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다양한 종교들
/ 유해석 선교사
이슬람이 아무리 “아브라함도 예수도 무슬림이었고, 이슬람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종교”라고 말할지라도, 이슬람은 무함마드에게서 시작된 종교다.
1. 고대 아라비아의 신앙과 관습의 영향
무함마드가 어떻게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만들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태어났던 아라비아 반도 지역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BC 480-430)는 그가 살던 시대 아랍인들은 남신(男神)과 여신(女神)을 숭배한다고 표현하면서, 이들의 아랍어 이름을 ‘타알라’(Taala)와 ‘알라투’(Allatu)라고 칭했다. 알라투는 확실하게 꾸란에 나오는 알라의 세 딸 중의 한 명인 랏트(Al-lat)이고, 타알라(Taala)는 알라(Aaala)로서 (Allah)의 오역일 것이다. 알라(Allah)는 알일라(Al Ilah)를 축약한 말로, 이는 셈족어의 신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정관사 Al이 붙어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알라(Allah)는 하나의 신(神)을 의미한다.
‘알라’는 아랍 신으로, 메카의 카바(Kabah) 신전에서 가장 높은 신의 이름이었다. 특별히 무함마드의 쿠라이시(Quraish) 가문은 메카의 카바신전을 관리했다. 무함마드가 자신을 선지자이자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은 자라고 했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의 종교적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무함마드의 친아버지의 이름은 압둘라(Abdu'lla)였는데, 이는 아랍어로 ‘알라의 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조카 이름은 우바이두일라(Ubaidu'Ilah)인데, 이는 ‘알라의 작은 종’이라는 뜻이다. 메카에 있는 카바신전은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알라의 집”(Baitu'Ilah)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무함마드는 새로운 신의 이름을 만든 것이 아니었고, 처음으로 유일신 개념을 도입한 것도 아니었다. 알라(Allah)라는 단어가 정관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이 단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의 개념 속에 이미 유일신 개념이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메카의 카바신전은 360개의 신을 섬기는 아랍 부족들의 만신전(萬神殿)이었다. 또 아랍 사람들은 신성한 돌을 숭배했다. 카바신전에는 검은 돌이 있는데, 이는 무함마드 이전부터 아랍인들이 숭배하던 것이다.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이 돌은 천국에서 내려왔으며, 원래는 순수하고 하얀색이었으나 인간의 죄로 인해 검게 변했다고 한다. 무함마드 시절에도 아랍 사람들에게는 신전을 방문해 자신의 우상에게 절을 하고 검은 돌에 입을 맞추는 것이 관례였다. 현재 이슬람에서 행하고 있는 이러한 관습들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전통적으로 해 왔던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2. 사비교 및 유대교의 영향
무함마드 당시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에게 영향을 미친 종교로는 유대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마르키온, 에비온파, 그리고 사비교(sabian)등이다. 이러한 내용은 꾸란 22장 17절에 언급되어 있다. 사비교는 이 중에서도 가장 미미한 영향을 미친 종교였다. 우리는 꾸란 2장 62절에 기록되어 있는 사비교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사비인들의 종교는 셋과 에녹에게서 왔다고 생각되며, “셋의 책”이라는 경전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종교적 규율이 있는데, 하루에 일곱 번씩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다. 사비교의 기도 시간 일곱 번 중 다섯 번은 이슬람의 그것과 같다. 사비교인들은 죽은 사람에 대하여 엎드려 절하는 대신, 기도하면서 30일 동안 금식했다. 초승달이 뜨는 달이 짧다면 29일 동안 금식했다. 그리고 사비인들은 메카의 카바신전에 영광을 돌리는 행위를 했다. 이슬람에서도 라마단 금식(30일)이 끝나면 3일 동안 이드 알 피트르(Eid al-Fitr) 축제를 여는데, 이는 사비교에서 온 것이다.
이슬람은 유대교에서 많은 내용을 차용하였기에 이슬람을 후기 유대교의 이단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당시의 유대교는 아라비아 반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AD 70년 로마의 티토(Tito) 장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아라비아 반도로 이주했고, 가장 컸던 3개의 유대인 부족은 메디나에 살고 있었다. 이슬람의 라마단 중에 금식을 시작하는 일출과 금식을 마치는 일몰의 정확한 기준은 유대교에서 왔다. 유대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브라함에게서 내려오는 경전을 가지고 있었다(무함마드가 속해 있는 쿠라이시 부족도 자신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전설은 유대인의 역사 및 전통과 동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 내용을 요약하면 카바 근처는 하갈이 고통을 겪었던 장소로 신성시되었으며, 신성한 우물 잠잠(Zamzam)은 하갈이 평안함을 얻는 근원이었다. 순례자들이 사파(Safa)와 마르와(Marwa) 사이를 앞뒤로 뛰어다니는 행위를 하는 것은, 물을 찾아 바삐 돌아다녔던 하갈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카바신전을 지은 것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며, 그곳에 검은 돌을 끼워 넣었고 성지순례에 오는 모든 아랍 사람들을 위하여 신전을 세웠다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사탄에게 돌을 던지는 것처럼 벽에 돌을 던지며, 아브라함의 희생제사를 따라서 미나(Mina)에서 제사를 지낸다.
비록 아랍의 토착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들은 유대인의 전설을 바꿔서 차용한 것이며, 무함마드는 이 전통을 바탕으로 그의 추종자들과 아라비아 반도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고 믿음, 회개, 천국과 지옥, 사탄과 타락한 천사, 천국의 천사, 하나님의 메신저, 가브리엘과 같은 테마를 내세운 것이다.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유대인의 선지자로 믿어 주기를 원했다. 이를 위하여 ‘예루살렘’을 믿음의 성지로 받아들이고 예루살렘으로 하루에 3번씩 기도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아랍인들을 회유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을 때는 기도 방향을 메카로 선택했다. 또한 무함마드는 메디나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이 대속죄일을 지키는 것을 보고, 추종자들에게 똑같이 하게 했다. 이름 또한 아슈라(Ashura)로 제정했다. 아슈라는 일출부터 일몰까지 금식하는 날이다. 이는 유대인의 속죄일인 욤 키푸르(Yom Kippur)를 그대로 차용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의 사이가 나빠지자, 무함마드는 아슈라 금식을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관습으로 남겨 놓고 라마단을 이슬람의 금식월로 제정했다. 또한 유대인과의 관계가 뒤틀리면서 AD 624년 4월에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아랍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을 바치려 하였다고 주장한다)을 제물로 바치려는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인 이드 알 아드하(Eid-al-Adha)를 제정했다.
3. 기독교와 성경의 영향
이슬람이 시작될 때, 기독교는 아랍인들 사이에서 크게 인식된 종교는 아니었다. 무함마드가 12살 무렵 삼촌을 따라서 시리아 대상에 참여하게 됐다. 그때 시리아 남부 보스라(Bosra)에서 ‘부하리’(Buhari)라는 네스토리안(경교) 수도사를 만났다. 부하리는 무함마드의 삼촌에게 무함마드에게는 선지자적 증표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교회에 대하여 보고 들었던 것은 좋은 인상으로 남지 않았다. 이삭 테일러(Isaac Taylor, 1787-1865)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젊은 시절에 경험한 미신은 너무나 절망적이었고, 우상숭배는 심각하고 수치스러웠으며, 교회 교리는 교만하였고, 교회 행위들은 방탕하고 유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만 경배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나무 십자가, 성자의 초상화, 그 출처가 의심스러운 성자들의 뼈를 신봉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천국과 지옥을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천국과 지옥은 없다 여기고 미신적으로 기독교를 믿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죄를 사함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 시대의 성직자들은 교회와 성직자에게 헌금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가르쳤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스럽고 거룩한 생활을 지키기 위하여 순결하고 경건함을 유지했다. 반면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종교의 실체를 의식 자체에 두었다.
여기서 우리는 무함마드가 단 한 번도 성경적인 기독교 복음을 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형태의 기독교 교리는 무함마드로 하여금 복음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하도록 했고, 반기독교적인 종교인 이슬람이 탄생할 수 있는 거름이 되었다.
신약성경은 AD 837년에 아랍어로 번역됐다. 그러나 읽을 수 있도록 출판된 것은 AD 1516년이다. 따라서 무함마드 당시에 아랍어 성경은 대중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성경적 복음은 성인들을 향한 숭배와 전설로 무시됐고, 신비로운 것을 좋아하는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됐다. 아라비아 반도는 비잔틴 기독교 제국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피난을 온 이들의 도피처였다.
동시에 무함마드는 자신이 만든 종교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정복하기를 원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유대인이 기다리는 선지자이며, 예수는 자신의 임재를 예언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비록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렀지만, 예수의 신성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처럼 무함마드는 표면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기독교의 중심 사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의 부활을 부정했고, 성경의 핵심인 구원의 복음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4. 조르아스터교의 영향
역사가 말해 주듯이 페르시아가 무함마드 시대 이전에 사우디아라비아 반도와 주변국가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무함마드의 증조할아버지의 형제인 나우팔(Naufal)과 누탈랍(Nuttalab)은 쿠라이시 부족장으로 있을 때, 페르시아 사람들과 조약을 맺고 메카의 상인들이 페르시아의 영향 아래에 있던 이라크와 고대 페르시아 지역인 파르스(Fars)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AD 606년에는 아부 수피안(Abu Sufyan)을 리더로 하는 쿠라이시 부족이 페르시아의 수도에서 페르시아 왕을 만나기도 했다.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시작할 무렵인 AD 610년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와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AD 622년 무함마드가 이슬람 신도들을 데리고 메디나로 이주(Hijrah)했을 때, 비잔틴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Heraclius, 제위 AD 659-681)는 강력해졌고, 페르시아의 국력은 약화됐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 군대는 페르시아를 정복해 무력으로 페르시아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 한 국가가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고 다른 국가가 비교적 무지한 상태일 때, 두 국가가 교류하게 되면 전자가 후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무함마드 당시 아랍은 상당히 무지한 상태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랍의 역사학자들은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무지의 시대”라고 부른다. 반면 페르시아인들은 고대부터 고도로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페르시아가 아랍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르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해석 선교사는
총신대학교(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equiv.)에서 공부했고, 영국 웨일스대학교 신학/이슬람학부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또한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Ph.D) 과정을 수학했다. GMS 파송선교사로 오엠선교회와 협력해 이집트에서 사역했으며, 현재 FIM국제선교회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생명의말씀사) 등 다수가 있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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