요한복음 본문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행위로 해석하는 견해 :

본문에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니 이것을 행위적인 결과로 해석하여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본문은 믿음 외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서는 포도나무 자체가 갖고 있는 것 외의 별도의 어떤 추가적인 행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본문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라는 것은 소위 상호내재라는 관계를 말하는데, 이 관계에 대해서 성경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에 거하고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2;24)

상호내재란 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연결된 유기체적인 영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예수라는 뿌리에 연결된 가지가 되므로서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10)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3:1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2) 신비적인 연합으로 해석하는 견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많은 사람은 모두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한몸이 되어서 서로 지체를 이룬다는 것은 유기체적인 영적연합을 뜻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종이나 자주자와 남자나 여자가 모두 한 인격이라는 것이 아니라, 한 믿음에 의한 유기체적인 연합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하셨으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전7:15-17)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몸이 되어진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두 인격이 한 인격으로 합체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본질적으로 창기와 같은 성적 탐욕을 가진 동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창기와 실제적인 연합이나 한 몸, 한 인격이 아니라, 연합적인 동질성을 말하는 것이다.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이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소위 신화사상을 주장하는데, 그들이 자주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요한복음 15장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실제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구별 가운데에서 유기체적인 영적 연합이 되는 것을 뜻한다. 루이스 벌콥은 신인합일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비적연합의 그릇된 개념들. 2. 신비적 오류:
다른 위험한 오류는 신비적 연합을 신자와 그리스도의 동일성으로 이해한 신비주의자들의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신비적 연합에는 본질의 연합이 있으며, 거기에는 한편의 인격성이 단순히 다른 편의 인격성으로 합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신자는 두 개의 구별된 인격들로 남아있지 않는다.“(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199쪽)

유명한 조직신학자인 웨인그루뎀도 다음과 같이 상호내재를 설명하였다.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3) 어떤 이단은 포도나무를 자신들의 교회로 비유한다.

구원파와 같은 계열의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포도나무라고 주장한다. 즉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교회에서 나가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오역임과 동시에 악의적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요한복음 본문의 포도나무는 지상에 있는 유형적인 어떤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머리가 되시는 무형적인 교회를 말한다.

무형적인 교회의 본질적 성격은 그 주인이며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의 일차적 정의가 되어야만 한다. 머리와 몸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교회를 구성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Sunday, November 20, 2016

죽음이 유익인 다섯 가지 이유

🔥죽음이 유익인 다섯 가지 이유

/ John Piper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서 1:21

어째서 죽는 것이 "유익"이 될까요?

1) 우리의 영이 완전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2-23).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죄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내적 전쟁은 끝날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께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가슴이 찢기는 실망감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 이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25).

죽자마자 몸이 부활하는 기쁨을 얻게 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고통에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위대한 반전이 있을 것을 보여 주십니다.

[부자가]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3) 영혼의 심오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9-11)

그곳에서는 이 땅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가장 평화로운 호숫가의 포근한 여름밤 저녁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은 보살핌 아래에서 평안함이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4) 우리는 진정한 본향에 온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8).

모든 인류는 그들이 비록 이를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없이는 만족하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듯 하나님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본향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안전감과 평화 그 이상의 만족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1:21-23).

그리스도는 이 땅의 그 누구보다 놀라운 분입니다. 그는 당신이 함께 있고 싶은 그 누구보다 지혜로우시고, 강하시고, 친절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끝없이 흥미로운 분이십니다. 그는 그의 손님들을 가능한 한 가장 즐겁게 만들기 위해 매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말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는 사랑이 넘치는 분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기 위해 그 사랑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무한한 통찰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Wednesday, November 9, 2016

가장 큰 부부 계명 / 이선이 목사

💜가장 큰 부부 계명(엡 5:33)
/ 이선이 목사

✔에베소서 5장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

성경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성경은 저자와 내용과 형식과 부피가 다른 66권 책들의 묶음이다. 기독교인의 경전인 성경은 계시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

성경의 방대한 내용은 ‘가장 큰 계명’으로 함축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22:37-39)

그러면 성경 가운데 부부에 관한 말씀 중에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일까?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는 말씀을 보고자 한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핵심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하나님이 아담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와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어떻게 하셨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신을 내어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엡 5:28-30)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유비하였다. 남편은 아내와 한 몸임을 강조했다.

남편에게 제일 가는 일은 자신의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남편은 일, 자녀, 명예, 친구, 취미, 스포츠 등 세상의 그 어떤 것 혹은 어느 누구보다 아내 사랑하기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아내에게 남편 사랑은 삶의 영양분이며 양식이다. 사랑받는 아내는 시댁갈등, 자녀문제, 재정 위기 등 모든 위기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

하나님은 아내가 남편을 희생적으로 존경하라고 한다.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 오늘날 아내들이 자기 남편을 존경하는 것은 거의 힘들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존경 없이 성공하지 못한다. 아내에게 제일가는 일은 남편을 존경하는 일이다. 남자에게 존경받고자 하는 욕구는 분명하게 심리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존경하다”는 단어에는 “두려워하다”와 “경외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아내는 남편을 높이 여겨야 할 뿐 아니라 매우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존경”과 “사랑”이라는 단어는 실제 부부 생활에 적용된다. 남편이 아내로부터 존경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경우 자신의 아내를 육체적·정신적으로 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람들 앞에서 깎아내리며 무시할 때, 아내와 거리를 둔다. 그리고 그는 일, 취미 생활, TV 시청, 컴퓨터 혹은 인정해줄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진정으로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지 않고, 불평하거나 비판하거나 우는 소리를 내거나 혹은 사랑을 느끼게 해 줄 누군가를 원한다.

사랑받지 못하면 아내는 존경하지 않는다. 존경받지 않으면 남편은 사랑하지 않는다. 서로 지겨운 사이가 된다.

존경받으면 남편은 사랑한다. 사랑받으면 아내는 존경한다. 서로 행복한 관계가 된다.

이것이 모든 부부 관계의 기본 원리이자 문제 해결의 결론이다.

🔹이선이 박사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장신대학원에서 석사((M.Div), 박사(Th.D. in Missiology) 학위를, 미국 플로리다신학원(FCTS)에서 여성리더십으로 박사(D.Min) 학위를 받았다.

Friday, October 28, 2016

이사야 53 주석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Who has believed our message and to whom has the arm of the LORD been revealed?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 '우리'에 대해서는 (1) '선지자  자신'(Calvin, Oehler, Stier), (2) 52:15의 '열방들'(혹은 이방인들, G.W. Grogan, (3)'이스라엘 백성, 특히 선지자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경건한 무리들'(Delitzsch, Leupold)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으나 마지막 견해가 가장 나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들  '우리'는 수난받는 메시야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또 저들의 고백은 거의 회개에 가까운데,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새로운 깨달음을 믿은 유대인들의 심리 상태와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He grew up before him like a tender shoot, and like a root out of dry ground. He had no beauty or majesty to attract us to him, nothing in his appearance that we should desire him.

🔹주 앞에서 - 여기 '주'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종'의 삶의 과정은 인간들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벧전 2:4).
  
🔹자라나기를(야알) - 문자적인 뜻은 '그가 자라나셨다'로, 과거 시제(완료형)로 되어 있다.  본 동사의 시제를 따른다면 본절이 나타내는 인물은 본서 저자  이사야의 과거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세, 욥, 예레미야 등을 거론할 수 있지만 본장이 묘사하는 종과는 비교되 될 수 없다.  결국 이 종은 메시야인신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자가 과거로 시제를 적은 이유는 본서 저자가 미래를 내다볼 때 자신이 예언하는 메시지의 성취를 너무나도 명백히  보고 있었으므로 자신에게는 그 일이 이미 발생한 것처럼 확신있게 적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예언적 기술법 중의 하나인 '예언적 과거'라 부른다.

🔹마른 땅 ... 줄기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며, 특히 '마른 땅'이란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처해 있던 비천한 상황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He was despised and rejected by men, a man of sorrows, and familiar with suffering. Like one from whom men hide their faces he was despised, and we esteemed him not.

본절에서 저자는 '종'의 비하(卑下)를 좀더 상세히 묘사한다.
  
🔹멸시를 받아서 - 여기에는 거절과 배척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가 고난의  걸음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를 거절하고 배척 했다.  고난의 '종'에 대한 태도 문제에  있어서 중립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그의 구원을 즐거워하고 그를  높이거나 아니면 그를 배척하고 멸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무관심 역시 그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질고를 아는 - 문자적인 뜻은 '병을 잘 아는'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가 육체적으로 허약하여 이런 저런 질병에 계속 걸렸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병'은 '죄'를 묘사하는 비유적 술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미 육체적 질병을 비유로 해서 유다의 죄악 상태를 드러낸 바 있다(1:5,6).  따라서 성취될 구원은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이 분명하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Surely 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sorrows, yet we considered him stricken by God, smitten by him, and afflicted. 

🔹우리의 질고를 지고 - '종'이 짊어진 질고와 수난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리 개념이다.  의로운 한 분이 질고와 허물과  죄악이 가득한 자들을 대신하셨다는 것이다(롬 5:17-19). 
이것은 그  '수난자'가  자기 백성을 죄의 결과뿐 아니라 죄 자체에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을 함의한다. 왜냐하면 죄와 그 결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난자'께서는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안고 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But he was pierc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the punishment that brought us peace was upon him, and by his wounds we are healed.

🔹본절은 '종'이 고난받은 참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허물  때문이다.  여기 '허물'이란 단순한 실정법들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변적인 법에 대해서 범죄하였다.  그 결과우리는 그의 진노와 그  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었다.  죄들은 영원한 사망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에서 인간이 지불할  사망이란 요구가 '종'에게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볼때 여기  '찔리다',  '상하다'등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사실  히브리어에서 이 두단어는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시사하는 용어들이다.

🔹평화 - 이것은 단지 외적인 안녕과 조화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 곧 하나님과의 평화를 뜻한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We all, like sheep, have gone astray, each of us has turned to his own way; and the LORD has laid on him the iniquity of us all.

본절은 신학의 대요이다.  먼저, 우리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은, 우리가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상태에 있지 못하다는 전적 부패 교리의 근거가 된다. 

둘째로, 본장에서 지금까지는 나타나지  않던  '여호와'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악을 '종'에게 담당시킨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의 근거가 된다.  

셋째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 시킴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에 필요한 것을 이루어 놓으셨다는 구원 교리로 볼 수 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He was oppressed and afflicted, yet he did not open his mouth; he was led like a lamb to the slaughter, and as a sheep before her shearers is silent, so he did not open his mouth.

본절은 고난에 대한 종의 태도를 요약해준다.  먼저 '곤욕을 당하여'는 좀 더 풀어 보면 '그가 자신을 곤욕당하도록 내맡기셨다'이다.  이것은 종이 고난을 자원하여  받은 것을 가리킨다. 

또한 '그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고  참아냈다는 것을 가리킨다.  종은 고난을 자원하였을 뿐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셨는데, 저자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털 깎는 자 앞의 양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By oppression and judgment he was taken away. And who can speak of his descendants? For he was cut off from the land of the living; for the transgression of my people he was stricken.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 '곤욕'(오체르)은 '강압',  '구금자'이라는 의미가 그 문자적인 뜻인데, 따라서 어떤 학자는 이 단어를 '감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신약에 비추어 볼때 '체포'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아무튼 '종'은  법적인  과정을 밟아 사형 언도를 받기에 이르렀다.  혹자는 이 같은 결과가 단순한 오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종종 무죄한 피고가 부당히 고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있기 떠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 같은 결과는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이다.  '종'은 빛으로 이땅에 오셨다. 그러나죄로 저주 아래 있던 이땅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오
히려 잔인하게 죽였다.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He was assigned a grave with the wicked, and with the rich in his death, though he had done no violence, nor was any deceit in his mouth.
  
그리스도께서 범죄자로 낙인 찍혀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후 부자의 묘실에 장례된 것을 연상케 한다(마 27:32-61).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Yet it was the LORDs will to crush him and cause him to suffer, and though the LORD makes his life a guilt offering, he will see his offspring and prolong his days, and the will of the LORD will prosper in his hand.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 하나님께서 그를 즐겨 고난당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 구절에 담겨 있다.  '속건 제물'과 속죄 제물의 차이를 정확히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속건 제물은 부채를 갚거나 또는 부과된 죄값을 만족시켜서 죄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목적으로 드려졌다(레 5:15).  이제 우리는 '종'의 비참한 죽음과 처참한 고난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죽음, 즉 그의 생명의 피를 쏟아  부음은 속죄를 위해 계획되고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이었다.

🔹한편 '종'의 죽음이 희생 제물이었다는 말은, 그 '종'이 제사장의 일을 수행하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종은 다른 제사장과는 달리 기꺼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따라서 그것은 모세 율법의 제사들과는 근본적으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유일  무이(唯一無二)한 제사로서 다른 제사의 원형이며 실체이다 :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그 씨를 보게 되며 - 여기 '씨'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영적  후손을  가리킨다(시22:30).  유대 사회에서 많은 자손은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였다.  물론  살아  생전 누리는 축복이었다.  그런데 종은 죽음으로써, 또 죽어서 그 축복을 누리신다.

🔹그 날은 길 것이요 - 장수 역시 큰 축복 중의 하나였다.  이제 종 메시야는 죽음에서 일어나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신 후 영원히 그의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호 6:2; 롬6:9).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After the suffering of his soul, he will see the light of life and be satisfied; by his knowledge my righteous servant will justify many, and he will bear their iniquities.

🔹자기  자식으로 - 이는  '그(종)의  지식으로'(by  his  knowledge,  KJV,  RSV, Hengstenberg,  Stier)  혹은 '그(종)에  관한  지식으로'(by  knowledge of him, Delitzsch) 등 두 가지로 해석된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본문 이해에는 별무리가 없으나,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라는 50:4내용 등을 고려하건대, 첫  번째 견해를 더 지지하고자 한다.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 이것은,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근거가 된다.  한마디로 그들의 죄악을 짐어지셨다는 말이다.  죄악을 짊어짐으로 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완전한 의를 베푸신다.  이렇게 주어진 '의'는 '법정적 칭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Therefore I will give him a portion among the great, and he will divide the spoils with the strong, because he poured out his life unto death, and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For he bore the sin of many, and made intercession for the transgressors.

본장은 종의 사역에 관한 하나님의 결론적인 선포롤 끝맺고 있는데, 종이  위대한 승리자로서 전리품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 승리는 바로 종 자신의 전부를 다바쳐 얻은 결과였으며, 이로 인해 범죄자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셨다 : 

"그가  위로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