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16, 2016

달란트 비유에 대한 오해 / 김곤주 목사

달란트 비유에 대한 오해

아마도 오늘날 많이 듣는  설교 내용 중 하나이거나 혹은 신자들이 흔히 하는 대화 내용중 하나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달란트 비유는 대부분 ‘재능을 절 활용하라’는 의미로 이해하거나 혹은 ‘받은 직분과 주어진 일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많이들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달란트 비유는 재능을 살려서 이익을 남기라는 비유나 혹은 맡은일에 충성하라는 것이 비유의 중심 내용은 아닙니다.

이 내용은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는 예수님의 종말론적 강화(이야기) 설교입니다. 다시말하면, 이 말씀은 마태복음 24장1절에서 25장46절까지 이어지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종말의 심판을 대비하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중심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쉽도록 마태복음 25장14-33절 본문 이야기를 조금만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가면서 종들을 불러서 각각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더 남겨서 가지고 왔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두 달란트의 이익을 더 남겨서 주인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땅에 감추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 줍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크게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비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 31-33).

무슨 말입니까? 결국 이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때  이루어질 심판의 비유 즉 종말론적 강화(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내용은 종말의 구원이 행위와 관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25장 34-45절의 두번째 비유 내용도 살펴보면 같은 의미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고 병들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나서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거나 병들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임금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같은 내용의 반대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이 비유에 대한 결론으로서 이렇게 결론을 말씀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25: 36). 이처럼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 두 비유와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보면 분명히 종말에 이루어질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굉장히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내용을 보면  마치 선행(착한 일)을 해야 천국에 간다는 말씀처럼 보입니다.‘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는 수많은 성경말씀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이것은 저자 마태가 앞에 나오는 마태복음 7장 12-23절에서도 강조하듯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반드시 열매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면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신자의 종말론적인 삶이 어떠해야 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선행을 해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진짜 구원받은 참 신자라면 적어도 그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으로 그리고 착한 행실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가 강조하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이고 제자도의 정신입니다.이것이 진짜 구원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세상 재미에 붙들려서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건 진짜 구원받은 믿음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진짜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의 행위로 나타나야 하고, 그것은 결국 최후 심판에 가서야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왜 달란트 비유가 늘 충성이나 재능을 말하는데 쓰여질까요? 물론 내용의 핵심주제는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면에서 적용해 볼수는 있을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되 그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 좀더 베풀고 나누어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보이신 삶의 모습을 닮아가라. 내 원수가 주릴때에는 베풀어주고 내 몫을 나눠주는 수준이 이르기까지 조금씩 사랑을 실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때까지 늘 깨어서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라… .”

김곤주 목사(시드니새언약교회 담임)

Friday, January 15, 2016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 박도술 (보스톤 필그림교회)

성경본문: 마태복음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만남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리 저리 얽히고 섥히며, 때론 사랑하다가 때론 죽도록 미워하는 지경에도 이릅니다. 좋은 만남이고 좋은 관계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만남이고 얽혀 버리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서로 원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예수님의 말씀 중 제일 실천하기 힘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되는데 감정이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떨어져 있거나 혹은 생각이 나지 않으면 괜찮은데 막상 보면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믿지 않는 분들을 만나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예수 믿었는데 지금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화하는 상대자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저에게 20년전 30년전 가슴속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바로 엊그제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누구 때문에 상처 입어서, 누구 때문에 돈을 떼어서, 누구 때문에 심한 배신감을 입어서… 이유는 다양하지만 한결 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원수의 대상은 친구이든 가족이든 같은 교인이든 너무도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고, 저마다의 가슴 속에 상대방의 잘못을 아직도 깊이 새기고 지워지지 않는 기록처럼 보관하며 살아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늘 의심과 손해의 구름이 그들을 둘러싸고 원망과 부정의 목소리가 그들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아파오고 저며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모습은 말을 안 했다 뿐이지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적인 삶에서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고 잠잠히 놔두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로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적 가르침(impractical idealistic teaching)일까요? 정의를 부르짖고 공평함을 주장하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종상해법이 훨씬 맞아 보입니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공평하다고는 할테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한들 우리는 몇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선은 그렇게 시행했을 때 우리 모두가 장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상대방에게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살점 한 파운드를, 이빨 하나를 피 한방울 흘림 없이, 그리고 다른 기관의 손상 없이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더 큰 문제는 우리의 보복의 속성이 꼭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곳에 사용되는 말이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에게 이만큼 손해를 받았으니, 모욕을 이만큼 받았으니 나는 갑절 이상으로 되갚아주겠다는 심리입니다. 이빨 하나가 아니라 이빨 전체를, 눈 하나가 아니라 얼굴 전체를, 사람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 가족 전체를, 도시 하나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망하도록 하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꼭 동종상해만을 구별했던 구약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법이 상당히 인간적인 구석이 있기는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실적인 부분과 상당히 동떨어져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것도 시험입니다. 원래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믿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면 시험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우리 자신의 죄된 본성이 자꾸 충돌하기 때문에 시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우리의 본능을 따라 시험에 져서 신앙의 불구자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하지 아니하느냐?”(마태복음 5장 46-47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습이 예수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를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흐르고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의 피를 따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실천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그런 신앙인이 되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가 어렵다 말고, 힘들다 말고 주님께서 능력 주시는 대로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시고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삶 속에 직접 적용해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가 누구인지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말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은 잡은 생선을 구워다가 가져다가 베드로를 먹이고 그 유명한 대화를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을 치라.”(요한복음 21장 15절) 지금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베드로는 한때 천국 열쇠를 받을 만큼 큰 신앙고백도 하긴 했지만, 예수님 편에서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심지어 십자가를 질 때도 자신을 부인하고 철저히 침묵했던 베드로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고 그 배신감 때문에 다시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제자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주님의 양떼를 칠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히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을 뵐 낯도, 그럴 자격도 전혀 없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마치 ‘너는 나를 배신하였지만, 너를 원수처럼 여기지 아니하고 용서하노라. 너를 여전히 사랑하노라. 그리므로 네 양떼를 네게 맡기노라.”는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이미지를 받았지만, 우리 안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장 23-24절) 그리고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되셨습니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에베소서 2장 14-17절)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전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만큼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사랑 아래 있는 자격 없는 우리의 모습을 먼저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조지 허버트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부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상처나 고통을 감추고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용서하지 않아 과거 속에 여전히 묻혀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 멈춰 선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용서를 통해 우리가 과거로부터의 자유함을 누리고 우리에게 예비된 미래의 축복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용서하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는 원망도 우리에겐 큰 짐입니다. 용서는 어렵지만, 일단 하게 되면 그 짐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빚진 자의 모습(마태복음 18장 21-35절)과 같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현재 시가로 한 50만불 정도 되는)를 빚진 한 사람이 도저히 빚을 갚을 길 없었습니다. 임금은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다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이 사람이 울면서 다 갚겠노라고 했을 때, 임금의 마음 속에 갑자기 그 사람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임금에게 진 빚은 제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한 5000불 정도되는)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그 빚을 당장 갚으라고 아우성입니다. 친구가 꼭 갚겠노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을 임금의 신하들이 보았습니다. 임금이 다시 그를 붙잡고 책망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임금은 화가 나서 다시 탕감한 빚을 다 갚도록 그를 감옥에 넘겨 버렸습니다. 우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구요?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의 대상에 따라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합니다. 우리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정의를 핑계 삼아 우리는 용서를 잊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 말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장 35절)       

우리는 날마다 주기도문은 암송합니다. 주기도문 중에 “하나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먼저 용서의 책임을 부각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려고 하면 우리는 형제에 대한 용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처럼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를 실천하실 수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용서도 대단한 신앙의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더 큰 믿음은 우리에게 손해를 입히고, 모욕과 수치를 주었던,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이유 없이 깎아 내리고 늘 하는 일에 반대했던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되갚아 주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44절은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믿음의 아버지를 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살아 생전 보물처럼 노트를 쓰곤 하셨습니다. 다른 일엔 일체 비밀이 없으셨지만 오직 노트에 대해서는 함구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 되어서야 비로서 그는 노트를 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노트에 적힌 것은 가족들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이름이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생각했던 아들은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아버지의 노트를 보고 있구나." 그의 모습을 본 어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이 노트를 아세요?" 어머니는 그 노트를 들고 한 장 한 장씩 넘기면서 추억에 잠기시는 듯 했습니다. "이건 너희 아버지의 기도 노트란다. 매일 밤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리곤 하셨지." 청년은 다시 낯선 이름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분들은 누구신가요?"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신 분들이란다. 아버지는 매일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올리셨지." 생각만 해도 힘이 드는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기회입니다. 다음으로는 원수를 위해 숯불을 쌓는 실제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부터 21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 하시느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가 배고플 때 오히려 먹이고 마시게 하는 행위는 원수의 양심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집안에 불을 피우고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화로에 숯불이 꼭 필요한 데, 하필이면 원수가 숯불을 달라고 찾아왔을 때 그 화로에 가득 숯불을 채워 줌으로 인해 그것을 머리에 이고 가는 그가 가는 동안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얼굴이 화끈거림으로 인해 오히려 자기의 친구로 만들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꾸 상식과 본능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따라 이런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 중에는 아직도 여러분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던 과거의 원수들 때문에, 혹은 아주 가까이 있는 원수들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발 아래 있는 저희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용서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때늦은 회한이 아닌 말이 나왔을 때 용서를 구하고 다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 머리에 숯불을 쌓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Tuesday, January 5, 2016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족보 / 김영한 교수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시리즈> 중에서
(크리스챤 투데이 2008년 9월 22일)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나타내는 역사적 증거 가운데 하나가 예수의 족보이다. 예수가 족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임을 가장 명확히 말하는 것이다. 족보는 가계보로서 가문의 혈통을 나타내는 사회문화적 전통이다. 마태와 누가는 그들의 복음서에 예수의 족보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마태와 누가가 예수의 족보를 작성한 것도 족보를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유대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언급할 때는 그 사람의 아버지, 할아버지 등 직계 혹은 방계의 몇 대를 언급하는 관습이 있다. 이것은 특히 구약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종족들에게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찾아왔으니 그의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민 27: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습 1:1) 

유대사회에서는 족보는 “신원 확인”의 역할을 하였다. 나사렛 예수의 경우에는 신구약 성경 몇몇 곳에서 아예 긴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한 예로 마태는 긴 족보를 바로 복음서 첫 부분에 삽입하였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의사 누가 역시 전혀 기억도 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 길게 삽입하였다. 마태나 누가는 처녀로 잉태된 예수를 유대인들이나 그 시대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긴 족보를 복음서의 첫 부분에 삽입한 것이다. 이 족보는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실재를 증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족보 

마태는 그의 복음서 시작에 “아브라함과 다읫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마 1:1)라는 제목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그는 유대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태복음의 족보는 법정족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태는 예수가 이스라엘 출신임을 증명하려는 것보다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가 예수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전하고자 한다. 특히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예수에 이르러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언하고자 한다. 마태 글의 제목은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관한 책이다. 말하자면 예수의 계보 책, 또는 예수의 출신에 관한 책이다. 글의 제목은 마태복음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계보 내지 예수의 탄생 이야기까지만 해당된다. 

마태는 법적 아버지인 요셉을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족보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 이르는 내림차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형태로 내려가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족보를 42대로 잡고 있지만,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왕들과 영웅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마리아와 같이 “정상적”이 아닌 방법으로 아이를 낳은 다말, 간통녀 밧세바, 이방출신 룻과 같은 여인이 있다. 이런 여인들은 과거가 있는 여인으로서 보통사람 같으면 족보에 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의도적으로 넣었다. 

누가복음의 족보 

누가는 예수로부터 시작해서 아담까지를 오름차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에 이르는 총 대수를 75대로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족보도 42대가 아니라 55대로 소개하고 있다. 누가는 누구의 “아들”이란 형태로 올라간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인물들, 특히 다윗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사이에 있는 40명의 인물은 거의 들어보지 못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누가족보는 형통족보라고 한다. 누가는 아담에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는 예수가 가져다 주는 구원은 온 세상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아담의 후손인 것을 말하고 있다. 인류 전체와 예수의 깊은 연대성을 말한다. 22절의 요셉의 아들인 예수는 38절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아담에게까지 소급한다. 23절에 “사람들의 아는대로 요셉의 아들이니”라는 표현은 예수의 처녀 출생에 대하여 특별한 사정을 고려한 표현이다. 이러한 특수한 예수의 출생은 바로 다윗을 거쳐 아브라함과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거술러 올라간다. 이것은 누가복음 족보의 독특성이다. 누가는 마리아를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아담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인류의 전 세대의 운명을 전환 시킬 것이다. 

누가는 이 족보 서술에 있어서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삽십세쯤 되시니라”(눅 3:23절상)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30세의 나이란 이스라엘에서 다른 위인들도 역시 그들의 일생의 사업을 착수할 나이다. 요셉은 30세에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요셉이 애굽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삽십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창 41:46). 다윗도 삼십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하여 70세까지 통치한다; “다윗이 30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년을 다스렸으되”(삼하 5:4). 나사렛 예수도 유대의 전통에 따라서 30세에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기록이 나사렛 예수의 생애가 구체적인 역사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는 들어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두 족보의 차이점과 공통점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는 몇 가지 점에서 상이하다. 첫째, 마태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 이르는 내림차순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담까지를 오름차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마태는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형태로 내려갔고, 누가는 누구의 “아들”이란 형태로 올라갔다. 이것은 다만 기록 양식의 차이일 뿐 족보 자체는 다르지 않다. 

둘째, 두 사람이 족보를 기록하는 순서와 인물들이 다른 것은 물론 총 대수(代數)도 상이하다.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까지의 족보를 42대로 잡고 있다. 그러나 누가는 아담으로부터 예수에 이르는 총 대수를 75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까지의 족보도 55대로 소개하고 있다. 

셋째, 마태는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왕들과 위인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이에 반해 누가는 들어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즉 마태복음에 기록된 인물들은 대부분 구약성경에서 이미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누가복음에 기록된 인물들, 특히 다윗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사이에 있는 40명의 인물은 거의 들어보지 못한 인물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다른 조상들을 기록할 수 있을까? 

히브리인들은 족보를 기계적으로 기록하기보다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사람들을 생략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실수로 일부 세대를 빠뜨린 것이 아니라 성경기자의 기록 목적에 따라 의도적으로 한 세대 혹은 여러 세대들을 생략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누가복음 3장과 마태복음 1장, 창세기 5, 10-12장, 역대상 1-10장 등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마태와 누가의 족보기록에서 한 가지 공통점은 두 사람 다 자신이 소개하고 싶은 예수의 모습을 고려해서 족보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왕으로서의 예수를 소개하고자 했던 마태는 예수의 왕통을 강조하기 위해 누가가 기록하고 있지 않는 다윗으로부터 솔로몬, 르호보암을 거쳐 남쪽 유다의 여러 왕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고, 또 왕들은 아니라 할지라도 구약에 등장하는 여러 큰 인물들의 이름을 예수의 족보에 삽입하고 있다. 

이에 비해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누가는 다윗까지는 동일하지만 다윗 이후는 구약 성경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사람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를 강조하고자 했던 누가는 다윗 다음으로 솔로몬이 아닌 나단(나단 선지자가 아닌 것이 분명)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후 등장하는 맛다다, 멘나, 멜레아, 맛닷, 요림, 에르, 엘마담, 고삼, 앗디, 멜기 등등도 전혀 구약에서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물론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에 삽입하고 있는 요셉, 유다, 시므온, 레위 등도 열두 지파와 무관한 사람들이다. 

인물중심의 족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족보기록이 매우 선택적임을 지적할 수 있다. 마태복음 1장 8-9절에 보면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역대상 3:11-12절을 보면 “그 아들은 요람이요 그 아들은 아하시야요 그 아들은 요아스요 그 아들은 아마샤요 그 아들은 아사랴요 그 아들은 요담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다음 두 구절을 보면 웃시야와 아사랴는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로 그 부친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을 삼으니 때에 나이 십륙세라.”(왕하 14:21); “유다 온 백성이 웃시야로 그 부친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을 삼으니 때에 나이 십륙세라”(대하 26:1). 따라서 마태는 그의 독자들이 요람이 웃시야의 고조 할아버지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요람 이후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등 세 사람을 생략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고냐에서 스룹바벨에 이르는 족보를 보더라도 마태는 스알디엘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역대상에는 스알디엘은 없고 대신 시드기아와 브다야가 등장한다. 

둘째, 족보에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넣게 되니 당연히 성경기자에 따라 족보의 대수도 달라진다. 예를 들면 마태는 다윗으로부터 바벨론 이거까지 14대라고 기록하고 있지만(마 1:17) 실제로 다윗으로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하는 유다 최후의 왕 시드기아까지는 14대가 아니라 22대이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열왕기상, 하에 기록된 유다왕 계보와 비교해 보면 마태는 아하시아, 아달랴, 요아스, 아마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등 7명의 왕들을 아예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 

성경 기자는 족보를 기록할 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인물들만 선별적으로 포함시켰다. 이는 성경의 족보에서는 기록자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을 생략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레위로부터 모세까지는 43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출애굽기 6장이나 역대상 6장에서는 레위->고핫->아므람->모세 등 4대만을 연결시키고 있다. 또 역대상 7장에서는 레위의 조카인 에브라임으로부터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 자손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까지를 10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성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인물들을 족보에서 생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성경의 족보에는 필요한 사람들, 특히 기록자가 생각할 때 의미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만을 선별해서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성경의 족보 기록은 역사 교과서처럼 엄밀하게, 그리고 기계적으로 족보를 기록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의미 있고 중요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족보를 아래에서는 “위인 족보”(Heroic Genealogy)라고 부르기로 한다. 

족보가 갖는 함축성: 성육신의 실재성과 계시의 연속성 

첫째, 족보는 나사렛 예수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육신의 실재성을 말하는 것이다.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거술러 올라간다. 예수가 실재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성경의 족보에 소수의 “위인들”만을 기록했다는 것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낳았다고 기록하기도 하는 히브리인들의 족보 기록 관습으로 생각해 볼 때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히브리어로 아들 ‘벤’(bên)이란 단어는 “아들”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손자, 아니 몇 대 아래 후손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유대인들의 조상-자손 동일시 관습은 복음서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유대인들에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담대하게 도전하였다(요 10:30). 이것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나아가 하나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하며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둘째, 마태의 족보는 계시의 연속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문전에 서 있다. 그러나 과거와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야이며, 다윗왕권의 참 후계자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의 상속자이다. 누가의 족보는 예수가 선택된 민족의 상속자일 뿐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의 형상을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시키시는 제2의 아담이다. 예수는 모든 인류에게 그들의 근본적인 인간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하고 있다(눅 3:23-24). 

이 족보들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한다. 그의 구속 약속은 역사의 각 세대를 거친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잘못이나 오류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다. 더욱이 이 족보에는 4 여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다말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여인(창 38장)이 있고, 라합은 매춘부(수 3장)였고, 룻은 이방 여인(룻기)이어고, 바셋바는 간음한 여인(삼하 11-12장)이었다. 

예수의 족보는 인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 구속의 경륜을 드러내는 함축성을 지닌다. 예수 족보의 의미는 하나님이 구체적인 인간의 혈통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어떠한 인간의 허물과 죄도 우연성도 하나님의 구속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혈통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도구라는 점을 알려준다. 은총의 역사는 인간의 구체적인 혈통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초대교회의 이단 영지주의가 도외시한 이 혈통의 역사를 인정하시고 사용하셨다. 하나님 자신이 이 인간 혈통의 역사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처녀탄생은 인간 혈통의 역사를 너머서는 하나님의 구속계시 사건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의 족보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성육신의 실재성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