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 관한 소고>
/ 이성일 박사
먼저는 충분히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고통스러울 유가족들께 하나님의 위로와 이끄심이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유가족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폭로성 기사로 이목을 끌려는 기자의 태도에 참으로 유감이다. 한국교회에서 "자살"에 관한 인식이 무척이나 저질스러운 상황에서 유가족들에게는 가뜩이나 무거운 짐을 안긴 일이라 더더욱 안타깝다. 다만 그가 알려진 공인이라는 이유에서 "알 권리"라고 생각했다면 일반의 논란에 대하여 취재를 하려는 기자의 사명감이라면 그냥 그렇게 이해하려는 정도로 받아들이려 한다. 더불어 그의 메세지로 인하여 위협을 받는 성도들을 잃어버리는 위험에 처하는 기존의 전통교회들의 입김이 작용한 기사는 아니기를 바란다.
과거 내가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를 변호한 적도 있고 그의 가치를 높게 보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물론 나의 신학은 몇가지 강조점에서 크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만 또 다른 부분들에서 김성수 목사님의 신학과 다르다. 알려진 바로 따지면 나의 글은 그냥 담벼락에 끄적이는 정도이겠으나 페북의 소통을 통해 함께 가는 지체들에게 생각의 나눔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여겨 글을 쓴다.
1. 나는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를 그의 사망 후 접하게 되었다. 그 전에 유투브에서 클릭한 적은 있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러다가 나의 아내가 미씨에서 그 분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설교를 들었나보다. 그리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을 비슷하게 사용하는 목사님이 있다고... "차원" "폭로" "밀려가는" "나그네" 이런 용어들이다. 그래서 나중에 글을 쓰면 내가 김성수 목사님 설교를 무척 많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서 밝힐 것은 내가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듣지는 않았고 시리즈 전체를 들은 경우는 한번도 없다는 부분이다. 하지만 여기 저기서 10편은 넘게 들은 것 같다. 본문별로, 시기별로, 상황별로 다양하게...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포괄하는 바가 익숙했으므로 어렵지 않게 들었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깊이와 장점, 방법론, 신학적 오해와 한계들도 나의 견해로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참고로 많은 설교들은 깊이와 장점, 방법론, 신학적 오해와 한계를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보통의 설교자들이 일관된 신학적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화의 사용과 설교방법론에 있어서도 그리 특징적인 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저기 들은 것들을 자기 생각과 의도에 접목시켜서 전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김성수 목사님은 그 자신만의 "신학적 안목 (성서와 상황을 연결시키는 눈)"이 있기에 긍정도 부정도 가능하다.)
2. 그의 신학을 말하기 이전에 그의 삶과 자살 문제를 먼저 쓰려한다.
나는 한국교회의 자살에 관한 이해가 무척 저질스럽다고 언급했다. 기본적인 틀에 있어서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명령이다. 우리가 그냥 보내어진 이 땅을 살아야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인정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한 사람의 생명의 지탱이 "공동체적 소명"이라는 사실은 애써 알려하지 않는다. 생명의 단절로서의 죽음은 하루하루가 살아지는 생존의 연속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그 생존의 연속은 공동체적이도록 부름받는다. 이 사실을 무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살"문제를 "죄냐? 아니냐?"라는 태도로 접근한다. 그들은 "자살이 죄다!" 심지어는 "자살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신학에는 동의하면서 다만 유가족들에 대한 목회적 차원으로 에둘러 위로할 뿐이다. 천국을 개인의 구원으로 이해하고 지옥을 불구덩이로 이해하는 질낮은 신학의 결과들이라 그 뿌리가 어디서부터인지 답답할 뿐이다.
우리가 "자살"이라는 아픔에서 그를 자살로 몰고 간 "공동체 손길의 짧음"을 안타까와하는 것이 바른 반응이다.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은 공동체 상실이 반증이 된다. 자신을 내어주고 사귀는 공동체의 역동이 감소하는 만큼 피폐해진 마음으로 죽음으로 자신을 던지는 지체들 또한 늘어간다. 우리가 "자살"의 소식 앞에 그렇게 울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이해해야 할 지점은 각종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이다. 정신질환은 기본적으로 뇌의 기질적 병변에 의한 것이다. 흔히들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질환을 귀신들림과 연관시켜 이해하거나 믿음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이해하는데 이로 인한 부작용이 엄청나다. 나의 이 언급이 하나님이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질환이 영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고쳐주실 당위성이 없음도 강조해야 한다. 이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공동체적 시야가 결여되었다. 정신질환자의 약함은 공동체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를 돌보는 공동체는 그 연약함으로 흘러가는 하나님의 활동을 경험하며 정신질환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 세상에서 그들은 돌보는 이들을 힘들게 하는 이들로 생각되지만 예수 공동체의 생명력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됨으로 그들을 존귀한 자로 세운다.
김성수 목사님은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공황장애"는 어떤 충격과 위협으로 인한 뇌의 기질적 병변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때때로 일어나며 그 위기에 대한 신체적 변화(숨이 막히거나 가슴이 죄어오는 등...)가 실재로 나타나며 이를 자주 경험하는 이들은 당연히 우울증으로 잘 빠지게 된다. 또한 우울증이 공황장애를 낳기도 한다. 그리고 또 고려해야 할 부분이 "공황장애"는 강박적, 회피적, 편집증적 인격장애와 연결되기 쉽다. 이는 당연히 사회생활의 문제를 발생시키고 대인관계 기피를 낳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가족들은 당연히 지치게 된다. 간혹 주변 사람들에게 폭언으로 비추어질 수 있는 언행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울증"의 경우 가장 위험한 경우가 "자살충동"과 "자살"이다. 그리고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우울증 약들의 초기부작용 또한 "자살"이다 보니 우울증과 자살은 떨어뜨려지지 않는 문제이다.
그러면 그의 자살은 "죄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혹자들의 소문으로 돌고 있는 술에 대취해서 가족들에게 폭언을 했다는 것도 사실여부를 떠나 가능한 일이다. 가장 관계적인 위치에 있어야 할 목사라는 자리에서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고 인격장애의 가능성은 공동체 개념이 없고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에 "열매없음"이라는 평가 또한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논의로 빠져들면 할 말 없이 서로 답답할 뿐이다. 문제의 본질은 "김성수 목사가 자살했다"가 아니다. "어떻게 목사가 자살 할 수 있는가?"도 아니고 "메세지가 잘 못되어 열매가 없는 것이다"도 아니다.
이렇게 되물어야 한다. 교회는 왜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안고도 김성수 목사가 목사의 직무를 계속하게 하였는가? 교회는 예수가족의 공동체였는가? 김성수 목사의 자살은 최소한 김성수 목사를 향한 공동체의 손길은 짧았다는 반증이다. 그의 열매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도 우리는 성경이 진리 검증의 시금석으로 요청하는 "열매"가 정말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고려해야 한다. "도덕적 윤리적 삶"을 "열매"로 이해한다면 무척 피상적인 것이다. "열매"는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알려지는 것"이고 그 하나님이 알려지는 몸의 선택이 열매를 맺는 삶이다. 그 가운데에 윤리적 도덕적 의미를 넘어선다.
나는 오늘의 교회가 공동체를 상실하고 "설교"라는 기능에 대한 비정상적인 욕구과 기대가 낳은 교회의 시대적 기형이 희생시킨 분으로 김성수 목사님을 안타까와 한다.
3. 흔히들 그의 신학의 비판자들은 그의 신학과 메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채로 이전의 조직신학적 체계로 그를 틀에 가두어 두고 "허수아비 때리기"를 한다. 그러니 원래부터 김성수 목사의 특이한/별난/튀는/강한 메세지에 반감이 있는 대부분의 전통적 교회의 보수자들에게는 이러한 비판들이 먹히겠지만 김성수 목사님의 메세지에 매료되어 빠져 있는 성도들에게 균형을 찾아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더더욱 김성수 목사님의 한계에서 더 나아가기 보다 그 자리의 진리에 안주하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작용으로 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비판은 안하는게 낫다. (하지말라고 안 할 위인들도 아니겠지만...)
나는 김성수 목사님의 메세지에 매료되어 그 화면 앞에 앉아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더 깊은 초청을 받아 김성수 목사님을 하루빨리 넘어서기를 바란다. (이 부분에서 설교에서 자주 "진리"라는 어휘사용과 개혁주의의 잔재로서의 "무시간적 진리 개념"과의 결합은 참 아쉬운 부분이다.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에서 "진리"라고 외쳐진 것들의 대부분이 사실은 "진리"가 찾아오기 위한 김성수 목사님의 "질문"이었다고 읽는다면 참 훌륭할텐데 많은 사람들은 "진리"라고 외쳐진 문장을 진리라 믿어버릴 위험이 있다.) 적어도 전통교회의 믿어오던 틀들은 많이 무너뜨렸으니 완성되었다는 교만에 빠지지 않고 더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럼 내가 생각하는 그의 신학에 있어서 시사점과 한계점을 간략히 기술해본다. 자세히 쓰려면 논문을 써야 할 것 같아서 그 것이 내 글의 목적은 아니다.
1) 그의 신학에 있어 중요한 시사점
- 그는 "마귀 탓"하는 신앙 전반의 이해들을 "자아"의 문제로 시야를 돌리도록 요청한다.
결국 우리 각자의 신앙이 가짜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 과정을 통하여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환경을 개선하고 사람을 바꾸려는 모든 종류의 자기 중심적 방향의 신앙생활/영성생활에 도전한다. 이는 번영복음과 종교화된 기독교에 대한 중요한 비판들이다. 그리고 신앙의 싸움지의 중심을 외부에서 "가짜 하나님"인 "자아"를 향해 이동하도록 한다. 그의 이 강조점은 지나치게 염세적인 느낌을 주고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로 "오해"된다. 이 "오해"는 그의 설교가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집착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서 비롯한다.
내가 이 부분을 "오해"라고 한 이유는
그가 설교에서 이렇게 인간을 몰고가는 목적/의도가 인간을 실존적으로 무가치하게 여기도록 하거나 역사를 무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무게감 있는 은혜를 말하기 위한 인간 실존의 처참한 "없음"을 직면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없음"에 직면하지 않고 "있으려" 하기 때문에 그의 메세지가 목적하는 자리로 나아가기 보다 균형을 잃었다고 비난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없음"을 직면하기 싫어한다.
- 언약신학의 도식과 용어를 발전시켜서 "율법이해"를 "언약"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성에 통합시킴으로 율법과 복음을 분리하여 이해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사고를 가지고 왔다. "창세전 언약"과 "행위 언약" 그리고 "은혜 언약"이 그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히 하나이다. 그는 구약성서 전체를 상징으로서 그리스도를 향한 것으로 집요하게 논증해 낸다. 그의 설교의 주제는 어느 본문을 설교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상징적 신학적 해석은 그의 신학이 "무율법주의"라는 오해를 낳게 한다.
그가 율법을 해체하는 목적은 그 율법이 말하는 바가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더불어 그 율법의 완성이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져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것은 믿기만 하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완성으로 받으면 나머지 인생의 삶에 "놀라운 자유"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인간으로서 마땅한 일들"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도록 요청하는 것인데 그는 이 부분은 설교에서 논증을 하지 않고 언급하기에 약하게 전달되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전달의 목적은 전통교회에서 율법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부분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자기 의"를 구축하는데 악용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자기 의"는 이웃에 대한 "선악판단"과 "정죄"를 낳고 그는 이 부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임을 충분히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무율법주의자들이라고 그 삶을 막 살았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무율법주의자들이라고 비난받았던 이들도 충분히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무율법주의 신학이 윤리적 부재를 낳았다"는 해석은 잘 못된 것이다. 최근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하나님을 고백하는 찬송의 신학"이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는 신학"으로 변질될 때 나타나는 일이 윤리의 부재일 뿐이다. 물론 사상적 신학적 약점들은 한두 세대가 지나며 그 문제점들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김성수 목사의 주장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라 "율법=은혜"라는 개념이므로 그의 신학적 틀은 율법무용론이나 구원파의 주장과 전혀 다르다. 다만 개혁주의자들과 언약신학에서 그의 주장이 새로운 것이므로 이전의 틀에 쑤셔 넣으려 하기에 나타나는 오해일 뿐이다.
- 그가 구약성서의 진술을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해석해내기 위하여 도입한 방법론은 "히브리어의 파자"이다. 고대 셈어족군의 언어들이나 한자와 같은 경우에는 그 어휘의 의미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형성사를 추측하는 방법론으로 "파자"를 사용한다. 물론 이 방법론은 추측에 의한 것이므로 다른 것들(문장과 어휘의 표면적 의미들)에 비해 이차적인 그리고 보충적인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경의 히브리어가 보다 고대에 형성된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히브리어나 아람어등의 셈어족의 시적, 예언적, 문학적, 상징적 성격을 잘 활용하고 있으므로 성
경해석에 "파자"의 도입은 무척이나 신선하다. 보통 구약의 주석에 히브리어 알파벳의 음가의 유사성을 이용한 언어유희나 숫자의 표현과 더불어 파자의 결과로 추측된 어의들이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설교에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왔기 때문이다. 최근 유대인 랍비들이 강론을 할 때,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창하며 히브리어의 공용어로서의 회복까지 주장하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신학을 공유하는 분파들에서 파자라는 방법론이 연구되어 사용되기는 하지만 설교에 무게감있는 논증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드물고 일반적의 사용자들의 주장과 다르게 그는 세대주의적인 이스라엘 회복론자들의 종말론을 극강하기 반대하는데에 그 사용의 독특성이 있다.
그의 고대언어들에 대한 전문성과 이를 해석에 접목하여 이해한 논증은 그의 신학에 뭔가 끌리지 않는 요소를 느끼면서도 섣부르게 공격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거기에 인문학적 소양과 철학적 소양들은 더더욱 그를 쉽게 건드리기 어렵게 한다. 사실 그의 해석학적 방법론 자체를 창의적인 것으로 받고 이를 연구하면서 비판한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비판자들의 게으름은 참담해 보인다.
- 그의 신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요소는 기존 전통 신학들이 중요하게 견지해오던 "성화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부분이다. 그리고 그는 질문한다.
"인간이 변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그는 "변할 수 없다!"고 단호히 답변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 그는 진리의 여정에서 "과연 지금까지 교회가 말해오던 그런 의미의 성화가 인간에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성화론의 깊이 없음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말하는 "진리"가 여정으로 이해되기 보다 그가 시작하였던 초기의 개혁주의 술어들 속에서 지칭하는 바로서 "무시간적 진리"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오해의 소지는 분명하다. 그가 "진리의 여정"에서 발견한 것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착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 선행이 일어난다면 그 선행은 전적인 선물이고 은혜일 뿐이다. 이 주장은 인간의 본성이 결코 변화될 수 없다는 이해이다. 칼빈주의/개혁주의 성화론에서 인간의 본질은 완전에 이를 수 없지만 인간의 본성은 은혜로 거룩해져 갈 수 있다고 이해하고, 웨슬리안 성화론에서는 이 인간 본성이 성령의 2차적 은혜로 관계적 완전으로 사랑의 온전함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이해하는 전통의 성화론들에 극심한 반기를 든 것이다.
그런데 이 그의 주장은 "진리의 여정에서의 질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간의 성화론들의 해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을 결코 반영해주지 못하고 거짓된 신앙으로 이끌어 간다는 합당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여정 중"이었다. 이전까지의 성화론에 도전하였지만 새로운 성화론을 제시하는 데로 나아가지는 못했고 그저 "견디어 내는 일" "버티는 일"로 비유했으며 "하나님께 밀려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나님께 밀려가는 방향을 보다 잘 규명하였다면 그는 성화론의 질문만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겠지만 그의 사명은 아니었다.
- 더불어 그의 논증에 등장하는 철학적 문헌들(노자, 불교, 헬라 철학...)이나 문학의 언급들은 그의 주장이 마치 이 땅에서 역사적 삶이 무가치하다고 들릴 여지를 강화한다. 그리고 그의 이 역사 너머의 진리는 마치 플라톤적 이데아와 레테의 강 너머 아레테를 연상시킴으로 그의 주장이 영지주의라는 오해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에서 등장하는 초대교회나 영지주의에 대한 서술이 주류 학문 진영의 논의가 반영되지 않은채로 보수적 입장의 주장을 그대로 차용함으로 그의 논증이 오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 결과 그의 주장이 그가 마치 역사와 이 땅에서의 삶을 무시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는 지점은 가능한 주장으로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차원으로서의 "하늘"과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한 그의 치밀한 강조는 매우 돋보이는 강조이다.
이러한 논증을 곡해하지 않는다면 "주여 어서오시옵소서"라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백을 오늘로 가지고 오는 좋은 초청이다. 이 땅의 성공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그분의 주권적 이끔을 따라 떠나는 "나그네성"의 강조는 오히려 땅과 역사에 덕지덕지 기대를 걸고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그의 설교의 중요한 무게이다. 오늘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리고 오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처럼 살도록 하는 그의 수사학이 영지주의로 오해되는 일은 무척 슬픈 일이다. 그리고 그의 자살이라는 "사고" (어떤 이들은 이 것을 그의 염세적 사고에 대한 당연한 결말로 이해하겠으나...)는 이러한 생각에 타당성을 부여해 주는데 어쩌면 그 자신은 분명 천국을 향한 소망의 간절함과 땅의 역사가 주는 무게감에 끼여 방황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설교의 수사는 분명 하늘을 향한 성도의 소망에 무게감을 둔 것이었지 역사의 무가치함에 강조를 둔 것은 아니다.
- 그는 기존에 당연히 생각없이 받아들여지는 "부활," "승천"과 "재림"을 "하늘"과 "영원"이라는 "차원"개념을 사용하여 보여주는 기초적인 생각들을 열어주었다. 이 부분에서의 그의 연구와 논증은 무신론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에 매우 중요한 패러다임이다. 그의 설교가 무신론자 지식인들에게 종종 잘 전달된다는 것들은 이를 방증한다.
그의 이러한 그리스도를 향한 상징적 해석들은 지독하게 "근본주의적 성경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오히려 성서비평을 통한 성경해석의 함의들을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2) 그의 진리의 여정에서의 도전과 더불어 신학적 한계들 또한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의 한계는 그가 시작한 "신학의 배경"과 그의 설교가 일어났던 "기독교회의 구조"에 기인한다.
- 그는 개혁주의 신학노선에서 그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발견들은 개혁주의 노선을 벗어나는 보폭을 보여주지만 그가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들의 한계는 여전히 그의 이해의 발목을 잡았다.
먼저 그가 "영원" "하늘"이라는 하나님의 차원을 설명하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에 그리고 "예정" "작정" "창세전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을 설명하는 어휘들을 사용하였을 때에 그의 어휘는 "무시간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변화 없는 개념" 속에서 사용되었다. 그의 이러한 한계는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하면 선언할 수록 "운명론적 세계관"과 "하나님의 예정"이 분리되지 않는 극단적인 칼빈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그는 "진리"라는 단어 또한 "여정"과 분리되어 사용함으로서 그의 주장을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에서의 고백"이라는 전달보다 "확정적 진술"로서의 무시간적 진리를 의미하게 하였다. 그래서 사실상 그는 하나님의 자리를 남기려는 질문의 부르짖음도 전달이 일어났을 때 교리적 진술로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그에게는 여정이었던 것이 청중들에게는 교리로 전달되기 쉬워지는 근본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달에 있어 "깨닫는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여 청중들이 신앙의 문제를 깨닫는 자리에 머무르게 선동되었다. 그가 몸으로 살아내는 신앙을 "하나님께 밀려가는 생애"로 표현하지만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과의 연결성이 상대적으로 약하여 청중들이 신앙양태에 왜곡이 가능한 전달이 되었다.
- 이상의 신학적 한계들보다 심각한 문제와 위험은 그의 설교가 일어난 "기독교회의 구조"가 여전히 그를 "목사"라는 위치에서 "설교"를 통해 그가 만난 그리스도를 선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목사와 성도들의 지식의 불평등에 분개하고 성경교사로서의 삶에 헌신하였다. 그러한 그의 의도와 별개로 그가 "설교자" 자리에 서게 됨으로 그의 전달은 나눔이 아닌 일방적으로 "가르쳐 줄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철저히 고립되었고 그가 만나고 깨달은 그리스도의 진리는 성도들에게는 이해하고 살아내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몸으로 체득되지 않은 진리는 오해되고 왜곡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 것이 청중들에게 영적 교만이 되는 것은 뻔한 이야기가 되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주변 교회들의 반응은 당연히 김성수 목사를 향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된다.
- 김성수 목사님은 설교자로서 비교적 자기 깨어짐의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솔직한 사람이었고 말씀이 자기부인과 그리스도로 사는 길을 가는 공동체를 창조하기를 소망하였지만 "설교"라는 형식과 "설교자"라는 위치는 이 모든 메세지를 왜곡하였고 그의 날카로움과 깊이만큼이나 치우침의 위험성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더불어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했을 것이며 그의 천재성과 교사적 열정은 그의 정신질환을 더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공동체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성도들에게 슈퍼맨이 되기를 요청받은 그는 더더욱 고립되어 하늘을 그렸을 것이다. 더구나 교회의 일정과 그의 편집증적인 교사로서의 열정은 그의 물리적 쉼을 박탈하였을 것이고 그의 가족에게 그 피곤함의 병적 증상들을 쏟아졌을 것이다.
5. 결어: 나는 김성수 목사님을 앞 세대 교회의 부산물들 속에서 진리를 찾는 여정의 길을 가다가 공동체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한 전우로 생각한다. 그의 온전치 못함은 우리의 아픔이다. 혹 나의 견해가 김성수 목사에 대하여 관대한 이유가 궁금한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글쎄 나의 제한된 이해 안에서 김성수 목사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떠나는 선택을 해 온 사람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때문이고 나 스스로가 뇌의 기질적 병변(자우뇌 불균형으로 인한 주의력 결핍 우세형 ADHD)을 겪으며 이해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가 관심이 없거나 이해가 안되는 분들, 혹은 내 글 자체가 이해가 안되는 분들은 나의 글을 읽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내용에 관심이 있거나 혹 그 설교가 자신을 염세적으로 비관적으로 만들어버렸다면 거기 머물러 서 있지 말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더 나아가기를 기도한다.
난 참고로 김성수 목사님의 메세지와 허운석 선교사님의 메세지를 거의 같은 것으로 이해하며 현 기독교 세계에서 껍질깨기의 과정들이라고 생각한다. 김성수 목사님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허운석 선교사님은 은사주의, 신사도운동에서... 그들은 앞 세대의 공동체 없음으로 부터 어렵게 어렵게 길을 가셨다.
나는 바른 공동체에서 바른 진리로 살아내는 여정을 가는 이들이 많아져서 쓸데 없는 고난없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적극적인 고난의 길에 순례하는 증인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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