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ugust 31, 2015

성경이 말하는 지혜란?

*성경이 말하는 지혜에 대해서

잠언은 지혜의 말을 적혀있는 말씀으로 알려져 있다. 잠언 서두에보면 잠언의 기록된 목적에 대해서 적혀있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지혜롭게하기 위함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게 지혜일까.

1장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고 경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예전부터 왜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하는지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그럼 경외란 무엇인가.

경외하다 [敬畏--] [동사]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다. 비슷한 말 :경구하다1ㆍ외경하다ㆍ존외하다.(From 네이버 국어사전)

공경하면서 두려워한다. 아직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공경하다 [恭敬--] [동사] 공손히 받들어 모시다. 비슷한 말 :경공하다ㆍ경지하다.
두렵다1 [형용사] 1 어떤 대상을 무서워하여 마음이 불안하다. 2 마음에 꺼리거나 염려스럽다.
(From 네이버 국어사전)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란 어떤것인가.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잠언 저자는 지식의 근본이라 하였는가.
 
잠언 1장 10절부터 19절을 살펴보면 보면 저자는 갑자기 악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악을 멀라하라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혜가 부르고 있다라고 이야기 하며, 돌이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심지어 영의 부어서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잠언1:20-23_개역개정)

위의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지혜란 어리석음과 거만함과 미련한것의 반대이며,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책망을 듣고, 돌이킬 필요가 있다.

정리해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통치자이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것을 보고 계시며, 종국에는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며 여호와를 공경하고 계명을 잘지켜 행하는 것, 이것이 악을 멀리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지혜의 근본이 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즉, 지혜는 똑똑한 것이나 머리가 좋은 것과는 관게가 먼,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고,  악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분별력이 바로 지혜라고 잠언의 저자 솔로몬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혜를 어떻게 가지게 될 것 인가,

첫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먼저 솔로몬은 일천번제후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물어보았을 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구하였다.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허락하셨고,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널리 아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을 때 선악을 분별할 줄 알 수 있고, 그것이 지혜라고 솔로몬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하다.

잠언 1장 23절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는 죄를 깨달을 수 없고, 죄에 빠져있는지 알 수 없고, 설령 누가 죄를 지적해서 알더라도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없고, 진정한 회개없이는 죄의 삶을 돌이킬 수 없다.

하늘의 지혜를 사모하자.  선악을 분별하는 영을 주시기를 간구하자. 우리의 사악함에서 돌이키고, 회개의 영이 임하기를 기도하자.

(어느 블로그에서)

Sunday, August 30, 2015

태초란 언제인가?

태초란 언제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성경 최초의 진술에는 네 가지 단어가 나온다.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가 그것이다. 각각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태초(太初)라면 과연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

범주의 오류

우선 확실히 해둘 것은 태초를 시간의 산술적 의미로 파악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수십억 년 전이라는 식은 아니다. 그러면 태초란 무한대의 시간보다 더 앞선 무한대의 시간 전이라는 가상도 가능해진다. 태초 전에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있었는지 등의 억지스런 질문 내지 반발이 꼬리를 물고 나오게 된다.

불신자들은 심지어 “하나님은 창조 전에 있었던 무한대의 시간 동안에 무엇을 했는가?”, 또 “하나님 그분은 누가 창조했는가?” 등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물어오곤 한다. 후자의 경우는 기독교변증학자 노만 가이슬러 등이 편저한 "Who made God?"(사랑플러스 2005 번역출간)이란 책에서 실제로 그 질문을 다루고 있다. 그 답을 발췌하여 인용해보자.

[우주는 단지 그곳에 영원히 존재할 뿐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무신론자들은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는 열역학 제1법칙을 들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관찰에 근거한 학문으로 '~할 수 있다' 혹은 ‘~ 할 수 없다' 식의 독단적인 주장을 하려면 실측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따라서 그 법칙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우주 속 실질 에너지의 양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에너지가 창조될 수 없다는 것은 실측적 증거가 아니라는 뜻임, 필자 주)     

에너지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그런 가정 안에서는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지 묻는  자체도 무의미하다. 에너지가 영원하면 아무도 그것을 창조하지 않았다. 만약 우주가 항상 존재해 있었다면 아무도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이 무의미하다면 하나님 역시 항상 존재했을 것이기에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도 무의미할 뿐이다. "누가 창조되지 않은 이를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은 마치 "그 총각의 부인은 어디 있지?"라는 질문처럼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에 속한다.

아무도 하나님을 만들지 않았다. 그분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항상 계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다. 만든 이가 필요한 것은 이 세상처럼 그 시작이 있는 것들뿐이다. 시작이 없으신 하나님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실 필요도 없다.](p. 17-18)

총각이란 결혼하지 않는 남자다. 부인이 결코 있을 수 없고 있다면 이미 총각이 아니다. 서로가 의미하는 범주가 전혀 겹치지 않는 두 대상은 어떤 수로 연결 지어도 해답이 나올 수는 결코 없다. 아예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창조되지 않은 이"란 창조와 전혀 연관이 없는데 그런 하나님을 누가 창조했느냐고 묻는 것도 아예 말이 안 된다.

태초를 시간의 수치적 양으로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범주의 오류에 속한다. 시간이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태양과 달의 운행과 연계해야만 생겨나는 개념이다. 그런 천체들이 없다면 하루, 한 달, 일 년 등은 아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다.

바꿔 말해 시간 자체는 창조 이후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태초는 창조 이전이다. 태초에는 시간이 없었다는 뜻이다. 태초와 시간과는 서로 겹쳐지는 범주라고는 아예 없다. 태초 혹은 그 이전의 상황에 시간이란 개념을 적용시킨다는 것 자체가 아예 말이 안 된다.

태초 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을까, 태초는 수십조 년 이전일까 등등에 관심을 쏟는 것은 호사가들조차 궁리할 필요가 없는 정말 무의미한 짓이다. 만약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인들더러 답을 못하도록 궁지에 몰아넣어 자신들 주장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고도 헛된 궤변일 뿐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표현이 참으로 정미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잠시 착각 혼돈했거나, 이모저모로 따져서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가 자기 마음에 이른다."고 했다. 스스로 아예 그렇게 마음먹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에 변할 수 없는 어리석음으로 완전히 고착되어져버렸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 자체도 어리석게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말로 무신론자가 단순히 지식이 모자라거나 지능이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해도 스스로 하나님은 없다고 마음에 정해버린 것이다. 어떤 구실이나 궤변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을 무조건 부인하고 보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기 기분대로 마음껏 신나게 살겠다는 뜻이다.

자기를 지으시고 모든 좋은 것으로 베푸시는 창조주를 자신의 삶에서 제거해버리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아니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르니 더더욱 어리석지 않은가? 남들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믿기 전에는 똑 같이 너무나 완악하고도 어리석게 그랬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십자가 구원의 공로로 그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게 되었다. 이 얼마나 평생을 두고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지 않는가?   

태초의 참 의미

태초(太初)란 영어성경의 번역대로 "시작"(In the beginning)을 의미한다.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선재(先在)해 있는 상태에서 공간이나 공간을 점유할 물질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텅 비워져있던 공간 안에 물질이 채워지자 시간이 작동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시공간을 동시에 창조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간은 피조물에게만 의미가 있다. 예컨대 지구와 달의 하루는 길이가 다르다. 순전히 이론적 가정으로 달에 인간이 있다면 그들의 시계와 달력은 우리와 달라야 한다. 같은 개념의 시간이 아니다. 이처럼 시간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직 피조물, 그것도 각기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시간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시간 자체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이다. 또 시간 밖에 계시기에 그분에게는 영원토록 현재 뿐이다. 무역회사나 여행사에 가면 공통적으로 세계 각지의 시각을 알리는 시계를 여럿 걸어 놓았다. 시차가 다른 지역과 원활히 소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는 사무실에 - 순전히 가정으로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 과연 지구 시계, 달 시계, 전 우주에 있는 모든 별의 시계를 걸어 놓고 계시겠는가 말이다. 

그분은 지구, 달, 태양, 모든 은하계와는 완전히 초월한 범주 안에 계신다. 그 모든 것들을 만드신 분이 그 안에 속해서 제한 받을 수는 결코 없다. 한 마디로 전 우주의 모든 시공간을 다스리는 온전한 주인일 뿐이다. 당연히 그분에게는 오직 현재만 있을, 사실은 인간이  인식하고 이해하는 시간의 개념으로 그분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지만, 뿐이다. 또 오직 현재만이 있기에 그분의 품성뿐 아니라 약속은 영원토록 신실하며 변함이 없으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하나님에게 하루가 천 년이 되고, 천 년이 하루가 된다는 것이 사람처럼 기분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인 길이가 그렇게 느껴진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기분과 상황에 따라 바뀐다면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자격은 상실된다. 천 년이나 하루나 시간이 그분을 절대 제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그분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분의 뜻과 의지뿐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마음먹으신 것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 약속이 이뤄지는 시점과 상황은 오직 피조물에게만 문제될 뿐인데 하나님은 그마저도 당신의 영광이 가장 잘 드러나며 피조물에게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는 시점에 시행하신다는 것이다. 첫 하루에 혹은 천년의 마지막 날에 시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신이 의도한 바가 시행되지 않는 법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4,27)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45:23, 46:11)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베드로 사도의 말씀에 적용하면 마지막 심판은 정녕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신자는 그 시기와 방식에 관심을 쏟을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뜻 앞에 절대적으로 겸비하여져야 한다. 그 뜻은 죄인들에 대한 진노를 누그러뜨리면서까지 모두가 회개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디 온다고 마음 놓고 있어도 되는가? 오히려 정반대다.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10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11,12절) 해야만 할 것이다.   

구원은 사후에 내리는 판정이 아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자 그 주인이시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영원토록 현재이신 분이어야만 시간을 다스릴 수 있다. 물론 그분이 시공간 모두를 다스리지만 특별히 창1:1의 "태초"라는 표현을 통해 시간의 주권자임을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시공간 모두를 다스리는 하나님만이 인간의 사후(死後) 심판의 주관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 수명의 종결이 아니다. 존재 자체가 멸절되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공간)과 육체 수명 이후의 영생(시간) 또한 그분이 주관하시기에 죽음 이후의 영원한 운명을 그분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적 진술이 아니다. 사실은 아주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생전에 이 땅에서 행한 모든 것을 다 살펴 본 후(事後)에 점수를 매겨서 심판하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그 심판이 있기 전까지의 모든 일들은 인간이 제 멋대로 행한 셈이 된다. (구원 받은 신자가 죽은 후에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 정도에 따라 상급이 달라지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물론 인간 쪽에서 판단하면 당연히 그러하다. 자유의지를 갖고, 비록 죄로 타락되었어도, 자기 판단 하에 그 전부를 행한 것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만약 죽어서야 점수 매기는 판정관 같은 하나님이라면 그때까지의 시공간을 제 멋대로 재단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인간에게 완전히 맡겨 버린 셈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입장에서 판단하면 시공간의 절대적 주관자로서의 직무를 그만큼 포기 내지 태만한 꼴이다. 하나님에겐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땅에서부터 절대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따라 한 죄인에게, 그가 당신과 원수 사이에 있어도, 선물로 주어지는 기독교의 구원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전한 구원이다. 태초부터, 여기서 태초도 영원전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시작부터, 구원할 인간을 예정하시어 당신만의 계획과 뜻 가운데로 인도하는 구원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공간 모두를 절대적 권한으로 통치하는 당신의 당신다우심이 온전히 드러나는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보라.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엡1:4-6)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아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려는(갈1:16) 계획 하에 택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모든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동일한 죄인인 상태에선 인간의 우열(優劣)로 구원의 기준을 삼을 수는 결코 없다. 점수로 치면 모두가 0점이기에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절대적이며 선택적인 구원만이 그 해결책이다. 또 그런 구원이라야만 “거저 주시는바 은혜의 선물”이 된다.

절대적 선택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전적 독단에 의한, 혹은 단순히 무작위적인 선택은 아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의 신비이긴 하지만 그분의 그분다우심이 완벽하게 반영된 완전한 선택이다. 그분에게는 어떤 악하고 추한 것도 함께 공존할 수 없다.

각 개별적 선택의 근거나 기준을 인간이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는 없지만 성경에는 아주 핵심적인 힌트는 나와 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주신 그 절대적 사랑 안에서 선택하신 것이다. 인간의 자격이나 조건에 전혀 선한 것이 없고 오히려 당신과 원수 된 상태의 죄인을 선택할 수 있는 근거란 그런 절대적 사랑 말고는 따로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태초에 종말도 작정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만이 시공간의 완전한 주인이기에 인간의 생애를 잠시라도 제 멋대로 방치해두지 않는다는 면에서도 예정에 의한 구원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놓아두다가 죽은 후에서야 생전의 공과를 점수 매겨 주는 구원이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일생이 어찌 되든 아예 모른 채 한 것 밖에 더 되는가? 말하자면 인간세상의 온갖 모순과 질곡으로 판단컨대 인간의 생사화복에 진정한 관심과 사랑이 없었거나,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행한 신경질적인 하나님 밖에 되 되는가 말이다.

정말로 바른 하나님이라면 당신의 백성을 이 땅에서부터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게 해야 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바울처럼 이방인의 사도 같은 직분을 수행하게끔 해야 한다. 또 그러려면 생전에 구원이 미리 이뤄져야만 하고 또 구원 받은 자도 그 사실과 자신에 대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이미 예정에 의한 죄인의 구원책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비 되어 있었기에 최초 인간의 타락 가능성을 무릅쓰고 자유의지와 선악과 금령을 주셨던 것이다. 거기에 더 보태어 당신께서 앞으로 만드실 피조물들이, 특별히 인간이 완전 타락한 채로 일생(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전부)을 마치게 만들 양이면 구태여 힘들여 창조하셨을 리는 만무하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구속을 사전에 다 예정해놓았기에 창조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인류 전체를 향한 보편적인 계획이나, 각자 한 사람의 경우에나 공(共)히 해당된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인류 전체의 죄를 대속하여 죽음으로써 구원의 길은 열렸으니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결단과 의지에 달렸다는 주장은 여전히 잘못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미 설명한대로 인간 일생의 어느 부분을 방치하는 하나님이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골고다 죽음 이후로는 인간의 구원 사역에서 그분은 손을 완전히 혹은 일부는 놓고 계신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각 개별 죄인을 향한 예수님을 통한 절대적 구속 또한 창조 시에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엡1:4)는 바울의 진술 그대로다.    

그렇다면 고려해볼 사항이 하나 더 생긴 것 아닌가? 말하자면 과연 태초에 십자가 구원만 확정되어져 있었을까? 마지막 심판은 그 작정에서 제외되었을까? 워낙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셔서 인간이 하는 짓거리를 다 보시고 난 후에 판단하려 하셨을까?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이 천 년 만 년이라도 더 기다려 주실까?

시간이 하나님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개념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어느 듯 다시 잊고 있다. 태초에 골고다가 예정되어 있었다면 새 하늘과 새 땅도 당연히 그 청사진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창조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도 확정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요한 사도에게 이미 이천 년 전에 그 일부라도 보여줄 수 있었지 않는가? 

인간에게 정작 문제 되는 것은 예수님이 영광 중에 심판하러 도적 같이 다시 오시는 일뿐이다. 그 시기와 방식에 관심을 둘 필요도 전혀 없다. 하나님은 그 시기와 방식마저 이미 정해 놓으셨다. 도적이 언제 어떻게 오겠다고 미리 가르쳐 주는 법은 없으니 관심을 두어도 부질없는 짓이다. 신자가 진짜로 기억할 것은 그분의 뜻이 이뤄지지 않은 채 사라지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뿐이다.

바꿔 말해 인간이 과연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할 지도 그분의 뜻 안에선 이미 다 작정되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뜻을 창세기 1:1 이후의 진술로 계시해 주셨다. 그럼 성경대로 믿지 않는 인간의 최후는 심판을 모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창조의 뜻과 계획에 전혀 해당되지 않아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Friday, August 28, 2015

성경적 내적 치유

성경적 내적 치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적인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면적인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내면적인 치유는 누구나 필요합니다.성경은 심리학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왜냐하면 마음이라는 말이 919번이나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털어놓기 어려운 부분의 이야기가 마음의 문제 내면의 문제입니다.

1.내적 치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마음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스스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내적인 치유입니다. 특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문제와 고민의 반복이 되지 않으려면 내적 치유의 과정을 지나가야 합니다. 마음의 문제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적인 치유라는 것은 단순한 치료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성령으로 단번에 회복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복은 우리가 상실한 과정을 하나 하나 밟아가며 원인적인 치료를 행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내적 치유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드리고 구원을 이루어 나갈 때에 그 속에서 내적인 치유가 저절로 일어납니다. 삭개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 들이자마자 재물에 대한 탐욕이 사라지고 그의 삶과 인생관이 변화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내적인 치유가 되어야 사람의 행동양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2.축사사역과 내적 치유의 관계
하나님의 능력으로 축사가 이루어지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공격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공격의 화살을 쏘아 댑니다. 그래서 내적인 치유의 과정이 매우 필요합니다. 비단 환자나 정신적인 질환이 있는 사람만 내적인 치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적인 치유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치유의 한 분유인 것입니다.

내적 치유는 축사 사역으로만 완전치 못함을 보완해 줍니다. 또한 축사를 통하여 내적 치유도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귀신의 방법은 생각을 넣어주고 상처나 충격 증오를 일으키는 방법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발판을 귀신에게 제공해 주지 말아야 합니다.

내적인 치유를 심리적인 요법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영적인 전쟁입니다. 마음의 갈등과 상처를 이기고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세워 가는 것은 신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적 치유는 신앙을 승리로 이끄는 영적인 전쟁의 한 분야입니다. 축사로 이루어 질 수 있는 영적인 치유의 한 분야로 이해하고 받아드려야 할 것입니다.

3.신유와 내적 치유
병을 고치는 것도 내적인 치유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내적치유가 없이는 진정한 신유도지지 않습니다. 내적인 치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치유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서로 죄를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약5:12-16).
그러므로 병고 침은 내적 치유를 발판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유는 믿음의 치료입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란, 마음이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마음으로 믿어(롬10;1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내적인 치유가 치료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하여 내적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누구라도 치료의 대상에서 예외인 법이 없습니다.

4.지도자의 내적 치유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내적인 치유입니다. 상담 자나 목회자 평신도 지도자들이 내적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파급효과는 매우 큽니다. 지도자가 내적인 상처를 가지고 치유하는 방법을 몰라서 방황한다면 그 영향력은 집단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상담가,목회자, 사모, 신학생 평신도 지도자(지역장 구역장)들에게는 내적 치유가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 영향력은 복음이라는 이름 하에서 주는 영향력이기 때문에 상처를 줄 때에는 매우 큰 것이 되고 복음의 영광이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역을 하시는 분들의 내적인 치유는 중요합니다. 지도자가 내적인 치유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내적인 치유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지도자가 성도들의 내적인 치유를 해결해 줄 수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개척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자꾸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40일을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계속하여 떠나가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자신의 성격에 대단히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나아가서 성도들의 마음의 상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후에는 자신의 마음이 제일 문제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밝아지고 긍정적이기를 기도하며 내적인 치유를 위하여 노력했다고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겸손하며 순종하는 사람의 변화가 되었을 때에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불신자들로부터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잇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형편없이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크리스천들의 도덕적인 삶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회 내에 상처받은 영혼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신앙을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크리스천답지 못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상처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상처받은 것을 해결해 나가는 치유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사람에게 경건히 나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적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영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힘이 듭니다.
특히 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터득한 자이어야 합니다. 상담기술을 배우기 이전에 진실로 스스로가 상처를 이기고 모든 삶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사람으로 변화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문제를 스스로 극복해 본 사람만이 남을 이해 할 수 있고 도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5.내적 치유와 하나님의 성품
내적 치유는 우리의 그릇된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내적 치유입니다. 자아중심의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내적인 치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여러 가지로 성경에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잘 이해할 수 있는 표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자아중심의 삶은 치유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아 중심의 삶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개성시대라고 합니다. 그만큼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자기를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자신을 피난하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구조가 모두 자기를 알리고 나타내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능력있는 사람은 교만해지고 반대로 무능력한 사람은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이는 신앙인 들에게 치명적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늘 영적으로 시달리는 요소가 됩니다. 마귀는 그런 약점들을 공격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한번 체크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항상 생각하고 자신의 단점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6.내적 자화상의 형성(데이비드 시멘즈)
내적으로 치유를 받아야 할 영역은 매우 방대합니다. 따라서 많은 시간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치유를 위하여 훈련을 해야 부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내적인 자화상이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형성이 됩니다.

1)외부세계
성격 형성에 영향력을 주었던 모든 요인입니다. 유전적인 것들 출생부터 어린 시절 사춘기를 지나서 지금 현재까지 당신이 겪었던 경험의 세계입니다. 어린 시절 환경 가정적인 배경과 환경 만났던 사람들 관계했던 사람들에 의하여 성장하면서 자화상이 형성이 됩니다.

2)내부세계
육체적, 정서적 영적인 감각이 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내적 세계에 가지고 있는 결함과 흠집에 의하여 영향을 받습니다.

3)사단
사단과 귀신은 우리의 마음을 공격합니다. 귀신의 대표적인 공격방법은 마음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자입니다(고후4:4).

4)하나님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우리의 자화상이 형성되고, 그릇된 자화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치료자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의 상한 심령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적인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내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치료할 수 있는 은혜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선물을 활용하여 내적 치유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활용하지 않으면 내적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훈련과 학습을 통하여 내적인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소그룹토의 1
*당신이 치유될 부분은 무엇입니까?☆표로 표시해 봅시다.
-☆☆☆심각하다.치유받아야 한다.
-☆☆ 다소 있는 편이다.
-☆ 조금 있으나 개선되어지고 있다.
-×거의 없는 것 같다.

1.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
2.타인을 용서하는 일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
3.원한과 증오를 품고 보복을 생각한다.( )
4.열등감이심하다.자신을 부적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
5.불안감이 심하며 늘 정서가 불안하다.( )
6.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늘 양심에 가책을 많이 느낀다.( )
7.자기를 높히려는 말을 잘한다.자신의 우월감이 강하다.( )
8.자기 주장에 대하여 변호를 잘하는 편이다.( )
9.가면을 쓰고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
10.용서를 위하여 노력을 하지 않는다.( )
11.한가지에 재미를 붙이면 집착이 심하여
죄악의 습관을 반복한다.( )
12.우울증이 심하다.( )
13.화를 잘낸다. 다혈질적인 성격을 주체못한다.( )
14.늘 의욕이 없다.( )15.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
16.외식을 잘한다. 과장과 허풍이 심하다.( )
17.하나님 앞에 진정한 헌신을 못한다.( )
18.영적인 능력이 없어서 늘 성령충만을 갈급하게 생각한다.( )
19.불신감이 좀 심하여 상대방을 잘 믿지 못한다.( )
20.물질욕 소유욕이 강한 편이다( ).
21.너무 말이 많다. 말을 절제 하지 못한다.( )
22.먼저 사과를 못하는 편이다.( )
23.남에게 절대로 지지 않으려고 한다.( )
24.자기 주장이 강한 편이다.( )
25.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

1.내적치유의 핵심은 용서에 있습니다.용서하지 못한 사람의 이름을 적으세요.
   용서해야할 부분을 적어보시길 바랍니다.그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문을 적어보십시오.
2.자신의 성격적인 단점,마음의 드러난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기도문을 적어보십시오(예 열등감 수치심 내성적성격).
3.나의 마음의 치유를 위하여 매일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고백할 말을 적어보십시요(나는 으로 시작하여).

(출처 어느 블로그의 무화과 님!)

Wednesday, August 26, 2015

그리스도인의 빚 보증

오늘 생명의 삶 큐티에서 실제적인 삶의 매우 민감한 문제인 빚 보증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네요...ㅠㅠ
그리스도인의 빚 보증에 대한 어느 목회자의 복음적인 칼럼이 있어서 퍼 왔습니다. 참조하세요.

보증 / 잠 6:1-5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보증에 대해서 교훈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보증의 종류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담보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보증입니다.영어 성경은 담보를 ‘co-sign a loan’ 이라고 번역했고, 보증은 ‘guarantee the debt’ 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 담보와 보증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같다고 보아도 됩니다. 두 가지 모두 보증을 서는 것인데 문제는 보증을 서준 사람은 선한 뜻으로 보증을 서 주었는데, 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이 잘 갚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는 ‘얽혔다’ 또는 ‘잡히게 되었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보증을 서는 것과 동시에 자유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언제 자유 하게 됩니까? 빚진 사람이 돈을 다 갚을 때 까지 입니다. 그러니까 불안 불안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증을 서 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아니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왜 보증을 안 서줍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교회가 이렇게 사랑이 없어서 되겠습니까?’ 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참 난처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보증을 서지 말라고 성경 여러 군데에 말씀하셨습니까?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증’ 이라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증을 서 주고 난 후에 관계가 깨어지고 심지어는 원수가 되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을 합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보증’ 이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통해서 도와 주었으면 관계는 깨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보증’ 이란  방법은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할 지라도, 좋은 방법은 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물론 빚을 진 사람은 ‘반드시 값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짓말 합니까? 돈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정말 갚고는 싶은데 갚을 돈이 없으면, 거짓말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라, 겉옷까지 벗어 주어라, 말씀하시지만, ‘보증’ 을 서면 올무에 빠지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돈 으로 인한 관계가 깨어지는 것’ 에 대해서는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까지 잃어 버리게 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물질로 인하여 시험에 들지 않고, 잘 관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