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4:1-35, 5:1-13
💥속죄제(贖罪祭)에 대한 규례
/ 차용철 목사(열린문교회)
제사의 종류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는 자원제이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의무제입니다. 그것은 모든 제사가 중요한 의미를 띠지만 속죄제가 기본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제사인지 나타내는 부분입니다.
1. 속죄제(贖罪祭)의 뜻
속죄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트 는 죄 라는 말로도 사용되는데, 이 뜻은 벗어나다 죄를 짓다 는 뜻입니다. 곧 율법과 계명에서 빗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카파르 는 덮다 가리다 는 뜻이고, 칼라 는 완성하다 채우다 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들을 종합할 때 속죄제는 율법과 복음에서 빗나가 죄를 범한 자가 (부지중에 그릇 범한 자-2절) 제사를 드림으로 그 죄를 덮임 받고 하나님의 공의를 채우고 만족시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는 제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시고 (요1:29,고후5:21,히13:10-13) 영원한 단번 속죄 제물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처형 당하시므로 (마 20:21) 하나님의 공법을 만족시키시고 죄인의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할 것, 죄인이 그 십자가 구속의 공로로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을 예표합니다 (히10:8). 그런 의미에서 속죄제는 구약의 갈보리 사건입니다.
2. 속죄제(贖罪祭)의 방법
①죄를 깨달음입니다(2,13,23,28절).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라도 범하면 속죄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부지 중에 무심코 그릇 죄를 범했다가도 죄를 깨우치면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사(赦)함을 받습니다 .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으로 우리의 모든 죄, 모르고 지은 죄까지 사해 주실 것을 가리킵니다. 동시에 우리가 모르고 지은 죄들도 심판의 대상이 되므로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알지 못하고 지은 죄도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몰랐기 때문에 심판받지 않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외부적 초청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가 모르고 지은 죄는 다 회개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용서해 줄 줄 압니다. 물론 법적인 면에서는 알고 지은 죄이든 모르고 지은 죄이든 이미 용서 받습니다. 그러나 관계성 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책망의 경중은 다르겠지만 그 죄에 대한 책임은 받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연법칙을 어기고 무식했다는 이유로 그 결과로 오는 화를 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독약을 마시면 모르고 먹어도 죽고, 번개칠 때 나무 아래로 피하면 모르고 피했어도 벼락을 맞게 되고, 교통 법규를 어기면 모르고 범했어도 범칙금을 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도 부지 중에 지은 죄를 속죄제와 속건제를 통해 사함받게 한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여 속죄제를 드리지 못한 것은 제사장이 한꺼번에라도 드리게 했습니다 (16장).
그러므로 죄를 많이 깨달을수록 복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많이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깊이 깨달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배워야 합니다. 로마서5:20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깊이 깨닫는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구속사적 의미를 바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 이레니우스 교부 같은 많은 사람이 성경을 우화적(寓話,allegory;풍자적,비유적)으로 풀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알레고리적 해석을 영해(靈解)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도들도 그런 해석을 특별한 깨달음으로 알고 추종하는 것을 많아 봅니다. 얼마 전 목회자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강사는 한국에서 이름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성경 해석은 대부분 알레고리(allegory)한 해석이었는데 그것을 영성 설교 (영적 해석)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한가지 단어에 대한 상징성을 모든 성경에 적용하였습니다. 영적 해석은 문자적, 문법적, 역사적, 원리적, 신학적 해석에 의하여 성경이 말하려는 기본적인 원 뜻을 밝혀 낸 다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 해석이라야 합니다. 알레고리적 해석과 영적 해석은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②헌납입니다(4절). 제물을 드리는 자가 죄책임의 경중에 따라 제사장에게 제물(짐승)을 회막문(성막)으로 끌고 와야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이 될 것을 예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나와야 합니다.
③안수입니다(4절). 희생 제물이 될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물 드리는 자의 죄를 전가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는 우리와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 와의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롬6:6-8).
④죄 고백입니다(5:5). 제물을 드리는 자가 제물에 안수할 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할 것을 예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주님께서 우리 죄를 뒤집어 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항상 생활 가운데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탈무드에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서 있는 땅은 최고의 랍비가 서 있는 땅보다 고결하다 는 말이 있습니다. 잠언28:13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라고 했고 요한일서1:9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마5:4참조).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자기 죄를 인정한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할 때 기뻐하십니다. 잃었던 아들, 양,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입니다 (눅15:4-32). 하나님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십니다. 지은 죄가 아무리 커도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흰눈같이 씻어 주시고 진홍같이 붉은 죄라도 양털같이 희게 씻어 주십니다 (사1:18). 과거에 지은죄 현재에 지은 모든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옮기십니다 (시103:12, 사43:25).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보여 주듯이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눅18:10-14).
회개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지,정,의(知,情,意)의 요소를 가져야 합니다. 죄에 대해 인식하고 깊이 뉘우친다 해도 의지적으로 돌이키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했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에게 다시는 범죄치 말라 고 했습니다 (막2:11, 요5:14, 8:11).
회개해야 할 범위는 자범죄의 원 뜻과 요구죄까지입니다. 죄는 원죄와 본죄가 있는데 원죄에는 정죄와 유전죄가 있고 본죄에는 자범죄와 요구죄가 있습니다. 자범죄는 우리가 생활 가운데 계명을 어긴 죄입니다. 계명의 외부적인 면 뿐아니라 그 계명의 영적인 뜻까지 회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했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죄라고 했습니다 (마5:21-22,27-28). 예수님은 요구죄는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요구하시는 뜻을 이루지 못한 죄를 말합니다. 사무엘은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쉰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삼상12;23).
그러나 회개해도 사함받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범죄한 것이 아닌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고의적으로 지은 죄입니다. 그것을 고범죄라고 합니다. 이를 공적인 죄라고도 합니다. 이를 히브리서 10:26-27에는 짐짓 범한죄라고 했고, 민수기 15:30에는 여호와를 훼방한 죄라고 했고, 마태복음 12:31에는 성령을 훼방한 죄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죄는 회개할 수 없는 죄요 불가사죄요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히브리서 6:5에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라고 했고, 요한일서 5:16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고 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였으나 회개하므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물론 아들 압살롬으로 인하여 보응은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용서를 받고 솔로몬을 통한 언약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 진멸에 대해 불순종한 죄와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린 교만죄와 신접한 여인을 찾은 우상숭배죄와 놉 땅의 제사장들을 죽인 살인죄와 다윗을 죽이려 한 죄를 짓고, 일시적으로 회개를 했으나 근본적인 회개를 할 수 없었고 용서받지 못하여 자살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녀들도 길보아 전쟁에서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어 왕통이 끊어졌습니다. 사울의 죄는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므로 충이 먹어 죽은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행12:23). 이것이 사(私)적인 죄와 공(公)적인 죄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 지은 사적인 죄는 회개하되, 공적인 죄는 짓지 않으려고 해야 합니다. 중심이 항상 하나님께 기울여 있으면 공적인 죄는 짓지 않게 됩니다. 의식적(意識的) 타락은 하지 않게 됩니다.
⑤희생의 죽음입니다(4절下). 속죄제물로 끌고 온 생축은 제사장에게 내어 주어 제사장이 번제단 곁(성막 북편 뜰)에서 잡게 했습니다. 범죄한 자가 죽어야할 대신 생축이 죽은 것입니다. 아담의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 짐승이 죽어야 했고, 이삭이 죽어야할 자리에서 수양이 죽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는 오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짊어지고 희생적 죽음을 죽으실 것을 예표합니다. 갈라디아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했고, 5:24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대신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 하여 죽으신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⑥피뿌림입니다(6-7절). 생축의 피를 번제에서는 회막문 앞 단에 뿌렸는데(1:5), 속죄제에서는 제사장이 친히 피를 성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피를 찍어 성소 앞 휘장 앞에 일곱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는 오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완전한 구속으로 하나님 보좌에 담대히 들어갈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성소의 장 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을 말합니다. 이 휘장은 뒤에 있는 지성소를 보호하고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쳐진 휘장입니다. 그 휘장에는 그룹(천사)들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호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창3:23-24). 뒤에 있는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속성과 공의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 접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촉범하는 것이 되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레16:2,출19:24). 그 곳에는 오직 대제사장이 대속죄일 1년에 1번 양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직후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마27:51, 막15:37-28, 눅23:45). 이 휘장은 손가락 4개를 합친 두께로서 (四指幅) 말 10필로도 찢어지지 않는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찢어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모든 죄인의 죄를 대신하여 흘린 피 공로로 하나님 보좌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상징입니다 (히8:5, 9:11-12, 24). 그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성도도 그의 피 공로로 하나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라고 했고, 3:12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라고 했고, 히브리서 10:19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이 성소 휘장에 피를 7번 뿌린 것이 상징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피로 그를 믿는 자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와 진홍같이 붉은 죄를 흰 눈과 양털같이 희게 되었고, 과거에 지은 죄 현재에 지은 모든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법적으로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사1:18, 시103:12, 사43:25). 물론 그 속죄 효과는 믿는 자에게만 해당하는 제한적 속죄(制限的贖罪)입니다 (행13:48, 엡1:4). 그렇지만 믿는 자에게는 완전한 속죄(贖罪의 完全性)인 것입니다. 그 완전성은 휘장에 7번 뿌린 것이 상징하기도 하지만 남은 피를 번제단 아래 쏟는 것이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한 향단 뿔에 바른 것도 그 상징성을 더욱 확고히 해줍니다 (롬8:34,행7:55,계5:7).
⑦불사름입니다(8-12절). 화목제에서 처럼 희생 제물의 전체를 진 바깥 재버리는 곳에서 불사릅니다 . 이는 오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 구속을 이루실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히브리서 13:11-12에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은혜에 감사하며 그의 뒤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3:13에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서-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24에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했고, 사도행전14:22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리라 고 했습니다.
3. 속죄제(贖罪祭)의 종류
속죄제의 종류는 범죄자의 지위와 신분과 책임의 등급에 따른 분류입니다. ①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가 있습니다 (3-21절). 이 때에는 수송아지를 제물로 삼아야 합니다. ②족장을 위한 속죄제가 있습니다.(22-26절). 이 땐 수염소로 드려야 합니다. ③평민을 위한 속죄제사가 있습니다 (27-35절, 5:1-6). 이 때는 암염소와 어린양으로 드려야 합니다 ④가난한 자를 위한 속죄제가 있습니다 (5:7-10)..이 땐 산비둘기 한 쌍과 집비둘기 새끼 한 쌍으로 드립니다. ⑤극빈자를 위한 속죄제가 있습니다 (5:11-13). 이 때는 고운가루 에바 십분의 일로 드립니다. 고운가루 10분의 1은 약 2.3리터 (약 1.2되) 정도 됩니다.
속죄제물은 지위와 계급에 따라 다릅니다. 이는 예수님은 어떤 죄얼(罪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든 모두 속죄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제물의 종류가 크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제물이 작습니다. 그것은 지위의 높이에 따라 죄의 영향력이 다르기 때문에 그 만큼 많은 속죄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평민들은 제사장이 법을 어기므로 범죄하면 그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이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경우와 같습니다 (삼상2:12-36). 또한 엘리멜렉 가정에서 가장인 엘리멜렉의 잘못된 판단으로 두 아들이 죽고 온 가정이 고난을 당한 경우와 같은 이치입니다 (룻1:1-5). 대표자가 범죄하므로 벌을 받을 때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이 함께 고난을 당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입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지 않습니다. 에스겔18:2에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리고 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이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비유로 들어 조상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0:5에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3-4대까지 저주가 임한다는 말은 조상의 죄값이 후대에게 전가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의 영향력이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곧 조상이 범죄할 때 후손들이 그 죄를 본받아 동일하게 범죄하므로 그 죄값으로 저주를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죄의 영향력은 환경으로 인한 문화적인 면도 있고, 죄성으로 인한 유전적인 면도 있고, 상처로 인한 심리적인 면도 있고 ,악령의 역사로 인한 영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대표자는 많은 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적으로 대통령과 중요 국회의원과 요직에 있는 사람, 교회적으로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 등, 가정에서 가장들은 죄의 파급 영향을 생각하여 다른 사람보다 죄를 덜 짓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편 제물이 다른 것은 제물 드릴 능력에 따라 드릴 수 있도록 배려된 규례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극빈자라 해도 드릴 수 있습니다. 제물을 드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속죄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베푸신 은혜의 상징입니다 (사55:1,요7:37,눅4:18,약2;5). 이는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누구나 믿기만 하면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福音의 補遍性). 또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누구든지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 네 여인이나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에 나오는 어린 아이나 두 렙돈을 드린 과부처럼 누구든지 마음만 있으면 주님께 헌신할 수 있습니다 (마1:1-6, 14:14-21, 막12:42).
※ 주의할 점
①비둘기의 몸을 아주 쪼개지 않아야 합니다.
5:8-9에 보면, 비둘기로 드릴 경우 한마리는 목을 비틀어 끊어서 흐르는 피를 번제단 곁에 뿌리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모조리 짜 흘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목을 비틀어 끊을 때에 몸은 아주 쪼개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새가 다른 짐승에 비해 작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실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속죄제사를 드릴 것을 예표합니다 (사53:5-6, 벧전2:24).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만 탓할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드려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②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섞지 않아야 합니다.
5:11에 보면, 고운가루 십분의 일로 드릴 경우에는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고 유향을 놓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름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상징이고 유향은 하나님에 대한 선포의 상징입니다. 2장의 소제에서는 기름과 유향을 넣게 했는데 (2:1) 속죄제에서는 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제는 오실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하고, 속죄제는 오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인류의 모든 죄를 전가받아 그 죄값으로 죽는 죽음이므로 저주의 죽음입니다 (갈3:1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는 성령께서도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어떤 하나님에 대한 진리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27:46, 사53:3-4, 벧전2:22-23).
4. 속죄제(贖罪祭)에 해당하는 죄들
①바른 진술을 하지 않았을 경우입니다. (5:1).
십계명에서도 거짓증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었을 경우에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게 되면 어느 한쪽에 손해를 주게 됩니다. 재판정에서의 고의적 묵비(默秘)는 사건의 사안에 따라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재판 오류로 우매한 사람이 사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타인에게 손해를 주는 것 뿐아니라 진실을 왜곡한다는 의미 자체가 잘못된 행위입니다. 그래서 묵비권이 세상 법정에서는 허용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는 죄가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시키는 말을 듣고도 묵비권을 행사했다면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더럽힌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은 세상 법의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 진실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진실하게 행해야 합니다 (행23:1, 딤전1:19, 벧전3:21). 목적이 옳으면 방법도 옳다 (machiabellism)는 논리로 모든 행위가 합리화 해서는 안됩니다. 목적에 있어서도 진실해야 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도 진실한 삶을 살려고 해야 합니다.
②부정한 것을 만졌을 경우입니다. (5:2-3)
부정한 들짐승이나 가축이나 곤충의 사체(死體)를 만졌을 경우엔 함께 더러워진 것이므로 죄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19:11-13). 구약시대에 사람의 피부병, 문둥병, 월경, 출산,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그것들을 접촉한 경우를 말합니다(12:1-5, 13:1-8, 15:1-30). 이 부정(不淨)은 실제적인 부정이 아니라 의식상의 부정이며 도덕적인 부정이 아니라 종교적인 부정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징성의 부정으로 종교적인 불결을 느끼게 하셨고, 의식상(儀式上)의 정결로 영적 정결 의미를 가르친 것입니다 (11-15장, 신10:16). 여기에서 우리는 영적이 뜻이 의식 보다 더 중요하지만 의식을 통해 영적인 정결함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시대에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삶을 살기위해 율법적 카테고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고(고후6:14) 하셨는지 깊이 생각하여 적용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게 할 것입니다.
③무심중에 맹세했을 경우입니다. (5:4)
보문의 무심중에 에 해당하는 라바테 는 거칠게 말하다 부모하게 말하다 어리석게 말하다 함부로 지껄이다 의 뜻을 가진 바타 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대부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했는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흥분과 혈기로 맹세할 경우 그것을 지키지 못하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성에 누를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악간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헛 맹세를 하므로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죄가 됩니다. 꼭 지키려는 마음도 없이 아무렇게나 맹세하는 것은 성도의 성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도 예루살렘으로도 자신의 머리로도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예루살렘은 임금의 성이요 머리로는 한 터럭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5:33-37). 이는 곧 우리가 아무리 결심하더라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꼭 맹세가 아니더라도 말에 대해서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혹 표현상의 실수가 있더라도 내용상의 실수는 하지 않으려 해야 합니다 (마12:36-37). 아무리 화가 나고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말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약1:19, 3:6).
우리는 속죄제사의 의미와 방법과 종류를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시대에 드리는 속죄제사가 일시적으로는 죄용서를 받게 했지만 영원히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영원히 법적으로 속죄받은 것을 늘 감사해야 합니다 (히9:12). 그리고 은혜의 수단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예수님의 피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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