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Ⅰ. 인류에게 왜 성경이 필요한가?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실존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종교심을 주셨고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당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섬길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롬 1:19, 20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함으로 마음이 둔해져서 지으신 만물을 보고도 하나님을 몰라보며 죄 아래 사는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만 것이었다. 롬 3:10~18에 보니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태리의 어느 변호사는 목사가 봉독한 여기의 성구를 들어 인권 모독죄로 법정에 고발했지만 담임 목사는 저자가 아니며 저자인 바울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고소사건은 기각판결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도리어 조물주 하나님이 배은망덕한 인간을 고발하고 있다. 사 1:2~4에 보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라고 탄식하셨다.
이렇게 인간의 타락한 종교심 또는 도덕적인 양심으로는 천지만물이 보아도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미련한 인간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전 1:21에,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자연계시만으로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 섬길 수 없게 되었다. 이 말은 자연계시가 불충분하다는 말이 아니고 자연계시 자체는 완전하지만 인간의 죄 때문에 영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못 보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당신을 바로 섬기게 하시려고 예로부터 당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영감으로 수록한 완전무결한 성경을 주신 것이었다. 히 1:1, 2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발전적인 게시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곧 옛날엔 사람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시고 또는 꿈으로, 환상으로 투시하는 방법으로, 상징적인 것으로, 특히 예언 등등으로 당신을 계시해 오시다가 마지막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 하셨기 때문에 기록한 성경은 하나님의 최종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엡 3:5에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다”고 했다. 임 라은 선지 사도들의 이적 특히 성경기록은 단회적이며 또 그들의 기록인 신구약 66권은 절대 가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란 뜻이다(계 22:18, 9).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들은 옛날과 같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성경 없이는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계시의 기록만이 아니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성경을 볼 때에 구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지금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계신다고 믿어야겠다”(김준삼 著 신앙고백서 강해 성경의 필요성에서).
그러므로 이 성경은 확실한 것이며(눅 1:3, 4)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시는 것이고(딤후 3:15) 후대의 신자들을 교훈하기 위함이고(롬 15:4) 특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해 절대 필요한 말씀인 것이다.(딤후 3:16, 7).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 당신이 필요하셔서 영감으로 쓰게 하고 편집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일세 반갑고 기쁘신 말 많은 중 날 사랑하신 단 말 좋도다 주 예수 날 사랑하시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예수 날 사랑하시니 나는 참 기쁘다.
Ⅱ. 왜 인류에게 성경을 주셨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에게는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이것이 짐승과 구별되는 특이중의 하나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독 인간대표인 아담과 행위계약을 맺었다. 이것은 소극적으로는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과 적극적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음으로 영생하는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만이 이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해야할 사람이 사탄의 말을 들으므로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해야할 사람이 사탄의 말을 들으므로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고 만 것이었다.
이 시험의 과정은 사탄의 거짓말을 통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사상을 빼어 버리고 악한 사상을 부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탄과 인간의 첫 대화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충동을 일으킨대 대해 하와의 대답은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셨느니라”고 했다. 사탄이 또 여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다.
이것이 사탄과 하와의 대화였고 그 후 그들은 타락의 길을 택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은 언어를 통한사상의 타락이었다. 이 범죄로 말미암아 행위계약은 파기되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은 대표자 아담을 세워 그와 후손들에게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은 실패해도 당신은 그럴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과의 계약을 경신하기를 여인의 후손 중에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허락하시고 그에게 인간이 파기한 행위계약을 준행케 할 뿐 아니라 아담이 어긴 죗값으로 죽는 전 인류의 영원한 형벌을 대신하여 죽으며 살아난 그분을 누구든지 마음에 믿기만 하면 영생을 회복한다는 약속을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계약인 것이었다. 이 은혜계약 곧 하나님의 구원사상을 인류에게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이 말과 글을 사용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이란 것이다.
Ⅲ. 왜 특정한 사람들을 통해 성경이 쓰여졌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곧 인류구원의 사상을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책 중의 책이다. 사상의 전달은 반드시 말과 글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을 사용하지 않고는 온전한 사상의 표현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말씀을 받아 수록하여 후대에 전할 사람들을 택하셨으니 그들이 바로 선지자와 사도들이었다. 성경의 기자는 약 40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왕, 제사장, 학자, 농부, 어부, 세리 등의 직업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실수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말씀의 바른 전달을 위해 성령님께서 특별간섭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성경의 기록은 성령님의 감동 간섭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한마디의 실수도 없는 것이었다.
벧후 1:21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대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고 사 34:16은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했고 마 5:18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고, 특히 계22:18,9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사상을 전담함에 있어서 개인 개인에게 매번 하늘로부터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고 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시고 기록하게 했는가? 이는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라고 하기 쉽다.
우리 이 대목을 바로 깨달아야 하겠다. 그것은 하나님은 실수함이 없이 만민에게 꼭 같이 말씀할 수 있지만 말씀을 받은 인간은 어둡고 둔하고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각양 각색으로 가감하는 과오를 범한다는 것이다.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택하사 영감으로 실수함이 없이 기록하게 하여 후대에 전달케 한 것이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Ⅳ. 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할 필요가 있었는가?
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할 필요가 있었는가? 성경의 많은 기자 중 베드로 사도를 들어 살펴보자.
그는 행 4:13을 보면, “본래 학문 없는 범인”이었다. 아마 배우고 싶었으나 가난한 환경 때문에 배우지 못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어부노릇을 하는데 학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아무튼 학문이 없는 사람임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동생 안드레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은 뒤부터는 그의 탁월한 감화력이 있는 말씀으로 참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늦게나마 그는 선생을 잘 만난 행운아였다. 무엇보다 주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시고 승천하신 뒤부터는 이 모든 것이 구약성경대로 된 줄 믿고 성경연구에 열중했으며 나중엔 글을 통해 복음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나이가 들었지만 말하는 것과 글 쓰는 은사를 받은 것을 깨닫고 복음을 글로 표현했는데 그것이 베드로 전후서였다. 역사가들은 본서의 저작 년대를 64년~68년이요 순교한 해를 68년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시대는 로마황제 네로의 대 박해 때였다. 그러니 그의 저서활동은 환경이 좋은 때가 아니요 더욱이 연로한 때요 죽음이 임박한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이 정리되면 주의 일을 힘쓰겠다!” “글을 쓰겠다!" 등등으로 말하기만 그 때 가면 ”이젠 늙었어!“하고 체념하고 만다.
주의 종 베드로는 그리스도께 받은 복음의 말씀이 후대에 바로 전달되는 것이 일편단심 소원이었다. 그래서 복음을 말로 전하고 듣는 것이 은혜로운 일이긴 하지만 청중은 제한되어 있고 또 세월이 지니면 잊어버리기 쉬우므로 복음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빼기도 하고 더하기도 하는 염려를 없애기 위해 변하지 않는 글로 전할 필요성을 깨달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작업에 열중한 것이었다. 그것이 벧후 1:15의 말씀이었다. 곧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기독교 복음이 말로만 전달된 것이 아니라 완전한 기록계시로 전달되었음을 깨달아야 하겠다. 만일 기독교 복음이 말로만 전달이 되었다면 지금쯤은 해괴망측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성경기록은 당대의 신자를 위함이 아니요 후대에 믿는 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롬 15:4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또 후대에 바로 전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상고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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