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30, 2018

믿음에 관한 성경 구절 30!

믿음에 관한 성경 구절 30!

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편 9:10)

2.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역대하 20:20)

3.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편 46:10)

4.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 : 9)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편 13 : 5)

6.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편 20 : 7)

7.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편 56 : 3)

8.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 : 5 ~ 6)

9.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 : 5)

10.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도후서 5 : 7)

11.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에베소서 6:16)

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2)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마가복음 5:34)

14.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마태복음 9:29)

15.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5:28)

16.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20).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태복음 21:21)

18.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마가복음 10:52)

2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누가복음 7:50)

2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22.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7:19)

23.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로마서 1 : 8)

24.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로마서 1 : 11-12)

25.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26.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27.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28.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5)

29.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30.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기독교 신앙의 본질

기독교 신앙의 본질

/ 박영선 목사

1.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2. 믿음은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점에서 선물이다. 그러나 믿음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지속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또한 책임이다.

3. 믿음은 초월이 아닌 계시에 의존한다.

4. 믿음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의 결과이다. 믿음은 지/정/의의 조화를 요구한다.

5. 믿음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6.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

7. 선악과의 금령은 인간의 본분을 보여준다.

8. 믿음은 성화의 도구이다.

9. 하나님은 더듬어 찾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10. 믿음은 맹신이나 뜨거움의 싸움이 아니며 믿을만한 분에 관한 것으로 인격에 대한 지향점을 가진다.

12. 믿음은 오랜 시간을 통해 자라난다 - 믿음은 평생의 과정이다.

13. 구원은 하나님 은혜에 반응하는 인간 책임의 양면성을 지닌다.

14. 믿음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15. 믿음은 존재의 변화를 가져온다.

16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다.

17. 믿음은 십자가를 통해 얻게 된 유익에만 몰두하지 않고 이웃사랑으로 드러난다.

18. 사랑은 행위가 아닌 본질이므로 사랑이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

19. 믿음은 기교가 아닌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20. 믿음은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같다.

21. 믿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다.

22. 믿음은 삶의 전 영역에서 드러난다.

23. 믿음은 윤리/도덕적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24. 율법은 인간의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25. 믿음은 순종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26. 믿음은 초월주의가 아니다.

27. 믿음은 모든 영역의 주권자가 하나님임을 인정한다.

28. 구원은 성화를 포함한다.

29.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으며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것이다.

30. 믿음은 사소한 것에서 드러난다.

31. 성령의 일차적인 사역은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데 있다.

32. 성령충만은 순간적인 자기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33. 믿음은 의심이 없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더 강한 확신을 위해).

34. 믿음은 절망이 없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연단)

35.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필요하다.

36. 온전한 믿음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과 기도이다.

37.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38.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바람이다.

참된 믿음이란?

참된 믿음이란?
하이델베르크 지상 강좌(8)
/ 해설 유기천 목사

📍제 20: 모든 사람들이 아담을 통하여 타락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해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서 그의 모든 복을 받은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아담 한 사람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 물론 자범죄라고 하는 개인에 의한 죄도 범죄가 되지만,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에게 죄가 전가 되었다. 이런 이치로 예수님 한 분의 순종으로 구원을 얻게 되나, 모든 사람이 다 예수를 통하여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참된 믿음 만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느니라.”(마7:14) 믿음이 없는 자가 예수를 통하여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께 접붙임을 통하여 가능하다.(롬11:16-21) 나무와 가지의 관계처럼, 확실하게 예수님과 관계적 연합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제 21문: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내가 진실되다고 아는 참된 지식이며 또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전적인 신뢰는 복음을 통하여 성령께서 내 안에 창조하신 것으로 죄를 용서하고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남들과 함께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해설)

1. 참된 지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를 아는 것이며, 진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요17:3,17)

2. 전적인 신뢰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큰 대제사장이며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체휼]하시기에, 우리는 그의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히4:14-16)

3. 전적인 신뢰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은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 임한다. 복음을 듣지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고전1:21)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말씀[복음]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롬10:16,17)

4. 성령께서 내 안에 창조하신 것이다: 구원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요3)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나누는 대화에서 임의로 부는 바람이 보이지는 않지만 실체가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실체가 있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성령은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적용한다.

5.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 죄인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시며 거룩하게 하셨다.(히10:10)

6. 남들과 함께 나에게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기에 의의 면류관이 자신에게도 예비되어 있다고 바울은 고백한다. (딤후4:7,8) 믿음을 지킨 모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만, 나에게도 라고 하며 개인적으로 적용이 이루어져야 복음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는 것이다.

7. 순전히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원 공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은혜+믿음-행위=구원. 즉, 은혜+믿음=구원+행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구원은 은혜와 믿음으로 이루어 진다. 즉 구원의 역사에는 인간의 어떠한 선행적 행위가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구원을 받게 되면 아름다운 행위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엡2:8-10). 믿음을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의(righteousness)'로도 말할 수 있고, 이 의는 믿는 모든 자에게 임하며 차별이 없다.(롬3:22)

📍제 22문: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입니다. 그 복음의 요약은 범교회적으로 인정되고 의심의 여지 없는 기독교 신앙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해설)

1. 지상명령(마28: 18-20)은 명령과 함께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라고 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우리는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도 앉아 계시지만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임을 믿어야 한다.

2. 복음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함다. (요20:30-31) 성경 말씀이 기록 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그 이름으로 생명(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제 23문: 그러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답: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한글번역에는 빠져 있음

(해설)

이처럼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사도신경은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으로 초대 교회때부터 암송되었다.

성부 하나님은 자신의 작정에 따라 선택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한 여인의 몸으로 보내셨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죄인에게 찾아 오셔서 구원을 얻게 하시며 구원받은 성도 안에 내주 하시며 하나님을 뵙고 영화롭게 되도록 인도하신다.

결국 구원은 성부 하나님의 작정과 성자 예수님의 대속과 성령님의 적용으로 주어지는 선물 곧 은혜이다.

Thursday, November 29, 2018

폴 워셔 비판에 대한 반론

폴 워셔 비판에 대한 반론

/ 김병혁 목사

위의 영문 자료 출처는 

http://www.jesus-is-savior.com/Wolves/paul_washer.htm

입니다.

이 글은 www.jesus-is-savior.com 이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David J. Stewart라는 사람이 쓴 것이지요. 한 주에 7만명 이상이 접속할만큼 꽤 유명한 사이트이긴 하지만, 이 사람 개인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신앙적 관심사가 워낙 방대하고 조잡해서 한 마디로 규정하기 쉽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의 글을 보면 대부분 비평과 비난조의 글인데, 유익한 내용도 많지만 지나치다 싶을 만큼 독선적인 내용도 많습니다.

그는 현재의 기독교(특히 미국 기독교)와 기독 유명 인사들을 향해서는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고 있지만, 정작 자신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신비주의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파악하려면 그가 쓴 글로 밖에 확인할 수 없는데, 차제에 그의 사이트에 올려진 글들을 살펴보니, 신학적으로 위험한 요소가 많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신학적 사고의 연원을 정리한다면, 제세례주의와 세대주의가 절충된 극단적 근본주의(Radical Fundamental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하여 그의 주장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현대 기독교의 병폐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기독교의 구원의 유일성을 일관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개혁신학과는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그는 역사적 칼빈주의 혹은 칼빈신학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의 5대 교리(TULIP교리)를 '이단적인 가르침'이라고 단정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영문 글을 유심히 읽어보신 분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습니다. 이 글대로라면 Paul Washer 목사가 행위구원론을 강조하는 것 같고, 자신은 전통적인 개혁교회가 부르짖는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을 주장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자는 알미니안 전통에 속한 반면, 후자는 칼빈주의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David J. Stewart는 칼빈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제가 볼 때에, Paul Washer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 사람이 비판하는 내용은 그리 새롭거나 독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세대주의 권에서 줄곧 지속되어 오는 '주되심 교리'(The Lordship Salvation Doctrine) 논쟁의 일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David J. Stewart는 '주 되심 교리'를 반대하는 전형적인 주장입니다. 이 사람이 Paul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Paul 목사가 구원을 말할 때에, 은혜로만 얻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행위를 조건으로 삼는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Paul 목사가 그의 설교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 죄에서 떠나야 한다거나 회개해야 한다거나 순종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을 조장하는 내용이므로 복음을 왜곡한 비성경적인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언뜻 들어 보면 맞는 말 같이 들리지만, 이는 성경적 구원에 대한 일방적인 오해로부터 야기된 것입니다. 건전한 주되심 교리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믿음으로 이끄는 복음의 부르심은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권위(주되심)에 복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여기서 말하는 회개와 복종을 마치 인간 편에서 구원을 이루기 위한 조건처럼 이해하기 때문에 주되심 교리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믿음과 행위를 상치된 개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에 합당한 열매가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없이) 오직 믿음으로서 얻는 칭의는 반드시 거룩과 경건을 도모하는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거나 분리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 역시 믿음을 늘 경건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믿음의 경건의 원인이며, 경건은 믿음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David Stewart가 바로 이 점에서 Paul Washer의 설교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Paul 목사를 두둔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도 일전에 지금 David Stewart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한창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얼떨결에 듣게 된 설교여서, 그 한편으로 Paul 목사의 신학 사상 전체를 평가하기란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평소 지향하는 신학이나 그가 존경하는 신학자들의 면모를 볼 때, 그를 가리켜 복음의 배교자, 이단적 복음을 전하는자, 행위구원론자라고 부르는 David Stewart의 견해는 얼토당토한 생각입니다. 

어떤 점에서 Paul 목사의 설교는 청자와 의도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있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말로는 주를 찾지만 구원의 좁은 길에 서기를 반대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고민과 도전을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다보니 구원의 칭의적 관점보다는 성화적 관점에서 보다 강하게 어필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도의 참된 믿음에 관하여서 뿐만 아니라 참된 행위에 대해서도 무수히 많은 언급이 있습니다. 구원의 원인으로서는 믿음이 강조되지만, 구원의 열매로서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논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은 서신서들의 첫 부분에서 늘 자신의 소명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된 예정을 언급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성도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본분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교훈들을 언급합니다. 믿음과 행위, 칭의와 성화는 구원론에서 바늘과 실과 같이 다루어져야 할 주제입니다. 

고로, David Stewart의 글은 Paul 목사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떠나서, 그 자체로 성경적인 구원론에 대한 매우 편협적인 사고에서 기인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지적한다면, Paul 목사가 속한 교단의 상황이나 그가 교제하는 사람을 근거로 그를 거짓 선생으로 단정하는 태도는 참된 신앙을 추구하는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정보만 더 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David Stewart가 자신의 주장에 각주를 달듯 소개하는 Dr. John R. Rice 와 Dr. Harry Ironside는 세대주의 신학자들입니다. 

그리고 '주되심 논쟁'에 관해서는 J. MacArthur 목사의 '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라는 책을 참조하세요. 다행히 이 책은 '구원이란 무엇인가'(부흥과 개혁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

주재권 구원론(Lordship Salvation) 비판

주재권 구원론(Lordship Salvation) 비판

/ 이인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에 그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에서 언급되는 “믿음”이 과연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을 의미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언제나 진정한 믿음이며, 앞에서 수식하는 형용사에 따라서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을 간단히 정리요약하자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이 복음이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을 의미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교단과 교파가 수없이 많지만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물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두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에는 동의를 한다. 분명히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 자체의 복음이 변질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여 어느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개인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이 분명하다.

만약 기독교의 복음이 변질되었고 잘못되었다면, 기독교인은 단 한명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선언해야만 한다.

최근에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준행위구원론에 가까운 소위 lordship salvation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구원론으로 신학적 논쟁을 일으킨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맥아더목사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부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목사들이 동의를 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결코 전통적인 개혁주의나 복음주의적인 주장이 아니며, 전혀 다른 내용의 또다른 신학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에 젊은 신학생들은 성경책을 단 한번도 통독하지 않으면서, 신학자들의 서적만 읽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옳다고 판단되면 맹목적으로 그 신학자들의 주장을 추종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성경적인 주장을 외면한 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주장은 무조건 옳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맥아더는 원래 세대주의 학자이다. 미국의 세대주의에서는 도덕폐기론이 성행되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구원파와 같은 구원론자가 미국에 많았다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즉 예수만 믿으면(혹은 어느 교회에 입교만 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고, 그 주관적인 구원의 확신은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에 상관이 없다는 도덕폐기론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원파 교회조차 그렇게 단순히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으며, 어느 기독교에서도 단지 교회만 다니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맥아더의 lordship salvation은 그러한 극단적 세대주의 구원론을 반박하기 위한 구원론으로 시작된 배경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구주(Savior)로만 고백하면 부족하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주님으로 고백하여 자기의 주인(Lordship)가 되어야만 하며, 순종과 회개와 행함의 열매가 나타나야만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교회들이 타락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많은 동의와 호응을 가져 왔으며, 조금 더 나아가서 기존의 기독교의 복음을 거짓 복음이며 변질되었다고 맹비난하며 공격하는 일련의 행위구원론자들과 인본주의적인 구원론자들이 이들의 주장에 가세하게 시작한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믿는 자의 의무로서 실천적인 행함을 강조하는 목사들과 이들은 엄격히 구별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은 많은 학자들과 목사들을 자기들과 같은 견해를 가진 것으로 포함시키기를 즐겨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기 주장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의도일 뿐이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일차적으로 성경적이어야만 한다. 성경이 기록된 객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모순과 오류를 살펴보자.

(1)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새로운 신학적 구원론을 세우기 위하여 기본 기독교의 복음을 거짓 혹은 변질된 것이라고 왜곡하고 비난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의도적인 과장과 왜곡을 함으로서 기독교의 복음이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이라도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하는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다. 이들은 단골적인 메뉴로서 사영리를 비난하는데, 모든 기독교인이 사영리로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아니며, 사영리는 입으로만 거짓 고백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사영리가 말하는 믿음도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 마음으로 시인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말한다. 실제로 사영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간증은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들으면 사영리로 전도받은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거짓 기독교인이 되고만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그들이 비난하는 도덕폐기론은 이미 정통기독교의 구원론이 아니며 이미 정통교단에서 이단으로 발표된 구원파의 구원론일 뿐이다.

(2) 물론 필자는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자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 동의를 하며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음을 동의한다. 그러나 결국 이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믿음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을 정확히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이 기준은 그들의 주장을 따르자면 결국 “행함, 순종, 의지, 도덕적 결단”이 되어지므로 결과적으로 행위구원론이 되고 만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행함, 순종, 의지, 도덕적 결단”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행함의 요소들이 구원의 또다른 조건이 되고만다. 이들은 믿음과 행함을 동일한 개념으로 포함시키지만, 성경은 믿음과 행함을 다른 개념으로 구별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의 행위구원론은 믿음이 전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아니다. 그런 주장은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적인 주장이 될 것이며, 결국 믿음과 함께 행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바로 행위구원론이다.

그러나 성경은 “연약한 믿음을 비판하지 말라”(롬14:1)고 기록하고 있으며, “단단한 식물을 먹을만한 장성한 믿음으로의 연단”(히5:12-14)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과연 믿음에 카트라인이 있는가? 이들이 누구길래 믿음의 카트라인을 설정하는가?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행함과 얼마만큼의 의지와 순종과 도덕적 결단이 구원의 커트라인이 되며, 그 기준을 무엇으로 정하는가? 100%의 행함과 순종이 구원받을 믿음인가, 아니면 몇%의 행함과 순종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들의 주장을 따르자면 갈라디아교회를 비롯하여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모두 구원을 잃게 된다.

고전 3:2-3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초신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되며, 연약한 믿음, 행함이 부족한 믿음, 행함을 아직 보이지 않은 믿음, 순종과 의지가 적은 믿음도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 구원의 커트라인을 신학자들이 정하는가?

과연 예수님의 사도들조차 완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만약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갖추어진 믿음이 완전한 구원이 된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기 위하여 수십년 혹은 평생의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며, 아마 평생동안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비극의 결과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이 평생동안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없다면 사람은 아무도 완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완전한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인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재권구원론자들은 자라는 사람들조차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 거짓믿음을 가진 자가 되고만다.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3) 이들의 구원론은 결국 기초적인 구원의 서정이라는 신학을 외면하는 주장으로서, 칭의와 성화조차 구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여 성경이 수없이 언급하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성화적인 과정”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즉 단번에 받는 즉각적인 구원(칭의, 중생)과 점진적인 구원(성화)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이상한 구원론이 되고만다.

다시 말하자면 칭의와 성화에 대한 성경구절을 모두 무시하여야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 예수를 믿고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행함의 열매가 없으면 모두 무더기로 구원이 취소되어지는가?

또한 예수를 믿고 중생의 거듭남의 체험을 한 사람도 성화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결국 성화구원론이 되지 않는가?

(4)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은 모두 거짓말이 되는가? 예수를 믿고 성령이 내주한 거듭난 성도들도 행함이 없거나 순종하지 못하면 구원을 잃는다면 다음 성경구절은 모두 거짓말이 되는가?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요 10:27-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5) 이들은 결국 또다른 구원론으로서 기독교의 교계를 분열시키고 있다.

이들의 구원론을 따르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대폭적으로 줄어들게 되며, 구원을 받기 위하여 상당한 어려운 양육과정과 고된 훈련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들 중에서 일부는 제자와 성도가 다르다는 주장까지 하지만, 성경은 제자와 성도를 구별하지 않는다. 또 제자만 구원을 받고 성도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극단적인 구원론으로는 어쩌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온전한 믿음의 조건으로 행함과 순종과 의지와 도덕을 100% 지킬 수 있는 인간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소위 값비싼 구원이 되며, 그러한 논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효과를 감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느 유명한 목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이 충만할 경우가 있으며 때로는 의심을 가질 경우도 있다. 순종과 행함과 의지도 일평생 항상 동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때로는 믿음이 장성한 교인도 죄를 짓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받았다가 취소되는 것을 반복하는가? 예를 들어 60평생을 진정한 믿음을 갖다가 죽기 얼마 전에 주님께 불순종하거나 믿음이 약해지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십자가 강도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그는 어떤 행함과 순종과 의지와 도덕적인 삶을 가졌는가?

(6)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은 성경에서 말하는 “값없는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구절에 대해서 이들은 설명할 방법이 없어지며,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수많은 바울서신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또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효과를 축소시키거나 부정하여야만 한다.

결국 이들이 자신들의 구원론을 성경적으로 증거하기 위하여서는 부분적인 일부의 성경구절만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이 핸드캡이 된다.

전통적인 개혁주의와 복음주의가 말하는 구원론은 행함이 전혀 필요없으니 지킬 필요가 없다는 도덕폐기론이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입으로만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행함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천적인 열매이며 성화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들이 이신칭의의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변질되었으며 거짓복음이라고 비난한다면, 이들의 구원론은 이신칭의 자체를 왜곡시키며 부정하는 주장이 되므로 행위구원론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행위구원론이 아니라는 궁색한 변명만을 늘어 놓은 것이 된다.

행함의 열매가 없거나 의지, 순종, 도덕적인 결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은 곧 믿음이 있어도 이러한 행위적인 요소가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결과와 동일하므로 이러한 주장이 바로 행위구원론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신칭의를 말하는 기독교의 복음을 거짓 믿음이나 입으로만 고백하는 형식적인 믿음으로 왜곡시켜서 기독교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행위구원론이 아니면 무엇이라는 것인가?

(7) 결론적으로 이 주재권구원론을 인정한다면 기존 기독교의 복음이 마치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기독교에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에서 믿음을 잘못 가르치지는 않는다. 기존 기독교는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구원파와 다르다.

교회가 타락하고 범죄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이들의 주장은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기독교인의 의무와 책임이 되어야 하는 것은 좋지만, 값비싼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극단적 세대주의의 도덕폐기론을 반박하는 좋지만, 일부 과격한 사람들과 같이 정통신학의 구원론까지 공격한다면 그들은 행위구원론이 되고만다는 교훈을 잊으면 안된다.

물론 맥아더 목사가 소위 과격한 행위구원론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는 훌륭한 신학자이다. 맥아더목사의 신학은 세대주의로 분류되지만, 그의 구원론은 애당초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도덕폐기론 혹은 율법폐기론자들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재구원론이 행위구원론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의 인터넷을 보면, 큰믿음교회의 변승우를 지지하는 일련의 행위구원론자들이 폴워셔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동영상을 올리고 있으며, 맥아더 목사의 '주재권 구원론'을 인용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이 변질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직접 목격하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