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October 31, 2018

그리스도인의 소명

💠소명으로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일(직업)

1. 창조 목적과 문화 명령

1). 요한계시록 4:11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온 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언합니다.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 You are worthy, our Lord and God, to receive glory and honor and power, for you created all things, and by your will they were created and have their being."

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3). 창세기 1:26-28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잘 알려줍니다. 특별히 창세기 1:28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규정해 주시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 / order)'으로 부릅니다.

문화 명령은 인간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이후에도, 무효화되거나 변경되지 아니하고, 노아, 아브라함, 다윗과 맺은 언약(covenant)으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칼빈은 이 문화 명령을 기독교 강요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요청이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는 대명령'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창세기 1:26-28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and let them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over the livestock, over all the earth, and over all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on the ground."

4). 개혁주의 신앙은 모든 문화의 근원은 바로 창조주 성삼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문화 명령을 완수해야 할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 곧 그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지고 그의 나라가 성취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생각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순복하며(고후 10:5), 모든 말과 일을 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의지하여 감사하라(골3:17)'고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 We demolish arguments and every pretension that sets itself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nd we take captive every thought to make it obedient to Christ."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And whatever you do, whether in word or deed, do it all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giving thanks to God the Father through him."

결국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는 교회 안과 밖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구분없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소명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왕 같은 제사장'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belonging to God, that you may declare the prais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1). 소명(召命, 부를 소 / 목숨 명)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칭의의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시는 것이 첫 번째 '소명(call, calling)'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특별한 재능을 주시고, 이를 사용하여 삶의 현장에서 일을 하도록 부르시는 '소명(vocation, profession, occupation)'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일로 부르시는 두 번째 소명의 의미에 대해서 나눕니다.

2). 벧전 2:9에서 개역개정의 '왕 같은 제사장(a royal priesthood)'을,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왕의 제사장'과 '왕가의 제사장'으로 각각 번역했습니다. 성도는 대제사장이시며 만물의 왕이신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삼중직분 - 대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속한 이 세상의 제사장임을 고려하면, '왕의' 혹은 '왕에 속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2:9에서, 우리를 택함을 받은 민족, 왕의 제사장들, 거룩한 국민,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그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표준새번역).

이것은 우리를 세상의 제사장으로 삼아 주신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소명과 관련하여 특별히 '왕의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개혁주의는 흔히 이것을 '만인제사장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 萬人祭司長)'이라고 부릅니다.

만인제사장설을 소명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성도의 삶을 성(거룩한 것 곧 교회나 이와 관련된 곳)과 속(거룩하지 않는 곳 곧 교회 밖/일반 세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장소에 제한되지 않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왕의 제사장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의 은혜 안에서, 삶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 의지를 최대한 드려서, 교회와 세상을 향해서 동일한 자세로, 주님의 뜻을 실현하여 하나님의 문화 명령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3). 중세 카톨릭 교회는 교회 안의 섬김과 교회 밖의 일을 완전히 구분하여, 성도의 삶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분리했습니다. 이것을 '성속(聖俗) 이원론 혹은 성속 분리주의(Dualism)'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은 이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카톨릭 교회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죄를 사해주는 사제(고해성사)와 같은, '인간 중보자(a human mediator)'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이러한 성속의 분리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성과 속의 구분없이 통합적(총체적)이고, 따라서 한 신자의 모든 생각과 행동 양식이 교회 안과 밖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어,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감당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4). 사도 바울의 권면

🎯고린도전서 10:31-3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31)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Do not cause anyone to stumble, whether Jews, Greeks or the church of God - (32)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 even as I try to please everybody in every way. For I am not seeking my own good but the good of many, so that they may be saved.(33)"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교회 안과 밖의 모든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말며,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쳐 구원에 이르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 안과 밖에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어 전체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며 사는 것이기에,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장소와 때에 따라서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동일한 믿음으로 교회와 세상을 섬깁니다. 물론 섬김의 장소와 시간 그리고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기독교적 세계관 곧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문화 명령의 이행이라는 가치관으로, 일관되게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3. 일에 대한 오해와 종교 개혁자들의 소명에 대한 입장

1). 일반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일을 아담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신 고통스러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타락전에 에덴 동산의 관리인으로 임명하셨고(창2:15), 또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땅을 다스리며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1:26-28).

결국 아담은 타락전에 이미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습니다.

🎯창세기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 The LORD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work it and take care of it."

2).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서도, 6일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하고(9절),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10절).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를 위해 6일 동안 일하셨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11절).

🎯출애굽기 20:9-11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Six days you shall labor and do all your work,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but the seventh day is a Sabbath to the LORD your God. On it you shall not do any work, neither you, nor your son or daughter, nor your manservant or maidservant, nor your animals, nor the alien within your gates.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 For in six days the LORD made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sea, and all that is in them, but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Therefore the LORD blessed the Sabbath day and made it holy.

3). 성도의 직업이 곧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라는, '직업 소명론(vocational calling)'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종교 개혁가는 마틴 루터였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콘체(W. Conze)는 루터의 직업 소명론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루터는 기독교적 일과 직업 개념에서 '재화를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가르친다. 소비 지출과 자기 복락을 위해서만 노력하며 사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루터 역시 이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거기 그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루터가 말한 기독교적 일의 개념은 자기 마음이 돈과 재화에만 의지하며 만족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현대 경제사회에서는 전혀 받아들 일 수없는 것을 루터는 가르친다. 
루터에게는 일과 직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의 장이다." (출처: 루터의 직업 소명론, 최주훈 목사, 루터교)

그렇다고 루터가 세상의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루터가 세상 직업을 거룩한 소명이며 성직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다. 콘체가 인용했던 것처럼, ‘자신의 일이 이웃의 유익을 도모하고 섬기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곧 이웃사랑과 직결된다는 것을 항시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자 자기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는 일이, 곧 세상을 예배로 가득 채우는 길’로 가르쳤습니다 (루터의 탁상담화).

이러한 루터의 가르침은 구약의 모든 계명을 하나님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던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마 22:37-40)과 앞에서 살펴보았던 사도 바울의 권면(고전 10:31-33)과도 일치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4). 루터를 이어서 종교개혁을 실천했던 칼빈은, 당시 카톨릭 교회가 노동을 신앙생활과는 무관한 세속적 의무로 규정했던 것에 반대하여, 모든 일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노동과 직업에 대한 존엄성과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노동을 영적 구원처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일의 거룩성을 인정하고 옹호했습니다.

실제로 칼빈은 그 당시 카톨릭 교회로부터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핍박을 받고 제네바로 도망왔던 피난민들을 위해, 방직 공장을 지어서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여 일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성도들이 실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칼빈은 마태복음 25장 24절(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의 주석에서 "인간사회에 유익을 끼치며 사는 삶의 방식보다, 더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만한 일은 없다"고 말하며, 사회에 대한 봉사를 곧 하나님의 봉사로 이해함으로써, 카톨릭 교회의 성속 분리의 이분법적 직업관을 혁신적으로 타파했습니다.

결국 칼빈은 '모든 일(직업)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가치를 가지며,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여 경계를 넘지 않아야 하고, 맡겨진 소명에 충실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이 교회의 섬김과 같이 소중하다'고 밝히면서, '성도의 일(직업)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기독교 강요, 3권 10장)

5). 이러한 소명(직업, 일)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주의의 해석은, 시민 계급의 대두와 함께 카톨릭 교회의 성속 이원론을 깨고, 유럽 사회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현대 그리스도인의 제사장 역할의 위기

1). 종교개혁 이후에 약 500 년이 지난 지금은,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명(직업)을 통해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제사장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 중에 세상에서 대충 일하고, 주일에 열심히 교회의 사역을 담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임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 실제 삶의 자리에서 아무런 영향력 혹은 유익을 미치지 못하게 되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고, 오히려  복음을 약화시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2). 또다른 분류의 성도들은 주 중의 일터를 오직 선교의 현장으로만 생각하고 일 자체를 소흘히 하여, 직장 생활이나 비지니스에서 실패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소명(직업)의 현장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 최선의 결과를 내며, 이를 통하여 사람들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미국 개척 초기의 청교도 목사였던 토마스 쉐퍼드(Thomas Shepherd)는 소명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늘의 직장(교회)에서 영적인 일을 하게 하실 때 세속적인 생각을 키우는 것이 죄이듯, 하나님께서 이 땅의 직장에서 일하게 하실 때 영적인 생각에 시달려 주의를 빼앗기는 것 또한 어떤 면에서는 커다란 죄이다." (출처: Worldly Saints, Ryken)

3). 우리가 일에 몰두 할 때에, 하나님을 잊고 있다거나 그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는 일을 통해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따라서 성도가 일에 전념하지 않거나, 허락하신 영역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그의 소명을 이루지 않는 것입니다.

선교사이며 기독교 저자인 오스 기니스박사는 '당신을 향한 소명'에서,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또한 같은 책에서, "우리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이며, 인간의 존재 목적의 가장 고상한 근원이다. 그러한 소명을 떠나서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자 하는 모든 희망은 결국 절망으로 귀결될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4). 반면에 세상의 일(직업)이 삶의 목적이 되어 불신자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직업의 선택이나 일의 과정 모두가 사람을 섬기거나 사회에 봉사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개인적인 성취나 이익의 극대화만을 따라가며, 일터에서 주님께서 당부하신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장인 혹은 비지니스 맨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 그리스도인 직장인 혹은 비지니스 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일이 목적이 된 삶과 일이 소명이 된 삶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일을 통해 이웃을 섬기며 우리의 존재 목적 곧 소명을 구현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5. 소명을 통한 하나님의 크신 뜻과 그리스도인의 책임

1).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터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그 시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지 못한다거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면에 하루 24시간 교회나 관련된 곳에서 신앙적인 일을 해야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또한 버려야 합니다.

예를들면 오페라 가수로 수년간 음악교육을 받고 전문 오페라단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 성악가는, 최선을 다해서 연습하고 준비해서 주어진 배역의 노래를 잘 불러서 청중들에게 가장 좋은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발휘하여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주일에 성가대에서 성가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과 동일하게 중요하며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왜냐하면 이 오페라 가수에게는 공연 현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소명으로 부르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2). 소명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영광를 돌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주신 재능이나 은사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잘 개발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책임을 무시하고, 단순히 좋아하며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망이라고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딤전 5:8은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맡겨준 가족과 친지들을 부양하며, 사회의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재능을 사용해서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소명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시지 않으면서 그 일을 수행하도록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시거나 동일한 은사를 주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전에 목수였고, 베드로는 어부였으며, 바울은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재능)을 주시고 일하게 하시며, 이를 통하여 서로를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작업은 귀하고 천한 일이 없습니다. 루터는 '사제가 말씀을 강론(설교)하는 일이나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귀중한 일'이라고, 자신의 여러 글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루터는 우리 모두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영적이며, 참된 제사장이라고 강조합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을 위한 3개의 논문)

우리들 마음 속에 깊이 잠재하고 있는 오류 곧 교회(신앙) 혹은 이와 관련된 일은 거룩한 것이고, 삶의 현장에서 행하는 일은 속되다는, 성속 이원론(혹은 분리론)을 완전히 버려야만,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하며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

주 중에 아침에 일어나 일터로 향하는 것은,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로 가는 것과, 동일하게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4). '만인제사장설'은 성도의 소명에 대한 차별과 서열 혹은 오만이나 특권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29에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slave nor free, male nor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 If you belong to Christ, then you are Abrahams seed, and heirs according to the promise."

하지만 만인제사장설이 교회 안에서 전임사역자의 역할이나 리더십 혹은 재량권을 무시하지 않는 것처럼, 전임사역자에게만 영적 의무가 주어져 있다고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전임서역자와 일반 성도는 교회의 안과 밖에서, 비록 다른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 동일한 의무와 책임을 가집니다.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인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를 구할 때에, 교회의 안과 밖에서 모두 거룩하고 신성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5). 우리의 일 곧 소명은 단순히 생계의 유지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방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명의 자리로 부르셨고, 우리 또한 소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 모두 모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거룩한 성도입니다. 어느 직업이든 이웃의 유익을 도모하며 서로를 높이고 섬긴다면, 교회 안과 밖의 소명이 '함께' 거룩합니다.

Tuesday, October 30, 2018

루터의 직업 소명론

<루터의 직업 소명론>

/ 최주훈 목사(루터교)

목사만 거룩한 성직자인가? '가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자주', 목사를 높디 높은 거룩한 성직으로 여기는 분들을 만난다. 교인들이 그렇게 목사를 높여주면 그것이야 고마울 법도 한데, 목사 스스로 '나만 거룩하다'고 폼 잡는 분들을 보면 눈살부터 찌푸려진다. 개신교 신학에서 모든 직업은 거룩한 하나님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직업(Beruf)은 소명(Berufung, Calling부르심)이다. 종교개혁의 추동력으로 신학적으로 ‘칭의론’을 꼽지만 실상 일반인들에게 힘을 주었던 루터의 가르침은 '모든 신자의 만인사제직'이었다. 만인사제설이 신자들에게만 해당된 한계가 있다면, 거기서 배태된 열매인 직업소명론은 교회 밖의 일반인들에게 거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영적계급(주교 사제 수도사)과 세속계급(영주 기사 평민 노예)으로 출신성분과 직업을 나누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런 계급적 구분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평면에 놓는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진리는 만인사제설의 골자이다. 물론 앞서 언급했다시피 언제나 루터의 이 교설은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게 한계다. 그러나 이와 병행해서 가르쳐졌던 직업 소명론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담을 넘어선다.


‘신의 부름’이란 뜻의 ‘소명’(Berufung)이란 말은 중세 시대엔 영적 직무에 속한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지만 루터는 이를 세속직업에 확장시키고, ‘직업’(Beruf)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 세속 직업도 역시 하나님의 소명이다.

루터에게 직업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직무를 명령하며 주신 일자리이다.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주신 일종의 positioning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진 직업엔 목적이 있다. 그것은 자기 생계를 위한 것 뿐만 아니라 이웃을 먹여 살리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성직이다.

이하는 루터의 글과 사회학자 W. Conze의 말을 인용해 본다.

“그러므로 한 여종이 주인의 명령과 직무에 따라 마구간에서 똥을 치우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천국으로 가는 직선로를 제대로 찾은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 직무가 무엇이지, 자기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성자나 교회당으로 가는 이들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직진하는 자들이다.” (루터 WA10,309)

“루터가 가르친 기독교적 일과 직업 개념은 '재화를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가르친다. 일을 통해 소비지출과 자기 복락을 위해서만 노력하며 사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루터 역시 이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거기 그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기독교적(루터) 일의 개념은 자기 마음이 돈과 재화에만 의지하며 만족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현대 경제사회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루터는 가르친다. '일과 직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의 명령에 따라 이웃을 위한 사랑실천의 장이다.' 이런 루터의 일과 직업개념은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현대의 개념과 반대편에 서 있고,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끊어진 다리 저편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루터의 시각으로 보자면 현대 직업사회는 전혀 기독교적(achristlich)지 않고, 심지어 적그리스도적(Anti-christlich)이다.....”(W.Conze, Art: "Arbeit", in:Geschichtliche Grundbegriffe. Historisches Lexikon zur politisch-sozialen Sprahe in Deutschland, Bd.I, Stuttgart 1972, 166)

여기서 질문 하나 해 보자. 그렇다면 모든 세속 직업은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성직인가? 그렇지는 않다. 루터가 세속직업을 거룩한 소명이며 성직이라고 주장하는 전제 조건이 있다. 앞선 인용구에서 언급된 바, ‘자신의 일이 이웃의 유익을 도모하고 섬기는 일’이 되어야 한다. 루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곧 이웃사랑의 일과 직결된다는 것을 항시 힘주어 강조했다.

그 때문에 ‘각자 자기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는 일이 곧 세상을 예배(Gottesdienst)로 가득 채우는 길’로 루터는 가르친 것이다<루터의 탁상담화, in: Johannes Schilling(Hg.), Luther zum Vergnügen (Stuttgart: Phillpp Reclam jun., 2008), 37.>.

물론, 루터의 직업 소명론을 현대적 관점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상존한다. 왜냐하면, 루터 당시 직업이란 거의 대부분 혈통이나 가문에 따라 이어지는 태생적이고 고정적인 카테고리였지만, 현대의 직업은 언제라도 이동 가능한 유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직업 소명론이 갖는 가치는 퇴색되지 않는다. ‘부익부 빈익빈’,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는 식의 암울한 논리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통용된다. 그러나 자기 배만 불리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직업관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섬기는 직업관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이런 현대 사회의 음지를 직시하고 저항하는 기독교적 시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 내부적으로 본다면, 목사'만' 영적 직무고, 목사만 하나님의 소명 받은 하나님의 사자(?)라는 식의 논리로 교권을 수성하고, 갑질하는 자들에겐 경종을 울리는 개혁 정신의 무기가 된다.

우린 모두 모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거룩한 신자들이다. 어느 직업이든 이웃의 이익을 도모하며 서로를 높이며 섬기는 일을 추구한다면, 특정 직업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거룩한 것이다.

Monday, October 29, 2018

왜 하나님께서 무죄한 사람들로 고통을 당하도록 허용하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무죄한 사람들로 고통을 당하도록 허용하시는가?

(출처: H.M. 모리스 '신앙난제 백문백답')

이 문제는 기독교인이 대답하기에 가장 어려운 질문 중의 하나이다. C. S. 루이스란 유명한 기독교 학자가 지적한 대로 “고통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려는 무신론의 최강의 무기이다. 모든 참된 과학과 역사는 바로 이해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존재 사실을 지지한다. 이런 증거가 너무 강력하기에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그러므로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그들의 신앙을 세울만한 객관적 증거가 없으므로 결국 철학적 반론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철학적 반론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이 고통의 문제이다. 즉 그들은 말하기를,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전쟁,질병, 고통, 죽음과 같은 것들을 허용하시며, 특별히 겉으로 보기에 무죄한 사람들에게 고통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셔서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 하시든지,아니면 그가 능력의 하나님이 아니셔서 고통을 어찌할 수 없든지 하시다는 것이다. 여하간, 절대 능력과 절대 사랑을 가지신 성경의 하나님이 불가능한 시대착오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무신론은 그 해답이 못되며 불가지론도 역시 그 해답이 될 수 없다. 

세상에 악이 많지만, 선한 것이 더 많다. 이것은, 사람들이 할 수만 있으면 생에 매어 달리려고 정상적으로 애쓰는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더욱이 “선”이 “악”보다 더 고차원적 진리임을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깊이에, 결국 “선”이 “악”을 이길 것을 계속 믿고 있다. 이러한 고유한 신념은 그 자체가 도덕적 존재로서 그런 희망을 인간의 영혼 속에 심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는 또한 우리의 마음 자체도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이 마음을 쓸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동기에 의문을 가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은 그야말로 당돌한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 뇨”(롬9:20). 

우리 스스로가 옳은 것의 표준을 설정하지 못한다. 모든 만물의 창조주만이 그것을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 우리가 이해하건 못하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옳은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결정한 후에 우리는 생의 축복 뿐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영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자유롭게 추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 마음에 다음의 위대한 진리들을 계속 명심하는 것이 유익하다. 
(1) “무죄한” 고통이란 것은 사실상 없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 르지 못하므로”(롬3:23), 자기 자신의 무죄에 근거 하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면제를 주장할 권리를 가진 자는 없다. 유아들과 정신적으로 시비를 가릴 능력이 없는 자들에 관한 한, 성경과 보편적인 경험에 비추어 그들도 본성상 죄인들이며 그들이 그렇게 할 능력이 있게 되면 즉각 죄인의 길을 선택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2) 세상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창3 :17).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 하며 함께 고통 하는” 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롬8:21, 22)은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보편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렇게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장차 만물을 다시 바로 잡으실 것이다. 그날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 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4). 

(3) 전체 역사에 있어서 유일하게 참으로 “무죄하시고” “의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수난을 당하섰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수난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15:3). 그가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그 저주로부터 구하시기 위해서였고 지금도 그는 그를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를 영접하는 자를 모두 죄와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하실 수 있으시다. 드러난 죄 뿐만 아니라 원죄의 형벌로부터의 이 큰 구원은 시비를 의식적으로 선택할 연령에 이르기 전에 죽은 자들의 구원까지도 확보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선과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완전한 신앙으로,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고난이 그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으로 변할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고난은 흔히 성경에 의해 사용되어 그들로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 회개하고 믿어 돌아오게 하는데 쓰인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더 큰 의존심과 더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개발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고난을 바로 당하기만 하면 말이다(히12:11).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당분간” 우리의 생활 속에 시련과 고통을 허용하실 때에라도 사랑하시며 자비로우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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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October 28, 2018

요나

요나

저자: 요나서 1장 1절은 요나서의 저자가 선지자 요나라고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저작 연대: 요나서는 주전 793-758년 사이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록 목적: 불순종과 부흥이 이 책의 핵심 주제입니다. 고래 뱃속에서의 요나의 체험은 그가 회개와 함께 독특한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초기의 그의 불순종은 그의 개인적인 부흥뿐만 아니라 니느웨 사람들의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나가 니느웨에게 가져 온 부흥을 모든 시대 가운데 가장 위대한 복음적인 노력 중 하나로 분류합니다.

핵심 구절: 요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1)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약: 요나는 두려움과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니느웨에 가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파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이 그의 원수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 성을 파멸시키시겠다는 경고를 수행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그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기 위해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탑니다. 곧 바로 격렬한 폭풍이 몰아치고 선원들은 제비를 뽑아서 요나가 문제라고 판단합니다. 그들이 그를 배 밖으로 던져버리자 큰 물고기가 그를 삼킵니다. 3일 낮과 3일 밤 동안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자 물고기는 그를 마른 땅으로 토합니다(우리는 그가 회개하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궁급합니다). 그 다음 요나는 800 킬로미터를 여행하여 니느웨로 가서 그 도시에 큰 부흥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가 회개를 하자 감사하는 대신에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람과 조롱박과 벌레를 사용하여 그분의 자비에 대해 가르치자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예표: 요나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2장 40-41절에서 예수님은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 있던 똑같은 시간만큼 무덤에 있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요나의 전파로 인하여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한 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요나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을 거부했다고 말씀합니다. 요나가 회개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것처럼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통해 임하는(롬 11:36) 동일한 구원의 메시지를가져다 주십니다(욘 2:9, 요 14:6).

적용: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반대와 억지로 끌려옴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에 순응하기 위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요나와 달리 지체없이 그분께 복종한다면 얼마나 주의 계획이 쉽게 이루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평판, 국적 또는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복음을 거저 제시하는 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여 세상에 복음을 제시하도록 수단이 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과 나누기를 바라는 경험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의 회심’으로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들에게 혹은 우리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들을 통해 나오는 이들에 대해 질투하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출처: 

Qotquestions.org

Thursday, October 25, 2018

로마서 8:1-2 강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혹은 나)를 해방을 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인지, <생명의 성령의 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깨달은 <한 법>

법이란 어떤 대상들을 통상적으로 규제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모든 천체들은 우주의 법칙 안에서 운행됩니다.  지상의 모든 물질은 만유인력의 법칙아래 있습니다. 예컨대, 무거운 바위나 가벼운 깃털이나 간에 모든 물질은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생들도 어떤 법칙아래 존재하게 되는 데, 바울이 바로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롬7:21)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법>이란 말을 <법>, <그 법>, <남편의 법>, <율법>, <한 법>, <다른 법>, <마음의 법>, <하나님의 법>, <죄의 법>, <죄와 사망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등...23회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법은 바로 이 <한 법>입니다.

🔷<한 법>이 무엇일까? 

바울은 <한 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라."(롬7:21)

바울이 깨달은 것은 <인간은 모두 선과 악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악이 승리하게 되어 있는 법칙>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선과 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선설도 있고, 성악설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선과 악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양심>을 넣어 주셨고, 또 도덕률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한 것을 추구하고 존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인간은 양심과 도덕을 지키기에 실패합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내면을 보면 선하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바울이 이 법에 대하여 좀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악은 행하는 도다."(롬7:19)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7:24)

이렇게 인간이 불가피하게 죄인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원죄로 인하여 타락한 마음이 주는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이렇게 바울이 절망하는 것은 인간성 속에 내재하여 있는 <죄와 사망의 법>이 상상할 수도 없이 크고 강해서 아무도 그 법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천체와 만물이 자연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는 것 처럼 모든 인생이 이 죄와 사망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떠나서 죽음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죄와 사망의 법>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롬7:12)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었다고 하셨고(마5:17), 바울은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롬3:31)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7:7)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죄와 사망의 법>은 인간성 속에 내재하여 있는 악한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이 그 지배를 받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5:18)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그러나 곧 바울의 이 고뇌에 찬 절규는 순식간에 환희의 개가로 바뀝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7:25)

왜 이런 개가가 울려 나올 수 있었을까요?

이 법을 초토화시킨 새로운 법을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의 법이 생명의 법인 이유는 성령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바로 그 영이며, 모든 생물(living being)들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창1:2) 그러므로 성령의 법은 생명의 법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법>은 어떠한 원리로 우리 인생에게 생명을 가져오게 될까요?

✔️ 1. 옛사람 아담이 죽음으로써 입니다. 

옛사람 아담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벧후2:19) 또한 사망선고를 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그의 모든 후손들이 그 운명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생들은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롬7:5)

그러나 이 죄와 사망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롬6:6)

옛사람 아담의 죽음은 곧 거듭나기 전의 우리 자신의 죽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2:2)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으므로 이제 죄와 사망의 법은 죽은 것입니다.     

 ✔️2. 새사람인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었으나 다시 살게 된 것은 두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써 입니다. 그러므로 더이상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고 죄를 짓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6:2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5:17)

즉, 아담에게 속했던 옛사람은 죽었고, 이제는 새사람인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되었으니 자연히 그리스도의 법, 성령의 법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본래 율법이란 의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불의한 자들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딤전1:9)

그러므로 이미 율법의 정죄를 받는 아담은 죽어 없어지고, 율법의 정죄를 받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자들에겐 율법은 더 이상 정죄의 도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고 외쳤고 (율법의) 정죄가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에 구속되어 있으며 율법의 정죄아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1-2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킹제임스 성경에 있는 대로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라는 말씀을 삽입하여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to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who do not walk according to the flesh, but according to the Spirit.>  For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in Christ Jesus has made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NKJV)

Tuesday, October 23, 2018

요한 일서 3장 20절 이해

📌요일3:20 이해

요일 3:20은 책망을 강조하거나 하나님의 위로를 강조하는, 두 가지 상의한 우리말 번역으로 나누어 집니다.

​책망를 강조하면, '우리가 스스로 책망받을 일을 하는 곳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사랑하지 못한 거짓과 위선의 죄를 다 알고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모든 것을 아시고 크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책망하실 것이다! 책망받지 않도록 더 사랑하며 살아라!'는 의미가 됩니다.

반면에 위로를 강조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혹은 한계까지도 다 알고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기를 주시고, 그래서 다시 사랑하게 하시고, 기회를 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무 죄책감에 빠지지 말아라!'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예전의 개역한글과 올려주신 쉬운 성경은 책망을 강조하여 번역했지만, 최근에 번역된 개역개정,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위로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옛 개역한글의 번역을 따라 책망을 강조하는 것으로 20절을 이해하는 것이, 앞의 18-19절과의 연결이 저 자연스럽다고 생각됩니다.

어느 쪽으로 번역을 했던 사도 요한이 강조했던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과 혀로만 하지말고 진실되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기도가 응답되며, 그의 계명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명령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23절)'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강조하여 경계심을 고취시키든지, 하나님의 위로를 통하여 부족한 믿음을 심화하든지, 사랑의 실천하여 주님의 계명을 이루고자 성도를 격력했던, 사도 요한의 의도는 결코 훼손되지 않을을 다시 확인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요한 일서 3장 20절 해석

🎯요일 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개역한글)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개역개정)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는데, 우리의 양심보다 크시며, 또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우리를 책망하시겠습니까?" (쉬운 성경)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양심을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할진대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니라.."(킹제임스 흠정역)

"whenever our hearts condemn us. For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s, and he knows everything. (NIV)

"For if our heart condemn us,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 and knoweth all things."(KJV)

📌요일 3장 주석: 예사랑 카페

본절에서 두 번 사용된 '호티'(* , 왜냐하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명사절을 이끄는 접속사(that)로 보고, 두번째 '호티'는 불필요한 반복으로 간주하여 생략한다. 이 해석은 20절 전체를 19절의 '페이소멘'(* , '확신케 하다') 이란 동사의 목적어로 본다(Bruce).

(2)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왜냐하면'으로 해석한다. 이 경우 19절의 동사 '페이소멘'(* , '안심시키다')의 목적어는 생략된 것으로 본다(AV).

(3)혹자는 첫번째 '호티'(* )를 '호'(* )와 '티'(* )로 분리시켜서 관계대명사 중성 명사로 보고, '에안'(* , '...이면')과 합쳐서 '...할 때마다'라는 의미로 본다.
이때 두번째 '호티'는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의 뜻이 된다(Stott, Smalley).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본서에서 서로 대조되는 구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1:9,10; 2:10,11; 3:8,9), 본절 역시 21절과 대립되는 구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Alford,  Wohlenbe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우리 자신도 우리 마음을 보시면 책망할 것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혹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 
한 묘사라고 주장한다(Brooke, Luther).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을 책망할 때마다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문맥상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밥 어틀리 교수 (미국 동침례대학)

3:19-20 이 두절의 헬라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혼동이 있다.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하는것이다. 이 문맥에서 두 번째 해석이 더 적합하다.

3:20-21 두 절 다 조건절의 제 3 유형이다.

3:20
신미국표준역(NASB)
뉴킹제임스역(NKJV)
신개정표준역(NRSV)
현대영어성경(TEV)
신예루살렘성경(NJB)

“무엇에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때마다”
“우리 양심이 우리를 책망한다면”
“우리 느낌이 혹 우리를 책망하더라도”

모든 신자는 그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인해 속으로 슬픔을 경험하고 있다. 양심으로부터의 이러한 아픔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오거나(회개케 하기 위해) 또는 사탄으로부터 온다(자기 멸망이나 증거가 되지 못하는 삶을 가져 온다).

이것은 적절한 죄의식이면서 부적절한
죄의식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책을 읽음으로써(혹은 그의 사자들의 말을 들음으로써) 차이를 안다.

요한은 사랑의 기준에 의해 살고 있으면서 죄와 아직 씨름하고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려고 한다(헌신과 간과).

요 12:40 의 특별제목인 마음을 보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참된 동기를 아신다(참조, 삼상 16:7; 왕상 8:39; 대상 28:9; 렘 17:10; 눅 16:15; 행 1:24; 롬 8:26, 27; 고전 4:4).

요한일서 3장 20절! 책망할 일이 있거든! 있더라도!

📌네이브 블로그

요한일서 3장입니다.

그런데 3장 20절에서 좀 중요한 번역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래 두 성경의 번역의 차이를 생각합니다.

(개역성경) 우리를 책망할 일이있거든

(개정성경) 우리를 책망할 일이있어도

<개역 성경>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요일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개정 성경>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한1서 3장 20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 개정성경은 지난번 개역성경의 뜻과 반대로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무슨 사연이,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무슨 내용인지 요한일서 3장을 14절부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요일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한일서 3장은 지금 사랑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는 사람, 그렇지 않는 사람은 사망에 머물러 있는 사람...

사랑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죄책감을 생각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했음이 찔립니다!

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 것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는 내 양심과 죄책감과 그리고 하나님의 시선과 이에 대한 나의 태도를 고민합니다.

어떻게 지금 개역성경과 개정성경이 다른 것입니까?

<개역 성경>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요일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하지 못한 거짓과 위선의 죄를 다 알고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실 것이다! 책망받지 않도록 더 사랑하며 살아라! 

즉 개역성경에 따르면 우리도 솔직히 양심적으로 책망할 일이 내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데, 솔직히 당신이 더 잘알지 않느냐!^^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말할 것도 없이 더 잘 알고 계실테니 책망받지 않도록 더 사랑하며 살라! 라고 이해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개정성경은 다릅니다. '도'를 집어넣었습니다.

<개정 성경>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간성의 약함-한계(사랑하지 못하는)까지도 다 알고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아시니까, (불쌍히 여기시고 용기를 주시고) 다시 사랑하게 하시고 기회를 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무 죄책감에 빠지지 말아라!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망받을 일이 있긴 있어도, 그럴지라도, 그렇긴 해도- 로 이해되는 구절입니다.

즉 개정성경에 따르면

"우리 마음이 혹 우리 스스로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그 앞 19절로 돌아가 연결해보면 '그렇다할지라도' (즉, 어쩔수 없는 일이니까, 너무 죄책감에 사로 잡히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굳세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을 믿고! 확신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역성경이 강조하는 "있거든!" (있는데, 아주 많은데!)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왜 이런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온 것일까요?

헬라어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o{ti eja;n kataginwvskh/ hJmw'n hJ kardiva, o{ti meivzwn ejsti;n oJ qeo;" th'" kardiva" hJmw'n kai; ginwvskei pavnta.

헬라어 각 단어에 대한 영어 번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Darby)

20  ὅτι  that ἐὰν if καταγινώσκῃ should condemn [us] ἡμῶν our ἡ 
- καρδία heart ὅτι that μείζων greater than ἐστὶν is ὁ- Θεὸς God τῆς the καρδίας heart ἡμῶν of usκαὶ and γινώσκει he knows πάντα all things

여기에서의 해석문제는  ὅτι 호티 
that 을  어떤 맥락으로 해석!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일반적으로 ὅτι호티는  that , for , because , how that, how , since 등으로 해석됩니다.

KJV성경은 for로 번역했는데 for는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NIV성경은 whenever로로 번역했고 다른 성경은 whatsoever로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Bible Hub에서는 위에 기록한대로 that if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ὅτι호티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내용도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해석에 해석자의 신앙이 들어갑니다!

살아온 과거가 해석에 들어갑니다!

[KJV 성경] 개정성경과 같은 입장이라고 보입니다. 한다 할지라도~~

[1John3:19] And hereby we know that we are of the truth, and shall assure our hearts before him. [1John3:20] For if our heart condemn us,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 and knoweth all things.

[NIV 성경] 개정성경과 같은 입장~~ 언제든지 그럴 때에라도 
 [1John3:19] This then is how we know that we belong to the truth, and how we set our hearts at rest in his presence [1John3:20] whenever our hearts condemn us. For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s, and he knows everything.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확실히 가책을 받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정 성경과 같은 입장입니다.

다른 성경은 개역성경처럼 내 양심도 나를 알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잘 알고 계시지 않겠느냐고 보는 입장입니다!

다른 성경버전들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표준새번역> 개정과 같은 입장

[요일3:19]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우리는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요일3:20]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 개정과 같은 입장

[요일3: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일3:20] 우리가 양심을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현대어 성경> 개역과 같은 입장

[요일3:19] 우리가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고 행동으로 나타내 보인다면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요일3:20] 우리도 죄를 저질렀을 때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 스스로의 잘못을 아는데, 하물며 더없이 어지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모르시겠습니까?

<쉬운 성경> 개정과 같은 입장

[요일3:19]  이렇게 행해야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요일3:20]  혹시 우리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참고가 된다면

19절에서 "굳세게 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페이소멘'  πείσομεν  즉 확신하다! will assure 라는 뜻입니다! 누가 뭐래도내 마음에 확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처럼 문장을 나누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한가지,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저는 이 기회에 그 본문들과 주석들을 새삼 다시 비교해보면서, 이 번역들에는 죄책감과 싸우는 내 자신에 대한 무겁고 진지한 고민들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 해석에 대한 깊은 기도와 기대와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도요한은 과연 어떤 의도였을까요? 

그는 사랑해야한다는 명제를 붙들고 사는 인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의 일생에 있어서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았을까요? 시행착오를 경험할 때 어떻게 생각하고 기도했을까요? 사도요한의 생애를 생각합니다!

저는 어쩐지 사도요한이 개정의 뜻으로 말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간이란 완벽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믿음을 가진 사람도 그러니까요...

그렇다고 믿음을 포기하고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 구절을 번역하면서 고민했을 모든 영혼들을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과연 이 부분에서 어떻게 반응하실지!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무엇일지,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고 우리도 고민하고 고민합니다!

내가 살아온 생애는 어떠하였으며,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사모해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야하는 것인지,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지...

얼마나,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요?

일생을 돌이켜보며 이 구절을 다시 읽습니다!

어떻게 해석하고 싶은 지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3:2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에 기도 응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 아시는 주님 앞에 마음을 늘 맑게 지키고 가기를 원합니다.

[요일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요일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

출처: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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