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30, 2018

가상칠언 /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 강변교회 김명혁 목사, 눅 23:34~43, 마27:45~54

사랑에는 로맨틱한 감미로움도 있지만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는 로맨틱한 감미로움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만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 사랑이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도 우셨고 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파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슬퍼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슬퍼하셨습니다. 아니 온 우주가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태양이 얼굴을 가렸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를 한 마디 한 마디씩 들으며 가슴에 새겨보겠습니다. 그 일곱 마디들은 우리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우리들은 그 말씀들 때문에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지금 이곳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과 저를 위해서 하시는 주님의 일곱 마디 말씀들을 바로 듣고 바로 마음 속에 받아 드릴 때 강도에게 임했던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할 것이고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에게 임했던 뜨거운 사랑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씩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father, forgive them.”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하신 기도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은 도저히 용서를 받을 수 없는 대역 죄인입니다. 지옥에 가도 지옥의 밑바닥에 갈 대역 죄인입니다. 그런 대역 죄인을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일이고 우주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아마 천사들도 모두 합세해서 “그것만은 안됩니다”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었지만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느니라”(요3:16-18). 그런데 독생자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독생자를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을 때 예수님의 가슴에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신의 뜻에 위배되는 호소의 기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의 가슴에도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런 주님의 기도 때문에 로마 군인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고통스런 주님의 기도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울도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마펫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쳐서 쓰러뜨린 이기풍도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한 평생 주님을 무시하고 거역하고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과 저도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주님의 기도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과 제가 죄 사함과 구원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father, forgive them.” 이 기도는 또한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해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아무 아무개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나에게 해를 끼친 아무 아무개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강도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도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는 말씀이었고 주님 자신이 하신 말씀에도 위배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천국이 임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예수님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1,24). 예수님은 또한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마25:46).

그런데 이 강도는 회개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신앙 고백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선행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한 모든 말씀을 어기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간절하게 소원하시면서, 강도의 신음 소리 한 마디를 듣고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의 신음 소리는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라는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자기의 말과 자기의 체면에 위배되는 말을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안타까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의 가슴에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때문에 강도를 비롯한 수많은 범죄자들이 용서함을 받고 낙원에 이르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살인 강도들이 이 말씀 때문에 지옥에서 옮겨 낙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 속에는 비극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woman, behold, your son.”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서 슬피 우는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써 자기 때문에 한 평생을 가슴에 칼이 찌르는듯한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신 인간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하신 슬픔과 아픔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써 어머니를 제대로 효도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 한 분을 위해서 살지 못했고 수많은 죄인들을 위해서 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써 인간 어머니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 때부터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써 모셨습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7).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말씀은 성모 마리아에게 하신 슬픔과 아픔과 위로의 말씀이었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 이별의 슬픔과 죽음의 아픔 가운데서 슬피 울면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신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나인성 과부를 위로하셨고 나사로의 누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때문에 슬픔 가운데서 위로를 주고받으며 외로움 가운데서도 효와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슬픔과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아무개여 보소서 그대는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대는 나의 부모요 나의 자녀입니다.”
 
4.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마27:46). 
 
이 말씀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경험하신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극치를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하시고 버림받게 되신 비극을 절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의 극치였고 모순의 극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뒤집어엎는 비극의 절규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 속에 비극적인 사랑의 극치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절규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대신 부르짖은 절규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해야 하고 버림을 당해야 하는데 주님이 나대신 끊어짐을 당하고 버림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 스킬더 박사는 이 비극의 극치는 지구상에서 사는 인간은 아무도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비극의 극치였다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지구 상에 살던 모든 인간들이 모두 함께 지옥에 내려가서 지옥의 고통을 당한 후 그 모든 고통을 한 곳에 쌓아 놓아야 알 수 있는 극치의 고통이요 총화의 고통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을 때 예수님은 극치의 고통과 총화의 고통을 당하셨고 극치의 슬픔과 총화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그 극치의 고통과 극치의 아픔과 극치의 슬픔 때문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죄 사함과 구원의 축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대신하여 버림을 받는 비극을 감수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아무 아무개 때문에 나를 버리셨나이까.”
 
5. “내가 목마르다”(요19:28). 
 
“i thirst.”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목마름을 토로한 말씀이었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목마름을 토로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인간의 모든 목마름을 대신 감수하신 우주적인 목마름이었습니다. 내가 목말라서 소리 지르는 나의 목마름의 소리를 대신 지르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목말라야 하는데 주님께서 나 대신 목마르신 것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 대신, 십자가에 달린 강도 대신, 간음한 여인 대신, 그리고 우리 모두 대신 목마른 목마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과 지옥에서 목말라야 할 목마름을 대신 당하시면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목마름은 목마름과 애탐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상에서 목 마르셨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천국에서 목마름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i thirst.” 이 말씀은 또한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목마른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목마릅니다. 여기 아프카니스탄의 형제들과 함께 내가 목마릅니다.”
 
6. “다 이루었다”(요19:30). 
 
“it is finished.”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므로 자기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은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지녔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엄청난 해산의 고통과 아픔을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이 아기 하나를 출산하는데도 피와 땀을 쏟으면서 심한 고통과 아픔을 당하는데 하늘의 별과 같이 수많은 자녀들을 출산하시면서 물과 피와 생명을 다 쏟으신 주님의 고통과 아픔은 우리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극치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믿음과 순종과 헌신과 죽음의 제물이 되시므로 우리들이 이루어야 할 믿음과 순종과 헌신과 죽음의 일들을 다 이루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데 주님께서 우리 대신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사역을 극치의 수고를 하시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순종도 우리의 헌신도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봉사도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죽음도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이 말씀은 만족과 기쁨의 이루심이었던 것과 함께 수고와 고통과 아픔의 이루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며 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이루어야 할 일들을 대신 이루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나는 부족하지만 저들이 이루어야 할 일들을 대신 이루며 살게 하시옵소서.”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은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지녔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지금 엄청난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당하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나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즉시 낙원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그 순간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사망에 버리시는 고통의 순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53:12).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다음 옥에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했습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3:19).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던 일이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영어로 된 사도 신경은 “he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죽음이 평안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영혼을 사망에 버리는 형벌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는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형벌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끊어짐의 고통과 슬픔과 저주의 죽음을 머리에 그려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롬9:2,3).

예수님은 지금 자기의 영혼을 사망에 버리는 저주의 죽음을 당하면서 이렇게 호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호소의 말씀 속에도 비극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주님의 일곱 마디 말씀들 속에는 모두 사랑의 고통과 사랑의 아픔과 사랑의 슬픔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극적인 사랑이고 예수님의 비극적인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가상 칠언”의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의 비극을 감히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비극적인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엎드려서 겸손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겸손이 엎드려서 그 말씀들을 조용히 들으면 됩니다. 십자가와 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슴에 깊이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Wednesday, March 28, 2018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기독교는 예수님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그 날을 축하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날을 기억하는 것이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지내셨다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날을 축하하는 것이 부활절입니다.  오늘입니다.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불길한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죽음은 연기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는 항거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입니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난 의사라도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국 죽음은 죄의 결과(삯)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부했던지, 명성과 인기가 있었던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죽음의 날에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맡길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죽음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의 장’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고 자세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하여 부활의 의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오직 예수님만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같이 죽었다가 살아난 여러 사람의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방금 죽은 회당장의 12살 먹은 딸을 살린 기록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죽어서 상여가 나가는 것을 멈추시고 청년을 일으키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어서 무덤에 장사 지낸 나사로를 무덤까지 가셔서 살리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사도는 구제에 힘쓰던 다비다(행 9:40)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졸면서 자신의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행 20:9-12)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는 다릅니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뿐입니다.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6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들이 살아난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뚜렷하게 다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영체가 되셨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갈보리 산상에는 십자가가 세 개 세워졌습니다.  가운데 십가가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양 옆에는 살인 강도짓 하다가 잡힌 자들이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같이 사형집행 당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전에 없었던 사건입니다.  인류 최초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주인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최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간계를 물리친 승리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흉계를 꾸며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정권의 압박을 이긴 표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 무덤에 장사지내면 끝날 줄로 알았으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사 로마정권의 압박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의 세력은 예수님을 죽게 하고 무덤에 장사지낸 것을 보고 축배를 들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부활로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의 깊은 욕구에 대한 해답입니다.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상대성 원리’에 의해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에게 눈이 있는 것은 보아야 할 물체가 있기 때문이고 귀가 있는 것은 들어야 할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고 목이 마른 것은 먹을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 원치 않는 죽음이 온다는 것은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저주받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장사지냈습니다.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죽음을 극복하셨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유교를 만든 공자도 죽어서 중국 창평향에 무덤을 남겼습니다.  불교를 만든 석가모니는 인도 살수산하에 무덤을 남기고 있습니다.

중동의 건설현장에 우리나라의 독실한 기독교인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이슬람교도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 모슬렘은 자기가 믿는 이슬람교에 대해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고 메카를 순례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이슬람교의 큰 자랑은 메카에 있는 모하멭의 무덤입니다.  너희 교주 예수의 무덤은 비어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굉장히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모하멭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 말을 들은 크리스챤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입니다.  모하멭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들은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빈 무덤입니다.”

제가 성지순례차 예루살렘에 갔을 때도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를 믿는 사람의 죄는 모두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믿는 자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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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장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복입니다.  죄에서 죽고 의로서 살으신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본문 22절과 23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문제는 그리스도가 아무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더라도 나와 관계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어야 하고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죄 씻음이 있고 천국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그가 쓴 편지에 164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먼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체험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말합니다.  율법에 충성을 다했던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3일 동안 소경이 되었고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이 뜨여졌습니다.  육체의 눈과 함께 영의 눈도 뜨여졌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결합된 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했다는 말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호흡하며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와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아담이 가진 요소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는 우리들 개인, 개인의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 체험이 우리들 구원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민족적인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피부색깔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직업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귀한 직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의 신성을 이해하고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주님은 복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죄인이던 죄인이 아니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도 예수님은 용서했습니다.  탐관오리로 세상을 살던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도 그의 회개를 보시고 주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평생을 살인 강도짓을 한 죄수가 마지막 죽는 순간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천국을 약속하시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뉘우치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죄는 아담 안에 있을 때 지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그 죄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구속의 주가 되셨습니다.  대속의 주가 되셨습니다.  인간이 고민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 말은 우리들도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삶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리스도께 붙었다’는 말은 그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기쁨의 소식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눈물을 거두게 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승리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 값으로 모든 인간이 당하는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날입니다. 

누구에게 이 복이 주어집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됩니다.  주 예수님 부활을 축하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이 놀라운 복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갓피플 자료실에서...)

Tuesday, March 27, 2018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

필 라이큰 | 생명의말씀사 | 272쪽 | 13.500원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에 관한 좋은 말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말로 용기를 북돋워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에게 고린도전서 13장은 두려움을 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사람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의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글에는 아무래도 감동이 덜한 법이다. 바울이 쓴 ‘사랑장’,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 중 하나인 고린도전서 13장은 그래서인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익숙한 글이라도 ‘추억’을 덧입히면 얘기는 달라진다.

필라델피아 제10 장로교회를 담임했으며 현재 휘튼칼리지 총장인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생명의말씀사)>의 저자 필 라이큰(Phil G. Ryken)은, 바울이 하나하나 분석해 놓은 사랑에 ‘예수님의 공생애 행적’들을 비추어서 자세히 설명한다. ‘사랑장’의 모든 속성이 예수님의 공생애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공부하는 한 방법은 그 분의 생애와 사역의 관점으로 사랑장을 살펴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예수님의 초상화’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는 절대로 사랑을 배울 수 없다. 우리의 삶을 예수로 채울 때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는 물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와는 다른 의미이다.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마가복음 10장의 ‘부자 청년’을, 저자는 ‘사랑을 안다고 믿었던 청년’이라 부른다. 그리고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아니 인정할 준비도 돼 있지 않겠지만, 우리도 이 청년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사랑장은 이미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고, 예배하고, 섬기고 헌신하는 데 있어 자신의 방법만이 최고라고 믿는, 사랑 없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었다.”

‘사랑장’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랑장을 친숙하게 느낀다고 해서,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사랑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에게 사랑이 많지 않음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는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주고도 남을 때만 준다. 섬길 준비도 되어 있다. 그러나 불편하지 않은 범위에서만 섬긴다.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가가 보장될 때만 사랑한다.”

‘사랑장’을 쓴 사도 바울조차 자신의 ‘사랑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더 큰 예수님의 사랑’이었지만, 그는 다른 누군가를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라고 말한 것처럼 1인칭 단수형을 사용했다. 이전의 자신을 배설물 같이 여긴 바울이었지만,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라이큰은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에서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임을 끄집어내고, 시몬의 집에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통해 ‘사랑의 거룩한 기쁨’에 대해 말하며, 나사로를 살리려 가시기 전 이틀을 유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사랑은 기다리는 것’임을 설파한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셨던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에서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을, 고난당하시는 구세주의 모습에서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이 겹쳐진다.

저자는 많은 이들이 고린도전서 13장을 ‘결혼’과 연관짓지만, 말씀 속 사랑의 가르침을 깊이 깨달을수록 이것이 ‘죽음과 희생에 관한 것’임이 더욱 분명해진다고 강조한다.

“이 말씀이 지배하는 이미지는, 웨딩드레스가 아니라 십자가다.”

그리고 ‘무엇이든’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믿는,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까지 회복시키시는 ‘한계 없는 믿음’을 말한다. 저자는 말한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이라는 미덕보다 귀하다. 사랑이 그토록 위대한 이유는 절대 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도 사랑의 영속성을 침해할 수 없다. 사랑은 영원하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사랑이시다. 사랑의 모든 속성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완전해진다. 그러므로 사랑장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사랑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사랑을 좇는 우리의 마음은 쉽게 지친다. 인생의 다른 부분에서 그러하듯 우리는 사랑에서도 실패를 경험한다.

그러나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또 실패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시는 그분의 사랑 없이는 절대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이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요구하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