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 정용섭 목사
에베소서 5:15-20 (2015년 8월16일)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저는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거기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집니다. 그들도 지금 우리와 똑같이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가난하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병들면 모든 게 귀찮고, 자식들이 잘되기를 학수고대 했습니다. 인생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쁜 일들도 많았겠지요.
성경에는 이런 일상이 자세하게 언급되지 않습니다. 대개는 하나님과 교회에 관한 이야기뿐이어서 자칫하면 구체적인 삶을 놓친 채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적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서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바탕에 두고 성경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엡 5:15-20절도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신앙적인 덕담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단어들을 보십시오. 지혜, 세월, 악, 주의 뜻, 술 취함, 성령 충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감사 등등입니다. 에베소서 기자가 이런 단어들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지금 기독교인다운 삶의 태도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15절에서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 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삶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데, 이런 내용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헬라와 로마와 유대 선생들은 다 지혜를 역설했습니다.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지혜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갖춰야 할 기본적인 삶의 태도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도 지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16절에 나오는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잘 알려진 경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이런 일반적인 가르침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만의 고유한 삶의 태도를 17절에서 확실하게 짚었습니다. 지혜롭게 살고, 세월을 아끼며 사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주의 뜻’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주의 뜻을 아는 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걸 오해하는 경우도 많고, 주의 뜻이라는 말 자체에 마음이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주의 뜻 운운할 정도로 지금 세상살이가 한가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밤새도록 인터넷 게임에 빠진 학생들이 학교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듯이 기독교인들도 세상살이에 마음을 많이 빼앗겨서 성경이 말하는 주의 뜻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저는 주의 뜻을 이해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옳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야만 실제로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자로서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주의 뜻’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일까요? 주의 뜻은 어떤 물건이나 상품처럼 고정되어 있거나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저절로 알아지는 게 아닙니다. 여기 시(詩)나 미술을 공부한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시와 그림의 세계가 저절로 우리에게 열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주의 뜻’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술취함과 성령 충만함
성경이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 18절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령 가득한 삶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뜻을 아는 바른 길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성령 충만함과 술 취함이 대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이 술 취함을 특징으로 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성령 충만을 특징으로 합니다. 취한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힘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방식으로 자기를 초월하게 됩니니다. 예술가들에게서 이런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가수들은 마치 무당의 신들림처럼 자기 자신을 망각할 정도로 음악소리에 빠져듭니다. 음악소리가 그들에게 아주 강력한 에너지로 작동됩니다. 이런 특수 분야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 자체도 취함이 없으면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돈에 취하고, 건강에 취하고, 취미생활에 취하고, 가족에게 취합니다. 그런 것으로 충분하지 못한 사람들은 간혹 마약에 취하곤 합니다. 맨 정신으로 세상을 버텨내기가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련의 현상을 가리켜 본문은 술 취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령 충만함도 현상적으로는 술 취함과 비슷합니다. 술 취한 사람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도, 즉 성령과의 존재론적 일치를 이룬 사람도 자기를 초월하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삶은 없습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성령에게 모든 삶의 토대를 맡김으로써 그는 그 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좌고우면 하면서 계산하기에 바빴던 삶이 아주 단순해집니다. 삶의 ‘껍데기는 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민감하게 됩니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로는 얻을 수 없는 존재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제야 그는 실제로 삶을 사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다른 것에 떼밀려 지낸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성령 충만이 모든 문제 해결의 마스터키와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와 같은 삶을 원하실 겁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 충만함이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외형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구분되긴 하지만 깊이에서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선 외형적인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19절은 이렇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여기서 시는 시편이고, 찬송은 찬송가이고, 신령한 노래는 영가입니다. 이건 모두 예배 때 사용하는 노래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를 드리면서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냥 부르는 게 아니라 화답하는 방식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곧 예배를 가리킵니다. 영어 새번역 성경은 ‘너희가 함께 만날 때’라는 표현을 첨가함으로써 이 구절이 예배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더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성령 충만함을 경험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서로가 성령 가득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드린 공동기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단락만 여기에 인용하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미래가 되시며, 우리 믿는 자들의 운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주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의 삶에 신비한 방식으로 함께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런 기도문을 성령에 취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 읽을 수 있을까요? 입술로만 읽는 신자들을 제외하면 우리는 모두 성령에 취한 사람들입니다. 성시교독과 헌금과 모든 찬송이 다 그렇습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런 예배에 꾸준히 참여하는 것이 성령 충만함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고 그 깊이를 알려면 그 음악을 꾸준하게 듣고 공부하고, 또 클래식 연주장을 찾아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거룩한 콘서트와 같습니다. 성령에 취하여 시편을 교독하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한 누릴 수 있는 절정의 생명 경험입니다. 그래서 이를 성령 가득한 삶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성령 충만의 두 번째 요소인 내면적인 것을 엡 5:2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1)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 행위는 단순히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가 달린 문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영혼의 깊이에서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감사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감사헌금 드리는 것쯤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처럼 큰 착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돈이 필요 없습니다. 전체 세계가 하나님에게 속했는데, 일부를 하나님께 바친들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생명과 구원 사건 앞에 바로 선다는 뜻입니다. 바로 서려면 바로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놀랄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자신을 다 바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죽음마저 용기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께 속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2) 본문은 그 감사가 범사에, 그리고 항상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굴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만 보면 이건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감사는커녕 하루에도 수없이 불평불만에 빠져듭니다. 평생 성경과 신학과 교회와 예배와 설교에 매달리듯이 살아온 저도 흔들림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살지는 못합니다. 작은 일에도 일희일비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 자신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개인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범사에 항상 감사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경우에 따라서 불안해 하셨고, 화를 내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는 말씀은 범사에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라는 뜻이라고 봐야 합니다. 앞에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서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 때만 범사에 항상 감사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그게 바로 성령이 가득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내면적인 태도입니다.
3) 본문은 한 걸음 더 나가서 감사의 삶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만 이런 삶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단어가 여기에 세 개 나옵니다. 예수는 자연인 예수의 이름입니다. 고유명사에요. ‘주’는 말 그대로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주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권력자를 가리킵니다. 당시에 주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즉 구원자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면 감사의 능력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그의 이름으로 감사하라는 말은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생명의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큰 감사의 조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이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른 조건들을 굳이 찾으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이런 삶을 가리켜 본문은 성령이 가득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영적 통찰이자 가르침입니다.
프뉴마
‘성령 가득한 삶’은 접어두고, 성령이라는 말 자체를 낯설어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정 목사가 성령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하는데, 도대체 성령이 뭐지, 하는 겁니다. 기독교 교리를 어느 정도 아는 분들도 성령을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성령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도 막연하고 낯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실질적으로(real)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설교를 정리해야 할 이 순간에 갑자기 난감한 생각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하는 성령을 신자들을 실감하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면 저의 설교는 헛수고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거기에 기초한 다른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설교가 뒷걸음치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오늘 본문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령 개념을 설명하겠습니다.
엡 5:18절에 나오는 성령은 헬라어 프뉴마의 번역입니다. 프뉴마는 원래 바람, 숨, 공기를 가리킵니다. 고대인들은 바람을 신비한 능력으로 경험했습니다. 일반적인 사물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보이지 않는데도 강한 힘으로 나타납니다. 바람의 온도에 따라서 봄이 되어 식물이 살아나기도 하고, 가을이 되어 식물이 죽습니다. 고대인들은 바람과 같은 어떤 힘이 사람의 마음도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별로 배운 게 없는 사람인데도 세상을 정확하게 뚫어보는 것은 분명히 프뉴마의 활동인 거지요. 전쟁에서도 이 프뉴마가 활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생명의 영으로 인식하고 경험하고 믿었고 선포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죽는다고, 그리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인식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전혀 인식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런 성경의 전통에 따라서 오늘 본문이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 겁니다. 저는 이런 이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성령이 가득한 삶을 원하시나요? 생명의 영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기를 정말 원하십니까? 또는 안타깝게도 평생 누구를 뜨겁게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런 삶에 목말라본 적이 없는 건 아닌가요? 그런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을 오늘 본문은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드려지는 예배를 영혼의 깊이에서 경험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부활 생명을 영혼의 깊이에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길을 함께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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