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28, 2017

성령 충만이란 / 배본철교수

💥‘성령 충만’이란 어떤 상태인가?

/ 배본철 교수(성결신학대학교)

Q) 성경에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 있는데요. 어떨 때 기도를 많이 하고 나면 성령 충만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 걸 말하는 건가요? 정확히 어떤 상태가 성령 충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A) 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정말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말 그 의미가 무언지에 대해서는 딱 꼬집어 말하기가 곤란한 모호한 면이 있는 듯합니다.

사실 성령 충만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성령의 은사나 기적 행함 또는 열광적인 기도의 몰입이나 황홀경의 체험 등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 충만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끌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 충만의 원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단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상태만 가지고는 우리를 충만히 다스리지 못하십니다. 우리들 자신의 욕망과 편견 등으로 가득 찬 영혼으로는 결코 성령 충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성령께 온전히 우리의 영혼이 붙잡히게 될 때 성령 충만의 상태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성령에 충만할 때 우리의 삶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와 복종의 영으로 넘치게 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8-21).

성령 충만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뜻으로 늘 영혼이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곧 성령 충만의 상태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대개의 크리스천들이 관념상으로는 성령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생활 속에서 성령께 인격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비록 성령 충만을 구하고 있지만 이를 얻지 못하는 경우 또한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많은 기도를 드렸을지라도,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서 성령께 인격적인 복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성령 충만을 구하고 계시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그 경험을 하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과연 내가 성령께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온전한 복종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시다면 이제는 마음의 태도를 회개하여 주님께 대한 복종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때 성령 충만을 받았으나 현재는 충만한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주 쓰러지는 분들이 계시다면, 과연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 성령께 복종하지 않았는지를 살펴보고 그 부분을 새롭게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난 이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온전히 우리의 영혼을 통치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대부분 신자의 삶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 분은 인격을 지니고 인격적인 관계를 우리와 맺기 원하십니다.

또한 성령 충만이란 <성령과 친밀히 교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친밀한 교제를 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피했습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8-10).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멀리 했던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온 것은 죄악과 수치와 두려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인간의 영혼은 부패한 죄성을 유전(遺傳)으로 온 인류에게 이어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끊어진 교제의 다리를 다시 잇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로 죄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신앙의 경륜이 오랜 분들만이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초신자라 할지라도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 나누기를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성령 충만한 상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회복이란 바로 주님과의 끊어진 교제를 다시 잇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를 즐기는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신앙과 장성한 자의 신앙

🔥어린아이의 신앙과 장성한 자의 신앙

✔히브리서 5장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어린아이는 자라서 일정 나이가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또 그로부터 약 12년이 지나면 대학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대학 진학 나이가 되었음에도 지능과 사고 능력이 발달하지 않아 초등학교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한다면, 이는 그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말할 수 없는 큰 비극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정체에 빠진 믿음의 자녀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의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장성한 자의 믿음이 되었어야 하는데, 아직도 어린아이의 믿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향해 안타까워하며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어린아이의 신앙과 장성한 자의 신앙을 대조해 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신앙의 모습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린아이 신앙의 모습

먼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모습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어린아이를 때론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부모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강한 의존성과 부모 말이면 무엇이든 잘 믿는 순수한 믿음의 특성을 높이 평가하며 어린아이들과 같이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있을 때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마18:3).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아이의 긍정적 특성들보다는 부정적인 특성들에 초점을 맞춰 우리에게 그러한 잘못된 모습은 버리도록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람직하지 않은 어린아이 신앙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요?

첫째, 젖을 먹는 것입니다. 육신의 어린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 것처럼, 믿음의 어린 자도 단단한 말씀은 먹지 못하고 초보적인 젖과 같은 말씀만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의(義)라는 한자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 우리가 의인이 되기 위해선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롬3:21), 양(羊)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요1:29) 내(我)가 하나되어야만 하는데, 그리스도 예수와 내가 하나되지 못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내가 하나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하나되는, 말씀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초보적인 말씀만을 붙잡고 언제까지나 누군가의 섬김만 받길 원하며, 나의 헌신과 노력, 나의 희생이 요구되는 말씀은 토해내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둘째,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의 두 번째 특징은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고전3:1).

이 사람들은 내 기분과 어긋나고 육신적인 내 생각과 어긋나면 그 어떤 말씀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내 생각이나 기분에 맞지 않으면, 단단한 음식이라 하여 토해내 버리고 오직 내 기호에 맞고 기존의 가치관과 감정에 부합하는 말씀만을 택하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일관성있게 행하지 못하고 감정에 따라 심하게 언행의 변덕을 부립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제 아무리 나이가 많고 신앙 생활을 오래 하여도 하나님 나라의 어린 아이일뿐입니다.

이상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2가지 어린아이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외에도 어린아이 신앙의 부정적인 특징들은 많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희생할 줄 모르는 것처럼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희생정신이 없어서 봉사도 싫어하고, 헌신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오직 대접받기만 원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인내심이 없습니다. 기분이 내키면 청소도 하고 교사, 성가대 등 물불 안 가리고 덤비다가도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거나 기분이 상하면 금방 포기하고 직분을 팽개쳐 버립니다. 또한 이런저런 핑계로 여러 소그룹을 옮겨다니며 정착하지 못하고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찢어 놓고 분열시키며 상처를 줍니다.

뿐만 아니라 툭하면 울고 삐지는 어린아이처럼 쉽게 시험에 들고 조그마한 문제에도 잘 넘어집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돌, 벌레 등 아무 거나 가리지 않고 입으로 가져가는 것처럼, 진짜 내 믿음을 살리는 선한 말씀이 무엇인지 분변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 기호에 맞으면 어떤 말씀이든 다 받아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고난은 싫어하고 영광만을 구하기 때문에 조금만 고난이 와도 흔들리고 너무나 쉽게 예수를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언제나 고난 후에 영광이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있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잊지마십시오.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아이가 먹는 젖을 '말씀의 초 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히5:12-13), 이 '초보(헬: 스토이케이온)'는 벧후 3:10에 보니까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체질(헬:스토이케이온)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라 하여 마지막 날에 지옥 불에 떨어져 심판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빨리 장성한 자의 신앙으로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를 드리는 믿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2. 장성한 자의 신앙의 모습

그렇다면 과연 이와 대비되는 장성한 자의 신앙은 어떤 모습일까요?

히5:14에서는 장성한 자를 향해, 단단한 식물을 먹어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단단한 식물, 깊이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기에 모든 환경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분변하여 행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장성한 자의 신앙은 고난이라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어린 자의 신앙과 확연히 구별되게 되는데, 고난이 다가오면 바로 신앙의 근본까지 흔들렸던 어린아이 신앙인과 달리 장성한 자는 고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는 환경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기 위해 주신 시험과 훈련이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두려워 말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승리합니다.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요6:63)만을 붙들어 그 어떤 환경이 와도 흔들림이 없는 신앙, 바로 이 신앙이 단단한 식물을 먹어 선악을 분변하는 장성한 자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처럼 장성한 신앙과 어린아이의 신앙을 나누는 시금석이 말씀에 달려 있으므로, 성경은 진짜 알곡 같은 성도들을 추려낼 때 '말씀을 취하는 태도'를 분리의 잣대로 사용하십니다.

기드온을 통해 하나님께서 미디안과 싸울 300용사를 뽑아내시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분리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삿7:1-8). 두려워 떠는 2만 2천을 돌려보내고 '주를 위해서라면 생명 걸고 충성해 보겠습니다' 다짐하는 1만인이 남았지만,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사용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물을 먹는 모습을 보시고 개처럼 핥아먹는 자, 꿇어 엎드려 먹는 사람은 다 돌려 보내고 오직 두 손으로 떠서 흘리지 않게 받치고 먹는 사람만 군사로 사용하셨고 그들을 통해 승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오직 말씀을 분변하여 생명의 말씀만을 받아서, 흘림없이 모두 다 취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택하시어 사탄 마귀의 권세를 파하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단단한 식물을 먹는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사용하시고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를 위해서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해야 합니다(히5:14).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끊임없는 분리의 역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때에는 반드시 양과 염소, 알곡과 쭉정이,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로 나뉘어집니다.

기드온의 300용사와 같이 말씀을 분변하여 생명의 말씀만, 흘리지 않고 다 받아먹고 장성한 영적인 군사가 되어, 사탄 마귀와의 싸움에서 그리고 육의 자신과의 싸움에서 모두 다 승리하는 믿음의 용사가 됩시다.

(어느 신앙 칼럼에서 펌...)

한결같은 믿음

🌻한결같은 믿음 (정이철 목사)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10)."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은 사람이 되려면 먼저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변덕이 없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고 안정된 것도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믿음은 그 사람의 성품과 마음을 통하여 표현됨으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의 믿음은 결국 함께 출렁이기 때문이다.

큰일을 감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태도가 자세가 일정한 사람이다. 지나치게 자주 요동을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기 어렵다.

먼저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참 믿음직하다! 언제가 믿을 수 있다!”라는 칭찬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도 큰일을 위해 그 사람을 들어서 쓰실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꾼으로 발탁되는 원리는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가 자신의 무기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아침에는 작동하지만 오후가 되면 잔 고장이 나며 애를 먹인다면 누가 그런 무기에 자신과 군대의 운명을 걸겠는가? 여름에는 그 성능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지만, 추운 겨울이 되면 자주 고장이 나는 총이 있다고 하자. 전쟁이 그 총에게 유리한 여름에만 일어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성능이 뛰어날지라도 항상 일정하지 못하면 절대로 좋은 총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선택받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갑자기 선발되지 않는다. 이미 그 전에 “너의 믿음의 총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일정하게 발사되고 있다!”라고 판정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일을 위해 쓰임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그때 갑자기 벌어지는 일로만 보일 뿐이다.

큰일에 쓰임 받고자 하면 더욱 그래야 한다. 하나님께서 믿어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큰일을 맡기시겠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 믿음의 성능이 언제나 일정해야 한다. 언제나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자주 요동하지 않아야 하고, 언제나 비슷한 믿음의 평균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통하여 원하시는 큰일을 이루어 내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비록 그 믿음이 뜨겁기는 하지만 늘 한결같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믿음의 기복이 심하다. 특히 어떤 성도들은 그 믿음이 조석으로 변덕을 부린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교회 사역에 헌신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선다. 그러나 머지않아 어둠침침한 구석에 그 믿음이 꼬라박혀 있는 모습을 보인다.

많은 목회자들이 무슨 말인지 다 알 것이다. 그래서는 크게 쓰임받지 못한다. 뜨겁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오래 가야 한다. 일정하게 믿음이 일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자세가 언제나 확고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큰 믿음의 도구가 되지 못한다. 다른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절대로 안 된다.

요셉이 괜히 세계의 중심국가인 이집트의 총리로 발탁되어 하나님의 세계 경영의 큰 일꾼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집트의 총리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그는 기근을 피해 찾아온 아버지 야곱과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될 열두 형제를 살려낼 수 있었다. 총리가 된 요셉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의 인큐베이터가 되었던 사람이니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큰 일꾼이 또 있겠는가? 과연 무엇이 그를 그렇게 위대하게 만들었는가? 언제 어디서나 꾸준하고 변함이 없는 믿음이었다. 한결같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믿으신 것이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살아가 갔는가? 그는 돌에 맞아 죽었다. 하나님을 너무나도 잘 믿었던 다니엘이 무슨 일을 당했는가? 사자 굴에 던져졌었다. 하나님이 쓰신 최고의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의 생애는 어땠는가? 음란하고 간교한 모녀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하고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헌신한 바울의 인생을 어떠했는가? 늘 매질 당했고, 감옥에 갇혔고, 결국 교수형을 당하여 죽었다. 그렇다면 가장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어떠하였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괴로이 죽어가셨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그 시대에 크나큰 영향을 남겼고, 역사 속에서 인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나침반들이 되었다. 그들보다 더 큰 믿음의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보기에 실패자들이었고 아무것도 아닌 처량한 인생들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비밀이 있다. 큰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는 현실을 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산다. 그러므로 큰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하면 보이는 현실에 의해 그 믿음이 출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큰 믿음의 사람들의 눈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외로운 길을 따라간다. 큰 믿음의 사람들의 영혼 속에 심긴 GPS는 보이는 현실을 짚어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원한 진리를 찾아서 따라가게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경외한다. 그래서 큰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은 언제가 일정하고 꾸준하고 변동이 없다. 그것이 큰 믿음의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큰 믿음의 우선적인 증거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큰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성취가 곧 큰 믿음의 증거라 믿으면 시험과 갈등만 커진다. 큰 믿음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큰 믿음이다.

우리가 아직 크게 쓰이지 못하는 것은 그런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외로워도, 힘들어도, 아파도, 무시당해도 요셉처럼, 욥처럼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 그런 사람 보기를 애타게 바리시면서 찾으시고 계신다.

우리 모두 언제나 변덕부리지 않고 변함없는 믿음의 성능을 드러내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자!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이 큰일을 맡겨주시는 일꾼들이 되기 바란다.

이스러엘의 3대 절기의 영성

🎯이스라엘 삼대 절기의 영성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유월절(Pascua), 오순절(Fiesta Pentecostal), 장막절(Fiesta Tabernaculo)이며 이 절기들은 모두 출애굽기에 나타난 것들이다. 그만큼 출애굽기의 영성은 우리 신앙 생활에 본질적으로 참 의미 깊은 것이고 아울러 그 절기들의 의미를 우리 생활에 잘 적용할 때 순수한 신앙의 본질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유월절은 애굽시절, 장막절은 광야 시절, 오순절은 가나안 시절과 관련이 있다. 유월절(Pascua- 뛰어 넘어 간다는 뜻)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는 과정(4월 1-15일 사이)에서 하나님의 애굽 왕 바로에 대한 10가지 재앙들(피개이파악독우메어장) 중 9가지 재앙들이 내리는 기간이었던 1-14일까지 거룩히 정결한 어린 양을 제물로 준비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기간을 보내다가 마지막 14일 저녁부터 15일 아침 해가 떠 오르는 새벽까지 각 가정에서 모두 문지방과 인방에 어린 속죄양의 피를 발라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가정을 표시함으로써 장자의 죽음으로부터 보호받은 것을 기념하기념하는 절기를 말한다(“유월절의 영성” 참조).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한 삶을 살았던 백성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어린 속죄 양은 물론 하나님의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 주신 사랑(요3:16)에 의해 성육신하셔서(요1:12) 후일 “세상 죄를 지고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을 나타내고 또 그 분의 찢어지심(뼈가 꺽이지 않고)과 흘려져 발라진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의 속죄를 위한 희생의 수난(이53장)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우리가 성도가 된 것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 내용에 있어서 출애굽기의 유월절 사역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유월절이 이스라엘을 참 이스라엘 되게한 결정적 사건이었으므로 그때로부터 이스라엘의 캘린더(calendario-달력은 ‘월력’이므로 캘린더에 어울리지 않으나 우리말에 다른 말이 없으므로..)에서 1월 1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을 기준으로 모든 것이 재편성된 신앙의 새 달력, 캘린더의 의미이다. 이런 달력을 갖고 있는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큰 복 받은 사람들인가.
 
🔹두번째는 오순절(칠칠절)이다. 히브리어로 “펜타”로 ‘다섯 번째의” 라는 뜻으로 50일(10x5)을 의미한다. 오순절은 출34:22절에서 “칠칠절, 곧 맥추절의 초실절을 지키고”에서 나오며 이스라엘 백성이 마침내 출애굽, 광야 생활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 첫 곡식을 심고 첫 소출을 거두고 나서 드린 추수감사의 의미가 담긴 절기이다. 이것은 또한 7주간을 지낸 후(7x7=49)의 다음 날이란 의미도 있다. 백성들이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돌아와 곡식을 뿌려 경작한 소산을 거두면서부터 그동안 광야생활 중에 내리던 만나가 그쳤고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했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고 광야에서 훈련, 인도하시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으며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정착한 삶을 누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을 기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에게 있어야할 모든 면을 아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도우시며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에 자비로우시며 성실하신 분이심, 그 분의 구원의 충분성(salvacion plenaria)을 보여 준다.

그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전체에서 구체적으로 완성되고 보여진 것이기기도 하다. 예수님의 유월절 전 마지막 저녁에 유월절의 어린 희생양처럼 죽으시고 유월절을 마친 첫 날 새 벽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소식을 처음 전해 듣고 제자들에게 전한 것, 또 성령의 강림도 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본격적으로 강림하사 성령의 시대를 열어 주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도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도 이러한 온전한 구원, 충만한, 총체적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선하신 목표이고 놀랍게도 이 세 절기들, 그 날자들과 깊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세번째는 장막절(초막절 – Fiesta Tabernaculo)이다. 일년 농사가 끝나는 때이므로 수장절이라고도 불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40년의 광야생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레 동안 초막(booths)에 거하게 됨으로 초막절(레23:42,43)이라고도 불린다.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유월절 역사에 의해 해방된 백성으로서 천막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각종 도우심으로 무사히 광야생활을 하면서 가나안에 입국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도 백성들에게 성막(Tabernaculo)을 주시고 그 성막을 백성들의 진 중앙에 위치하고 하시고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며 경배를 받으시고 가르치시며 인도하신 것을 기리는 절기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마치고 40일 동안(40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런 의미에서 생활하다 그 마지막 부분의 한 주간을 장막절로 지키며 그 때에는 각 가정이 텐트를 치거나 또는 나무로 간단한 집을 짓고 지붕에 종려나무(palmera)와 감람나무(olivo)를 가지들을 얹어 그늘을 만들고 광야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광야생활동안 훈련하셨던 것들을 몸으로 체험하며 기억에 되살리고 그것을 모르는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도 하면서 영적 회복과 부흥의 시간을 가진다. 우리도 오늘날 세속화되고 다른 것으로 바쁜 삶 속에서 신앙의 본질적 역동성을 잃어 버리기 쉬운 현실에서, 적어도 교회에서는, 이런 기회를 어떻게든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다음으로, 이 세 절기들을 연속해 보면 애굽의 바로의 속박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생활을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다사 돌아갔다는 것으로 요약해 볼 때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있어야 했고 그것이 정상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라고는 하지만 불순종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에(누구나 영적으로 적어도 한 번 이상 씩은 탕자의 삶으로 전락되었던 경험이 있는 같은 사람들이었기에) 애굽도 광야도 가나안도 필요해서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왜 있어야 하는지 다만 그 이유를 깨닫는 데에 엄청난 세월(약400년)이 걸렸을 뿐이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가 가나안에 계속 있지 못했던 시간들은 일종의 외도에 해당하는, 불필요하게 잃어버린 시간들에 해당되지만 물론 그렇다고래서 마치 가나안이 아닌 애굽에 있었던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래서 하나님마저도 이스라엘의 통치에 그 부분에 관해서 만큼은 실패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전혀 아니다. 하지만 좀 더 가나안으로 인도함 받았고 “이곳이 바로 그 땅”임 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후의 신앙의 역사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약속된 땅이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을 400년 이상이나 타향에서 험한 나그네 인생을 살고나서 다시 돌아 오는 과정에도 40년이나 걸린 역사의 이면에는 거기에 못지 않은 무엇인가 중요한 뜻이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또 그만큼 중요한 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가나안 땅과 함께 가지셨던 아름답고 선하신 계획(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더욱 의미 있는), 그것을 신자가 잘 깨닫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받는, 가치 있는, 백성이 되는 일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람이 첫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 선택 받은 것은 가나안이라고 하는 특별한 장소에서 그 자신의 일신상의 안위보다는, 예수님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통해 태어날 신앙의 백성(이스라엘)이 온 세계 모든 민족들을 위해 존재하는 제사장 백성의 역할을 하도록 타자를 위한 삶(vida para otros)에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갈 때에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위해, 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그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때부터 제시해 주신 삶이고 하나님께서 그 삶을 축복하시고 사용하실 것 임을 보장하신 삶 임을 의미한다. 물론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에게는 선택권이 있어서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인간 공로(행위- 때로는 인간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로 인한 실패도 있을 수 있는)에 의한 의가 아닌,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그의 의로 보셨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인간 행위가 아닌(no por obra), 하나님의 은혜(sino por gracia)를 믿음으로 인한 구원 개념은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개념이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옳다(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다) 생각된다.
 
문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명(使命)과 소명(召命)이 있는 삶에 피조물 인간이 얼마나 잘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뒤 늦게나마 이런 부분을 새롭게 정리해 볼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앞으로 남은 시간에서라도 이러한 절기적 신앙의 회복과 함께 순종하며 더욱 귀하게 쓰임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려 드리는 삶이 되기를 기원한다.

출처:리빙스톤침례교회 자료실

http://www.livingsbc.org/bbs/board.php?bo_table=library&wr_id=55

Thursday, February 23, 2017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성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성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7,8)

간혹 구약에는 십자가 복음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 대신에 율법적이고 심판만 하는 두려운 하나님만 나타난다고들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이 이스라엘의 역사책은 당연히 아닐뿐더러,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예언만 곳곳에, 그것도 묵시적으로 숨겨놓은 책도 아닙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25:11)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12,13)

죄지은 대로 심판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인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자식처럼 용서하시는 분이야 말로 바로 십자가의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이 외에도 구약에는 복음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본문 또한 직접적으로는 기독교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면서 간접적으로는 복음도 가득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먼저 기도할 때마다 여호와께서 가까이하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중에 함께 거하시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회막에서 직접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시어 인생만사를 당신의 뜻에 따라 주도하시며 특별히 당신 백성을 더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른 말로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인간이 죽은 이후에 생전의 공과만 심사하여 심판을 내리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면 얼마든지 생전에 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오히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언제 어디서나 신자와 함께 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울면 그분이 함께 울고, 신자가 웃으면 그분이 함께 웃으십니다. 당연히 그분이 울면 신자도 울고, 그분이 웃으면 신자도 웃게 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죽음 넘어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는 분입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처럼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주신 계명에 도덕적 우월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방 나그네 과부 고아를 압제하지 말며(출22:21,22),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해 추수할 때 일부를 남기라고 합니다.(레19:9,10) 또 여자를 상속인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민36장) 심지어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도 했습니다.(레19:18)

열거한 예들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인 내용들입니다. 우상 숭배를 철저하게 금하는 영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도 다른 종족의 여타 종교와는 비교가 안 되게 뛰어났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이 재해석하여 가르치고 또 몸소 실천하여서 완성하기 이전에 이미 완벽한 공의에 기초하여 주어졌던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이 두 가지 특징을 문자 그대로 신앙의 기초로 삼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특성대로 믿는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의아해집니까? 문제가 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먼저 가까이 있어서 기도 응답에 능한 하나님으로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또 신앙을 도덕적 우월성을 실천하는 것에만 중심을 맞추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기에 기독교를 믿기로 한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기도하면 이적 같은 은혜가 가장 많이 일어나니까 믿기로 하고, 또 기독교가 도덕적으로 가장 우수하게 가르치니까 그대로 따르기로 하는 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럼 기독교를 믿은 것이지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신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두 특성은 기독교 고유의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자체적으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에게선 반드시 이런 두 특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언제 어디서나 신자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 이단종파들처럼 결코 기독교라는 종교나 교회나 전통과 관습이 그분보다 앞장설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 신앙은 영원토록 살아계시는 하나님 그분과 그 아들에 대해 더 깊이 알아나가는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에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서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러 직접 이 땅에 비천한 몸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에 찌든 인간이 가장 절실하고도 우선적으로 깨달아야 할 그분의 특성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공의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기독교의 두 근본적 특성도 바로 그 사랑과 공의를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신자가 신앙의 우선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 기도하여 문제 해결 받는 것과 도덕적 선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둘 다 아주 중요하고 너무나 소중한 신앙의 실천 덕목입니다. 매사에 쉬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여야 하고 또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기독교의 두드러진 특성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귀한 기도와 선행도 예수님을 알아나감으로써 자연적이고도 필연적인 반응으로 따라 나와야 합니다. 그 자체가 신앙을 가진 최종 목표가 되거나 의무적 종교 행위가 되는 것은 오히려 금기 사항입니다.

자연적 반응이란 어쩔 수 없이 저절로, 더 정확하게는, 반드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 앞에 절로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게 되며, 또 그분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그분 속에 있고 그분 또한 우리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포도나무 가지요 우리는 가지로 그분께 붙어 있기만 해도 그분의 열매가 맺힙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선 절로 열매 맺지 못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과 하나이듯이 신구약 성경도 하나입니다. 구약에도 십자가 복음의 사랑은 넘치도록 나타나며, 신약에도 여호와의 공의는 충분히 드러납니다. 우리 신앙은 기독교의 우월적 특성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겸비해져서 그분의 참 생명을 붙드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요컨대 속에서 날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자하는 열망이 솟구쳐야 하며, 말씀과 기도에 능하여 그분을 알아나갈수록 세상에서 밀알로 썩고자 하는 열망도 동시에 솟구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정확히는 예수 믿는 신앙의 가장 두드러진 두 특성인 것입니다. 지금 현재 내가 갖는 신앙의 실체를 이 두 열망으로 대변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