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28, 2016

이사야 53 주석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Who has believed our message and to whom has the arm of the LORD been revealed?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 '우리'에 대해서는 (1) '선지자  자신'(Calvin, Oehler, Stier), (2) 52:15의 '열방들'(혹은 이방인들, G.W. Grogan, (3)'이스라엘 백성, 특히 선지자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경건한 무리들'(Delitzsch, Leupold)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으나 마지막 견해가 가장 나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들  '우리'는 수난받는 메시야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또 저들의 고백은 거의 회개에 가까운데,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새로운 깨달음을 믿은 유대인들의 심리 상태와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He grew up before him like a tender shoot, and like a root out of dry ground. He had no beauty or majesty to attract us to him, nothing in his appearance that we should desire him.

🔹주 앞에서 - 여기 '주'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종'의 삶의 과정은 인간들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벧전 2:4).
  
🔹자라나기를(야알) - 문자적인 뜻은 '그가 자라나셨다'로, 과거 시제(완료형)로 되어 있다.  본 동사의 시제를 따른다면 본절이 나타내는 인물은 본서 저자  이사야의 과거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세, 욥, 예레미야 등을 거론할 수 있지만 본장이 묘사하는 종과는 비교되 될 수 없다.  결국 이 종은 메시야인신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자가 과거로 시제를 적은 이유는 본서 저자가 미래를 내다볼 때 자신이 예언하는 메시지의 성취를 너무나도 명백히  보고 있었으므로 자신에게는 그 일이 이미 발생한 것처럼 확신있게 적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예언적 기술법 중의 하나인 '예언적 과거'라 부른다.

🔹마른 땅 ... 줄기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며, 특히 '마른 땅'이란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처해 있던 비천한 상황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He was despised and rejected by men, a man of sorrows, and familiar with suffering. Like one from whom men hide their faces he was despised, and we esteemed him not.

본절에서 저자는 '종'의 비하(卑下)를 좀더 상세히 묘사한다.
  
🔹멸시를 받아서 - 여기에는 거절과 배척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가 고난의  걸음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를 거절하고 배척 했다.  고난의 '종'에 대한 태도 문제에  있어서 중립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그의 구원을 즐거워하고 그를  높이거나 아니면 그를 배척하고 멸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무관심 역시 그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질고를 아는 - 문자적인 뜻은 '병을 잘 아는'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가 육체적으로 허약하여 이런 저런 질병에 계속 걸렸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병'은 '죄'를 묘사하는 비유적 술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미 육체적 질병을 비유로 해서 유다의 죄악 상태를 드러낸 바 있다(1:5,6).  따라서 성취될 구원은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이 분명하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Surely 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sorrows, yet we considered him stricken by God, smitten by him, and afflicted. 

🔹우리의 질고를 지고 - '종'이 짊어진 질고와 수난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리 개념이다.  의로운 한 분이 질고와 허물과  죄악이 가득한 자들을 대신하셨다는 것이다(롬 5:17-19). 
이것은 그  '수난자'가  자기 백성을 죄의 결과뿐 아니라 죄 자체에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을 함의한다. 왜냐하면 죄와 그 결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난자'께서는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안고 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But he was pierc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the punishment that brought us peace was upon him, and by his wounds we are healed.

🔹본절은 '종'이 고난받은 참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허물  때문이다.  여기 '허물'이란 단순한 실정법들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변적인 법에 대해서 범죄하였다.  그 결과우리는 그의 진노와 그  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었다.  죄들은 영원한 사망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에서 인간이 지불할  사망이란 요구가 '종'에게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볼때 여기  '찔리다',  '상하다'등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사실  히브리어에서 이 두단어는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시사하는 용어들이다.

🔹평화 - 이것은 단지 외적인 안녕과 조화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 곧 하나님과의 평화를 뜻한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We all, like sheep, have gone astray, each of us has turned to his own way; and the LORD has laid on him the iniquity of us all.

본절은 신학의 대요이다.  먼저, 우리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은, 우리가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상태에 있지 못하다는 전적 부패 교리의 근거가 된다. 

둘째로, 본장에서 지금까지는 나타나지  않던  '여호와'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악을 '종'에게 담당시킨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의 근거가 된다.  

셋째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 시킴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에 필요한 것을 이루어 놓으셨다는 구원 교리로 볼 수 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He was oppressed and afflicted, yet he did not open his mouth; he was led like a lamb to the slaughter, and as a sheep before her shearers is silent, so he did not open his mouth.

본절은 고난에 대한 종의 태도를 요약해준다.  먼저 '곤욕을 당하여'는 좀 더 풀어 보면 '그가 자신을 곤욕당하도록 내맡기셨다'이다.  이것은 종이 고난을 자원하여  받은 것을 가리킨다. 

또한 '그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고  참아냈다는 것을 가리킨다.  종은 고난을 자원하였을 뿐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셨는데, 저자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털 깎는 자 앞의 양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By oppression and judgment he was taken away. And who can speak of his descendants? For he was cut off from the land of the living; for the transgression of my people he was stricken.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 '곤욕'(오체르)은 '강압',  '구금자'이라는 의미가 그 문자적인 뜻인데, 따라서 어떤 학자는 이 단어를 '감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신약에 비추어 볼때 '체포'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아무튼 '종'은  법적인  과정을 밟아 사형 언도를 받기에 이르렀다.  혹자는 이 같은 결과가 단순한 오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종종 무죄한 피고가 부당히 고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있기 떠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 같은 결과는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이다.  '종'은 빛으로 이땅에 오셨다. 그러나죄로 저주 아래 있던 이땅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오
히려 잔인하게 죽였다.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He was assigned a grave with the wicked, and with the rich in his death, though he had done no violence, nor was any deceit in his mouth.
  
그리스도께서 범죄자로 낙인 찍혀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후 부자의 묘실에 장례된 것을 연상케 한다(마 27:32-61).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Yet it was the LORDs will to crush him and cause him to suffer, and though the LORD makes his life a guilt offering, he will see his offspring and prolong his days, and the will of the LORD will prosper in his hand.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 하나님께서 그를 즐겨 고난당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 구절에 담겨 있다.  '속건 제물'과 속죄 제물의 차이를 정확히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속건 제물은 부채를 갚거나 또는 부과된 죄값을 만족시켜서 죄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목적으로 드려졌다(레 5:15).  이제 우리는 '종'의 비참한 죽음과 처참한 고난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죽음, 즉 그의 생명의 피를 쏟아  부음은 속죄를 위해 계획되고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이었다.

🔹한편 '종'의 죽음이 희생 제물이었다는 말은, 그 '종'이 제사장의 일을 수행하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종은 다른 제사장과는 달리 기꺼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따라서 그것은 모세 율법의 제사들과는 근본적으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유일  무이(唯一無二)한 제사로서 다른 제사의 원형이며 실체이다 :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그 씨를 보게 되며 - 여기 '씨'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영적  후손을  가리킨다(시22:30).  유대 사회에서 많은 자손은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였다.  물론  살아  생전 누리는 축복이었다.  그런데 종은 죽음으로써, 또 죽어서 그 축복을 누리신다.

🔹그 날은 길 것이요 - 장수 역시 큰 축복 중의 하나였다.  이제 종 메시야는 죽음에서 일어나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신 후 영원히 그의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호 6:2; 롬6:9).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After the suffering of his soul, he will see the light of life and be satisfied; by his knowledge my righteous servant will justify many, and he will bear their iniquities.

🔹자기  자식으로 - 이는  '그(종)의  지식으로'(by  his  knowledge,  KJV,  RSV, Hengstenberg,  Stier)  혹은 '그(종)에  관한  지식으로'(by  knowledge of him, Delitzsch) 등 두 가지로 해석된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본문 이해에는 별무리가 없으나,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라는 50:4내용 등을 고려하건대, 첫  번째 견해를 더 지지하고자 한다.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 이것은,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근거가 된다.  한마디로 그들의 죄악을 짐어지셨다는 말이다.  죄악을 짊어짐으로 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완전한 의를 베푸신다.  이렇게 주어진 '의'는 '법정적 칭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Therefore I will give him a portion among the great, and he will divide the spoils with the strong, because he poured out his life unto death, and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For he bore the sin of many, and made intercession for the transgressors.

본장은 종의 사역에 관한 하나님의 결론적인 선포롤 끝맺고 있는데, 종이  위대한 승리자로서 전리품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 승리는 바로 종 자신의 전부를 다바쳐 얻은 결과였으며, 이로 인해 범죄자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셨다 : 

"그가  위로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 4:8).

Saturday, October 22, 2016

🔷‘더러운 복수의 달인’이 발견한 하나님🔷

🔷‘더러운 복수의 달인’이 발견한 하나님🔷

/ 류응렬 교수 (총신대 설교학)

2012년 4월 21일에 80세의 생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백악관에서 감옥까지’라는 책 이외에 수많은 책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사람인데, 이 책의 본래 제목은 ‘Born Again’(거듭나기)라는 책입니다. 찰스 콜슨은 변호사이자, 법학박사로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닉슨 대통령의 특별법률고문 역할을 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최 측근 참모로 모든 정치적 수단을 사용하여 닉슨을 대통령에 재선시켰습니다. 대통령 옆방에 사무실이 있었던, 당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감옥에서 발견한 행복

세계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서 가장 비천한 감옥으로 떨어졌지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인생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감옥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동료 죄수들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죄수들이 싫어하는 빨래를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의 진심을 의심했지만 한결같은 그의 봉사를 보면서 감동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평생 집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던 나는 저들을 사랑하면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7개월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난 다음 1976년도에 교도소 선교회를 세워 죄수들의 새로운 삶을 위해 그의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 후 35년을 한결같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필활동과 선교활동을 벌여 왔습니다. 1993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고, 2005년에는 ‘타임’이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복음주의자 25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됩니다.

갖은 권모술수로, 닉슨의 참모로 ‘더러운 술수의 달인’ 혹은 ‘닉슨의 청부살해업자’라고 오명을 들었던 그가 하나님을 만남으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

자신이 누군지 깨달아야 가치 있는 인생, 하나님이 기대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등급을 매기려 합니다. 학력, 재력, 배경, 직장, 부모님, 자식들을 가지고 상대방과 키재기를 하려 합니다. 남들보다 우위를 차지하려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이라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땅 위에서 좀 더 많은 것, 좀 더 높은 것, 좀 더 좋은 것을 추구하며 상대주의의 괴물에 집어삼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는 존귀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군지 깨달을 때 비로소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나와 자신의 모습을 깨달을 때 자신을 향한 인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인생을 시작합니다.

Thursday, October 20, 2016

시편 100 / 양인국 목사

🌻시편100편 강해

이 시는 찬양 시(詩)이며 시편23편과 함께 시편에서 가장 많이 애송되는 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주석 학자들 중에는 1-3절까지는 예배자들이 감사의 예물을 드리러 성전 문으로 가는 도중에 부른 것이고, 4-5절은 성전 안에 있는 성가대가 부른 노래인데, 후에 두 시가 하나의 시로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볼 때 이 시는 세 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다. 처음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모든 사람을 초청하는 내용이고 다음은 찬양해야 할 이유들을 고백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시는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예배 찬송으로 불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송으로 불렀다. 특별히 이 시는 지금도 서방 교회에서 “옛날의 노래 시 100번째 노래”라는 제목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찬송이다.

이처럼 이 시는 모든 시대 성도들이 예배 중에 부른 찬송 시(詩)로서 우리는 이 시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가 예배드릴 때 가져야 할 합당한 태도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100:1-5.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100:1-5)"

여기 “온 땅이여”란 모든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기쁨으로 찬송하며 그 앞에 나가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무엇보다 먼저 지켜야 할 태도는 “기쁨으로 그 앞에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아론의 아들들 중에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향로에 담아 하나님께 분향함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른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레10:1-6)”

모세는 아론에게 아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살아남은 아론의 아들들에게 형제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모세가 이들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은 예배하는 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슬퍼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유의 주인이시며 또한 만유의 주재자로서 만유를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주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는가? 요한도 이와 동일한 사실을 말하였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두움이 이기지 못하더라(요1:4,5)” 즉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어둠은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나갈 때 기쁨으로 나갈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에서 언제나 기뻐할 수만은 없다. 믿음의 사람인 우리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삶의 여정에서 당하는 피할 수 없는 수고와 슬픔을 동일하게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가 예배하는 동안에는 기뻐해야 한다. 에스라는 유대 백성들에게 공적 예배 시(時)에는 자신의 약함과 죄를 슬퍼하는 것조차 피하고 기뻐하라고 권고했다. “이 날은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여기 “이 날”이란 성일 즉 유다가 공적 예배를 드리도록 정해진 날을 의미한다. 에스라는 유다 온 백성에게 “이 날은 주의 성일” 즉 예배하는 날이므로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권고했다. 에스라는 백성들의 통회를 금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공적으로 예배드리는 성일에는 개인적인 회개조차도 금하고 그 앞에 기쁨으로 나가라는 권고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100:3)”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가져야 할 합당한 태도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과 그 고백의 깊이만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없이 하나님께 나간다면 우리는 예배 의식에 참여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나갈지라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깊이는 신앙 고백의 깊이를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에 따라 요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요청됨을 말해 준다.
시인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올 것을 초청한 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100:3)”

시인이 말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당연이 우리는 그의 소유된 자들이다.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의식하고 자신들을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고백했다. 여기 “그의 백성” 또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 고백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지만 특별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돌봄을 받는 자임을 말하였다. 우리는 시인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를 신령과 진정한 예배로 이끌어 주는 신앙의 고백이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보편적 고백으로부터 점점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로 나가는 신앙의 고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우리의 신앙 고백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앎으로 인한 고백일수록 진정한 예배로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자들은 보편적인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야 하지만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은 개인적으로 보다 더 깊이 체험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나가간다. 이처럼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깊을수록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깊어 진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100:4)”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가져야 할 합당한 태도 가운데 또 다른 한 가지는 감사함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그 문” “그 궁정”은 하나님의 임재 앞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감사함으로 그의 임재 앞에 나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갈 때마다 감사함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지금 여기에서” 감사할 이유를 찾을 줄 알아야 한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생존해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우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환경 가운데 있든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은혜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을 때 언제 어디서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시인은 우리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100:5)”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기에 우리는 바울처럼 모든 순간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고백은 우리의 생존을 포함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고백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살았고 앞으로 그 은혜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예배에 대하여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 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 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우리가 시편 본문의 교훈에 따라 기쁨과 신앙의 고백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갈 때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것이다.

(서신교회 목사 양인국)

감사와 행복

💥감사와 행복

감사와 행복은 한 몸이요, 한 뿌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깃들고
그 행복 속에 더 큰 감사가 자라납니다.

삶을 즐길 수 있는 가장 큰 비밀은
날마다 주어지는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생각하면
늘 부족하게 여겨지지만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먼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감사하십시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을지라도,
알지 못하고 깨닫진 못하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어느 신앙 칼럼에서...)

유명한 사카고의 부훙 전도자요 목사였던 D. L. 무디는 어느 집회 도중 교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컵에서 공기를 모두 빼낼 수 있는지 물었다.

어느 사람이 대답했다. “공기 펌프로 빼내면 됩니다.”

그러나 무디는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하면 진공 상태가 되어 컵이 깨지고 말 겁니다” 라고 말했다.

많은 빗나간 대답들이 있은 후, 무디는 미소를 지으며 주전자를 들어 컵에 물을 가득 부었다.

“자, 보세요. 공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감사가 충만하게 되면 불안이나 미움 같은 사악한 죄들이 끼어들 수 없게 된다. 빈틈없이 감사로 충만(充滿)하면 죄는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다.

(어느 신앙 칼럼에서...)

💥감사(感謝) 십계명(十誡命)💥 / 찰스 하돈 스펄전 목사

💥감사(感謝) 십계명(十誡命)💥
/ 찰스 하돈 스펄전 목사

1. 생각이 곧 감사다.
생각(think)과 감사(thank)는 어원이 같다.
깊은 생각이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2. 작은 것부터 감사하라.
바다도 작은 물방울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 것에 먼저 감사하라.
그러면 큰 감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3. 자신에게 감사하라.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높은 산과 태양과 별들을 보고 감탄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감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4. 일상을 감사하라.
숨을 쉬거나 맑은 하늘을 보는 것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감사가 어려운 감사이다.

5. 문제를 감사하라.
문제에는 항상 해결책도 있게 마련이다.

6. 더불어 감사하라.
장작도 함께 쌓여 있을 때 더 잘 타는 법이다.
가족끼리 감사를 나누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돌아온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
결과를 보고 감사하지 말라.
문제 앞에서 드리는 감사가 아름답다.

8. 잠들기 전 시간에 감사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짜증과 걱정을 안고 잠자리에 든다.
잠들기 전의 감사는 영혼의 청소가 된다.

9. 감사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라.
감사에는 메아리 효과가 있다.
감사하면 감사한 대로 이루어진다.

10. 모든 것에 감사하라.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가 아닌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감사하는 마음 /이해인

💛 감사하는 마음 / 이해인

🌷감사하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입니다.

투명한 유리창처럼 마음을 갈고 닦는 선함과
순수함으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습관을
충실히 하는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다 보면 매일 매일 감사할 일들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 올라
맑은 물 한 동이씩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될 것 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퉁명스럽지 않은 다정함으로 남을 배려하며
그 누구도 모질게 내치지 않는 마음
자신의 몫을 언제라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마음
아주 사소한 것 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다 보면
늘 감사에 가득찬
어질고 부드러운
눈길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기적인 자기 도취
독선적인 오만함에 빠지지 않는
겸허함과 온유함입니다
남을 섣불리 비난 하기 전에
그의 좋은 점 부터 찾아서
칭찬하고 격려하는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새
감사의 인사가 즐겨 부르는
노래의 후렴처럼
자주 새어 나옴을 경험하게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가끔은 슬프고 우울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 안에 숨겨진 뜻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쓰는
너그러움입니다.

남에게 우울을
전염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밝은 쪽으로 시선을 두는
지혜를 구하다 보면
생각 보다 빨리
감사의 환한 미소를 띨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예민하게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게으르고 둔감한 마음의 하늘엔
감사의 별이 환히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민감하게 깨어있어야만
언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잘 분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걸
하루에도 몇번씩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만이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 듣고
먼저 용서 청하고 먼저 용서하는 그 마음엔
평화에 뿌리 내린 감사가
늘푸른 산처럼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하나님과 이웃의 도움을 청하는 빈 마음
호흡하듯 끊임없이 기도하는 마음 안에
열려진 넓이와 깊이로
감사는 마침내 큰 사랑으로 이어 지고
오늘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삶의 축제가 될 것 입니다.

(이해인 산문집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중에서...)

감사해야 하는 이유 감사요법 (Thank You Therapy)에서 / 돈 베이커(Don Baker) 목사

🌻감사해야 하는 이유

감사요법 (Thank You Therapy)에서 발췌...
/ 돈 베이커(Don Baker) 목사

🌷첫째, 감사는 느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위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생면부지의 땅 그랄에서 살아갑니다. 우물을 팝니다. 물이 귀한 중동지방에서는 우물이 곧 생명입니다.

그 지방 사람들이 그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자리를 옮겨 또 팠습니다. 빼앗겼습니다. 자리를 옮겨 또 팠습니다.

또 빼앗겼습니다. 또 팠습니다. 또 빼앗겼습니다.

몇 개나 더 그랬는지 모릅니다. 그 이후 이삭이 한 행동을 성경이 이렇게 전합니다.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치고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 26:25)

정말 못 말리는 이삭입니다. 여기서 단을 쌓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제사’입니다.

그런데 그랄 땅의 지배자 아비멜렉이 군대장관을 대동하고 또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이삭은 놀라자빠질 지경입니다.

“어찌하여 내게 또 왔느냐?” 그러자 놀라운 말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느니라...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 26:27-29)

절대강자 아비멜렉이 바보 이삭에게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이삭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걱정도 근심도 불평도 분노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감사는 환경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캐롤은 32세의 여자입니다. 그런데 몸은 여섯 살 어린아이 만합니다. 다리도 없고, 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밝게 살아갑니다. 그 어떤 사람도 캐롤 앞에 서면 부끄러워집니다.

어떻게 그런 몸으로 그렇게 열심히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녀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런 몸으로 태어나는 것을 허용하셨어요. 만약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을 거예요. 내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불평과 원망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기 시작하였어요.”

세계적인 성악가이자 법률가인 안드레아 보첼리는 열 살 때 공에 맞아 시력을 상실합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시력을 잃은 것을 슬퍼하는 데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농촌 출신의 보첼리는 열심히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너무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퇴근 후 한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감사한다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환경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태도가 바뀌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합니다.

🌷셋째, 감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다고.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 3:1-6)

하나님께서 헐겠다고 생각하시면 사람이 아무리 세우려고 해도 무너져 버립니다.

그렇게 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우리들의 삶이 복잡하고 어렵고 슬프고 괴롭게 된 것은, 내 계획에 따라 욕심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 살게 됩니다.

지금 어려우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게 하심을 믿으며 묵묵히 견딥니다.

현재 형통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기고만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렵게 하실 것을 대비하여 더욱 겸손해집니다.

감사와 찬송의 능력 / 이기범 목사

🌻감사와 찬송의 능력

/ 스포켄한인장로교회 이기범 목사

멀린 R. 캐로더스가 쓴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 Prison to Praise>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35개 언어로 번역되어 1,000만 부 이상 판매된 유명한 책입니다. 멀린 캐로더스는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공군 82사단에서 복무했고, 아이젠하워 장군의 경호원, 작가, 강사, 목사, 전도자로 다양한 경력을 소지한 분입니다. 그는 '범사에 찬양한다'는 특별한 신앙으로 사역하는 분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찬송과 감사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책에서 그는 짐이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짐은 어머니와 아내까지, 가족들이 30년을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30년 동안 기도해도 아버지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짐은 설교를듣다가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이 때 짐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아, 지금까지 아버지가 변화되기만을 바랬지, 감사한 적이 없구나!' 그래서 짐은 자신의 삶이 도저히 감사할 상황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일이 뭐가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자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현실에서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마셔도 심한 주정은 안 하니까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술은 마셔도 길에서 쓰러지지는 않으니까 그것도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보니까 술을 30년 전에 비해서 적게 마시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짐은 그 날 저녁에 자신 안에 소망이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불만과 좌절과 어두움이 가득하던 자신 안에 소망과 감사와 어떤 전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짐의 아버지가 짐을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아버지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너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내가 어제 TV를 보니까, 어떤 마약중독자가 예수를 믿고 마약을 끊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냐, 영구적인 것이냐?"

짐의 아버지는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영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 증세는 완전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짐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30년 동안 변화되지 않던 아버지가 감사하는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니까 변화되더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우리의 '기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위대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출 때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위로해주십니다. 도와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