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20, 2017

이사야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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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사야 :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

28,241113 

이사야서부터 말라기서까지 17권을 ‘선지서’라고 부릅니다. 그중에서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애가, 에스겔서, 다니엘서의 5권을 ‘대선지서’라고 부르며, 호세아서에서 말라기서까지 12권을 ‘소선지서’라고 부릅니다. 

선지서들은 역사적인 서술보다는 역사서를 보충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메시지를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선지서의 목적은 단지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게 아니라 죄를 깨닫고 돌이켜 주를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낙심한 자를 위로하고, 소망을 불어넣어주며, 연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선지서에서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선지서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책들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애가, 에스겔서, 다니엘서를 ‘대선지서’, 나머지를 ‘소선지서’라고 부릅니다. 이는 어떤 서열에 따른 분류가 아닙니다. 단지 앞의 책들의 분량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지요. 이사야보다 먼저 사역한 선지자들은 호세아와 요엘과 아모스와 오바댜입니다. 이사야는 이들보다 조금 뒤에 활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서가 선지서 중에 맨 앞에 있는 것은 분량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열왕기하 19장과 20장에 13번이나 언급됩니다. 또 열왕기하 18장-20장은 이사야서의 37장-39장과 같은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왕족이었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웃시야 왕의 동생입니다. 그는 히스기야 때 궁정에서 생활했고,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남유다 왕국만 남은 시대에 사역했습니다. 웃시야 왕 통치 말년에 예언 사역을 시작하여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60년 동안 사역했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아들인 악한 왕 므낫세 왕의 핍박을 받아 톱질을 당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히브리서 11장 37절에 톱으로 켜는 순교를 당한 것은 이사야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서는 유대와 예루살렘을 향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멸망한 북이스라엘과 바벨론 제국과 다메섹을 향해 예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주변국들에 대해서도 경고합니다.

웃시야와 요담과 히스기야 때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좋았으나 아하스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달랐습니다. 그는 아주 악하여 그가 다스리던 16년 동안에 나라 전체가 우상숭배를 하게 됩니다. 이때 이사야가 이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땅에서 쫓겨날 거라고 예언하지요. 그러면서도 이사야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들을 위로합니다. 그들이 비록 흩어질지라도 먼 훗날에 고레스라는 왕을 일으켜서 회복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을 거라고 말하며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합니다. 흩어진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복이 흘러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징

이사야서는 어느 선지서들보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가장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사야를 ‘복음적인 선지자’라고 하고, 이사야서를 ‘제5복음서’라고도 합니다.

이사야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25번, ‘심판’은 52번, ‘위로’는 18번, ‘구원’은 26번 언급합니다. 특히 53장은 고난 받는 종에 관한 것으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지요. 이 장은 신약에서 85번이나 인용됩니다. 이사야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지존하신 통치자이시다’입니다.

이사야서는 내용이 방대합니다. 성경 권수와 같은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성격도 같습니다. 1장부터 39장은 구약의 성격을 띱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회개가 강조됩니다. 

또 40장 이후부터 66장까지의 후반부 27장은 신약의 성격을 띱니다. 구원과 소망, 용서와 회복이 주 내용으로 기록되었지요. 첫 번째 39장까지는 구약의 내용을, 40장 이후부터는 신약의 내용을 요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체가 시로 구성되어 있는 놀라운 문학작품입니다. 문체가 매우 미려하고 세련되었지요. 어떤 이들은 이사야를 문학적으로는 셰익스피어에 비유하고, 신학적으로는 구약의 사도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사야서 전체가 66장 1,292절로, 성경이 66권 1,189장도 비슷합니다. 신약에서는 472번이나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합니다.

주요 구절

이사야서에서 주목할 만한 중요한 부분은 우리의 죄를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드러나는 구절들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1:18), “나는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43:25),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같이, 네 죄를 안개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44:22).

예수 그리스도가 처녀를 통해 오신 것을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9:6). 

이사야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를 반복하여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두려워하지 말라 …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41:14), “두려워하지 말라”(43:5, 44:8).

또한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리라’라고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43:18,19).

이 구절들 외에도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과 은혜의 고백이 충만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주의 날의 유다와 이스라엘

이사야서의 전반부 1장-39장은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후반부 40장-66장은 약속과 위로의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1장-12장은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에 관련된 것들이지요. 이들의 죄에 대한 공의의 하나님의 심판은 법 집행관으로 먼 나라들을 부르십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은 메시아에 대한 약속도 하십니다.

1장은 이사야 선지자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1절은 이 책의 제목, 즉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입니다. 2절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로 시작하면서 마치 성명서처럼 모두가 읽을 수 있고, 필사해 갈 수 있도록 성전의 공공게시판에 붙여놓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강도 높게 고소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땅이 거의 초토화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을 고치지 않는 모습에 하나님은 탄식하십니다. 그들이 회개한다면 죄사함과 회복을 약속하실 것이지만 계속 완악하여 불순종한다면 멸망당할 거라고 경고하십니다.

2장-4장은 두 번째 설교입니다. 2장 1절에 나타나듯이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해 하나님께 받은 말씀입니다. 2절의 ‘말일’은 메시아의 날입니다. 어느 한 날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느 기간을 말합니다. 즉 메시아가 오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만방이 그곳으로 모여들 것입니다. 이방이 주께 모여올 것이나 이스라엘은 강퍅하여 주께 돌아오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자에게는 구속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5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고소장’입니다. ‘화 있을진저’를 6번 언급하시며, 이들의 여섯 가지 죄를 고소합니다.

1. 불법으로 재물을 모음(5:6-8)-연금 조작,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남김, 남의 사업을 망치며 자기의 사업을 키움, 투기 목적으로 땅과 아파트를 사들임,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중소기업을 삼킴
2. 향락을 일삼음(5:10-17)-알코올중독과 마약에 손을 댐
3.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지음(5:18,19)-신앙의 위선
4. 하나님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원칙을 무시함(5:20)-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죄를 미화시킴
5. 교만함과 자신의 판단을 의지함(5:21)-우쭐대고 거만하며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음
6. 술 취함(5:22)-쾌락, 파티 등 흥청망청함, 정직하지 못함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한 판결은 “재물이 날아가고, 땅이 황폐화하고, 사로잡히며, 유리하며, 굶주리며, 낮아질 것이다”입니다. 또한 유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먼 나라들을 ‘형 집행관’으로 부르십니다.

6장은 이사야의 소명을 말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 된 모습을 보았지요. 하지만 죄 용서함과 죄 사함을 경험합니다. 또한 온 땅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것인가”라는 주의 말씀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합니다(6:8).

7장은 특별한 경우에 행해진 권면과 위로의 설교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심판하시지만 여전히 긍휼을 베푸십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하나님의 긍휼의 표입니다. 처녀의 몸에서 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8장-12장은 연속된 설교입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할 것이며, 유다도 앗수르에 의해 환난 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에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실 것이며, 앗수르는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특히 메시아의 오심과 다스리심을 보여줍니다(9장,11장). 그날에 구원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12장). ‘남은 자’에 대해 언급하십니다(10:20-22, 11:11,16). 이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열방에 부과된 부담들

13장-23장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과 불의를 행한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바벨론과 모압과 다메섹과 애굽과 두로 등에 대한 경고이지요. 당시 강국인 앗수르에 대해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당시 미미하고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이 거대한 제국이 될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그런 나라가 멸망할 것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들 나라들의 심판의 이유는 그들의 ‘교만’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의 자리와 피조물 된 자신들의 자리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겸손입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게 교만이요, 이를 아는 게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열방의 경영자이십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이루리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행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14:24,26,27).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것에 있습니다(17:10). 공의의 하나님은 먼저 그의 백성들부터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주변의 나라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그의 백성들이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변국들도 온 땅의 통치자이신 그분을 알고 두려워하여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날과 이방 나라들

24장-27장은 이사야의 새로운 설교입니다. 의인에게는 그들이 잘 되리라는 보배로운 약속이, 악인에게는 그들이 잘되지 못하리라는 두려운 경고가 있습니다. 이 같은 약속과 경고가 잘 짜여져 있어 서로를 조명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나라를 향한 게 아니라 열방을 향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동방에서와 바다 모든 섬에서 영화롭게 되실 것입니다(24:15). 하나님은 그를 기다리며 의지하는 자에게는 요새요, 피난처요, 그늘이요, 반석이 되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심판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

28장-35장은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망과 경고,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이들을 환난 가운데서 건지실 것이며, 그 원수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28장-29장은 에브라임의 교만과 술 취함, 안일함과 방탕함 그리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교만함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남은 자들에게는 은혜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30장-31장에서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공격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를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주를 의지하면 앗수르의 군대를 멸하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32장-33장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장차 임할 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34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모든 나라들은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35장은 예루살렘의 번성도 말하지만 이를 넘어서서 하나님나라가 임함으로 주어지는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길로 인도되어 사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

36장-39장은 역사가로서의 이사야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역사의 현장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고,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하 18장-19장과 거의 동일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에게는 구원을 베푸시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교만한 자들은 대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한 후에 마음이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당시 세계의 강국 앗수르를 격퇴하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생명이 연장되는 사건들을 통해 히스기야는 세계 무대에서 일약 스타가 됩니다. 특히 막 떠오르는 나라인 신흥국 바벨론의 사자使者들이 와서 인터뷰를 할 때 그의 마음이 교만해집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훗날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계기가 되지요.

축복의 예언

40장-66장은 이사야의 예언의 후반부로서 예언의 목적과 문체도 달라집니다. 전반부는 몇 차례의 설교로 이사야의 이름이 자주 언급됩니다(2:1, 7:3, 13:1). 그러나 후반부는 하나로 연결된 강론이며, 이사야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전반부는 수많은 경고와 화에 대하여, 후반부는 수많은 축복에 대해 말씀합니다. 전반부는 주로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한 고통과 그것에서의 구원의 말씀이고, 후반부는 바벨론의 포로 됨과 구원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는 훗날 바벨론 포로 생활 가운데 힘과 위로가 됩니다. 전반부에도 메시아의 임하심과 은혜가 언급되지만 후반부에 훨씬 더 많습니다. 

후반부는 세례 요한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시작하여(40:3),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마치고 있습니다(66:22). 그러므로 후반부는 신약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40장-55장에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전하러 다니시고(42장),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시고(49장), 수욕과 고난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순종을 보이시며(50장), 고난을 통해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고 승리와 영광을 받으시는 종의 모습입니다(52장-53장). ‘종의 노래’라고도 하는 이 장들은 구약 선교의 정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40장-41장에는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하나님나라의 선포가 나옵니다. 그분의 백성을 향한 위로의 말씀입니다(40:1-11). 영광의 하나님의 모습, 특히 그분의 크심을 이처럼 실감나고 확실하게 언급한 곳이 없습니다(40:12-26).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라”라고 하십니다. 우상숭배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고, 이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42장-48장은 메시아의 오심과 구원을 선포합니다. 특히 바벨론에 의해 환난 중에 있는 백성을 건져주시며 새 일을 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죄사함의 약속을 하십니다. 우상들은 거짓이며 오직 여호와만이 경배 받으실 한 분 하나님입니다. 또한 고레스가 장차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키도록 쓰임 받을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주권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역사의 주主이십니다. 그의 약속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45장). 바벨론의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을 섬길 것을 말씀하십니다(46장).

바벨론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막대기이지만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잔혹하게 대하며 교만하게 행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47장). 마찬가지로 야곱의 집의 죄로 인해 심판하실 것이나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위해 야곱의 집에 구원을 베푸십니다(48장).

여호와의 종정

49장-57장에서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은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나는 종은 오실 메시아의 모형입니다. 메시아에 의해 그분의 구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방인들 가운데 그분의 교회가 세워질 것입니다(49장). 

비록 흑암 중에 있어 빛이 없을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듣고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위로자이십니다(51장).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깨어서’ 구원을 베풀기를 원하지만(51:9),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깰지어다”라고 명령하십니다(51:17, 52:1). 이스라엘이 스스로 힘을 내어 일어나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라고 격려하십니다.

52장의 끝의 세 구절(52:13-15)은 53장의 처음의 세 구절(53:1-3)과 동일한 주제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입니다. 53장만큼이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예언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하심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흥왕할 것입니다(54장). 

앗수르와 바벨론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인한 집행관이었으나 그들의 교만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같이 신약의 교회들도 위로와 힘을 얻길 원하십니다.

53장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고, 54장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것이라면 55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죄사함을 얻고 회복이 있습니다. 56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 해야 할 의무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열방을 향한 중보자의 역할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으나 돌이켜 주께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치며 소성케 하실 것입니다(57장).

여호와의 도전

58장-66장은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 시대의 교회의 영광을 말하기도 합니다. 종교적인 위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올바른 금식을 행하고 안식일을 지킨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고치시며 새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열방의 치유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58장).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을 것입니다(59장).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은 백성들은 빛을 발하고 땅끝까지 확장될 것입니다(59:19-60:3).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올 것입니다. 

61장-62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기쁨과 영광과 축복을 말합니다. 또한 신약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간절한 기도와 소원을 들으시고 오셔서 그들을 환난 가운데서 구원하실 것입니다(63장-64장).

65장과 66장은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는 로마서 9장-11장의 말씀과 연관이 됩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주께로 올 것이지만 유대인들은 불신앙으로 버림을 받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중에 남은 자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시지요(호 6:6). 또한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며 그의 교회는 영원히 굳게 설 것입니다.

본 컨텐츠는 「말씀관통100일통독」 의 내용으로 저작권은 ⓒ 규장 에 있습니다

말씀관통 100일 통독 오디오북 (단행본 MP3 CD)홍성건규장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It shall also come to pass)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It shall also come to pass)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담은 유대인의 성경주석인 미드라쉬(מדרש, Midrash, 성서해석을 추고하는 이야기나 전설,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큰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은 승리의 기쁨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반지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보석 세공인을  불러들인 다윗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반지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큰 승리를 거두어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 동시에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는 그 글귀를 보고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하느니라”

보석 세공인은 왕의 명령대로 매우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반지에 넣을 적당한 글귀는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솔로몬 왕자를 찾아갑니다. 보석 세공업자의 설명을 들은 솔로몬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반지에 이렇게 적으십시요.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

탈무드보다 더 오래된 미드라쉬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근거로 랜터 윌슨 스미스(Lanta Wilson Smith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거대한 슬픔이 노도의 강처럼 평화를 파괴하는 힘으로 그대의 삶으로 쳐들어오고 소중한 것들이 눈 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갈 때 매 힘든 순간마다 그대의 마음에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끊임없는 근심이 즐거운 노래를 들리지 않게 하고 피곤에 지쳐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때 이 진실의 말이 당신 마음의 슬픔을 줄여주고 힘든 나날의 무거운 짐들의 무게를 가볍게 하도록 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짓고 근심걱정 없는 나날이 환희와 기쁨으로 다가올 때 그대가 세속적인 보물들에만 안주하지 않도록 이 진실의 말을 그대의 마음에 깊이 새겨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정직한 노동이 그대에게 명성과 영광을 가져오고 지상의 모든 숭고한 이들이 그대에게 미소 지을 때 삶의 가장 길고 장대한 이야기도 이 세상사에서는 짧은 한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의 일상은 늘 복잡한 문제들과 예기치 않는 상황들로 인해 마음이 쉽게 흔들리고 자주 불안해하고 초초해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상황과 여건에 따라 감정과 마음이 요동치지 않도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마음을 거룩히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잠4:23)

삶이 힘겹고 마음이 낙심되어 지칠때  슬픔과 고난의 폭풍우가 몰아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하고 싶을 때 비온 후 무지개와 같이 환희에 찬 기쁨과 축복이 비춰올때에도 다시 한번 이 말씀을 가슴에 되새기십시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It shall also come to pass)”

그리고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가까이 하십시오.

출처:

http://likumc.org/cp/?p=4483

Monday, September 11, 2017

하나님은 왜 인간이 타락할 줄 알면서 선악과를 두셨는가?

하나님은 왜 인간이 타락할 줄 알면서 선악과를 두셨는가?

[질문]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하와의 범죄를 방조해서 원죄라는 것을 만드셨는지요, 어쩌면 선악과라는 것을 만들어서 인간의 범죄를 조장하신 것은 아닌지요?

설교시간에 인간은 모두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대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우리의 자유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인간은 로보트이고 모든 프로그램은 하나님께서 작성하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로보트인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작성하신 하나님의 책임이 아닐런지요?  

하와의 범죄나 가롯 유다의 범죄도 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들의 잘못은 없는 것이 아닌지요? 비약해서 생각해 보면 인간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에 반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닌지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의미 없이 인간을 시험하고 계시거나 아니면 하나님 영역 밖의 어떤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성경에서 무어라고 말씀하고 계신지 목사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답변]

바보 같은 질문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항상 궁금해 하지만 그 해답을 정확하게 정리해 놓고 있지 않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신학적으로도 죄의 기원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 나아가 하나님의 예정에까지 이어지는 굉장히 심오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질문하신 가운데 조금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이 있어 답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설교 시간에 인간은 모두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대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우리의 자유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사전에 정해진 절대적인 운명에 무조건 묶여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아마도 목사님이 그런 뜻으로는 결코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에 틀림없이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의 의미였을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지 못해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은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령 불신자가 자신의 자유 의지를 동원하여 어떤 선한 행위를 해도 궁극적으로 선하지 못하다. 2)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한 어떤 선한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요컨대 인간은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주팔자처럼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 노력해도 어떤 정해진 방향으로 반드시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의미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식의 숙명론을 인정하면 죄를 짓는 것도 숙명이기에 인간에게 귀책사유가 전혀 적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죄인이라고 탓하는 것이 잘못이 됩니다. 아래 답변에서 따져볼 죄의 기원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이 결코 숙명론으로 묶여 있을 존재가 아님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악과와 자유의지에 관해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 상의 오해 내지 이해 부족을 한두 가지 갖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존재를 만들었는가? 그래서 그런 인간이 하나님과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관계가 어떠한지?”를 잘 모릅니다. 둘째는 아담이 행사할 수 있었던 자유의지의 의미에 관해 정확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고 또 그가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한계를 분명하게 안다면 제기하신 질문은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이 두 가지 오해부터 명확히 하는 것으로 답변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본 주제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인격성을 가진 존재-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지정의로 느끼고 생각하여 결정한 후에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 독립성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독립성은 절대적이지 못하며 상대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被造物)로서 모든 삶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인격성 또한 처음 피조 될 때, 즉 범죄 이전의 아담의 경우에도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후 심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정의는 하나님의 수준level)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인간으로서 살아가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이 완전했습니다. 창조 때의 인간의 지성적 능력과 감정적 깊이와 의지력의 세기는 진화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지금보다 열등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세 자리 아이큐를 갖고 희로애락을 풍부하게 느끼며 의지를 사용해 마음대로 선택을 한 후에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인격성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지정의에 제 삼의 존재가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으며 그래서 그분은 영원토록 스스로 자존(自存)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그 존재의 출생, 성장, 종말에 이르기까지 오직 창조주에게 의존해야 하며 또 그분의 뜻대로 그 모든 과정이 이뤄다는 의미에서 그 인격성은 상대적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인격성이 완전하다 해도 결코 피조성을 뛰어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인격성을 갖고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전 우주 가운데 아주 독특한(unique)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는 닮았지만 100% 같을 수는 결코 없고 마찬가지로 다른 피조물과도 닮았지만 100% 같지 않은 존재입니다. 

인간 다음에 고급한 생물인 동물도 아주 초보적이긴 하지만 지정의를 갖고 있습니다. 지성과 감정뿐 아니라 심지어 의지력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일관되게 추구하며 서로 의사소통까지 합니다. 갈매기가 조개를 입에 물고 높은 곳에서 콘크리트 바닥에 여러 번 떨어트려 그 속을 까먹는다고 합니다. 조개껍질을 깨기 위해 공중에서 딱딱한 바닥에 떨어트려야겠다고 마음먹고 그것도 되풀이해서 시도하는 것은 벌써 상당한 수준의 지성과 의지가 동원된 표시입니다. 

그러나 동물의 지정의는 어디까지나 생존과 번식이라는 절대적인 틀 안에서 오직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문제로만 연결됩니다. 사자가 사냥해서 배부르게 먹고 나면 누워 자기만 하지  혹시 사냥감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남은 것을 저장해 놓으려고 작정하는 법은 없습니다. 동물은 지정의는 있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인격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학자 안토니오 후크마의 표현대로 인간은 “피조된 인격체(created person)라는 점이 사람의 중심적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피조물, 특별히 동물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Leonard Verduin은 인간을 “선택권을 소유한 피조물(creature of option)”이라고 규정지었습니다. 요컨대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자유의지의 한계 

인간의 인격성이 창조 때부터 항상 상대적이었다면 그 인격을 구성하는 지정의도 당연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아담으로 선악과를 따먹도록 이끈 자유의지는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내용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자는 배고프면 무조건 사냥하러 나갑니다. “지금 기분도 썩 내키지 않고 한 끼 굶는다고 당장 큰 일 나는 것도 아니니 한 끼 정도 굶어볼까?”라고는 아예 생각조차 못합니다. 사냥 아니면 금식 둘 중 하나를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자도 분명히 사냥하러 갈려고 의지적으로 작정해서 결행했지만 선택을 하지 못했기에 자유 의지가 아닙니다. 그 의지는 하나님이 이미 마련해 놓은 계획안에서만 작동될 뿐이며 100% 하나님 의존적입니다. 동물의 의지는 수동적이며 로봇 같이 프로그램화 된 의지입니다.       

인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배고프면 라면을 먹을까 빵을 먹을까 아니면 한 끼 굶을까 순전히 자신의 지정의로만 판단하여 선택하고 결행합니다. 의지를 사용하는 과정에선 어느 누구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물처럼 프로그램화되어 그 의지가 일방적인 선택으로 강요되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의에 의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숨도 쉬지 못합니다. 언제라도 목숨을 거두어 가시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생각과 말과 행동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피조물로서 단지 우리는 진흙에 불과하며 하나님 그분이 토기장이입니다. 인간이 아무 장애 없이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그렇게 선택하고 결행할 힘 자체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하긴 하지만 상대적일 뿐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의지만은 완전하면서도 절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그분이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함에 있어 영원토록 어떠한 존재로부터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나는 ‘자유의지’라는 단어 자체가 결코 생겨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 말은 성경에도 없는 단어요 아무런 유익이 없는 단어로 마땅히 ‘자아의지’라고 불렸어야 했다. 자유의지는 명백히 신의 용어로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하늘과 땅에서 하시고자 하는 바를 행하시기 때문이다.”

본능에 따라 일방적 선택이 강요된 동물의 의지와 달리 인간에게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의지를 주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동물과 전혀 다른 모습의 의지를 주셨다면 당신의 특별한 뜻이 따로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나아가 인간이 그 의지를 행사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하고 의지를 행사한 결과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어야만 합니다. 요컨대 아담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는 과정에선 자유로웠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사했어야 했고 또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이 져야할 응분의 책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봇도 동물도 하나님도 아닌 인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하나님은 인간을 이 땅에 당신을 대신할 관리자로 세우기 위해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의 나머지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하는 중간적 위치에서만 온전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으로선 인간을 상대적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밖에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다음 세 가지 종류의 형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완전히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또 다시 만들어 이 땅에 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란 그 자체로 하나님일 수 없기에 절대적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럴 가능성은 완전히 제로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자유의지를 갖되 죄는 전혀 선택하지 못하고 오직 선(善)쪽으로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의지를 가진 인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평생 동안 단 하나의 죄도 짓지 않는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가 됩니다. 이 또한 따지고 보면 하나님입니다. 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지란 진정한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완전히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는 일종의 로봇 같은 인간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인간이 만들어졌다 해도 이 땅에 선만 있게 되면 벌써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악이 없는 곳에서의 선은 단순히 아무 의미 없는 일상사에 불과합니다. 그 반대로 인간을 죄만 짓도록 의지를 작동하게 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선이라 그런 것을 계획조차 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동물처럼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릴 자가 없어집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이 한 명도 없고 사자나 공룡만 군림하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지구를 만들 의미와 목적과 가치가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온 천하를 오직 인간을 위해서 지으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히 하나님 같은 존재나 동물이나 일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같은 존재로는 결코 만들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 수 있고 또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해 그 뜻대로 이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시편 기자가 인간의 정체성을 두고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곧 영화와 존귀로 관을 쒸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시8:4-6) 

천사는 아니지만 천사와 거의 방불한 정도의 영적인 존재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서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비록 상대적이긴 하지만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것이 너무나 큰 은혜라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것이 오히려 인간이 인간된 신비적 중심이자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선택하게 해 놓고 왜 벌을 주는가라는 질문은 그 의지가 과정뿐 아니라 책임까지 절대적으로 자유스러운 의지였다면 합당한 의심이자 불만입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기에 마음대로 한 것을  두고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가 받은 자유의지는 하나님 뜻 안에서만 사용되어지고 또 그 결과도 하나님 뜻 안에서 인간의 책임이 되는 상대적 자유의지였습니다. 따라서 이 진리만 정확히 인식한다면 처음부터 성립 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만약 자꾸 그 문제를 따지고 드는 것은 인간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거나 아예 태어나지 말게 했어야 옳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선악과는 오히려 축복

대체로 신자들은 선악과 사건을 보면서 홍시가 주렁주렁 열린 가지가 담장 밖으로 넘어가도록 방치 해놓고는 동네 아이들이 따먹기만 기다렸다가 벌을 주는 심술궂은 할아버지를 연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을 줄 미리 알고도 자유의지를 주어 놓고는 따먹자마자 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시고선 아담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게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인간이 자기 의지를 무한정 사용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악과만은 따 먹을 수 없다고 그 한계를 분명히 정해 주었습니다. 아담에게 준 의지는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절대적 자유의지가 아니라 상대적 자유의지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당신의 임재의 상징인 선악과는 역으로 말해 아담에게 자신의 정체성도 깨닫게 해주는 나무였습니다. 다른 과일은 다 먹을 수 있지만(=이 땅의 만물을 하나님을 대리하여 다스릴 수 있는데) 선악과는 먹지 말라.(=어디까지나 나를 대신하는 대리인, 즉 피조물임을 잊지 말라.) 

그렇지만 그 금령(禁令)에 벌을 주겠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인간의 활동을 제한시키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때만이 참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축복의 징표이자 약속이었습니다. 비유컨대 복잡한 쇼핑 몰에 엄마가 아기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네가 들어 가보고 싶은 가게는 어디든지 전부 다 가도 되는데 단 엄마 손은 절대 놓으면 안 돼”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아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그 명령에 반항하여 대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엄마 손을 꼭 붙들고 있어야 안전하고 또 엄마랑 함께 즐겁게 쇼핑하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처럼 엄마 손을 놓치지 않으면 모든 가게를 다 갈 수 있는 자유였기에 아담의 자유의지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라고 표현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의지를 사용하여 그 결과도 하나님의 뜻에 제한을 받는 상대적 자유였지만, 선악과는 인간에게 형벌과 저주로 가는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너무나 귀한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은혜를 어떻게 변질 시켰습니까? 자신의 의지를 의도적으로 작동해 사단의 유혹을 받아들여 선악과를 따 먹어 버렸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이 은혜라는 약속을 의심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다시 비유컨대 쇼핑몰에서 엄마가 손을 꼭 잡고 있으니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가게를 못 가게 막는다고 오해한 어린 딸이 그 손을 뿌리치고 수많은 쇼핑객 사이를 뚫고 혼자서 쵸코렛 가게로 뛰어 들어 가버린 셈입니다. 단 하나 엄마 손을 놓지 말라는 속박(사실은 축복인데도)조차 귀찮고 싫어서 엄마 품을 뛰쳐나간 것입니다. 

아담도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는 상대적 자유의지가 싫어서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절대적 자유의지로 바꾸려고 시도했습니다. 하나님만이 갖고 또 가질 수 있는 절대적 자유의지가 탐이 났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못 먹게 하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어! 그런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 필요 없어! 나는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고 그 책임도 내가 질꺼야!” 하나님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올라서겠다는 극도의 교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엄마가 귀찮고 싫어 쵸코렛 가게로 뛰어 든 어린 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혹시라도 엄마가 자기를 쫓아올까 일부러 인파 속에 숨어버린 그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처음에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구경하겠지만 막상 사먹으려니 돈이 없어서 단 한개도 살 수 없습니다. 배는 고파 오고 자꾸 시간은 흘러 쇼핑객은 다 빠져 나가고 어두워집니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습니다. 두렵고 떨리기 시작합니다. 

아담도 죄를 지은 이후에 두렵고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면 상대적 자유의지가 절대적 자유의지로 바뀔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부자유스러워졌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심령에 평강과 자유는 완전히 없어지고 대신에 불안과 공허만 가득 찼습니다. 이미 그의 영혼에 사단이 자리 잡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죄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어그스틴의 표현에 따르면 “죄를 짓지 않을 수”(posse non peccare)" 있는 자유가 이제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non posse non peccare)” 자유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갖고 있던 상대적 자유의지는 마음대로 선을 택할 수 있고(모든 실과를 따 먹을 수 있되),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선악과만은 먹어선 안 되는)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에는 여전히 그 의지는 상대적이지만 이제는 사단에게 제한을 받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죄에서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고(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단 쪽으로 향했으므로), 모든 선한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동산의 다른 실과마저도 못 먹게 에덴에서 추방되었으므로)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선악과를 따 먹느냐 안 먹느냐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분기점이자 죽음의 형벌이 따르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을 벗어나면 사단의 노예가 되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그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은 자가 됩니다. 나아가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버리고 오로지 악만 행하는 자유를 택했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따먹지 않으면 선을, 따먹으면 악을 철저하게 알게 해주는 나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의지적으로 버리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사단의 종이 되어 악을 추구한 인간의 죄악은 크게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또 하나님의 품을 떠났으니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쉽게 말해 쇼핑 몰에서 딸아이가 엄마 손을 놓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엄마랑 그 몰 안에 있는 모든 가게를 다 구경하고 쇼핑하며 너무나 즐겁게 지낼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전히 쇼핑 몰 안에는 사람들이 많아 길을 잃거나 엄마를 놓칠 위험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엄마가 손을 붙들고 있기에 그런 염려를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선악과는 동산 중앙에 있고 사단은 항상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만이 자신의 행복과 만족의 근원이라는 확신에 흔들림이 없었다면 그는 선을 행할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죄의 무서운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선악과는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이지 인간을 죄악에 빠트리는 걸림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쇼핑 몰에서 엄마 손을 절대 놓지 말라고 당부하는 엄마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방조한 것이 아니라 아담이 죄 쪽으로 자진해서 뛰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을 알고도 왜 선악과를 두었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먼저 불신자의 경우를 잠시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우연히 물질에서 진화 되어진 존재로 동물 중에 가장 고급한 동물로 보거나, 자연을 구성하는 한 일부로서 그 구체적 과정은 모르지만 뛰어난 지정의를 갖게 된 특이한 존재로 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이 두 가지 측면에서만 생각합니다.  

첫째는 동물이 갖고 있는 의지와 동일시합니다. 생존과 번식의 본능만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동물의 의지가 작동되듯이, 그들도 자신의 지정의-인격을 오직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만 사용합니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동물로 비하시키는 셈입니다. 진화를 믿어 원숭이를 자기들 할아버지로 모시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을 갖춘 인간이 아니라 동물의 본능을 닮은 인격체, 정확히는 조금 고급한 본능을 가진 동물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 자연에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주의 주인으로 그 위에 아무 것도 없으므로 마치 절대적 자유의지를 가진 양 행동합니다. 모든 것을 인간이 판단, 선택, 결행하고 그 결과도 인간이 책임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이 독단적으로 이룬 일들이 궁극적으로 선한 열매를 맺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을 보더라도 물질적, 기술적 진보는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 영적 진보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불안 염려가 인간을 옭아매며 죄의 타락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인간  스스로 절대적 자유의지를 주장한 결과입니다. 인간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할 때뿐입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오직 피조된 인격체라는 관점에서만 확인합니다. 그에 따라 모든 신자의 삶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껏 살펴본 대로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라고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인격성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둘째는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그분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당신을 대신해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 삶의 피조세계를 향한 하향적 목적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상향적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 삶의 목적을 매일 상기하라는 뜻입니다. 매일 매 순간 동산 중앙에 있어서 자기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면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고 또 찬양과 감사로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없이 하나님이 모든 실과를 마음 놓고 다 따먹으라고 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담은 자신이 상대적 자유의지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의지를 받은 양 오해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하나님이 따로 계심을 알지 못하거나 잊게 됩니다. 하나님으로선 아담에게 당신의 실체를 직접 보여줄 수는 없고 당신의 표상을 심어주어야 했습니다. 환언하면 아담에게 하나님 당신의 임재하심과 또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좋다는  어떤 시험 내지 훈련의 과정은 반드시 있어야 했습니다.     

그 반대로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포함한 모든 과일을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명령입니다. 굶어 죽으라는 명령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예 어떤 과일이라도 주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악과를 섭씨 수만 도의 고열을 내뿜는 나무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구태여 말을 안 해도 도저히 접근 할 수 없으므로 금령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케이스는 겉으로는 자유를 준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전혀 자유가 없이 인간을 하나님의 노예로 삼은 것입니다. 선악과는 항상 따 먹을 수 있으되 말씀으로만 금하는 형식을 취해야만 시험과 훈련의 목적이 달성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런 형식 대신에 인간의 순종을 어떤 현실적, 육신적 어려운 조건을 붙여서 그것을 지켜내는 지로 테스트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테스트에 아담이 성공한 경우는 자기 스스로의 공적으로 구원을 취득한양 착각하고 자랑이 따르며 하나님에게 감사가 없어집니다. 반대로 아담이 그런 테스트에 실패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 기회는 영영 상실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스스로 뒤집지 못하는 신실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선악과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반드시 있어야 했던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 봅시다. 아주 큰 갑부가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면서 아들에게 집을 맡기고 갔습니다. 차고에는 온갖 차들이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벤즈 600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면서 다른 차는 다 타도되지만 그 차만은 타지 말라고 당부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차고와 차의 열쇠를 다 주면서 그 차의 열쇠를 주지 않고 가면 어떻게 됩니까? 순종의 테스트가 아니라 아예 아들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둘 사이에 올바르고 진실 된 관계는 결코 생길 수 없습니다. 차라리 그런 말을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다 타도된다고 완전히 방임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도 타지 말라고 무조건 금지시켜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음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 아담과 진실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설령 아들이 그 벤즈를 몰고 나가 사고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열쇠를 주고 가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안 하고 자기 말대로 잘 따라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만 설령 자기 말을 위반하더라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결코 손상이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선악과는 너무나 선하며 은혜로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의도하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시고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영원까지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으로선 아담이 타락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사단이란 영적 존재가 인간의 창조 이전에 이미 있었고 그보다 영적인 능력이 뒤지는 인간으로선 틀림없이 사단에게 넘어가리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미리 알았다면 막아 주실 수 있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은 전혀 논리적이 되지 않습니다. 앞에서 길게 따져 본대로 인간을 하나님이나, 동물이나, 로봇 셋 중에 하나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줄 미리 알았어도 인간을 꼭 당신의 형상대로 닮게 만드시길 원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더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계획이 태초부터 다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약에 예수가 없었다면 인간의 타락을 처음부터 허용하지 않았고, 아니 인간 자체를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대안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락이 따를 것을 아시고도 예수가 있기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가장 인간다운 모습, 피조된 인격성을 가진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말하자면 하나님은 잠시 동안 인간을 사단의 수중에 놓아두신 것입니다. 때가 차서 예수님이 구원해 낼 때까지 인간을 죄의 종으로 지내게 했습니다. 또 다시 하나님이 병 주고 약 준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병은 분명히 아담이 잘못해서 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아담에게 병이 날 것을 아시고 그 구원책까지 미리 마련해 놓은 것이지 일부러 병을 준 것이 아닙니다.

쇼핑 몰에서 엄마 손을 뿌리치고 혼자 뛰어간 아이가 어디에 있을지 엄마는 압니다. 그래서  초코렛 가게로 바로 찾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뛰어가 구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엄마 손을 놓고 간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신나고 즐거울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두렵고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혼자 두고 봅니다. 그러나 아기 몰래 뒤를 쫓아다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구원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죄인들을 두고 보시다가 때가 차 매 당신께서 직접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던 인간을 십자가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 질문은 신자가 앞에서 인용했던 시편 기자의 찬양을 진심으로 함께 부를 수 있다면 저절로 해답을 가진 셈입니다. 인간을 인격성을 갖춘 유일한 피조물로 만드시고, 상대적 자유의지를 갖게 해 주고, 천사보다 조금 못하지만 이 땅을 다스리게 하고, 비록 아담이 실패했지만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며 그분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 준 것들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을 로봇이나 동물로 만들지 않고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타락할 줄 알고도 자유의지를 주신 뜻은 당신께서 거룩하고 온전하니 그도 거룩하고 온전해지라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당신을 닮은 인격성을 심어 주었는데 오히려 죄에 묶이는 일에 그 자유의지를 써버린 인간이 그런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거꾸로 책임을 물을 수는 도저히 없지 않습니까? 

출처:

http://whyjesusonly.com/questionok/7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