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7, 2019

겸손이란 무엇인가?

🎈겸손이란 무엇인가?
/ 존 파이프 (John Piper) 목사

1908년에 영국의 작가 G.K. 체스터톤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그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는 미숙한 문화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하고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천박한 상대주의"(마이클 노박의 표현을 빌리자면)의 한 표징은 인간의 확신에 대해 "오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매도하고 인간의 의심에 대해서는 "겸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톤은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오늘날 겸손이 잘못된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불행스러운 일이다. 겸손은 더이상 야망 혹은 야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제 겸손은 확신에 반대되는 개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버렸다. 전에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는 의심해야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되었었다. 하지만이제는 정확히 그 반대로 되어버렸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이 확신하지 말하야 하는 부분 - 자기 자신- 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 - 하나님의 이성(신적 이성) 등 - 에 대해서는 의심한다. 오늘날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회의론자들은 너무나 겸손해서 그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지조차 의심한다...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겸손이 있는데, 고행을 통해 덕을 쌓으려는 격렬한 노력보다 실제로 더 독성이 강한 겸손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새로운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목표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일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너무 겸손해서 구구단을 믿지 못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길 위에 서 있다. (Orthodoxy [Garden City, NY: Doubleday and Co., 1957], pp. 31-32)

우리는 가장 최근에 이러한 겸손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에서 그러한 겸손의 실상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확신에 대한 세상의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은 거만하다는 것입니다. 현대 시대의 겸손은 절대로 "불이야!" 라고 외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연기가 세탁 건조기에서 나오는 수증기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겸손이 미숙한 회의론의 상대주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겸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에 대해 적어도 다섯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1.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래에 자신을 온전히 종속시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태복음 10:24).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6).

2. 겸손은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바라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태복음 10:25).

그러므로 겸손함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지된 권리에 바탕을 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1-23)

3. 겸손은 논쟁을 주도하거나 논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자아를 높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며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내가 [예수님]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두려워하지 말고" (마태복음 10:27-28).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전서 4:5).

4. 겸손은 모든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7).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in humility) 받으라" (야고보서 1:21).

5. 겸손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알고, 비판을 고려하고 그로부터 배웁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확신을 허락해 주신 것과 다른 이들을 설득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린도후서 5:11).

(출처: Desiring God Ministry)

Thursday, April 25, 2019

야고보서 2:24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고'의 의미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는 야고보서 2장 24절 말씀은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문제와 관련하여 종종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왜곡 되어 인용된다.

칭의라고 하는 신학 용어는 쉽게 말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죄 없는 자로 여긴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언뜻 보면 칭의를 위해서는 사람의 행함도 필요하다고 가리키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야고보서 2:24에서 사용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δικαιόω)라는 표현은 칭의 말고도 다른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 되고 있다. 그리스어 사전(Strong 혹은 Thayer)을 보면 대략 다음 두 가지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A) 올바름(의로움) 혹은 정당함을 증거(입증)하다.

(B) 올바르다(의롭다)고 판결하다 혹은 여기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장 35절의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에서, ‘옳다 함을 얻는다'(δικαιόω)는 표현은 야고보서 2:24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무작정 (B)의 의미를 대입해서 읽으면 ‘지혜는 그 결과를 보고 올바르다는 판단을 받는다’는 어리숭한 문장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A)를 대입하면, ‘지혜는 그 결과를 통해 올바른 것임을 증거한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24은 크게 나눠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a) 행함으로 올바른 자리에 있음을 증거하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b) 행함으로 칭의를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이상의 두 가지 가능한 의미 가운데 무엇이 바른 것인지 알기 위해서 전체 문맥을 살펴야 함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혹시 의미가 불명확한 구절이 있다면, 그와 관련된 성경 곳곳의 더 명확한 말씀들에 비춰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살펴 볼 때, (a)가 바른 의미임을 별 어려움 없이 알 수 있다.

📍야고보서 2장의 문맥

야고보서 2장은 그 시작부터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1절)라고 하여, 믿음 없는 사람들이 아닌, 믿음이 있노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중반에 가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며 ‘행함이 없는 믿음’을 논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고 설명하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행함을 전혀 일으키지 못하는 믿음’ 곧 믿음의 질(質)에 관한 지적임을 알 수 있다.

믿음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믿음이 있음을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 비유에서 ‘돌밭에 뿌려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즉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은 아니나,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과연 계속해서 18절을 보면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도전함으로써, 행함의 문제를 논하는 이유가 행함을 통한 믿음의 증명을 가르치기 위함 것임을 알 수 있다.

21절부터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로 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창세기 15장 6절)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 나서 비로소 칭의를 얻은 것이라기 보다는, 과거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을 증명한 것이라고 사도 야고보는 23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야고보서 2장 전체의 문맥을 보면, 야고보서 2:24의 의미는 앞서 제시한 (a)와 (b) 중 (a)에 해당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24 말씀을 가지고 구원을 시작하게 하는 (새 새명으로 태어나는) 칭의를 논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행위가 칭의에 어떤 식으로라도 관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야고보서 말씀을 완전히 왜곡 인용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와의 조화

성경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가? 우리가 위에서 내린 결론은 성경이 전체로서 가르치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가? 물론이다. 야고보서에서 언급된 창세기 15:6 기록을 놓고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3–5)".

우리가 일을 아니할지라도 즉, 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명백히 적고 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을 통해 나타난 완벽한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5)."

우리의 믿음에 무슨 가치가 있어서, 우리가 잘 믿어서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passive obedience) 그리고 완벽한 순종 (active obedience) 때문에 용서하심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로마서 5:9–10)."

우리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함께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 혼자만의 행위로 인해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8–19)"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속죄, 속령)을 통해서이며, 거기에는 사람의 그 무엇이 조금이라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임을 성경은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우리 구원에 관한 도리를 오직 성경에서 찾는다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음으로 가능하고,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공로가 조금도 개입할 수 없으며, 그 은혜를 입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지 사람의 행위가 관여하지 않는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야고보서에서 배우듯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음으로 그 참됨을 증거하는 신앙이다. 과연 그 나라의 열매는 나의 힘으로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15:4).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고 (로마서 1:16), 그 능력은 사람의 열심이 아닌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16).

그러므로 복음을 믿노라 하는 사람에게서 그 나라의 열매가 전혀 맺히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실천적으로 조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침내 영광에 이르도록 부르신 성화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빌립보서 2:12) 좇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출처: once4all.org)

Wednesday, April 10, 2019

이삭과 이스마엘

🎈이삭과 이스마엘

이삭이 태어남으로 가장 소외 되었을 이스마엘이 오늘 이삭의 잔칫날에 이삭을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 가정의 이 사건을 비유로 해서 육신과 약속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2, 23)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말하며 이삭은 약속을 따라 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약속의 아들 이삭이 누구인지도 밝힙니다. 

갈라디아서4장 28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태어납니다. 인간의 힘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이삭입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영적인 의미에서의 이삭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와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이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은 누구입니까? 

주님을 만나기 전에 내 옛 모습들입니다. 육체로 태어난 것입니다. 내 몸의 한 부분입니다. 그냥 편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미움, 질투, 화내는 것을 위해서 특별히 노력하거나 공부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죄는 우리의 몸의 일부처럼 우리 안에 자라나 있습니다.

참 아들인 이삭이 태어나면서 이스마엘과 이삭과 서로 갈등하는 것처럼 자기 육신의 소욕을 따라 내 맘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은혜와 그 말씀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새로운 마음, 이 두 마음이 우리 안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어느 쪽이 더 우세할 것 같습니까? 

갈라디아 4장 29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겉으로 볼 때에 이스마엘이 훨씬 더 큰 아이였고 어린 이삭을 가지고 놀았듯이, 겉으로 보고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인간의 수고와 노력과 선행, 그리고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이론이 훨씬 더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마치 참 아들처럼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참 아들인 이삭이 태어나면서 이스마엘은 이삭과 서로 갈등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진리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좋은 대로 살아가기 위해 무슨 짓을 해서든 돈을 벌어들이고 그것으로 맘대로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이고 진리인 것처럼 생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었을 때, 내 육신의 소욕과 주관에 따라 살려고 하는 마음이 바로 옛 성품과,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려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내 안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싸우는 것입니다.

육신의 욕망과 자기 의, 나의 옛 사람이 나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축복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꿈틀거립니다. 그 거룩한 마음을 육신의 마음이 희롱하고 방해하고 가지고 놉니다. 

이렇게 서로 두 마음이 싸울 때 해결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 30절에 대답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사라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왜? 두 존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을 내쫓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기에 아브라함은 그 일로 인하여 '매우 깊이 근심했다'(창 21:11)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육신의 생각과 나의 주장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하루 이틀 그런 마음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나의 생각에 엄청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그 마음을 가지고 살려합니다.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려고 하는 그 두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살려합니다. 이 두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며 살려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결단하고 내 맘속에 있는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십시오. 

옛 성품, 육신적 생각, 그걸 가지고는 하나님의 약속하신바 천국을 유업으로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나를 포기하고 은혜를 붙들면서 사는 성도만 승리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고민이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과 '내가 쟁취하려고 하는 것'사이에 두 가지 날마다 싸우기 때문 아닙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나는 택하겠습니다. 이스마엘을 몰아내고 나는 이삭만을 택하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이스마엘을 쫓아낼 때, 갈등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영적인 갈등과 심령의 갈등 속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시고 우리 속에 있는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Monday, April 8, 2019

양자의 영으로 오신 성령

✔️양자의 영으로 오신 성령

/ 이종철 목사 (당당뉴스에서 펌...)

🎈아바 아버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단어는 ‘아버지’입니다. 이 호칭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개역한글 판으로 검색해보면 무려 117번이나 ‘아버지’란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주님’ ‘하나님’ ‘여호와’ ‘거룩하신 분’ 등의 호칭들을 사용하고 있던데 비해서 예수님의 ‘아버지’란 호칭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친밀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며 시작합니다. 그런데 헬라 어 원문을 보면 그 순서가 다릅니다. “아버지여, 우리, 하늘에 계신”의 순서입니다. 기도는 무엇보다 “아버지여”를 부르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듯이 우리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사실 ‘아버지여!’ 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우리 모든 기도는 응답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의 소원을 모르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녀들의 간절한 소원, 그것이 합당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당한 소원일지라도, 부모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부모이고, 사랑하는 자녀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버지’로 마칩니다. 그냥 다른 말없이 ‘아버지, 아버지’ 하고 울며 내려와도 족합니다. 기도의 응답이란 것도 ‘저분이 나의 아버지시고,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를 느끼는 순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다가오는 순간이 기도의 절정입니다. 이 이상의 기도는 불필요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만드신 분입니다. 이 광대한 우주에는 수십조, 수백조 개의 별이 있고 지구는 별에도 들지 못하고 작은 행성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지구조차도 인간이 살기에 얼마나 광대한 땅덩어리입니까? 그런 우주를 만드신 분을 우리는 아버지라 부릅니다. 

구약 시대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은 얼마나 거룩하고 두려운 분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그 얼굴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거룩한 그 얼굴을 본 사람은 죽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았을 뿐입니다(출33:20-23).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고 온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빛마저 바라볼 수 없어 모세가 수건을 쓰고 있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을 뵈옵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하며 절망적인 탄식을 했습니다. 그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지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 겨우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이제 ‘아버지’라 부릅니다. 

구약시대에는 심지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는 십계명의 제3계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이 단어를 ‘아도나이’ 곧 ‘나의 주님’으로 바꾸어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뿐만 아니라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란 호칭도 성이 안 차셨던지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셨습니다. 아바는 우리말로 ‘아빠’ 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아빠’ ‘엄마’란 단어가 좀체 우리 입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님 어머님’ 하고 부르는 것이 어른답지만 친밀감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감히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갈라디아서 4:6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Because you are sons, God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the Spirit who calls out, "Abba, Father."
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라 부릅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우주를 만드신 신이 바로 우리 ‘아빠’입니다. 

🎈성령님은 양자의 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요, 죄인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을 믿는 순간 놀라운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양자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원래는 아들이 아니었는데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무명한 인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들의 믿음이나 신념입니까? 아니면 우리들의 거룩한 착각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증거하십니다.

롬 8:16절에서 말씀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증인입니다. 성령님을 오늘 말씀에서는 ‘양자의 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장을 찍어 놓으신 것입니다. 

🎈종의 영과 양자의 영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들입니다. 롬 8:1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종과 아들의 차이를 아십니까? 종의 기본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종은 잘못하면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잘 지키다가도 하나만 잘못하면 죄인으로 정죄를 받습니다. 종은 일을 하다가 실수나 잘못을 범하면 벌을 받거나 쫓겨납니다. 심할 경우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은 실수해도 심지어 수백억을 말아 먹어도 벌을 받거나 쫓겨나지 않습니다. 단지 부모님께 미안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죄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그 죄는 믿기 전과는 무게가 다릅니다. 믿기 전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송함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전히 엄한 주인입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아버지입니까? 부모와 함께 살면서도 여전히 부모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본인도 괴로울 뿐만 아니라 그 부모님도 안타까울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십니다. 

자녀는 또한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습니다. 롬 8: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습니다. 유산은 뛰어난 종이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된 자가 받습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신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무엇을 상속 받습니까? 장차 이 땅 위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왕 같이 고귀한 존재들이 되어 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 또한 상속받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함과 능력이 자라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당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상속의 효력은 죽은 다음에 발생하지만 이미 그 권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영향을 미칩니다. 사장님의 아들은 말단 사원의 자리에 있을망정 권세가 있습니다. 누구든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우리는 지금 천국을 소유한 자로서 삽니다. 미래에 주어질 것이지만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롬 8:23절에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뜻은 이미 장차 이루어질 것들을 성령 안에서 미리 맛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첫 열매를 먹으면서 우리는 이후 있게 될 풍성한 열매와 수확을 기대합니다.

성령님이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며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행사하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서부터 천국은 시작되었습니다. 

🎈양자는 고난과 영광을 함께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고난에도 함께 참여합니다. 롬8:17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오늘 읽은 말씀에서는 ‘함께’(헬라어로 ‘쉰’)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16절, 성령이 ‘함께’ 증거한다, 17절,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한 가족이요 한 몸이 되었습니다. 가족은 영광도 고난도 함께 누립니다. 가족 중 누구 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모든 가족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사실 함께 고난을 당해야 권세나 영광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 함께 고난을 겪었다는 것처럼 큰 권세가 없습니다. 

고난을 우리 의지로만 견뎌야 한다면 우리는 어려울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려울 때 힘주시고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우리가 낙담하여 있을 때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맛보게”(8:23) 하심으로 다시 힘을 내어 전진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유혹이 들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각을 주십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화로운 영광입니다. 

이 성령님 의지하여 매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부활의 의미

🎈부활의 의미

/ 존 파이프 목사(John Piper)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9)

부활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와 가까와지려고 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버림받고 멀다는 느낌을 극복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스라엘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에 이를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영광에 이르는 그 불가능을 하시려고 의도하신다는 선언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은 어떠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신다는 것, 그가 당신과 가까와지셨다는 것, 그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계시다는 것, 그가 당신을 구원하사 영원한 기쁨으로 인도하실 것 등을 확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부활이 지지하고 있는 생명과 소망과 의의 모든 약속들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확신함으로써, 세상적인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나 세상적인 이익에 대한 탐욕 때문에 유혹받아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게 되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과 성도의 차이입니다. 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그를 사랑하게 하시고 그의 아들의 부활 안에서 안식하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출처: Desiring 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