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14, 2015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1. 카이로스에 대한 이해. 

헬라어에는 '시간'에 대한 3가지 중요한 용어가 있다. '매우 긴 시간, 영원한 시간'을 뜻하는 아이온 속에 크로노스가 있고, 크리노스 속에 카이로스가 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부분적으로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특히 '일정적인(calendrical) 의미로 인생의 시간의 한정된 지속에 대한 진술'이 있는 곳에서 이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시간의 기간 period of time'을 나타내는 반면, 카이로스는 자주 '결정적인 순간이나 시간(때), 종말론적으로 찬 때'을 가리키며, 따라서 '위기의 시간(때), 적합한 시간(때), 좋은 기회'라는 의미도 지닌다. 

카이로스는 인간의 카이로스와 하나님의 카이로스로 양분되는데, 인간이 인간을 본위(本位)로 한 자리에서 인간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마련되는 인간의 카이로스로는 세속사(世俗史) 곧 인간의 일반 역사가 형성되고, 하나님이 하나닙의 계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로는 구속사(救贖史) 곧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歷史)가 이루어진다. 

끝없이 흘러내려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役事) 하나 하나의 합(合)이 '구속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경우 카이로스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다(행 l:7).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카이로스’에의해서만 사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의 일체는 곧 ‘구속사’였다.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의한 삶과 인간의 카이로스에 의한 삶의 대조를 요 7:6-8이 잘 보여주고 있다.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카이로스)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예수의 형제) 때(카이로스)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카이로스)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아니 하노라.” 

여기서 '너희 때'란, 아직 결정적인 신앙이 없이 세상에서 자기 본위로 살고 있는 '예수님의 형제들의 때' 인데, 이는 곧 ‘인간의 카이로스'를 말씀하신다. '나의 때'란 하나님이 정하여 주시는데서 만이 행하게 되는 '예수님의 때'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카이로스’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예수님은 그의 형제들을 향하여 인간 본위로 사는 너희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때는, 너희들의 뜻에 의하여 항상 열려 있으나 하나님 본위로만 사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야 하는 때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란, 하나님의 카이로스로만 이어지는 삶을 지향(指向)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어져야 한다. 카이로스는 구원사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심판의 때"와 "마지막"의 개념을 표현하는 확립된 용어이다. 

신약성경에서 카이로스는 때때로 '운명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시점'(참조, 막 1:15), 예를들면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의 카이로스를 인정하지 아니했다(눅 19:44; 참조: 막 12:56; 마 16:3-4). 예수님의 카이로스는 그의 죽음의 때(time)이다(마 26:18). 이 용어는 귀신을 제어하는 메시야적 권능의 시작(마 8:29), 신자들에 대한 박해(벧전 4:17), 막는자의 능력의 옮김(살후 4:17), 신자들의 판단(고전 4:5), 죽은 자에 대한 일반 심판(계 11:18)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카이로스는 요한 계시록의 독자들의 생각을 이러한 주제들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위기나 심판의 때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신 카이로스라는 시간을 바로 인식하여, 보다 가까와진 '세상의 종말 및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새로운 각성을 하고, 그리고 이 각성을 바탕으로 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2. 신약성경에서 카이로스의 용법 명사 카이로스는 신약성경에서 8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카이로스는 ① '결정적인 순간이나 싯점'을 의미하며, 항상 명시적이 아니지만 그 순간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행 24:25는 예외). 모든 기독교적 시간 개념의 결정적으로 새로운 구성하는 요소는, 예수님의 강림과 더불어, 다른 모든 시간에 특성을 부여하는 카이로스가 동텄다는 확신이다. 

막 1:15은 이것을 프로그람적인 방식으로 명백하게 한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선포의 핵심은 '성취의 시간이 동텄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이미 나타났으며, 곧 그 결정적인 도래를 개시하는 재난이 닥칠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시간을 활용하라 그것은 생사(生死)의 문제이다'(J.Jeremias)는 것이다. 

이러한 카이로스는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하나님의 성취이다. 선지자들이 바라던 은혜의 때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실현되었다(롬 3:21; 벧전 1:11). 예수님의 삶 및 특히 고난과 죽음과 더불어 옛 시대는 지나갔으며, 진정한 하나님의 의의 뉜 카이로스(롬 3:26)와 더불어 신기원, 말하자면 '시대의 성취'가 동텄다. 예수 기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5:21; 요 3:16; 요 10:27 이하). 따라서 결단의 중대성이 새로이 커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러 오신 그 독특한 카이로스를 알지 못했다(눅 19:44). 무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존재하는 카이로스의 결정적인 성격을 깨닫지 못하였다(눅 12:56). 

② 예수님의 육체적 임재가 모든 구체적 오늘(Today)을 하나님의 구원의 빛 속에 담그듯이(눅 13:32; 눅 19:5, 눅 19:9; 눅 23:43; 눅 2:11) 승귀하신 분과의(참조: 눅 22:69) 신앙의 관계를 통해서 그의 구속하시는 능력이 이제로부터 계속하여 인간들의 생활 속에서 유효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이다'(R.Bultmann; 참조: G.Delling). 

부활 이래 다음과 같은 선포가 중요성을 지닌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카이로스 유프로스데크토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참조: 사 49:8). 예수님의 카이로스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말미암아(Stauffer) 구원을 제공하는 지금(Now)은 계속하여 새롭게 결단을 요구하는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말씀(Word)의 선포의 "지금"(now)은 계시자(Revealer)의 도래의 "지금"과 정확하게 상응하며, 이는 또한 일정한 시간의 한 역사적 사건의 "지금"이며, 기회의 "지금"이며, 한 주어진 시간에 구체적 사건으로서 말씀을 전파함으로써 예수님이 계시자가 되는 그 "순간"(moment)인 것이다(Bultmann).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에 순종한 것과 같이(참조: 마 4:20, 마 4:22; 막 1:18) 

각 사람도 이 선교적 선포에 지체하지 않고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모든 사람에게는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시간과 장소는, 사랑의 시간이요 이 사랑을 경험하는 장소임을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이 주어진다(Fuchs). 그들은 오늘을 내일로 연기함으로써 이 결단을 회피치 말아야 할 것이며(Philo, Sacr. 69 참조), 그들이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다시 말해 하나님 없는 존재에로 그들의 뜻을 강화시키지 말아야 할지니(참조: 히 4:7, 히 4:15) 이는 그들이 예루살렘처럼 "화"(Woe)의 평결하에서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눅 19:44). 

③ 종말과 현재의 성취의 동시성은 사랑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행동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신자는 이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시기를 분별해야 한다(눅 12:56), 이 시기는 자다가 깰 때이다(롬 13:11). 신앙은 시간을 마음대로 현명하게 활용할 윤리적 책임을 면제하지는 않는다(갈 6:10; 골 4:5). 진실로 그와 같은 책임이 있으니, 선지자들은 "시간을 사라"(엡 5:16)는 명령법 어구와 더불어 역사적 시간을 할당 받았다. 이 시기는 복을 받는 시기이기도 하지만(막 10:30), 고통의 시기이다(롬 8:18). 이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의 순간에(눅 8:13) 타락하지 않도록 서로를 권면해야 한다(딤전 4:1; 참조: 히 3:12이하). 

④ 예수님 자신의 삶은 카이로스의 요구에 지배를 받는다. 예수님은 때를 분별하고 따라서 결정하신다(요 7:6, 요 7:8). 이 카이로스가 단순히 호의적인 기회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은 성부로부터 오는 그 때를 기다리며, 따라서 참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마지막 특히 카이로스 하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신 카이로스를 보고, 붙잡고, 받아들이며 때가 가까왔다고 말씀하신다(마 26:18). 따라서 그 때는 "적절한 때"이다(롬 5:6). 

(b) 때때로 카이로스는 특별히 그 내용과 관하여 '특별한 결정적인 순간이나 시점'을 나타낸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사실이 강조되나 사람이 한 결정이라는 의미는 크게 약화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로고스가 출현할 때(딛 1:3),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할 때(딤전 2:6),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딤전 6:15), 그의 백성들의 수확시기(갈 6:9)를 정하신다. 

이러한 종류의 다른 카이로이 중에는, 즉 하나님의 계획의 전개에 있어서의 특별한 시점들로는 귀신들을 제압하는 메시야의 권세의 시작(마 8:29), 임박한 심판의 시작(벧전 4:17), 카테콘("막는 것")의 권세를 제거하기 시작하는 때(살후 2:6), 최후의 심판의 시작(고전 4:5; 계 11:18) 등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때를 헤아릴 수가 없다(막 13:33; 살전 5:1; 행 1:7); 하나님만이 그러한 때를 주관하신다. 카이로스는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가 될 수도 있다(눅 21:8; 벧전 5:6; 계 1:3). 그러나 카이로스는 또한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의 개별적인 시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딤후 4:6; 눅 1:20). 

(c) 카이로스는 
① '짧은 시간'에 대해 사용되었다. 눅 21:36; 엡 6:18,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도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롬 9:9(창 18:10에 근거)에서 한번 특별한 '기간, 기한', 마 24:45; 눅 12:42에서 '일정한 시간', 막 12:2과 병행구에서 '정한 때', 마 13:30; 마 21:34; 막 11:13; 행 14:7에서 자연적 사건들의 '때'을 나타낸다. 
② 카이로스는 '시간이 연속이나 얼마간의 시간'에 대해 사용되었다. 예를들면, 사람이 '정한 시간'(살전 2:17; 고전 7:5), '불확정한 시간'(눅 8:13), 하나님이 정한 시간(눅 21:24; 고전 7:29; 계 12:12), '생의 일부분'(히 11:11), 연대(행 17:26; 엡 1:10),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 생의 부분(엡 2:12), 현재 시간(막 10:30)을 나타낸다. 

(참조: Walter Bauer; G.Delling; H.C.H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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