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16, 2017

히스기야의 기도 그 이후/이진오 목사

🌷히스기야의 기도 그 이후

/ 인천 더함공동체교회, 이진오 목사

'히스기야'는 남 유다 14번 째 왕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시대에는 북으로 앗수르가 강성하였는데, 주전 721년에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남으로는 이집트가 강성하여 남 유다는 앗수르와 이집트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였고 선지자들은 이방 나라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외쳤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인 '아하스'는 친앗수르 정책을 펴면서 앗수르 왕의 신복이요, 아들임을 자처하였습니다(왕하 16:7). 아하스는 여호와의 성전의 예물까지도 앗수르에 바쳤고 심지어 앗수르의 신 림몬을 스스로 들여와 여호와의 성전에 모시고 우상숭배를 일삼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의 길로 행한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역대기 기자가 제2의 솔로몬으로 묘사할 정도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18:3). 종교개혁을 단행해 아버지 아하스가 들여왔던 우상들을 철폐하였고 바알과 아세라 목상도 찍어 버렸으며 심지어 모세가 들었던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던 것도 부수어 없앴습니다. 이 외에도 십일조를 부활시키고 성전을 정화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등 철저한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가 앗수르의 봉신국임을 자처하며 앗수르의 신들을 들여온 것을 모두 훼파하자 앗수르와의 관계는 당연히 불편해졌고 친앗수르 정책은 철회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히스기야가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았다(18:3)."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18:5~6)"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도록 복을 주셨다(18:7)"고 말합니다.

🔹️히스기야의 기도, 그리고 그때에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함으로 국가적으로 형통한 복을 누리던 히스기야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20:1).

히스기야가 죽게 된 그때는 그의 나이 불과 37~38살 정도 되는 때입니다. 히스기야는 주전 686년까지 통치를 했으니, 15년 생명을 연장받은 것을 생각하면 주전 701년 가까운 시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와 공동 섭정을 하다가 주전 715에 단독 왕이 되었는데 25살에 왕이 되었고 29년간 통치했습니다(18:1).

우리는 히스기야가 눈물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15년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설교나 기도와 관련한 이야기에서 예를 들며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기적을 행해 주신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이성이 다 이해하지 못하는 기적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단지 히스기야가 기도했고 하나님이 들어주셨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하고 하나님의 복을 구하자고 전하기에는 전후에 고려해 살펴봐야 할 내용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이 기도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까지 살펴보면 조금 다른 해석과 적용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기도의 배경과 결과를 전체적으로 살펴봄을 통해 히스기야의 기도와 생명 연장을 통해 이 본문이 정말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교훈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뜻하지 않은 고통을 만난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왕이 되어 14년,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서 또 백성들 앞에서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는 그동안 북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이방에 힘 있는 나라들을 의지하다가 결국 이방 민족 앗수르에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앗수르의 봉신국을 자임하기까지 한 아버지 아하스의 정책을 바로잡았습니다. 또 종교개혁을 단행하며 우상숭배를 근절시켰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시키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고 현실화시켰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개혁 조치에는 친앗수르 정책을 편 아버지 정권에서 이를 지지하며 엄청난 정치적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우상숭배와 관련해 생계를 유지하며 살던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이제 겨우 나라가 안정되고 맘 편히 살 수 있을 바로 그 때,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히스기야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가정환경이 좋든 나쁘든, 머리가 좋든 나쁘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정을 이루고 직장 생활을 하고 뜻하는 것을 이루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인생입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이제 조금 살 만하다 싶을 때 뜻하지 않은 청천벽력 같은 고통이, 절망이 우리에게 닥쳐올 때 누군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히스기야의 나이 이제 겨우 37살입니다.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죽을 것이라고 했고 그러니 집을 정리하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벽을 향하여 앉아, 심히 통곡하며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하나님 제가 그래도 주님의 뜻을 좇으려고 애쓰지 않았습니까? 조금이라도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떼를 쓰며 매달립니다.

매정하게 말하면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기를 구한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사는 것이 뭐 대단하다고, 죽으면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가는데 이 더럽고 복잡하고 죄 많은 세상 일찍 가는 게 오히려 복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입장이 되어 보면 그렇게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고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비단 병뿐이 아닙니다. 열왕기서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죽은 사람, 전쟁의 어려움 등 여러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기도하고 간구하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닥쳤을 때, 또 바라는 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당연히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옵소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도 모두 간구와 간청으로 무엇을 달라 하는 내용입니다.

📍둘째, 응답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기도가 기도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자연 만물을 주관하시고 순리대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한둘이겠으며, 하나님께 매달리고 싶은 사정이 있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정에 이끌려, 누군가를 편애하여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역사는 뒤죽박죽이 될 것이고 인간들 안에는 하나님이 공평과 정의를 말하면서 스스로 공평하지 않다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기도할 권리가 있고 아니, 어쩌면 기도를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지만 그 기도가 요구한 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께서 인간이 기도한 대로 다 들어주시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저주하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스포츠 경기를 하면서도 누구나 이기기를 구하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때는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만한 이유가 있고 역사적 섭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때는 그의 공평과 정의, 사랑과 은혜의 성품에 위배됨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 것은 극히 예외적이었는데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와 뜻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섬기며 우상숭배 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화를 내시며 멸망시키고자 할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회개하며 울며 금식하며 떼를 쓰니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십니다. 이는 모세의 기도처럼 공의로운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필연적 응답입니다.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히스기야가 연장받은 15년의 생명은 그저 히스기야라는 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역사를 거스르고 자연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 응답 후에 더욱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히스기야는 15년 생명을 연장받은 것을 통해 본인은 15년 더 사는 복을 누렸지만, 남 유다는 이로 인해 멸망의 길로 가는 단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엄밀히 말해 히스기야의 기도와 이에 대한 응답은 복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저주로 작용하였습니다.

열왕기하 20장 15절은 '그때에'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를 문병하기 위해 편지와 예물을 들려 사람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기쁘게 사신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신들에게 왕의 보물고와 무기고를 열어 모든 것을 보여 주며 자랑하였습니다. 심지어 나라 안에 모든 것 중에 사신들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국가 기밀,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 것들을 거침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이런 태도에는 히스기야의 자만심과 교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한 것은 반앗수르 정책에 기인합니다. 북방 지역에 떠오르고 있는 바벨론과 화친하는 것을 통해 앗수르를 경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도 유다가 얼마나 부강하고 힘이 있는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외교적으로는 유다에 유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를 방문한 이사야는 오늘 보여 준 모든 것을 바벨론에 빼앗기고 심지어 왕의 후손들까지도 바벨론에 끌려가 환관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은 어처구니없게도 "내 때에 일어날 일이 아니니 다행이라(왕하 20:19)"는 식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던 때와 너무나 다른 태도입니다. 기도 응답에 대한 교만, 외교적 자신감에 대한 교만이 영적인 눈을 어둡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실제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돌아오는 일로 벌어지고(대하 33:11), 115년 이후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는 것으로 현실화됩니다.

또 열왕기하 18장 13절은 히스기야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로 쳐들어온 기사를 기록합니다. 이때는 히스기야가 생명을 연장받는 그해나 그 다음 해 가량입니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들을 환대하고 바벨론과 연계해 앗수르를 압박한다 생각한 앗수르 왕이 안 되겠다 생각하고 쳐들어온 것입니다. 다행히 이 전쟁은 하나님이 앗수르 군사들을 몰살시키시고 산헤립을 죽이심으로 크게 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에게 은 300달란트, 금 30달란트를 여호와의 성전 예물까지 모두 긁어 바쳐야 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성전 문의 금과 모든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서 바쳤습니다. 앗수르의 부하들에게 말할 수 없는 조롱을 들어야 했습니다. 왕의 사정이 이럴진대 백성들의 어려움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생명 연장으로 인한 가장 비극적인 상황은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열왕기하 21장 1절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12세에 왕이 되어 55년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므낫세가 얼마나 악독했는지 북 이스라엘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과 아세라 등 온갖 우상들을 끌어와 여호와의 성전에서 버젓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을 불에 태우는 이방 제사를 했고, 백성들을 죽여 그 피가 강을 이루었습니다. 므낫세의 악독함은 이후 요시야에 의한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지 않고 유다를 멸망시키게 되었습니다(23:26).

이런 므낫세가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히스기야가 15년 생명을 연장받은 기간에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 응답보다 순종이 중요하다

히스기야는 37살 너무나 좋은 나이에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렸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사 뜻을 돌이켜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었습니다. 히스기야는 15년이나 덤으로 인생을 더 연장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연장받은 히스기야는 교만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고 창고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무기고에는 무기가 가득하니 교만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함에서 멀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우리의 눈물 어린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을 받을 때 그때가 중요합니다. 그로인해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공평과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역사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내 기도를 들어주셨을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겸비하고 더욱 낮은 마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반면,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에 순종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먹을 것을 달라고 떼쓰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메추라기 떼를 보내 고기를 먹게 하시지만, 그 고기를 입에 넣고 씹기도 전에 심히 큰 재앙이 임하였습니다(민 11:33). 또 왕을 달라고 사무엘에게 떼쓰는 백성들에게 왕을 주시지만, 그 왕으로 인해 그들이 고통 받고 결국 멸망케 되었습니다.

때로는 응답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응답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 우리는 자칫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작은 열매도 잃어버리고 영원에 대한 구원도 상실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와 자연을 순리대로 인도하심을 믿고 내 욕심, 욕망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좇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바른 믿음이요 태도입니다.

이 믿음과 태도로 살아가는 한 주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멘!

Friday, October 13, 2017

📌주일성수의 역사 / 이민규 교수(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주일성수의 역사

/ 이민규 교수(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본인(이민규 교수, 한국성서대 신약학)의 논문 <사회학적 시각으로 본 마태복음에 나타난 안식일>(신약논단, 봄호 2006. 3)과 복음주의의 대표학자인 D.A. Carson이 편집한 <From Sabbath to Lord's Day>(1982)에 실린 7명의 성서학자와 교회사 학자들의 심포지엄, 그리고 특히 양용의 교수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이레서원, 2000)의 내용을 일반인이 알아듣기 쉽게 정리 요약한 것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자란 교포 목사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미국 교회와 한국교회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그 젊은 목사는 율법적인 '주일 성수'를 들었다. 주일 성수란 말도 생소할뿐더러 대부분의 미국 교회에서는 주일은 예배의 날이며 축제의 날로 여기지 신약의 안식일로 지키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 교인들은 율법적인데 특히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여긴다는 짐이 신기했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미국 목사 한 분과 통화하면서 미국에서는 주일을 예배의 날로 여기지 안식일과 무관하게 본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보는 것에 대하여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 주일이 신약의 안식일이라는 전통은 자기가 아는바 일반 교회에서는 없다고 했다. 주일/안식일 엄수주의 전통은 사실 과거 청교도 신학에서 수입한 것인데 막상 미국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한국교회는 신학의 측면에서 자생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특정 전통을 비판 없이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한국교회 대부분은 예전부터 안식일 엄수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이미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문제점을 복음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해결한 서양 교회들과 달리 한국교회는 아직도 유별나게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믿는 경향이 강하다. 신약의 성도들은 주일을 그리스도의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날짜만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제칠안식교의 가르침을 거의 문자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주일 성수란 이름으로 주일에는 사업이나 장사도 접고 절대 근무를 하지 않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본다. 주일은 말 그대로 신약의 안식일로 지킨다.

물론 지금은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것이 예전처럼 과격하지는 않다. 예전에는 과거 청교도주의를 모범으로 삼아 주일날노동을 금하는 것은 물론 봉헌 이외에는 돈을 쓰는 모든 행위, 일과 오락에 대한 일절 금지를 요구한 교회들이 많았다. 따라서 버스 택시와 같은 공중 교통수단 사용 금지, 식당 찻집 금지, TV 극장, 연극, 세속 음악 시청 금지, 모든 스포츠 오락 금지 및 각종 시험 응시 금지를 주일 성수의 모범으로 여겼다. 어느 교회에선 주일날 바자회도 금지한다. 어느 목사는 주일날엔 자판기 커피도 빼 먹지 않는다고 하며 교인들이 그의 엄격한 경건 생활을 칭송하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럼 초대교회도 주일 성수를 했을까?

🔵주일에 일하면 안 되나요?

답 : 초대교회는 주일은 예배드리는 날로 여겼지 쉬는 날로 여기지 않았다. 주일은 보통 때와 같이 일하는 날이었다!

이 질문은 주일을 구약의 안식일처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 로마제국에서 일요일은 공휴일이 아니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원래 자기 문화에서 하던 것처럼 계속하여 안식의 날만 쉬었다.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일요일은 당연히 일하는 날이었다. 일요일이 공휴일이 된 것은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부터다. 콘스탄틴 황제는 기원후 321년 3월 3일 주일을 쉬는 날로 정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7월 3일 로마법은 주일을 공휴일로 선포했다(Codex Instinianus 3.12. Codex Theodosianus 2.8.1).

그러나 이때에도 주일은 예배의 날임을 강조했지 신약의 안식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330년 교부 유세비우스의 시 91편 주석 참조). 초대 교부들인 저스틴(Justin), 터툴리안(Tertullian),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드(Clement of Alexandria), 그리고 오리겐(Origen)까지 모두 주일을 예배의 날로 강조할 뿐 신약의 안식일이라거나 쉬는 날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소수지만 4세기경 성 암브로시우스와 같이 일요일에는 여행과 연극 관람 등을 금하고 성찬 행위와 자비로운 행위만 하라고 권한 경우도 있었다(Exam, III. 1.1).

초대교회는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바꾸지 않았다. 초대교회에서 주일은 안식의 날이 아니라 예배의 날로 정착되었다. 그들은 언제 예배를 드렸을까? 그들은 일을 마치고 주의 만찬을 포함하는 저녁 예배를 주로 드렸다. 기독교가 탄생하고 300여 년이 지나기까지도 주일은 기독교인들에게 일하는 날이었다. 주일날 사업을 접고 직장을 가지 않고 쉬는 날로 생각한 기독교인은 있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공휴일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초대교회에 주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주중에 육체적으로는 가장 '힘든 날'이었다. 일은 일대로 하고 예배는 예배대로 드렸기 때문이다.

🔵그럼 주일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신학은 어디서 나왔을까?

일요일이 공휴일로 선포된 이후에도 기원후 6세기까지 일요일에 일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시도는 드물었다(Bauckam, <Post-Apostolic Church>, p. 286). 기원후 1200년경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74)는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 교리를 확립한다. 그는 주일을 기독교의 안식일이라 선포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므로 모든 일을 금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안식일에 관한 제4계명은 폐지될 수 있는 의식법이 아니라 신약의 백성에게도 유효한 하나님의 도덕법이라 주장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즉 날짜만 바뀐 것이라 했다(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 5 vols,; [repr.: New York: Benzier Brothers, 1948], 1a 2ae 100.).

🔹️아퀴나스의 오류

아퀴나스의 율법에 대한 분류는 율법의 절기와 의식, 제사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대치되었고 이스라엘과 관련된 율법의 시민법 역시 민족을 넘어선 복음으로 효력이 다하였고, 오직 도덕법만이 남는다는 이론이다. 이 중 안식일의 쉼이 도덕법에 속한다는 것이기에 오늘날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으로 분류하는 아퀴나스의 전통은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국가와 종교가 구분되지 않았던 고대 유대인들에게 종교법과 시민법, 혹은 도덕법의 분류는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이런 구분 자체는 헬라적 이원론의 산물에 불과하다. 신정 통치를 추구한 이스라엘은 종교국가로 율법은 국가법이자 종교법이며 도덕법이다. 그들에게 제사제도는 곧 시민법이요 도덕법이다. 또한, 도덕은 하나님에 대한 제사이다. 율법을 통합적으로 보는 그들에겐 절기, 의식, 제사법을 다른 법에서 구분할 방법이 없다.

설사 아퀴나스의 분류를 인정한다 해도 율법 조항 중엔 이렇게 분류하기 모호한 것들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희년은 의식법으로 보기도 시민법으로 보기도 모호하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밭의 모퉁이를 남겨 두라는 것은 시민법일까 도덕법일까? 십일조는 그럼 도덕법이라 오늘날 강조하는 것일까? 율법은 하나로 되어 있지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없다. 안식법도 쪼개서 결코 도덕(쉼의 논리)법과 의식법(요일의 변경) 부분으로 나눌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의 반기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안식일 엄수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었다. 칼뱅은 주일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선포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유대교의 미신을 기독교에 접목한 거짓 선지자로 몰아세웠다. 안식일 엄수주의적인 주일성수에 대한 칼뱅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이처럼 거짓 선지자들의 덧없는 이야기들은 사라진다. 그들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 사람들을 유대교의 견해로 감염시켰다. 그들은 이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부분(그들이 하는 말로, 일곱째 날의 '제정')만이 폐지되었고, 도덕적 부분(즉, 이레 가운데서 하루를 정하는 것)은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의미에서 날을 변경한 것일 뿐이고, 그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이러한 자신들의 교회 규정들을 고수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들보다 세 배나 더 유치하고 육욕적인 안식일 엄수주의적 미신이다." (Calvin, Institute, 2, 8, 34)

<기독교 강요> 2, 8, 28~34에서 칼뱅은 안식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폐지되었음을 강조한다. 칼뱅은 여기서 예배가 꼭 일요일(주일)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주일 예배는 일요일이 쉬는 날이기에 다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편의성 때문이다. 성취된 안식일에 대한 그의 견해는 기독교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따로 주일을 인식일로 지킬 필요란 없다.

루터는 칼뱅보다 더욱 비판적이다. 루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매주 '쉼의 날'이나 심지어는 '예배일'까지도 종교적 의무로써 지켜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다(the Augsburg Confession, 1530).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모범을 누리고, 따라서 안식일이나 혹은 다른 한 날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을 즐거워할 일이다."

🔴청교도주의가 종교개혁 전통을 떠남 : 가톨릭의 안식일/주일 엄수주의 교리 선택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은 긴 세월 동안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지켜내지 못한다(M. Bucer, P. Martyer, H. Bullinger). 그리고 청교도들은 이후 율법주의적인 안식일 엄수주의를 교리화한다. 청교도들은 분명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금욕적이고 정숙한 신앙을 엄격하게 추구한 공로가 있다. 그러나 청교도 운동에는 공과 사가 있다. 청교도들은 율법주의와 배타주의적 성향이 강해 신앙 스타일이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쉽게 정죄하면서 자신들의 경건을 자기 의를 드러내는 잣대로 삼은 모습을 자주 보였다. 영어권에서 청교도란 표현이 속어로 위선자라는 의미일 정도였다.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라는 소설은 특히 미국 청교도들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엄격성, 바리새적 위선을 꼬집는다.

청교도 운동의 안식일 엄수주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에 잘 나타나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년), 21, 7~8,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1647) 제 59~60문,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1645년) 1, 1~6).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1647) 제59~60문

제59문 하나님께서 칠일 중에 어느 날을 안식일로 정하셨는가?

답 : 세상 시작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하시기까지는 하나님이 이레 중에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하셨고, 그 후로부터 세상 끝날에 이르기까지는 이레 중에 첫날을 정하셨으니 이날이 곧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다.

제60문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 :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방법은 다른 날에도 할 수 있는 모든 세상의 일과 오락을 끊고 그날을 종일토록 거룩하게 쉬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로 그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부득이한 일이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드려야 할 시간만큼은 예외이다.

보쿰은 웨스트민스터의 예배모범에 나타난 주일의 노동, 운동과 오락 금지를 "위험할 정도로 바리새주의에 가깝다"고 하면서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비복음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Bauckham, <Protestant Tradition>, p. 327).

🔵그렇다면 신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설사 아무리 엄격하게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킨다 해도 교회 시대에 구약의 명령을 그대로 지키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만일 주일이 신약의 안식일이라면 주일날 일반적인 노동 이외에도 불을 피우는 일(출 35:3), 음식을 만드는 일(출 16:23), 나무를 줍는 행위(민 15:32~35), 여행(사 58:13)은 금지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더욱 큰 문제가 된다. 불을 피우는 일은 현대적으로 엄격하게 전기를 키는 일을 포함해야 하는가?, 음식을 만드는 일은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우는 행위까지, 그리고 투석형이 선고되었던 나무를 줍는 행위는 오늘날 휴지를 줍는 행위(종이도 나무니까)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또한 여행 금지로 인해 주일예배는 동네에 있는 곳에서만 드려야 하는가? 유대인들은 2000규빗(3/4마일) 이하의 거리만 걸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랍비들처럼, 출 16:29과 민 35:5를 근거로 해석할 때).

이는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자는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율법으로 돌아가 이방인들이 유대교의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는 초대교회에도 논쟁이 되고 있었다.

🔹️바울서신과 안식일

사도바울은 안식일은 복음과 대치된 '율법의 행위'이며 부정적으로 반대하는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갈라디아서 4:9~11에서 바울은 유대의 율법 교사의 요구를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복음을 부인하고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 종노릇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골로새서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혼합주의로 돌아가는 것으로 본다. 이는 본질적으로 이전 세대에 속한 것이고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더는 구속력이 없다. 안식일 계명은 그리스도로 인해 나타날 영원한 안식에 관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골 2:16~17).

로마서에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아직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자유를 얻지 못한 오직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서만 허락된다(롬 14:1~12).

🔹️히브리서와 안식일

히브리서는 3:7~4:11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다루고 있다. 복음에 응답하여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며(4:2),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낸 목적이었다. 히브리서 저자에게 창조의 일곱 번째 날에 하나님의 쉬신 사실, 즉 안식일의 의미는 마지막 때 주어질 참된 안식(3~4, 10절)은 '하나님나라' 혹은 요한복음의 '생명'과 같은 뜻이다. 신약에서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참된 안식이 제공되는 종말론적인 구속으로 성취된다. 결코, 안식일 율법이 신약에서 날짜만 바뀌어 연장된 것은 아니다(히 4:1~11).

🔹️마태복음의 안식일 : 주님을 만나 안식을 성취하고 완성하는 날!

복음서는 기본적으로 예수를 율법의 위에 있으신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배하는 주님으로 소개한다(눅 6:1~11, 막 2:23~28).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핵심 구절은 마태복음 12:1~14(병행 구절 눅 13:10~17; 14:1~6; 요 5:1~8)이다. 필자 역시 이 본문에 관한 졸저를 쓴 적이 있다(<사회학적 시각으로 본 마태복음에 나타난 안식일>, 이민규).

마태복음은 안식일 논쟁을 철저히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안식을 제공하는 하나님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차원에서 전개한다. 안식일 논쟁은 '예수가 누구신가?'를 답하는 기회로 사용된 것이다. 예수는 다윗보다 크시고 참된 성전이시며, 안식일의 의도인 자비를 실현하시는 분이고, 더욱 놀라운 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다.

즉 마태복음에서 안식일 논쟁은 예수가 안식법을 성취/완성하시는 하나님/주님이심을 보여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예수의 구속 사역이야말로 구약 안식일에 대한 원래 의도요, 안식일 율법의 종말론적 성취이자 완성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종말론적인 안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만나 구원에 참여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안식일 율법의 성취이자 완성이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완전히 폐지된 것인가?

아니다! 예수는 안식일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고 완성하러 오셨다. 구원으로 성취되고 그 원래 의도했던 정신은 복음으로 완성되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어 구원의 안식에 거하면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된다. 이후 기독교인에게는 영적인 차원에서 날마다 안식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육체적 안식은 필요하다. 육체의 완전한 구원은 장래의 것이기에(고전 15:51~54; 빌 3:21),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곱째 날의 안식이란 창세기의 내용은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나만의 쉼이 아니라 모든 고용인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쉼을 제공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구약의 안식일 율법에는 오늘날도 배워야 할 사회 복지적 정신이 있다.

아래의 내용은 본인의 졸저에서 인용한 것이다(<사회학적 시각으로 본 마태복음에 나타난 안식일>, 이민규, <신약논단>, 봄호 2006. 03. 01).

1) 예수의 말에 따르면 안식일 법의 조항은 가난한 자의 절실한 필요의 상황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이는 구약의 안식일 의도의 회복이다. 여기서 구약과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종교/정치적 차원에서 위정자들을 향해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안식일 정신의 구현을 말했다면, 예수는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차원에서 자신을 따르는 개개인들과 그의 제자 공동체에 소외된 자들을 향한 영적이고 육체적 필요에 관심을 보이길 원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2) 예수는 안식일에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안식을 누리게 하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즉 모두에게 쉼과 예배하는 날로서의 안식일 전통도 중요하지만 소외된 자들의 안식을 위해 이제 제자들은 안식일에도 휴식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선을 행하는 것을 통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성취하는 것이다.

3) 예수는 안식일에 모든 사회적 경제적 장벽을 허무는 것으로 참된 안식을 제공한다.

4)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주인이므로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분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안식일의 성취이다.

5)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거나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대치하려는 시도도 없다. 그러나 안식일 정신은 지속하며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게 안식을 제공하여야 하는 의무는 오늘날도 계속된다.

🔵안식일과 주일

그간 안식일과 주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는 있었으나(<This is the Day: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Christian Sunday in its Jewish and Early Church Setting>, Roger T. Beckwith and Wilfrid Stott,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8), 현재까지 학계의 절대 다수의 성서학적인 연구는 주일과 안식일이 신학적으로 상관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신약은 안식 후 '첫날'을 신약의 안식일로 대치하려거나, 안식일 신학을 주일예배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주일은 예배의 날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상응하는 공휴일을 제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주일이란 표현에 익숙하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주의날(퀴리아케 해메라, 주일)'이란 표현이 딱 한 번 요한계시록에 나온다(1:10). 여기서 '주의날'은 △종말론적인 "주의날(Yom Yahwe, 심판과 구원의 날)" △안식일(토요일) △부활절 △일요일로 제안되었다. 아마도 이 표현은 일요일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유는 12사도의 가르침을 적은 2세기 초 기독교 문헌인 디다케에서 주일예배를 명령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디다케 14:1)."

또한, 초대교회 교부인 이그나티우스는 일요일을 주의날로 표현하면서 일요일을 "안식일화 하지 말고 주님의 날(Lord's Day)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명령한다(Ignatius, Magnesians 9:1). 이 구절은 교부들이 초대교회가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여기려던 시도를 금지한 증거이기도 하다.

대략 기원후 70년 이후 1세기경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바나바 서신도 제 팔일(주일)의 기념(예배)을 강조한다.

"우리 역시 팔 일을 기념하며 즐거워해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Epistle of Barnabas 15)."

2세기 이후에는 '주일(주의날)'이 기독교인들에게 날짜의 차원에서 일요일의 의미로 확실하게 정착되기 시작한다. 그전에는 안식 후 첫날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사도행전에서는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이 나온다("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행 20:7). 이 표현은 일요일인 주일, 아니면 토요일 저녁을 의미할 수 있다. 누가가 로마식 날짜 계산법을 따랐다면 '안식 후 첫날'은 자정부터 자정까지의 일요일을 의미할 것이다(사도행전이 전반에 걸쳐 로마식 제도를 따랐다는 증거는 4:3; 20:7; 23:31~32).

그러나 누가가 유대식 날짜 계산법을 따랐다면(일몰에서 일몰까지) 여기서 안식 후 첫날은 '토요일 저녁'이다('그 이튿날'로 번역된 '헤 아우리온'은 헬라어로 '그다음 아침'도 의미할 수 있다). 사실 New English Bible과 Good News Bible, Today's English Version 등은 “Saturday"(토요일)로 그리고 표준새번역성경(난외주를 통해)은 이를 '토요일 저녁'으로 번역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일요일 오전 선교지로 출발하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강론을 듣기 위해 토요일 저녁 애찬식(성찬식)을 하며 예배를 드리던 시간이었다. 이날 유두고는 밤이 깊어 졸다가 2층에서 떨어진다.

고린도 교회에서 한 주의 '첫날'을 예배를 위한 날로 모였다는 암시가 있다(고전 16:2, 당시는 저녁 만찬을 포함하는(애찬식, 성찬식) 예배로 드렸는데 이것이 로마식이거나 다다케의 고정화된 표현이라면 분명히 일요일 저녁 식사 때일 것이나 유대식의 일요일 개념이라면 토요일 밤을 의미했을 가능성도 있다). 성만찬을 주일날마다 모여 드린 가장 전통은 사실 디다케에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다. 전반적으로 초대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강한 주일 전통을 세운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주일이 노동의 날이었고 사도바울이 특정한 날을 지키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일을 소중하게 여기지 말란 말은 아니다. 바울의 의도를 '모든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지 특정 날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새 언약의 성도들에게 가하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미 논의한 대로 골 2:16~17; 참조 롬 14:5~8; 히 4:1~11, Ignatiusgnatius, Magnesians 9:1).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주일은 특별하게 거룩한 날이다. 그러나 다른 날들도 똑같이 특별하게 거룩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일만 거룩한 날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날을 거룩한 날로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것을 금한 의도이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어찌 주일 오전 예배는 중요하고 오후 예배나 평일 날 드리는 예배는 덜 중요하단 말인가? 모든 날이 소중한 것같이 모든 예배가 중요하다. 특히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며 율법의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구해 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구원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 넓게 본다면 주님의 날이 아닌 날이 어디 있는가? 주일을 특별하게 거룩한 날로, 주일예배를 특별하게 소중한 예배로 드리는 차별적인 태도는 성경적이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아직도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 안식교와 다름이 없어진다. 우리는 주일뿐만 아니라 모든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토요일도 공휴일로 변하면서 우리 사회에도 일부 주일 대체 예배에 대한 논의가 있다. 주일 대체 예배라는 것은 없다. 모든 예배는 대체할 수 없으며 항상 거룩하고 특별하다.

기독교인이 주일날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날에 해서는 안 된다. 다른 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주일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양용의 교수가 어디선가 한 말이다). 주일을 율법적으로 사업이나 운동, 오락을 금하는 날로 여겨서도 안 되지만, 경건한 예배와 모임의 중요성을 위해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 예배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이다. 주일은 특별하고 소중한 날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일뿐만 아니라 다른 날들도 다 특별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안식일/ 주일 엄수주의를 떠날 때 또 다른 위험도 따른다. 율법의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주말의 여가나 사회적 활동을 위해 주일의 참된 의미를 무시하거나 간과한다면 이는 율법주의만큼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며 공휴일이기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날이다. 주일은 예배를 위한 기독교의 중요한 전통이다. 예배를 온전히 드릴 목적으로 그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 수는 없어도 매우 바람직한 현실적인 권장 사항이다. 또한 창세기 2장 2절을 모델로 하여 일주일에 최소 하루 정도 육체적으로도 쉬는 것은 바람직하다. 마침 공휴일인 주일날 예배를 위해 모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좋은 전통이다.

🔵나가는 말

구약의 안식일이 변하여 신약의 주일이 된 것이 아니다. 안식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영원한 '안식'인 구원으로 성취되고 완성되었다.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초대교회는 주일날 모여 예배를 드렸다.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예수님의 영원한 안식인 복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말이다.

신약에서 주일은 결코 신약의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일은 모세 율법이지 신약의 계명이 아니다. 즉, 이스라엘에 특별한 표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신약에서 어떤 것이 폐하여지고 어떤 것은 유지되고 어떤 것은 어정쩡하게 타협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통째로 폐하여졌고 통째로 갱신/성취/완성되었다. 신약의 계명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율법의 뜻과 정신이 완성된 것이다.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안식으로 성취된 것이다(히 4:1~11).

제발 주일을 신약의 안식일로 지키지 말아라!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고 안식을 누리며 사는 것이 올바른 안식일 계명을 성취하고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참된 안식일의 유일한 모임이라면 미래에 있을 새롭게 창조된 세상에서 어린양과 함께 영원히 세상을 통치할 하나님과 어린양의 종들의 모임이다(계 22:3~6).

물론, 안식법의 정신 중 신약 성도에게 아직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몸은 아직 연약 가운데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완전한 몸의 구원은 미래의 부활 때 이루어질 것이다(고전 15:51~54; 빌 3:21). 그 전에 우리는 정기적인 쉼이 필요하다. 특히 고용인들에게도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을 제공하는 것은 오늘날 온 세상에 적용돼야 할 안식일 정신이다. 특히 쉬는 날을 함께 모여 영혼의 양식을 섭취하는 기회로 삼으면 유익할 것이다.

신약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명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같은 특정한 날을 지키는 것을 금지한다(골 2:14~16).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안식일 율법은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대한 그림자였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취/완성되었다. 구원의 안식을 누리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미덥지 않은 율법 준수는 이제 피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종하는 신약의 교회는 안식일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마 11:28). 우리는 구약과 동일한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킬 수도 없고 지킬 의무도 없다. 종교개혁자들도 안식일 엄수주의가 성경에 근거할 수 없는 가르침임을 간파하고 다시 초대교회의 성경적 신학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였다. 주일은 안식일의 의도가 아닌 거룩한 예배를 위한 모임 날로 지켜야 한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주간의 첫날로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의 날인 주일날 자발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디다케 14:1 참조 고전 16:2).

그러면 주일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주일은 율법적인 의무가 아니라 기쁨의 잔치에 초대이다. 주님을 위한 예배를 억지로 드리거나 자주 빠진다면 문제가 있는 그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예배 모임을 위해 명령을 받았다.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히 10:25)."

이 글은 마치며 또 다른 위험성을 경고하고 싶다.

이 글이 오해되어 반율법주의로 빠질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율법주의의 위험에서 점차 반율법주의의 위험으로 빠지고 있다. 그래서 필자의 졸저인 안식일/주일 논쟁이 오히려 주일예배를 소홀히 여기게 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 같아 두렵다.

요즘 안식일 엄수주의에 빠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오히려 그런 성도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푸념하는 목회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리새인처럼 헌금과 예배, 기도와 말씀에 열심도 없으면서 그들을 욕하면 안 된다. 진정성 있는 복음을 믿기는 정말 쉬우면서도 어렵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오늘날 절실하다.

오직 예수의 주 되심과 진실한 복음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