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앙발달과 인격성숙이 이뤄지지 않는가?
/ 최덕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신앙인격이 성숙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중생체험은 영적인 변화와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기독인이면서도 인격적으로 전혀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인격 파탄의 행동을 하고 공동체를 어지럽힌다. 인간관계의 악순환을 몰고 온다. 교회를 다닌 연륜이 오래되고 상당한 신학 지식을 가졌는데도 인격적으로 전혀 성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신앙인격 성숙이 무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 신앙인격이 저절로 성숙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목회자가 떻게 하면 기독인의 신앙인격의 성숙을 도울 수 있는가? 어느 설문조사는 우리나라의 기독교 청소년들에게 ‘왜 교회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간다’고 하는 답이 가장 많았고, ‘안 가면 부모가 혼내기 때문이다’고 하는 대답이 그 다음으로 많았다고 한다.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이름을 등록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냥’ 교회에 출석하며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동기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교회가 신봉하는 신조나 부모나 친구의 종교관습을 자신이 관습과 타율에 따라 신봉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현대 기독교인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신앙과 행위의 괴리가 뚜렷한 점이다. 신앙은 무기력하고, 실천은 수동적이다. 예배처소에 갈 때 하나님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가며, 죄책감을 가지고서 ‘엿새 동안 세상에서 죄와 더불어 살다가 왔다’고 기도하기도 한다.
신앙이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시동이 걸리지 않는 자동차처럼, 상당한 성경지식과 교리를 알고 교회 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신행(信行)의 괴리가 극심하며, 세상의 유혹과 도전에 쉽게 넘어간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중생체험, 영성, 신앙훈련, 심리(Personality) 등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할 수 있다. 신자가 죄를 끊고 악을 멀리하며, 세상의 도전과 유혹에 대항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말씀과 성령 안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임할 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신앙적 자아의식, 내면적 독자성, 강한 주체성을 가진 신앙인격을 구축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신앙교육은 신자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성경지식과 개혁주의 신념 체계에 바탕을 둔 세계관과 교리를 가르치는 단계에서 말씀과 성령 안에서 자기를 깨뜨리고 의식의 세계에서 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서조차 신앙을 내면화 하며, 영적 자각을 갖는 신앙발달과 인격성숙에 초점을 모을 필요가 있다. 다가오는 시대의 교회성장과 신앙공동체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일은 신앙적인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 교인들을 어느 정도로 많이 확보하는가에 달려있다. 정상적인 교회는 ‘교회 다니는 사람’(Church-goers)에 만족하지 않고 중생 체험이 인격성숙으로 연결되어 영적 자각을 갖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율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성실히 살아가는 신앙인(Believers) 양육에 심혈을 기울인다.
1. 신앙과 신조
설교와 교회교육의 기본 과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는 일이다.1 신앙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의 진리, 가치체계, 행동양식, 소망 등을 자신의 것으로 수납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헌신하고 섬기는 궁극적 실재를 향한 우리 자신의 신뢰(Trust)와 위탁(Commitment)으로 표현된다. 신앙은 신적 존재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삶의 목적, 우선순위, 절대 가치, 자아의 확장인 직업, 지위, 평판, 영향력, 재물, 사랑, 성, 타인을 둘러싼 것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신앙은 제도, 제의, 종교형식들로 표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 우리의 삶의 방식, 깊은 사랑과 값비싼 충성을 바치는 방법들을 형성해 준다.2
신앙(Faith)과 신조(Belief)3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나 엄격하게 따지면 구분된다. “신앙은 좀 더 심원하고 풍부하며 개인적이다. 이것은 종교 전통에 의해 형성되고, 때로는 어느 정도까지 교리에 의해 생겨난다. 신앙은 제도적 성질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 신앙은 자신과 그의 이웃과 세계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이다. 일상적인 차원을 넘어서기도 한다.4
한편, 신조는 신앙의 구성요소이다. 신조는 초월적 경험과 그 관계성을 개념 또는 명제로 이해하고 해석한 결과이다. 신앙은 명제나 개념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신앙은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 분의 가르침에 대한 실천이나 충성으로 표현된다. “최상의 신앙은 평온과 용기와 충성과 봉사의 형태로 나타난다. 최고의 신앙은 고요한 확신과 기쁨 가운데 우주 안에서 평안을 느낄 수 있도록 하며 이 세계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심원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자기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그러한 확신과 기쁨을 제공한다.”5 이러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재난, 혼란, 풍요, 슬픔에 직면해도 동요하지 않으며, 확신과 의욕에 넘치는 삶을 산다. 기회를 포착하고 다른 사람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자선을 베푼다.
‘신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aman he min, munah)와 그리스어(pistuo, pistis)와 라틴어(credo, credere)는 신조(belief)를 뜻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신앙한다)는 말과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신조에 동의한다)는 것은 다르다. 유태인과 기독교인과 로마인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의 유무를 따지는 일은 없었다.
‘신앙’을 뜻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는 ‘나는 마음을 쏟는다,’ ‘나의 마음을 바친다,’ ‘나는 이로써 나 자신을 …께 맡긴다,’ ‘나는 충성을 서약한다’ 등으로 사용된다.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자기를 맡긴다.6 신앙은 마음 또는 의지의 문제이다. 절대자를 신뢰하고 그 분에게 충성하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자신을 위탁하는 데서 드러난다.
‘믿는다’(Believe)는 동사는 16세기 초까지도 ‘마음을 쏟는다’의 뜻에 가까웠다. 신앙을 의미는 독일어 글라우베(Glaube)는 ‘소중히 하다,’ ‘사랑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종교개혁기 후에, 특히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 ‘믿는다’(belief, believe)는 신앙 선언이나 어떤 명제를 인정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모호한 어떤 것을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신앙하다’는 말이 하나의 명제를 목적어로 받는 경우 신념 체계의 진실성과 적합성에 관한 교리적 선언이 된다. 그래서 ‘믿는다’는 말은 일련의 명제들을 승인하거나 신조와 신념체계를 인정하는 것을 지칭했다.
개혁주의 전통은 신앙의 내면성(Internality)보다 외형성(Externality)에 더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무엇을, 어떤 형식에 따라 믿을 것인가에 높은 관심을 보여 왔다. 칼빈주의자들은 종교개혁 신학자 존 칼빈의 가르침과는 달리 ‘신앙’을 진리체계에 대한 인정, 승인, 동의(assent)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7 그들의 신앙교육은 성경과 신조를 가르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설교는 논리적인 서술로 진행되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에 담겨 있는 교리를 외우고, 그리스도의 속죄교리와 성경교리를 등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동의하는 것을 ‘신앙’과 동일시했다.
신앙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를 가진 개혁주의 전통 아래 있는 교회들은 교회성장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체로 복음전도 활동이 빈약하고 신앙생활이 경직되어 있다. 교회성장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다. 성인세례를 베푸는 경우가 드물고, 자녀를 많이 낳아 키우는 방식으로 교인 수를 확보하기도 한다. 교인들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다독거리는 방법으로 교인 감소를 지연시킨다.
‘개혁주의 전통’과 ‘교회성장’이 걸맞지 않게 여겨지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창의적인 목회방법을 계발하고 시대정서에 부합하는 설교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인이 심장에 뿌리내리게 하는 탁월한 사역을 하지 않으면 서양교회가 보이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조만간에 한국교회의 특성이 될 수도 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경의 내용과 교리를 수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신조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어느 정도 그것에 의해 형성된다.
그러나 교리를 인정하고 수납하는 것을 신앙으로 본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지녔던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신앙은 언제나 관계적이다. 신앙에는 항상 대상이 있다. “나는 …를 신앙한다”고 표현한다. ‘신앙한다’는 말은 부모와 자녀, 교수와 학생, 임금과 신하 사이에 존재하는 충성과 신뢰와 의존성을 담고 있다.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교리체계를 수납하고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위탁하지 않을 수 있는 점이다. 신조(Belief)는 수용하지만 신앙(Faith)이 없는 사람이 있다. 신학지식이 많고, 기독교 형태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신앙의 대상을 신뢰하거나 충성, 헌신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윤리를 말하고 타인의 허물을 질책하는 데는 신속하지만 자기 계발과 인간 성숙이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앙은 신조를 수긍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칼빈이 이해한 신앙의 핵심은 “우리의 가슴을 주께 바치나이다”고 하는 구호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 칼빈대학교나 학생신앙운동(SFC)의 배지(Badge)에 ‘하트’ 모양을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칼빈이 가르친 신앙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칼빈의 사상과 17세기와 그 이후의 칼빈주의는 다소 차이가 있다. 칼빈에 따르면 신앙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의지의 문제이다. 충성과 신뢰에 바탕을 둔 의존성과 위탁이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신앙의 대상을 사랑하고 그에게 자신을 위탁하는 결단이다. 신앙은 절대 타자에 대한 신뢰와 초월적 가치와 영적 힘에 대한 충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신앙은 주체적이며 총체적이다.
2. 신앙의 발달 단계
바울은 신자들이 ‘신앙의 진보’를 보이라고 가르친다(빌1:25; 딤전4:15참고). 개혁주의 전통이 강조하는 성화(Sanctification)의 핵심은 신앙의 성장이다. 웨슬레신학이 강조하는 완전(Perfection), 동방신학이 강조하는 신성화(神聖化: Deification)는 모두 신앙의 발달과 상승에 그 초점이 있다. 신앙은 중생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시작하여 발전한다. 그렇다면 신앙을 어떻게 발달시킬 것인가?
에모리대학교의 신앙발달연구소 소장 제임스 포울러(James Fowler)8는 삐아제(Piaget), 에릭슨(Eric Erikson), 콜버그(Lawrence Kohlberg)의 인간발달 심리이론과 자신이 8년 동안에 400여 명의 사람들과 회견한 결과를 가지고 신앙의 발달단계를 분석했다. 아래에 소개하는 일곱 가지 신앙발달 단계는 포울러가 저술한 『신앙의 단계들』(Stages of Faith, 1979)9을 요약하고 적용한 것이다.
포울러의 신앙발달론의 논지와 필자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이며 무시간적인 변화와 무관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기독교 신앙의 변화와 발달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단계들을 뛰어넘거나 초월할 수 있다. 신앙의 발달 단계들을 지나치게 세분화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가 말하는 ‘신앙’은 기독교 신앙에 제한된 것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한 측면이면서도, 모든 종교인들과 모든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인간성숙을 의미한다.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 사상과 비슷한 내면적인 발달을 뜻한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신조를 받아들이지만 정작 인간성숙과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포울러가 말하는 신앙발달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포울러의 이론을 살펴보는 것은 기독교인의 신앙성숙도 일련의 발달단계를 거쳐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자각하기 때문이다.
1) 유아기적-미분화 신앙
아이가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배가 고프고 기저귀가 축축하면 막연한 불안을 느낀 나머지 울음을 터뜨린다. 답답함을 울음으로 표현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유아기에 속하는 미분화된 신앙인은 이와 마찬가지로 막연하게 종교의 씨앗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절대자를 의식하는 단계에 있다. 신뢰, 용기, 희망 등의 씨앗들이 미분화된 방식으로 융합되어 양육자의 보살핌을 받고자 한다.10
2) 제1단계: 직관적-투시적 신앙
아동기에 해당하는 3-7살배기 아이는 직관적이며 투시적인 단계에 있다. 인식능력이 발달하면서 내적으로 성장한다. 쉴 새 없이 ‘이게 뭐야?’(what), ‘왜?’(why), ‘무엇 때문에’(for what) 하고 물어댄다. 이 단계의 아이는 자기중심적이다. 지각 대상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들을 통합시키거나 비교할 줄을 모른다. 하나의 현상에 대해 자기가 경험한 것과 지각한 것이 유일한 관점이라고 생각하여 아무 의심 없이 그것을 믿어버린다. 서로 다른 견해와 관점을 통합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관점이 적합한가를 검토할 줄도 모른다. 자기와 가까운 어른들이 보이는 모범, 분위기, 행동, 이야기에 의해 매우 강력하고 영속적인 영향을 받는다.11
신앙이 이러한 단계에 머무는 사람은 환상적인 생각을 좋아한다. 교리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한다. 그러나 논리적이지 않고, 이미지들과 느낌들로 구성된 생각을 통해 긍정적인 것들과 부정적인 것들을 대립시킨다. 타인을 모방하며, 자기중심적인 특성을 보인다.
3) 제2단계 : 신화적-문자적 신앙
10세 전후의 어린이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수 있고 사물을 분류하거나 기계를 조작할 수 있다.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나 사물에 대한 타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추론하고 검증할 수 있으며, 질서정연하고 신빙할 만한 세계를 구상한다. 어느 정도의 귀납적 사고와 연역적 사고를 할 수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실재를 구분한다. 자기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을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고, 그것을 의미와 결합시킨다. 자기가 속한 가족이나 사회의 기원과 그 형성에 관한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다.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며, 상호간의 공평성과 권선징악을 이해한다.12
신앙이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상징, 이야기, 신조, 관례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교리를 수납하고 그것의 이치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그것들을 자신의 말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도덕규범들과 신조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청년기와 성년기의 사람이라도 이 단계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4) 제3단계: 비분류적-관습적 신앙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신체와 정서 생활에 변화가 일어난다. 거울을 자주 본다. 얼굴과 몸은 얼마나 틀이 잡혀졌는지, 신체의 곡선은 어느 정도 멋있는가를 관찰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들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느낌, 통찰, 불안, 결단 등을 들어줄 귀와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기 시작한 인간성의 이미지를 봐줄 눈을 가진 신뢰할 만한 사람들을 찾는다. 이때 ‘단짝’이 생긴다.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사고가 생겨남과 동시에 자신의 사고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 사물에 대한 평가능력이 생기고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가설과 설명을 동원한다. 현실을 준엄하게 비판하는 눈을 갖는다.13
신앙이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암묵적 가치체계와 신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가진 가치와 신조 덩어리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객관화 시켜 검토하지는 못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기가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어떤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것에 친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타인의 기대와 판단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반면에 독자적인 관점을 형성하여 그것을 따르기에는 아직 자신의 주체성과 자율적 판단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단계의 신앙인은 인간관계의 경험들을 확장시킨다. 이것을 순응단계라고 부른다. 이러한 단계의 신앙은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평생 이 상태, 이 단계의 신앙과 인격 상태에 머무는 성인들도 많다.
5) 제4단계 : 주체적-자기 반영적 신앙
포울러가 말하는 제4단계는 청년기, 곧 중학생, 고등학생 연령에 해당한다. 이 나이에 이르면 청소년은 새로운 독자적인 세계를 경험한다. 부모를 떠나 홀로 여행하거나 다른 도시나 다른 나라에서 유학을 하거나 정신적으로 가정을 떠나 독립하거나 병영생활에서 새로운 세계를 접하거나 이 사회에서 저 사회로 옮겨가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접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관습적 가치를 재검토한다. 이 단계의 신앙발달은 원초적 관계들에 변화가 생길 때 이루어진다. 부모의 이혼, 사망, 자신의 가출, 이사, 전업, 파산 또는 제3단계의 비분석적-관습적 신앙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할 때 이루어진다.14
주체적-자기반영적 단계의 신앙인은 자신의 세계관, 가치체계를 상대적으로 인식한다. 자신의 신조나 가치에 대해 비판적 생각을 가지면서 신조를 시인하거나 단순히 동의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그것을 자기 자신의 고백으로 인지한다.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적 요인들을 감지한다. 자아 주체성과 자기 견해에 대해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능력이 생긴다. 지금까지 의존하고 있던 관습적 권위들을 버리고 강한 실행적 자아를 대두시킨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암묵적 가치체계에 거리를 두고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이 단계의 신앙인은 외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신앙의 관습적 정박지를 떠난다. 방향이 확실하지 않은 두려운 상태에서 있을 때 자아의식이 생기며 강력한 주체성이 생긴다. 이 주체성은 자신이 선택하는 개인적 인간관계와 집단과의 관계와 자신의 생활태도를 형성하는 것으로 반영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와 태도를 통해 새로운 자기 주체성이 형성된다.
이 단계의 신앙인은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Religious Symbols)체계에 비판적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한 답을 통해 그 실체를 파악한다. 예배, 제의, 상징을 볼 때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지금까지는 상징이나 상징행위가 주도권을 가지고 그 참여자에게 권위를 발휘했지만, 이때부터는 참여자가 상징을 이해하는 주도권을 갖는다. 아무런 의심 없이 일련의 종교 상징들을 통해 초월자와 관계한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서 상징의 의미들을 개념화 한다. 상실감, 슬픔, 죄의식을 느낀다. 자신의 결단이나 생활 태도, 신조, 자세 등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 주체성 대(對) 집단, 주관성 대(對) 객관성, 일차원적 관심인 자기 성취 또는 자기실현 대(對) 타인을 위한 봉사와 타인을 위한 노력 등의 긴장관계에 직면한다. 자기의 견해와 세계관을 타인의 것과 구분한다. 자기와 타인의 행동에 대한 판단과 해석과 반응에 주목한다.
이 단계의 신앙인은 자신의 깨어있는 정신과 비판적 사고에 대해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다. 나르시시즘(Narcissism), 곧 자기도취에 빠져 반성적 자아가 실재와 타인들의 관점들을 자기 자신의 세계관과 지나치게 동화시킬 수도 있다.
6) 제5단계 : 접속적 신앙
중년이 되면 ‘이것이냐, 저것이냐’고 하는 반위적(antithetical) 논리의 차원을 넘어서서 어떤 문제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인식하는 단계로 발전한다. 사물을 기존 생각에 짜 맞추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관련성과 다양한 패턴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의 단계는 어거스틴이 제시한 것과 같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이 나를 읽고, 그것이 나의 요구와 성령의 역사를 내 안에서 들려지도록 하는 단계이다. 자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재조명하는 시간을 갖고, 자신의 심중에서 울려나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자기 안에 무의식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신화, 이상적 이미지, 편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다. 역설과 명백한 모순을 가진 진리를 인식하며, 자기의 생각과 경험과 정반대되는 것들을 통일시키려고 노력한다. 정의를 따르며 종족, 계층, 신앙공동체,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사고를 한다.15
이 단계의 신앙인은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믿는 기이한 진리가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동전의 양면을 고려하며 자기의 생각과 그 생각을 위협하는 것, 곧 자기의 것과 같지 않은 것을 포용한다. 양면성을 지나치게 고려한 나머지 신속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이 되기도 한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갖기도 한다. 물러서거나, 마음으로만 만족하는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7) 제6단계: 신앙의 완성
마지막 단계는 신앙의 완성 단계이다. 포울러는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사람으로 테레사 수녀, 본회퍼, 토마스 머튼을 꼽는다. 완성의 단계라고 하여 완전한 인간성숙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니며, 보통 사람이 도달하기 어려운 단계에 올라섰다는 것을 뜻한다. 포울러는 이 단계를 복잡하게 설명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단계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단계이다. 약속된 미래에 매력을 느끼며, 절대자를 철저히 의지하는 차원이다.16 이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3. 신앙발달 모델: 야곱의 신앙성장
삐아제, 콜버그, 에릭슨, 포울러는 구조주의에 입각하여 심리이론을 전개하고, 도덕, 인격, 인지 발달 단계의 도식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구도를 따르지 않아도 성경의 인물들이나 교회사 인물들은 신앙발달과 인간성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창세기가 들려주는 야곱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야곱은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의식 없이 살아가던 내성적이고 이기적인 청년이었다. 그러한 그가 몇 단계의 신앙발달, 영적의식의 발달을 거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었다. 팥죽으로 형을 속이던 시절, 광야 길을 지나 하란에 머물던 시기, 고향으로 돌아가 형 에서를 만날 때의 야곱은 각각 다른 모습을 보였다. 압복 강가의 야곱과 브니엘의 야곱은 아주 달랐다. 한 단계 한 단계 신앙이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야곱은 자신의 내면의 변화를 경험하고 원초적인 본성과 무의식의 대양에서 영적인 자아가 솟아나고 연단되고 새로워지는, 그래서 사물을 독자적으로 영적으로 인식하고 분별하는 안목을 지진 신앙인물로 성장했다.17 의식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에서조차 하나님을 신뢰하고, 약속(covenant)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단계로 발전했다. 내면적 독자성과 신앙적 주체의식을 가졌고, 독자적 판단과 자율적 신앙행동을 보여주었다. 야곱의 이러한 인격성숙은 포울러가 말하는 신앙발달 단계들을 보여준다. 아래는 특히 제4단계, 주체적-반영적 단계를 중심으로 야곱의 신앙발달을 분석한 것이다.
야곱은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에서와는 달리 내향적이고 여성적이었지만 에서를 제치고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는 꿈을 키웠다.18 인생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려는 상상의 세계 속에 살았다.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난 야곱은 지독히 이기적이었다.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만사가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지배하려는 갈망을 가졌다. 그는 기회가 왔을 때 교활한 방법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다. 그 무렵에 특기할 말한 것은 그가 형과 아버지를 속였지만 이 점에 대해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신적으로 솔직했다. 이러한 특성들은 포울러가 말하는 제1단계, 직관적-투시적 단계에 속한다.
도망자 야곱은 광야 여행에서 생명의 위험, 염려, 굶주림, 맹수의 습격, 도둑, 추위와 더위를 경험했다. 첫 번째 경험은 고통을 통한 자각이었다. 가정에서 곱게만 자란 내성적이고 직관적인 그는 광야의 거친 환경에 적응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19 새로운 환경들은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정신적 기능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고난의 여정에 들어서면서부터 부모에게서 배운 신앙 전통에 따라 기도를 시작했다.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 전통의 신념과 관례에 따라 기도를 했다. 발달되어 있지 않은 영적, 정신적인 기능에 호소한 것이다.
그의 두 번째 경험은 자아가 하나님과 직면하는 것이었다. 야곱은 꿈속에서 위대한 분을 만나며, 고난 속에서 예전에 없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적인 자각을 가졌다.20 이제까지 야곱은 그러한 경험을 한 바 없다. 홀로 고난의 여로로 여행하면서 독자적인 자주성이 발달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두려워하여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7)고 외쳤다. 이러한 정신적인 발달은 신앙성숙에 필요한 통과의례였다. 이 경험은 이기심을 죽이고 새로운 신앙의 자세를 갖는데 필요한 영적인 자아를 구축해 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단을 쌓으면서 하나님과의 일련의 ‘흥정’을 했다.21 야곱의 서원은 조잡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사업이 잘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식의 흥정이었다. 하나님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비록 조잡할지라도 그것이 야곱의 영적인 발달의 한 단계였다는 점을 눈여겨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단계에서 그는 자기 자신만이 아닌 다른 인격체, 곧 하나님의 실체를 의식했다. 이기심이라는 철옹성에 약간의 틈바구니가 보이기 시작했다.
야곱은 만사가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 꿈을 꾸었다. 무의식에서 생겨난 원형적인 것이었다. 정신적인 위기를 직면하면서도 사닥다리를 통해 임하는 천사들, 영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야곱은 스스로 꿈에 나타난 사닥다리를 밟고 올라갈 만한 영적인 성숙단계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발달이 시작되고 영적인 의식의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포울러가 말하는 제2단계, 신화적-문자적 단계를 경험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삼촌 집이 있는 하란으로 도망간 야곱은 목적지에 비틀거리며 도착했다. 거기서 아름다운 여인 라헬을 만났다. 그녀를 사랑하면서 그의 인간성숙은 포울러가 말하는 제3단계, 비 분류적-관습적 신앙의 단계로 진입한다.22 거기서 인간관계를 확장시키는 ‘순응’을 경험하면서 자기의 암묵적 가치체계와 신념에 대해 비판적인 성찰을 하게 된다. 이제까지 어머니 치맛자락을 맴돌던 그가 한 여인을 에로스의 대상으로 여긴다. 야곱은 라헬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를 얻기 위해 7년을 하루같이 머슴살이를 했고, 라헬이 아닌 레아가 첫날밤에 주어지자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다시 7년 동안 머슴살이를 했다.
야곱은 라헬을 데려올 때 신부의 아버지에게 줄 지참금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 대신에 노동을 제공했다. 야곱은 이성에 대한 자신의 여인상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성을 사랑했다. 그의 이상적인 여인상은 자기의 이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바라는 환상적이고 미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만약 그가 가정에서 곱게 자라 부모 밑에서 결혼을 했다면 제도와 형식과 관습의 울타리에 갇혀 그러한 성숙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야곱은 사회 규범에 순응하기 위해 억지로 결혼한 레아에게 최선을 다하는 인간적인 성숙도를 보였다.
야곱은 삼촌의 가축을 자기 것으로 만들 정도로 영리했다. 자신을 해칠 음모를 알고 빨리 도망쳤다. 이때 하나님은 그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31:3)고 말씀했다. 야곱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음성을 들었지만 그곳에는 살기 등등한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3의 장소로 탈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악한 일을 행하던 땅으로 돌아가 에서를 만나지 않는다면 정신적, 영적 발달은 결코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는 제3의 장소로 도망가서 육신적인 평안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라반의 땅에서 고치지 못한 무서운 행실들, 이기심이라는 두꺼운 벽을 헐지 못하게 된다. 영적 성숙은 그 단계에서 고착되거나 중지되고 만다.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고향에 가서 에서와 화해하고 속임수로 일관했던 과거의 자신을 대면해야 했다. 자기의 원초적인 이기심과 본성을 거슬러 문제를 직면해야 했다. 그것은 야곱의 신앙발달, 영적 의식의 성장에 필요한 아주 중요한 단계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로 독자적으로 결심했다. 수동적인 순종이 아니라 강력한 자아의식을 가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응답이었다. 포울러가 말하는 제4단계의 신앙에 이르렀다.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평안과 안전을 뒤로 하고 위험한 미지의 세계를 대면했다. 위대한 어떤 분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식솔과 양떼를 거느리고 가나안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이 단계에서 야곱은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쫓는 사람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과거의 야곱은 자기의 목표를 관철하려는 사람이었지만, 현재의 야곱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기심은 깨어졌고, 새로운 신앙 인격이 그 안에서 자리 잡았다.
삼촌 라반의 군사가 야곱을 뒤쫓고 있었고, 앞에는 형 에서의 군사가 무리를 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에서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보낸 선발대는 그가 400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살기등등 다가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곱은 자신과 자신의 식솔들과 종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제3의 장소로 줄행랑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를 올렸다. 그의 기도는 압복 강변에서 했던 흥정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주신 온갖 축복에 대해 감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만한 사람이 못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고 보호해 주시기로 약속한 것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에서의 진노에서 구해 달라고 간구했다.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자기의 두려운 심정을 솔직히 아뢰었다. 야곱의 정직하며 숨김없는 기도는 주체적 자아의식의 발달을 반영한다.
기도를 마친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간구했다. 가족, 종, 가축을 두 무리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한 뒤에, 그날 밤은 홀로 지냈다. 이 땅에서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므로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함께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 있기를 원했다. 사람은 홀로 있으면 의식의 문턱이 낮아져 내면의 소리들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영적인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보다는 홀로 있을 때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야곱은 홀로 있을 때 신비한 일을 경험했다. 갑자기 어떤 존재가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붙잡고 밤이 새도록 씨름했다.23 야곱이 그 긴 밤 내내 무서운 적과 씨름했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서 온 신령한 존재와 더불어 씨름했다는 것은 그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강건하고 용감한 상태로 발돋움했는가를 말해준다. 야곱이 어머니의 치마폭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도 그 두려움 때문에 기절하거나 죽거나 자비를 구하거나 도망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밤새 씨름을 할 만큼 성숙해 있었다. 심지어 그 씨름의 의미를 파악하기까지 그 영적 실체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도록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자신의 경험하고 있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는 아무리 어둡고 무서워도 그 체험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영적인 실체와 만남에서 도망가지 않고 그것과 씨름하고 새롭게 태어나고자 했다.
이 영적인 싸움을 통과한 야곱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씨름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어냈다. ‘빼앗은 자’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이스라엘이 되었다. 야곱은 영적인 투쟁을 거쳐 내면에 있는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와 씨름을 했다. 이기적인 사람, 형과 아버지를 속인 사기꾼인 자아와 이기심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한 자아가 대결을 한 것이다.
야곱은 날만 새면 죽임을 당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내면의 검은 그림자와 씨름을 했다. 죽음 앞에서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이기심과 사기성이라는 검은 그림자를 내쫓았다. 자신 안에 있는 새로운 영적인 자아와 더불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씨름에서 승리하려고 했다. 강을 건너기 전, 그는 새로운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의식의 세계 안에서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서조차 검은 자아와 더불어 씨름했고, 드디어 승리했다.24
야곱이 경험한 씨름의 의미는 누가 이기고 지며 누가 힘이 세고 약한가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일격을 가하면 환도 뼈가 으스러지고 전신이 으깨질 수도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야곱이 더 높은 단계의 신앙발달과 인격성숙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체험은 영적인 실재를 확신하게 하며, 지엄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 준다. 많은 신앙인들이 경험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영적인 체험은 의식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체험일 수도 있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은 과거의 자아로 돌아가지 않고 대개 생을 앞질러 나아간다. 매일 자신의 내적 실재가 바로 곁에 있다고 느끼며 살아간다. 그들은 대개 말이 적고 고독하게 지내지만 그 고독 자체는 위대한 축복이기도 하다.
높은 차원의 영적 세계를 경험한 야곱은 형 에서에게 다가갔다. 지칠 대로 지친 그가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하겠다고 한 그 약속을 믿었다. 살고 죽는 것은 피안의 문제였다. 생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하실 일이며, 자신의 급선무는 이기심을 포기하고 사기꾼인 자아를 직면하고 형 에서와 화해하는 것이었다.
무장한 에서의 용사들이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무시무시한 장면이 펼쳐졌다. 이제라도 도망가면 생명은 부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야곱은 만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에서에게 다가갔다. 야곱은 그만큼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다. 그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는 것을 알고서 목숨을 하나님께 맡겼다. 야곱은 강력한 주체성을 지닌 자율적 신앙인으로 성숙했다.
야곱은 에서에게 다가가 일곱 번 절을 했다. 포울러가 말하는 제5단계의 신앙을 보였다. 옛날에 배고파 지쳐 돌아온 형에게 팥죽 한 그릇 주기를 거절했던 그 오만한 청년 야곱이 아니었다. 에서가 야곱을 용납하기 전에 야곱이 에서를 먼저 수용했다. 야곱은 엎드려 형을 향해 “내가 형님의 얼굴을 봐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33:10)라고 말했다. 에서는 야곱을 포옹하고 울었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열고 미움, 적개심, 복수심의 고리를 끊었다. 그리고 한없이 울었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검은 그림자를 직시했다. 자아를 대면하면서 균형을 찾았다. 검은 그림자와 손을 잡지 않고 영적으로 성숙한 자아와 손을 잡았다.
4. 자율적 신앙과 교회교육
신앙은 예수를 믿고 교리를 수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앙인격의 발달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신앙교육은 성경과 기독교적 세계관과 신조(Belief)를 가르치는 일과 더불어 주체적인 신앙(Faith)을 구축하도록 해야 한다. 신앙이 원시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거나 신화적·문자적·관습적·비분류적 차원에 머무는 수동적이고 형식적인 단계가 아니라 강력한 자아의식을 가진 자율적·주체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포울러가 말하는 높은 단계의 신앙은 아래 단계의 신앙발달이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 목회자나 교회교육 담당자는 ‘주체적-자기반영적 단계’의 신앙발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신앙이 성숙한 신자들은 야곱처럼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어머니의 치마폭을 떠나 검은 자아를 버리고 건전한 자아와 손을 잡고 내면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충성하며, 의식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영적 의식과 자각이 발달하도록 한다. 강력한 신앙적 자아의식을 길러 하나님의 말씀에 주체적이며 능동적으로 반응하도록 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행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자율적·주체적 결단과 선택의 결과로 그렇게 한다. 자의적으로,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적 관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며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에 대한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대한 자신의 능동적, 주체적 반응으로 그렇게 한다. 신앙은 이처럼 주체적·자기 반영적·능동적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망할 수 있는 주체적 정체감을 어떻게 심어 줄 것인가 하는 것은 이제 목회자, 교회교육자의 과제로 넘겨진다. 신자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정체감을 갖게 하려면 각자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자주 들여다보게 하고 자신과 대화를 자주 나누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히는 질문을 통해 자기의 견해를 반영하게 하고, 건전한 대답을 자신의 신념으로 갖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등, 성경 인물들을 모델로 삼아 신앙성숙을 가르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성경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 ‘신앙발달’ 또는 ‘주체적 자기반영적 신앙’에 초점을 두어 신자들이 삶 속에서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나침판을 갖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목회자는 칼빈이 강조한 것처럼 신앙을 머리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목회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신앙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가슴의 문제이다. 가슴의 문제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된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25 확고한 자아의식과 행동지침을 가진 사람은 거친 세상의 유혹과 도전 앞에서도 방향 감각을 가지고 항해할 수 있다. 주체적 신앙을 키우려면 말씀의 봉사자와 교회의 교사가 친구와 같은 상담자 역할을 해야 한다. 신자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과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망하고 그것을 자아 정체성 형성의 기회로 삼도록 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과 신앙의 성숙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예수를 믿어도 신앙인격이 성숙하지 않는 것은 신앙발달의 단계를 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오래 동안 출석한 사람도, 상당한 신학지식을 가진 사람 가운데는 신앙인격이 포울러가 말하는 제1단계나 제2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칼빈의 성화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가르치고 요한 웨슬레의 완전주의를 논하고 동방신학자들의 신성화(神聖化: Deification)를 역설한다고 신앙발달과 인격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조와 신앙 사이에는 포울러가 말하는 신앙의 단계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신앙발달, 인격성숙, 영적인 성숙에는 이러한 신앙단계에 대한 이해와 교육과 자기관찰과 훈련이 필요하다. 고통스런 경험이나 불행의 늪에서 하나님을 찾고 절망과 좌절의 웅덩이에서 그를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경험을 거쳐 인간성숙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무풍지대, 안전지대에서만 살아온 사람보다 험난한 인생살이의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 더 탁월한 신앙인격을 가질 수 있다.
교회는 신자들을 타율, 형식, 관습에 충실한 수동적 신앙인이 아니라 강력한 자아의식을 가진 능동적·적극적·주체적 신앙인으로 교육, 훈련시켜야 한다. 신조(Belief)를 가르치는 동시에 신앙(Faith)을 키우는 교회교육이 필요하다. 총동원주일 행사를 갖는 등 사람을 모으기에 급급한 물량적이며 성취주도적인 목회사역보다는 성령 안에서 삶이 변하고 신앙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인격성숙을 가져올 수 있는 ‘신앙교육’이 기대된다.
주석
1빌1:25; 딤전4:15, 마28:20 참고하라.
2See Paul Tillich, Dynamic of Faith (New York: Raper & Row, 1957).
3Belief를 ‘신념’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내적 확신(신념)만이 아니라 신조에 근거한 일련의 교리에 대한 확신을 뜻하므로 ‘신조’ 로 번역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에 가깝다. 그러나 둘 다 본래의 의미를 완전히 전달하지는 못한다.
4Wilfred Smith, Faith and Belief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9). 12.
5Smith, 12.
6Smith, 76.
7칼빈은 신앙이 지식과 이해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면서도 궁극적으로 가슴의 문제로 본다(『기독교강요』 II. 28.; III.2.33, 36). John Hesselink, On Being Reformed(Ann Arbor: Servant, 1983), 74-75.
8전 하바드대학교, 현 에모리대학교 교수이다.
9The Psychology of Human Development and the Quest for Meaning (New York: Harper & Row, 1978).
10Ibid., 120-121.
11Ibid., 122 ff.12Ibid, 135 ff.
13Ibid., 151 ff.
14Ibid., 174 ff.
15Ibid., 184 ff.
16Ibid., 199 ff.
17창28:10-22, 32:22-31, 33:1-11
18에서는 육체적으로 건장하고 활동적이며 남성적인 성품의 사나이였지만 ‘무엇을 먹을까?” 하는 현실과 환경에 관심을 쏟았다. 이 차원은 포울러가 말하는 유아기적-미분화 신앙의 단계 또는 직관적-투시적 신앙단계에 해당된다.
19John A. Sandford, The Man who Wrestled with God: Light from the Old Testament on the Psychological Individuation (Ramsey, NJ: Paulist Press, 1974), 32.
20“나는 야훼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28:13).
21“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편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오”(창28:20).
22Sanford, 31.ㅁ23창세기 32:24. Larry Richards, Let’s Day Begin: Man in God’s Universe: Studies in Genesis and Jocob (Elagin, Ill.: David Cook Pub., 1976).
24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영적 실체를 향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이름을 물었던 야곱에게 그 영적 실체는 대답 대신에 환도 뼈를 치고 떠났다. 절룩거리는 야곱은 밤새도록 씨름한 사람이 단순히 정신적인 현상이 아니라 영적 실체, 능력적인 존재임을 말해 준다.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이름 지으면서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도다”(창32:30)고 말했다.
25『기독교강요』 III 2.7, 33; II.2.8.
위 글은 최덕성,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2)에서 옮긴 것이다. 이 책에는 신학적 깊이를 지향하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주제의 글들을 담고 있다.
글쓴이 최덕성은 신학자이다. 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이며 교희학 석좌교수이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1989-2009)였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정통신학과 경건>, <신학충돌>, <교황신드롬>, <KOREAN CHRISTIANITY> 등 약 20권을 저술했다. 미국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대상'(2001)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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