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ugust 19, 2015

신은 존재하는가? / 이창용 목사

신은 존재하는가?  / 이창용 목사

아직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를 예배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는 영역이 확대되면서 현대인들은 인간의 모든 일을 신과 연관시키던 태도로부터 차츰 떠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의 태도 변화는 인류의 문화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세속화라 한다.

세속화된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의 문제와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신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앙인들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처럼 인식되고 있다. 자신의 나약성을 감추기 위해 신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이라고 신앙인들은 간주되고 있다. 학교의 교과과정 그리고 강의 내용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이러한 세속화의 영향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과학적 지식과 물질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정신적으로 공허해지고, 무력감과 심리적 압박을 깊이 느끼고 있다. 범죄율은 날로 높아가고 자살율도 증가하고 있다. 인간들은 가공할 무기 체계를 개발시켜 대량학살을 서슴지 않고 있다. 과거에 비하여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이 신을 잠시 잊을 수는 있어도 인간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을 마련해줄 종교적인 전망을 더욱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이 신을 망각할 수 있으나 신의 문제는 인간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과제임에 틀림없다.

1. 다양한 신관

역사적으로 볼 때 인류는 신의 존재에 대하여 매우 다양한 태도를 취해 왔다. 여러 신을 믿는 다신론(polytheism),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atheism), 한 신만을 믿는 유일신론(monotheism), 신의 존재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불가지론(agnosticsm)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신관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신 관

개 요

⑴ 무신론(atheism)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신념

⑵ 불가지론(agnosticism)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존재 유무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신념.

⑶ 유신론(theism)
신의 존재를 믿는 신념.

1) 다신론(polytheism)
많은 신들의 존재를 믿는 신앙

2) 일신론(theism)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

① 범신론(pantheism)
모든 우주 만물 안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신앙

② 이신론(deism)
태초에 이 세상을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 운행 되도록 창조하신 신은 더 이상 자연 세계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는 신이라는 신념

③ 유일신론(monotheism)
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신은 오직 한 분이라는 신앙.

고대 희랍인들은 제우스를 비롯하여 많은 신들을 믿었다. 인도의 힌두교인들도 비슈뉴, 쉬바 등 여러 신들을 믿었다. 이와 같이 고대 세계에서는 다신론을 신봉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반면에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숭배하고 있다. 무신론자 중에는 니이체, 사르트르와 같이 인간의 비극 즉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에 대하여 침묵하는 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 스스로의 생애의 의지와 참여를 강조하였다.

이신론은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에서 특히 유행하던 신론으로서 이 세계를 질서정연한 우주로 보고 이러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있으나, 그는 인간과 우주의 운행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 신이라고 믿었다. 과학자 뉴톤과 같은 사람들도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였으며, 자연과학이 종교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전하도록 했다.

동양의 종교들은 신관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 나라에는 "천"사상이 보편적으로 전파되어 하늘에 대한 숭배감을 고취시켰고, 황제들은 이 하늘의 아들들인 천자로서 존중되었다. 특히 우리 나라의 삼국유사에는 하늘이 환웅이라는 인격적 개념으로 나타난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이 이와 같이 '한울님'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었으며,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거부감을 갖지 않은 것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기저에 인격적인 신관의 하나인 '한울님' 사상이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농어촌 지역에 가서 전도하면, 사람들로부터 한결같이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반응을 자주 듣는다.

불교의 경우에는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라 신관을 다양하게 해석한다. 모든 것을 비우는 공(空)또는 무(無)가 곧 신이라는 해석자들이 있는 반면에 그것들은 결국 모든 존재자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신론이라고 부르는 해석자도 있다. 그러나 서양적인 사유 체계의 입장에서 불교의 신관을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특히 불교 자체 내의 여러 분파들을 생각해 보면 신관을 쉽게 정의할 수 없다. 불교에는 수양을 통한 자력 구원이라는 면이 강하나, 아미타 분파에서는 미륵불에 의한 타력 구원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같이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한 분이면서도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세 인격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유한성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비어 인간이 되심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찾아 오셔서 인간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신관은 가족적인 표상을 강조하고 인간을 사랑하시고 또 스스로도 사귐과 교제 가운데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한다.

2.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철학적 논증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사색을 하여 왔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목적론적 논증(teleological argument)

이 우주는 질서정연하다. 누군가가 이 질서 정연한 우주를 설계하고 만들었으며, 이 설계자가 곧 신이라고 하는 입장이 목적론적 신존재 논증이다.

만일 사막에서 컴퓨터를 보았다고 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모래가 바람에 휘날리고 퇴적을 거듭하면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가 지능을 소유한 존재가 컴퓨터를 설계에 의해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물며 컴퓨터 보다 더 정교하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우연히 발생했으리라고는 확률적으로나 과학적인 상상력으로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목적론적인 신존재 증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

2)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

이 우주에는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다. 만물이 움직이는 운동은 누군가에 의해 시발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고, 부모님들은 조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 만일 이러한 결과들의 원인을 소급해 가면 결국 최초의 원인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최초의 원인자가 곧 신이다. 이것이 우주론적 논증이다. 목적론적 논증은 우주론적 논증의 일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의 주장이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위대한 신학자가 이 논증을 체계화 시켰다.

3)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안셀름이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을 "그 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가 머리 속에 상상으로만 존재한다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 보다 위대하지 못하다. 따라서 그러한 존재는 상상 속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신이라는 존재는 실제로 존재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존재이다. 이것이 안셀름의 유명한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이다. 철학자 데카르트, 파스칼 등은 이 논증을 열렬히 찬동했다. 그러나 버트란드 러셀과 같은 철학자는 이것을 비판했다.

4) 도덕론적 논증(moral argument)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앞서 설명한 신존재 증명들이 논리적으로 많은 비약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 이성은 시간과 공간 등과 같은 유한한 범주를 통해서만 이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면 그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무한한 신이 아니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신의 존재는 실천적으로 꼭 요청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도덕률이라는 궁극적인 법이 있는데 이 법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 만일 악한 사람이 계속 권력과 부를 누리고 선한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세계가 계속 된다면 어떻게 선과 악의 법이 효력이 있겠는가? 분명히 인간에게는 선과 악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도덕률이 성립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이 나지 않고 불멸해야만 악한 자가 심판을 받게 되고 선한 자가 축복을 받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들을 보장해 주는 절대자인 신이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이렇게 도덕률이 충족되기 위해서 인간의 삶의 세 가지 근본적인 원칙(자유, 영혼 불멸, 신)을 요청하면서 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네 가지 외에도 많은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이 시도되었으나, 바르트에 의하면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은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이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이론들이라고 말했다. 신앙이란 합리적인 이해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어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존재증명

1) 목적론적 논증(teleological argument)
2)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
3)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4) 도덕론적 논증(moral argument)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안셀름, 데카르트, 파스칼
임마누엘 칸트

3. 기독교의 하나님

성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나는 주체자가 된다. 마치 자녀들이 부모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효가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효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법을 따르고 모든 일들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론적인 무신론자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두려운 것이다. 입으로는, 또는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나 실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악을 행하면 그는 실천적인 무신론자인 것이다. 이러한 무신론이 인류에게 더 큰 비극을 가져다 준다. 그럼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의 속성

비도덕적 성품(하나님만이 가지신 성품)
도덕적 성품(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가진 성품)

(1)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2)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3)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4)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무소부재).
(5)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6)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1) 인자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2) 성실 :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3) 의로움 :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4) 판단 : 하나님은 공정하십니다(하나님의 공의로우심).

1) 스스로 존재하는 무한하신 하나님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유한하지만 신은 무한하다. 인간은 죽지만, 신은 영원하신 분이다. 삶의 무상성과 유한성은 모든 종교가 해결하려고 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유한성 앞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하고 동요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며, 유한한 인간의 생명을 그 무한의 품안에 품으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참 평화와 안식을 얻도록 한다. "하나님, 내가 당신 안에서 평안을 발견하기까지는 나의 마음에 참 안식이 없었나이다"라고 설파했던 성자 어거스틴의 말은 이러한 인간의 삶의 무상성을 넘어서는 신앙의 힘을 웅변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인간과 만물은 누군가에 의존하여 생명이 잉태되고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고,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시다. 이 세상은 신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으나, 신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한다.

2) 창조자 하나님

창조란 무에서 어떤 것을 있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 무로부터 이 세상의 존재들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쓰여 있다.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고 이 우주의 존재들을 하나하나 말씀으로 만드셨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셔서 하나님의 관리자로서 이 세상 만물을 가꾸고 경작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서로서로 사랑하도록 만드셨다. 이 세상은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어떤 근본적인 목적을 갖게 된다. 인간도 우연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의 본래의 목적은 이 세상의 생명을 관리하고, 서로 사랑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관리자여야 할 인간이 만물의 주인 행세를 하고 땅과 생명을 자신의 마음대로 처리하는 순간에 인간은 파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서로 사랑하여야 하는 존재인데 증오하고 살인함으로서 무서운 폭력과 살육의 역사가 전개되어 왔다. 하나님과 같이 주인이 되려는 인간의 교만이 이 세상을 마음대로 파괴하고 살육하는 죄인으로 바꾼 것이다. 인간이 창조자가 아니라 관리자로서의 위치를 지키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이루어 질 수 있다.

천지창조

첫째날
빛(낮과 밤)

둘째날
궁창, 궁창 위의 물, 궁창 아래의 물

셋째날
땅, 바다, 채소, 과목

넷째날
해, 달, 별

다섯째날
물고기, 새

여섯째날
짐승과 육축, 기는 것, 인간

일곱째날
안식하심

3) 인격자 하나님

유대교 철학자 마틴 부버는 참된 관계를 맺음으로서만 모든 존재는 그 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상대방을 이용하고 상품처럼 대하는 나-그것(I-It)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인격적인 나-당신(I-Thou)의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자기 실현의 참된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버지"(abba)라고 호칭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 혹은 노예로 대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들·딸로서 만나 주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하나님이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기계처럼 대했다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책임을 올바로 수행했더라면 인간의 운명은 달랐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남용하였던 결과이다.

4) 인간이 되신 하나님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스로를 인간에게 보여 주실 수는 있다. 인류의 역사에 이러한 사건이 꼭 한번 일어났다. 즉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유대라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예수라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가 자라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12명의 제자들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그들의 증거를 듣고 인류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따랐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자기 자신들과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신 사랑의 교훈을 마음 깊이 존경했고, 마지막 모함에 빠져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의 형틀에 달렸을 때 그들은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는 어두운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과 천대와 멸시를 받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삶의 비전을 찾았고,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 생의 깊이를 통찰할 수 있었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불사했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그들의 생이 바뀐 것을 깨달았으며, 이제 그들의 인생은 후회할 것이 없는 의미로 가득 찬 인생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통하여 세계도 변화되었고, 유럽과 미국,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참다운 삶의 길이 있음을 깨닫게 했다. 이러한 변화된 삶이야말로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구체적인 표식이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라는 질문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그들의 변화된 삶으로 답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알아야 한다.

한 때는 하나님 없이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자신의 삶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이 세상에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지중해 지역에서 예수의 사랑, 희망, 믿음을 전한 사도 바울의 생애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 주었고, 인도의 가난한 어린아이들과 함께 자신의 생을 보낸 테레사 수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위한 의료 선교를 했던 슈바이처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이 세상에 증언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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