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27, 2018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 김효성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

/ 김효성 목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죄인의 구원이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주’라는 명칭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고 질문할 때, 그의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그것을 잘 나타낸다.115)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에게 해당하는 명칭이었는데, 구약시대의 이 세 직분은 장차 오실 한 인물을 예표하였다. 그는 참선지자, 참제사장, 참왕으로 오실 자이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나타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선지자, 참제사장, 참왕이시다.

 

 선지자직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선지자이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뜻, 특히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실 때 친히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다 가르치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 일을 계속하신다. 소요리문답 24문답,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써 선지자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의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사도 베드로는 모세의 이 말씀을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하며 인용하였다(행 3:22, 23).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밝히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치신 말씀들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 전달하였다. 그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표현하기도 하셨다. 누가복음 13:33, “. . .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또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임을 강조하셨다. 요한복음 8:26, 28,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 . .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12:49, 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 . .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요한복음 15:15,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제사장직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제사장이시다. 제사장은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로서 그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와 기도를 드리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소요리문답 25문답,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사역을 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많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제사장이 되시고 제사장의 일을 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모습]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스가랴 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자기 보좌에서 제사장이 되리니].” 이사야 53:10, 12,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 . . .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속죄의 제사를 올리셨음을 밝히 증거한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 유화[宥和]제물)로 세우셨으니.” 에베소서 5:2,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프로스포라 προσφορά)과 생축(뒤시아 θυσία)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힐라스모스, 유화제물)이니.”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부르고(히 5:6; 7:15, 17, 21; 10:21) 또 더 빈번히 ‘대제사장’으로 부른다(히 2:17; 3:1; 4:14; 5:10; 6:20; 7:26; 8:1; 9:11). 또한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제사 혹은 제물이라고 증거한다. 히브리서 9:26, “자기를 단번에 제사(뒤시아 θυσία)로 드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프로스포라 προσφορά, 몸의 예물)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신다.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엔튕카네이, 탄원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25, “그는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요한일서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왕직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왕이시다. 왕은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를 다스리시고 보호하신다. 소요리문답 26문답,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 자신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우리를 보호하심으로써, 그리고 그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제압하시고 정복하심으로써 왕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많다. 구약성경은 장차 한 왕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예언된 그가 오셨는데,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민수기 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사무엘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사야 9:6, 7, “(그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시편 110:1, 2, 5,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 . .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다니엘 7:13, 14,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 . .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미가 5:2,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스가랴 9:9, “시온 딸아 크게 기뻐하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 곧 주(主)가 되심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1:32, 33,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 마태복음 27:11,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요한복음 18:37,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에베소서 1:22,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5,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7:14, 19:16, “만왕의 왕.” 요한계시록 22:1, 3,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은 주로 교회 안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그를 믿는 자들의 심령과 삶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의 주시요 왕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된다. 소요리문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왕권을 ‘은혜의 나라’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세속적, 정치적 왕권이 아니고, 교회적, 영적 왕권이다. 주 예수께서는 칼과 창으로가 아니고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요한복음 3:3, 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 안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는 온 세계, 온 우주의 왕이시다. 그는 오늘도 온 세계 안에서 참된 교회를 설립하시고 보호하신다. 그의 왕권은 온 세계, 아니 온 우주에 미친다.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에베소서 1:22, “만물을 그[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고린도전서 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요한계시록 1:5,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7:14,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거절하므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따라서 그가 재림하실 때 왕으로 오실 것이지만, 지금 교회 시대에는 왕이 아니시라고 말한다.116) 그러나 성경은 그가 지금 왕이심을 증거한다. 교회는 현재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또한 그는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지금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며 능력으로 보호하신다. 물론 그의 보호의 강조점은 육적인,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있다. 누가복음 17:20, 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1:13, “그가[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현재 다 드러나 있지 않다. 그것은 장차 그가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그는 미래에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의 은혜의 나라도 장차 영광의 나라로 드러날 것이다. 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베드로후서 1:11,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선지자시요 참제사장이시요 참왕이시다.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다고 그를 통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고 그를 통해 환난 많은 세상과 악과 사탄의 시험을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현대인의 우상/박성혁

🎯현대인의 우상

/ 박성혁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인 막스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경제적인 성공과 종교 사이에는 연관이 있음을 밝혔다. 그는 17세기에 대표적인 두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경제가 활짝 피고, 당시 대표적 가톨릭 국가로서 세계 강국이었던 스페인의 경제가 몰락한 사실에 주목했다. 베버는 그 이유를 두 종교(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노동에 대해 취했던 생각의 차이에서 찾았다.

칼빈주의에서는 노동이 예배로 여겨졌다. 반면 가톨릭에서는 노동을 신성시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부지런함과 절약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직업을 소명으로 본 칼빈주의는 힘든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청교도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고 절약함으로써 자본이 축적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자본주의가 창안된 것이다.

베버의 연구에 따르면  현대의 직업인이란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자본주의를 낳았지만, 그 자본주의가 이제는 프로테스탄트의 최대의 적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를 파괴하고 있다. 이미 18세기에 코튼 마더라고 하는 학자는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 그는 한 저서에서 “종교는 번영을 낳았고 그 딸은 어머니를 파괴했다”고 썼다. 여기에서 종교는 프로테스탄트를, 그 딸은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잘 경계하지 않으면 소명의식은 번영을 낳을 것이고 그 번영이 결국 소명 의식을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명 의식은 과거 근대 자본주의가 발흥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초기 청교도에서 소명 의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부지런히 살고 그 세상에 대해 죽게 만들었지만, 후기 청교도에서는“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해서 성공했다”고 말한다. 오스 기니스의 말처럼 소명에 대한 오해때문에 번영의 교리가 생겨났고, ‘건강과 부의 복음’이라는 어리석은 이단이 생겨났다.

유명한 정치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은  미국 여행을 하면서 들은 설교에 대해 이렇게 썼다고 한다. “그들의 설교를 들으면 종교의 주된 목적이 내세에서의 영원한 복락을 얻는 것인지,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획득하는 것인지 종종 혼란스럽다.”코튼 마더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후의 일이다. 오늘날 이슬람권이나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박해받으며 믿음을 지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도로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대형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으면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지 모른다.

베버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간에,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이전 시대에는 부지런함과 절약이 미덕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소비가 미덕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듯이, 생산과 소비라는 바퀴가 굴러가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붕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조짐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잉태했던 정신이 사라진다면 그런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강력한 우상숭배의 유혹의 도전을 받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강력한 유혹이 되어왔던 우상은 바로 풍요에 대한 욕망이었다. 사사시대의 특징적인 죄악도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는 것이었다. 아합 시대 때 활동했던 엘리야도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비를 내리는 자가 누구이냐?”는 논쟁을 벌였다. 바알과의 논쟁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다. 가나안 신화에서 바알은 폭풍우의 신으로서 비를 내려주는 자다. 가나안 신화를 믿는 자들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는 바알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물질에 대한 욕망은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다. 오히려 물질이 풍족한 우리 시대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더욱 부추긴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맘몬이라는 단어는 아람어로 부를 의미하는 단어다.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도 이런 이름을 가진 신이 없었다. 다시 말해 맘몬은 어떤 신의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단어에 이전에는 없었던 힘과 의미를 부여하셨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는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부(富)가 어떤 우상보다 더 강력한 도전이다. 예수님은 돈이 하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신다.돈은 우리가 선하게 혹은 나쁘게 사용할 때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능력으로 존재한다. 주님은 청중에게 하나님이나 맘몬 가운데 한 주인만을 선택하라고 요구하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데 대해,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맘몬이 우상숭배의 위험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은 깊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그런 사실을 외면하려 한다.

오스 기니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돈을 이용하든지,맘몬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맘몬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 맘몬을 섬기는데 하나님을 끌어들이고 있다. 야웨를 섬기면서도 바알을 의지하려고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맘몬을 포기할 생각도 없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 눈과 발이 가는 곳, 마음이 가는 곳은 맘몬의 신전이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주님의 말씀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맘몬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돈을 이용하는 자들이다. 맘몬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무시해선 안 된다. 맘몬을 경멸할 필요는 없지만 사랑해서도 안 된다. 맘몬은 그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숙제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돈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오스 기니스는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가장 강렬하게 사랑하는 것을 좇아서 그것이 귀결되는 종착역인 영원이나 죽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Thursday, January 25, 2018

바울의 부활 이해 (송영목 교수)

바울의 부활 이해

/ 송영목 교수 (고려신학대원)

바울은 심오한 '부활신학자'이다. 고전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의 (미래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고린도교회의 거짓 선생들을 대항하여, 미래적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며 복음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로서 제자들에게 현현하신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고전을 기록할 당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의 태반이나 살아 있었다 (고전 15:6).

4.1. 예수님의 부활의 내포로서 신자의 부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자의 미래적 부활과, 믿음을 통한 현재적 귀속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재적 주되심과, 그리고 미래적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완성과 연결짓는다. 고전 15:20-22절은 바울의 부활 이해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사람 (교회)의 부활을 포함한다는 근본적인 확신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담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죽음의 시작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의 시작이 되었다. 여기서 '아담-그리스도 모형론' (Adam-Christ typology)이 다시 나타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2000년 전의 단회적인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의 새로운 질서이다.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만유의 주재권 (lordship)을 부여하셨다. 이 주권의 목적은 현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고 죽은 자의 마지막 부활 때에 사망과 관련된 모든 것을 멸절시키기 위해서 이다 (고전 15:23-28). 성도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의 목적이며 완성이다.

4.2. 구원사건으로서의 부활 사건

고전 15:3-5절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구속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은 예수님과 성도에 대해 지배권을 상실했다 (고전 15:20-22, 54-57).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다시 죽지 않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롬 6:9 이하; 참고행 13:34),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인데, 즉 모든 사람이 더 이상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죽음에 대해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에 동참하는 것이다 (고전 15:48-55).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 이 부활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 사역의 핵심 부분이다. 죄로 인해 멀어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죽음으로 나타나고 이 죽음을 부활이 정복하였다. 롬 1:4과 빌 2:9-11절은 예수님은 부활로 주님이 되셨다고 밝힌다. 고전 15:27절은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 아래 만물을 두셨다고 말씀한다. 주님의 재림 시에 있을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완성이다 (고전 15:23-28; 51-55).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시다 (고전 15:45).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불멸 그 이상이다. 부활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 안에서의 교제와 영생, 그리스도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을 포함한다 (고전 15:49). 주님의 최종 파루시아 때의 몸의 부활은 현재적으로 이미 임한 부활 생명을 전제로 한다. 성도는 이미 여기서 부활을 예비적으로 공유하고 맛보고 있다. 부활 생명은 교회가 선취해야 할 것이다.

4.3. 부활의 주체, 때, 양태

고전 15:23절은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만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고 밝힌다.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현재적인 연합은 궁극적이고 미래적인 부활로 인한 연합을 위한 예비 단계이다 (롬 5:1-10; 6:11; 갈 2:20). 롬 8:19-23절은 전 피조물이 부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궁극적인 영광에 참여 할 것이라고 밝힌다 (고전 15:24-28). 주님이 최종적으로 오실 때 죽은 자들의 집단적인 부활이 발생할 것이다. 

바울은 개인의 죽음과 몸의 부활 사이의 중간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부활의 양태는 고전 15:35-55절에서 바울에 의해 강조되는 '변화' (transformation)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이다. 변화된 몸의 전인격적인 존재가 썩지 않을 것이다. 

고전 15:42-54절에서 바울은 부활의 변형된 새로움과 영속성을 '신령한', '강한', '영광스러운', '하늘에', '썩지 아니할', 그리고 '죽지 아니할' 등과 같은 용어로 설명한다. 바울은 35-37절에서는 현재의 육체와 부활체가 연속성을 가질 것을 죽은 씨가 자라서 되는 식물의 비유로 설명한다.

4.3. 부활,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성도의 실존

1:3-4절과 빌 2:6-11절은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늘뿐 아니라 이 땅에서 현재적이며 역동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셨다고 밝힌다 (시 110:1; 고전 15:27).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현재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교회와 복음의 대적을 물리치시며 원수를 발등상으로 밟고 계시며 메시아 주권을 시행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통치의 완성은 사망을 완전히 정복하실 때이다 (고전 15: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최종 파루시아(강림 / advent, coming, presence)는 예수님의 주 되심의 완성적 절정이 될 것이다. 

이러한 미래적인 구원의 사건을 믿되, 우리는 부활의 현재 실존적 의미를 새겨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권능이 현재적으로 성도의 삶에 약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 조셉 플레브닉, 2000:59-81).


출처: http://bsmilal2.tistory.com/entry/바울의-부활-이해 [bible and knowledge]

부활한 육신은 어떤 모습일까?

부활한 육신은 어떤 모습일까

(성결대학교 / 성기호 총장)

썩지않고 영원한 "생명의 형상"

살과 뼈 가진점에서 이전의 몸과 연관성

시간과 공간 제약 안받고 영광으로 빛나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14:14)하는 질문은 수천년 동안 내려오는 인간의 질문이다. 죽으면 그만이고 특히 몸이 썩으면 없어져 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산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15:23)"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라고 신자들의 부활을 보증하셨다.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은"죽은 자들이…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15:35)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 살펴본다.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사르밧 땅의 과부아들(왕상17:17-24),수넴 여인의 아들(왕하4:17-27), 유대 관원인 야이로의 딸(막5:22-43),나인성의 청년(눅7:11-17),나사로(요11:17-44),여제자 다비다(행9:36-43),졸다가 떨어져 죽었던 유두고(행20:7-12) 등이 죽었다가 살았으나 신학적인 의미의 부활은 아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었다가 소생했을 뿐 부활의 몸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부활의 몸이란 예수님 경우처럼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나 살과 뼈를 가진 몸이다(눅24:2940).어떤 불신앙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같이 예수님의 출현이 영의 출현이거나,단순한 환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못자국을 보이시며 손가락을 내밀어 창으로 찔렸던 옆구리 상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요20:2527).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다고 선언하고 있다(마28:9).

부활한 몸은 부활체를 가졌기에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다(눅24:41-45).영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어릴때의 경험에서 이것을 생각해 본다. 유교의 관습대로 조상의 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한 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꽂아놓고 음식을 잡수시도록 자손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한참 후에 방으로 들어와 호기심어린 눈으로 없어진 음식이 있는가 살펴보아도 밥이나 국이 없어지지 않아 안심하던 기억이 있다.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와 동일하지는 않으나 깊은 연관성이 있다. 도토리가 자라서 참나무가 되고 갓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될때 동일한 물질에서 발전하지만 그 형태가 같지 않다.

도토리와 나무, 아이와 어른 사이에 차이가 있으나 계속성이 있음을 의심할 수 없는 것 같이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몸은 계속성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가까이서 예수님을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생각한 일이나(요20:1415),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길에서 동행하게된 예수님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6). 제자들이 무서워하며 모여있던 다락방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영으로 생각할 정도로(눅24: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해있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는 흙으로부터 온 것이나 부활 때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될 것이다(고전15:49).지금 우리의 몸은 썩고 욕된 약한 몸이지만 부활 때에 갖게될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한 몸이 될 것이니 곧 신령한 몸이다(고전15:42-44).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의 비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후에 가지시게될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변화산사건이라 부른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고 전하고 있다.

부활의 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 부활체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않을 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죽을 수 없음과 같다(마22:30).닫힌 방안에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으며(요20:19),동행하던 일행중에서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눅24:31) 몸이 부활의 몸이다. 가고싶은 곳에 갑자기 나타났다가,원할 때 즉시 사라지는 부활체는 현재 우리 육체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과 다르다.

출근길에 또는 중요한 약속의 자리에 시간을 대기 어려워 조바심하며 차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일도 부활한 몸을 가질 때는 없어질것이다. 고칠 수없는 병에 걸려 고통하는 일도,늙는 것을 두려워하지도,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뺏기고 통곡하는 일도 부활 이후엔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죽은 자들이 다시살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를 받을 것이니(고전15:5152) 성도들의 몸이 구속을 받는 복되고 소망스런 날이 될 것이다(롬8:23).

바울의 부활 이해(장흥길 교수)

🌈바울의 부활 이해 
/ 장흥길 교수 (장로회 신학대학원)

1. 들어가는 말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가 아니면 죽은 자의 부활이 있는가?

부활이 있다면 그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가 아니면 믿는 자에게만 국한되는가?

죽은 자의 부활은 각 사람에게 일어나는 개인적인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때 동시적으로 일어날 보편적인 것인가?

죽은 자가 부활할 때 영이 부활하는가 몸도 함께 부활하는가?

몸이 부활한다면 현재의 모습 그대로 부활하는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성경의 진술들은 한 곳에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어떤 특정한 상황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공동체의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신약성경의 부활 진술을 토대로 통일성이 있는 부활론을 세우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하려하고 가르치려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바울 서신에 언급된 부활 진술들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저자일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부활 주제와 관련하여 제기된 여러 문제에 대해 통일성 있는 한 단락(고린도전서 15장)에서 다루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이해 특징을 살펴보려면 먼저 그 전제와 배경이 되는 바울 이전의 부활 이해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2.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바울 이전의 이해 

그리스 세계에서 죽은 자의 부활은 때로는 불가능하게 생각되기도 하였고(Homer) 때로는 일상적인 삶에서 드물게 일어나는 이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Plato). 더구나 철학적인 영혼불멸 사상을 가진 그리스인들에게 역사의 종말시 일어날 일반적인 죽은 자의 부활이란 낯선 것이었다. 또 헬라의 신비주의나 비밀스런 밀의(密儀) 종교는 제의적인 봉헌 행위를 통한 인간의 신성화(神性化)를 추구하였다.

구약성서에서는 죽음의 경계를 너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안전함에 대한 믿음이 나타난다(시 16:10; 73:23; 욥 19:25). 그러나 본래적인 부활 신앙은 상당히 후기의 구약 전승층인 이사야의 묵시에 해당되는 이사야 24-27장에서 비로소 나타나며(사 26:19), "영원히 생명에 이르는" 부활과 "영원한 수치와 부끄러움에 이르는" 부활을 언급하는 다니엘서 12장 2-3절에 분명히 묘사되어 있다.

유대교에서는 경건한 사람이 행한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상 사상이나 또는 각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義) 사상에서 부활 신앙이 지지되기도 하였다. 사두개인들은 거듭남으로서의 부활을 부정하였으며(막 12:18-23), 그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부활 신앙을 늘 암송하는 18기도문(Shemoneh Esreh)의 두번째 간구에 반영하였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Ⅱ, 263)와 고대사기(ⅩⅧ, 14)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단지 "의인의 부활"(눅 14:14; 마카비 2서 7:14을 참조)만을 기다렸다. 이들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는 "부활을 부인하는 자는 장차 올 세상에 참여하지 못한다"(산헤드린 10:1)는 교리를 결정하였다.

유대의 묵시 문헌에서 죽은 자의 부활은 특히 에디오피아 에녹서나 제4에스라서, 시리아의 바룩 묵시록에 분명하게 증거되어 있으며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메시아의 중간 나라 이전에 일어날 의인의 부활과 세상 종말시 일어날 일반적인 죽은 자의 부활(계 20장을 참조)은 회당에서 주후 3세기 초에야 비로소 구분되었다.

예수는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기사(막 12:18-27)에서 지상에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부활한 자의 삶을 묘사한다.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막 12:23)과 사두개인의 질문에 예수는 "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갈 것이다"(막 12:25)라는 대답으로 부활에 대한 사두개인의 오해를 고치신다. 부활한 자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막 12:25; 이에 대하여 단 12:3; 시리아의 바룩묵시서 51:10을 참조).

예수에 의하면 마지막 때의 부활은 단지 지상의 삶을 다시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막 12:24)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존재이며 지상에서는 어떤 비슷한 유비도 찾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존재이다.

이런 바울 이전의 부활 이해에 대한 바울 자신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가? 

3. 바울 이전의 부활 이전에 대한 바울의 입장 

바울의 부활에 대한 생각은 영원에 대한 그리스·헬라 사상과 비교해 볼 때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 어디에서도 그리스 철학적인 영혼 불멸 사상에 맞서서 직접적으로 대결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을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말미암은 죽은 자의 전인(全人)적인 새로운 소생으로 이해하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런 영혼 불멸론은 결코 참된 소망이 될 수 없었다(살전 4:13 참조).

또 바울은 인간의 영이 신성에 나타난다는 헬라 신비주의의 주장에 반대하며, 제의적인 봉헌 행위를 통한 인간의 신성화를 추구하는 밀의 종교의 입장도 거부한다. 바울의 경우 인간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죄에 대한 심판인 죽음으로 말미암은 철저한 생명의 단절을 극복할 수는 없다.

한편 바울은 구약 예언 전승, 특히 묵시전승을 장차 일어날 마지막 때의 사건을 묘사하기 위해서(롬 2:5; 8:18; 고전 1:7; 3:13) 만이 아니라 현재적인 계시를 서술하기 위해서도(롬 1:17f; 갈 3:23) 붙잡는다.

이때 구약·유대적인 묵시전승과 바울의 묘사에서 차이는 사용된 사상적인 틀에 있다기 보다는 현재적인 계시를 예수에게로 돌린다는 사실에 있다. 즉 바울이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의 계시는 아직 오지 않은 재림의 때 모든 세상에 계시될, 존귀하신 그리스도를 미리 경험하는 나타냄이다.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도 바울은 부활 신앙을 그리스도론의 관점에서 증명하며 전개한다. 믿는 자들은 세례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되며,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의 기초가 된다(롬 6:4). 그렇기는 하나 부활하여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수세자의 동일한 형상은 미래에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롬 6:5. 8).

그러면 바울의 부활 신앙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특징은 무엇일까? 

4. 바울의 부활 신앙의 특징 

a)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말시 죽은 자의 부활의 기초와 시작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전 15:1-11). 이로써 예수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셨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부활이 역사하게 되었다(고전 15:11). 부활을 통해서 예수는 구원자로(빌 3:20), 심판자로(고후 5:10), 주님으로(빌 2:11) 등극하셨다.

이러한 사상은 바울 서신 뿐 아니라 전체 신약성서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는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골 1:18)이며, "많은 형제 중에서 먼저 난 자"(롬 8:29)요, "생명의 주"(행 3:15)요,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산 자(행 26:23)요, "구원의 주"(히 2:10)이시다. 

b) 바울은 부활을 인간 안에 있는 어떤 본성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지 않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동으로 이해한다(롬 4:17).

바울에 의하면 부활은 인간 내부에서 유래된 어떤 진화 과정이나 변화 과정이 아니며 이전의 생명을 다시 취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롬 6:4) 다시 사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빌 3:21),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롬 8:11) 죽을 몸을 살리실 것이다.

이때 '영광', '능력', '영'은 죽음을 제압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적인 행동에 대한 완곡한 표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부활은 바울에 의하면 이 세상 삶으로의 복귀나 이전의 생명의 소생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거듭남이며, 인간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 가능하게된 다시 살아남이다. 

c) 바울에 의하면 부활은 단지 영의 부활이 아니라 전인(全人)의 부활을 의미한다.

바울의 인간 이해는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인 그리스·헬라의 인간론과는 구분된다. 오히려 바울은 구약성서의 사고를 따라서 몸이 없는 생명을 생각할 수 없었으며 인간을 몸과 (혼과) 영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로 통전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바울은 열광적인 '영성'주의자(Pneumatiker)들이 몸의 죽음을 단지 유물(唯物)적인 몸에 관련시키는 반면(고전 15:35 참조) 몸의 죽음을 전체 인간의 종말로 이해하며 "죄에 팔림"으로 규정한다(롬 6:23; 7:14).

역으로 부활은 본질적으로 몸과 영혼의 재결합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새 창조이다. 이렇게 마지막 때 다시 살 새로운 존재 양식은 이 땅에서 살던 "육의 몸"(sōma psychikon)이 아니라 세상이 아직 알지 못하는 "영의 몸"(sōma pneumatikon)이다(고전 15:44). 

d)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묵시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장차 있을 우주적인 세상의 완성과 관련시킨다.

그에 의하면 죽은 자의 부활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너머 하나님의 우주적인 갱신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모든 것이 변화하고 나팔 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고전 15:50-52). 이로써 결국 세상의 무상함과 죽음의 권세가 멸절하게 된다. 마지막 때 죽은 자의 부활은 믿는 자들이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사건일 뿐만이 아니라 함께 고통하며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우주적인 사건이다(롬 8:18-25).

그러나 유대 묵시적인 미래 기대와 비교해 볼 때 바울은 구원의 현재를 강조한다.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다(고후 6:2). 물론 바울이 주장하는 구원의 현재는 고린도의 '영성'주의자들의 현재적인 구원과 비교해보면 부활이 아직 밖에 있다는 점에서 그것과는 확실하게 구분이 된다(고전 15:22-28; 고후 4:14).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와 함께 예수께서 가지고 오시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는 것처럼 바울의 부활 선포에서도 그 종말적인 우주적인 차원과 함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 안에 거하는 현재적인 개인적인 면도 나타난다(롬 6:4; 고후 6:2).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삶은 마지막 때 일어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선취(先取)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e) 이러한 선취적 종말 사상과 관련하여 바울은 믿는 자의 부활 소망을 그들의 삶, 곧 윤리와 관련시킨다.

부활 소망을 가지고 믿는 자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야 하며(롬 6:11), 자신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한다(롬 6:13). 또한 마지막 때까지 흔들림이 없이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하며(고전 15:58), 현실의 삶이 고달프더라도 서로 위로하고(살전 4:18),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삶을 향하여 좇아가야 한다(빌 3:10-16). 

f) 바울은 부활을 대체적으로 구원 사건으로 이해한다.

바울 자신은 "모든 사람의 부활"이나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행 24:15), "생명의 부활"이나 "심판의 부활"(요 5:29)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바울은 바리새인들처럼 의인의 부활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 역시도 죽은 자의 일반적인 부활을 생각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롬 2:5f. 12; 고후 5:10).

마지막 때 세상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동이 전체 인류와 모든 피조물에 관련되어 있다는 암시가 바울에게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롬 8:18-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자신의 진술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믿는 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바울이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위한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5. 맺는 말 

부활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그때에 하늘 나라에서야 가능할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기"(고전 13:12)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가 아니었으나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떠난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던 부활의 증인이었다(행 9:1-9; 22:3-21; 26:2-23).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 사건으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위한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였으며, 믿는 자의 부활 소망의 기초로 보았다. 바로 이 부활 소망이 바울의 십자가 신앙과 함께 그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으며 그의 필수적인 신앙 요소이었다.

부활을 증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없어서 아니 되는 신앙의 요소는 바울의 경우처럼 부활 신앙이다. 이 부활 신앙으로 죄와 싸우고 세상을 이기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부활의 소식을 힘차게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참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 주요 참고 문헌 - 

Hoffmann, Paul. Art. Auferstehung Jesu Christi. TRE 4 (1979). 478-513

_________ (Ed.). Zur neutestamentlichen Ueberlieferung von der Auferstehung Jesu (WdF 522).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88. 

Kremer, Jacob. Art. anastasis, anistēmi. EWNT Ⅰ (1980), 210-221. 

Lang, Friedrich. Die Briefe an die Korinther (NTD 7). Goettingen: V. & R., 1986, 241-244. 

Oberlinner, Lorenz. Auferstehung Jesu - Auferstehung der Christen (QD 105). Freiburg i. Br.: Herder, 1986. 

Wilckens, Ulrich. Auferstehung (GTB. S 80). Guetersloh: Guetersloher Verlagshaus, 41988. 

Monday, January 22, 2018

생명주는영(a life-giving Spirit)/고전15:45

고전 15:45 -생명주는영(a life-giving Spirit)


반적인 구원론은 구속 곧 죄사함과 칭의를 많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조에)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요10: 10하). 이것은 죄사함과 칭의가 구원의 한 방면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구원의 완성이 아니며, 구속받은 사람들은 더 나아가 생명을 얻고 더 얻어 영적으로 자라가는 면의 구원이 더 필요 함을 말해 줍니다(롬5:10, 벧전2:2, 1:5 본문 참조).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을 ‘생명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으로 소개한 고전 15:45은 주목할 만한 성경 본문입니다. 서울교회 담임인 이종윤 목사께서도 설교에서 “고전15:45에는 창조론, 인간론, …  구원론, 종말론이 들어 있어서 신구약 성경 중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 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 http://www.seoulchurch.or.kr/2008/sub02_02.htm?read_no=3753&page=0&list=0&key= )

 

그럼에도 이 ‘생명주는 영’은 대부분의 성도들 심지어 목회자들에게도 다소 생소한 편입니다. 더구나 일각에서는 이 구절이 언급한 생명주는 영과 성령과의 관계를 놓고 양태론 시비를 벌이는 등 다소 혼돈스런 면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본문에서 언급된 생명주는 영이 누구이시며, 주 예수님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지를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고전 15:45 본문과 주석적 견해 소개

 

위 성경본문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적 이해를 돕기 위해 원어를 직역한 본문과 그에 대한  몇분 성경 교사들의 관련 주석 일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고전 15:45 :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So also it has been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핸드릭슨),1987, 932쪽)

 

1) M. 빈센트 :

“마지막 아담은 그리스도이시다. 아담은 죄 있는 족속의 머리라면, 그리스도는 구속 받은 족속의 머리이시다…생명주는 영은 단지 살아 있는 생명만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  생명이시다 (…Not merely living, but impartinglife). 요1:4, 3:36, 5:26, 40…11:25, 14:6과 비교해 보라(M. 빈센트, Word Study, Vol. III., 1980, 284쪽).

 

2) 존 칼빈:

모세는 아담이 산 혼이 된 것을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과 연관시킨다. 생명 또는 생명의 근원이 된 것은 다만 사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처럼 산 혼이 되신 것과  이외에 주의 영께서 그분 위에 부어지신 것, 그분의 능력에 의해 그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시고 또한 다른 이들도 일으키시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Moses relates that Adam was furnished with a living soul: Christ, on the other hand, is endowed with a life-giving Spirit. Now it is a much greater thing to be life, or the source of life, than simply to live. It must be observed, however, that Christ did also, like us, become a living soul; but, besides soul, the Spirit of the Lord was also poured out upon him, that by his power he might rise again from the dead, and raise up others…” ( 칼빈주석 Vol. XX(고린도서 vol. 2), 베이커 북 하우스, 1981,  52쪽)

 

이로부터 우리가 사람임으로 산 혼을 소유하지만, 우리는 중생의 은혜에 의해 우리 위에 부어지신 그리스도의 생명주는 영도 소유함을 본다. 요컨대, 바울의 취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얻은 지위는 첫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산혼은 이름 그대로의 아담에게와 그의 후손에게 주어졌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생명이신 그영을 획득 (procured)하셨기 때문이다.”

 

“From this you see, that we have living souls, inasmuch as we are men, but we have the life-giving Spirit of Christ poured out upon us by the grace of regeneration. In short, Paul’s meaning is, that the condition that we obtain through Christ is greatly superior to the lot of the first man, because a living soul was conferred upon Adam in his own name, and in that of his posterity, but Christ has procured for us the Spirit, who is life.”(위 책, 53쪽).

 

3) R. C. H. 렌스키

그리스도는 참으로 “마지막 아담, 생명주는 영”으로 불리우신다. 둘은 매우 유사하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두 아담들은 모두 선조들이지만, 한쪽은 오직 천연적인 혈통의 선조라면, 다른 쪽은 영적인 혈통의 선조이다. 한쪽은 창조될 때 단지 “산혼”이 되었을 뿐임으로 우리는 그로부터 “자연적인 몸”(a natural body)만 물려 받았지만, 다른 쪽은 우리를 위해 “생명주는 영”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그로부터 “영적인 몸”(a spiritual body)을 받게 될 것이다.”(렌스키, 바울의 고린도 전후서 해석, 핸드릭슨 출판사, 1963, 720쪽,  * 독자의 편의를 위해 영문 원문을 번역한 것임).

 

“”생명주는 영”은 우리와 연관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영적인 생명의 원천이시다. 비록 그분이 영적인 몸과 영광의 몸이 되셨을지라도, 그러한 영적인 생명은 그분의 몸으로 부터가 아니라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 안에 ‘거하는’(dwells) 영으로 부터 우리의 몸 안에 거하는 우리의 영으로 흐르고, 그 결과 우리를 영적으로 활기있게 하고, 우리에게 생명(조에)을 주신다.”(위 책722쪽).

 

“이렇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은 일시적인 죽음을 통과하여 축복된 영원 안으로 옮겨간 조에의 생명을 우리가 영접하는 때인 중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역사의 완성은 우리 몸의 부활과 영화롭게 됨인데, 그것은 우리의 혼과 영과 다시 결합하여 22절이 말하는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이다.” (위 책,722쪽).

 

-고전15:45의 핵심 단어들 정의

 

1) 마지막 아담

생명주는 영이 누구이신가를 알려면 우리는 먼저 마지막 아담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주는 영은 다름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 죽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 빈센트에 의하면, ‘마지막 아담’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는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요1:14) 즉 주 예수님이십니다(행9:22, 요11:27).

 

이제 이 마지막 아담이신 주 예수님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분은 육신을 입으신 <제 2격 아들 하나님>이심이 분명하지만(갈4:4), 그러나 이것은 다른 두 위격과 ‘분리된’ ‘아들 하나님 만’(God the Son only)이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계시며…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all in each)”라는 어거스틴의 정통 삼위일체의 정의에 따르면 이 분은 <성부와 성령께서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 즉 <온전한 하나님>(the complete God)이십니다(요14:11, 8:16, 16:32).

 

이러한 이해는 ‘삼위는 각기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으신 상태로 상호내재 하신다’는 존재론적 삼위일체 방면의 고전적인 원칙과도 부합됩니다

 

요약하자면, 마지막 아담은 ‘육신을 입으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마지막 아담은 ‘육신을 입은 아들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 상호 내재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이십니다.

 

2) 생명주는 영

생명주는 영은 바로 위에서 정의되신 마지막 아담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분입니다즉 마지막 아담이 부활 전 예수님이시라면, 생명주는 영은 <부활 후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위 어거스틴의 정통 삼위일체에 의거하여 좀더 풀어서 말하자면, 이 부활 후 예수님이신 생명 주는 영은 < 성부, 성령께서 존재론적으로 함께 하시는 부활한 몸을 입으신 성자>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3) ‘되었나니’

성경은 ‘마지막 아담이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후 문맥을 볼 때 그 렇게 되신 시점은 부활 때임을 알수 있습니다. 위 인용문에서 칼빈은 마지막 아담 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영 곧 생명주는 영을 ‘procured’(획득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부활전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부활 후 예수님(생명주는 영)이 되시는 과정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그런 부활 전후의 차이를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문을 닫고 있는 공간에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가심”(요20:19), “눈에 보였다가 (갑자기) 안 보이는 존재가 되심(눅24:31)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되었나니”의 실상은 바로 앞 절을 근거로 예수님의 하나님이신 방면은 전혀 변화가 없으시나 그분의 인성에 있어서는 부활 전의 “육의 몸”이 부활 후의 “신령한 몸”이 되신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전15:44).

 

지금까지 생명주는 영을 검토해 온 내용들이 맞다면, 우리는 생명주는 영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들을 재차 강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우리가 정의한 생명 주는 영은 ‘부활한 예수님의 인성이 포함된 신성한 영’ 또는 ‘신성, 인성의 영’이십니다 (2) 성령은 영원 전부터 계셨지만 신성 안에 인성이 포함된 이러한 생명주는 영은 주 예수님이 영광 받으신 싯점인 부활(눅24:26, 고전15:43) 전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요7:39). (3) 고전15:45의 생명주는 영은 다만 아들만 또는 다만 성령만도 아니시고, 부활한 몸(인성)을 가지신 아들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성부와 성령도 함께 포함되신 온전한 하나님, 즉 삼위 전체이십니다.

 

-바울 서신에서의 성령과 생명주는 영의 동일시 문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다’라는 정의가 정통 삼위일체에서 구별된 삼위를 유지하는 원칙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주는 영이시니” (And the Lord is the Spirit)(고후3:17)에서 보듯이 성경본문 자체가 그런 원칙과 충돌하는 곳이 몇군데서 발견됩니다(사9:6, 고전15:45, 고후3:17). 개핀 교수님, 박형용 박사님, 제임스 D.G. 던(Dunn)박사님 등 저명한 개혁 신학자들은 이러한 부분들을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방면 즉 ‘기능에 있어서의 위격 간의 동일시’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것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론의 특징인 위격간의 구별을 손상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집니다.

 

(만일 이런 관점을 양태론이라고 한다면 ‘주는 영이시다’(고후3:17) 등의 성경기록 자체가 양태론이라는 말이 되고 말아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제임스 던 박사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와 그영- 한 영적인 존재 또는 영적인 차원 또는 영역이 아니라 그영 즉 성령을 동일시 하고 있다…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 영 사이에 구별이 없다”(Paul identifies the exalted Jesus with the Spirit-not with a spiritual being or a spiritual dimension or sphere, but with the Spirit, the Holy Spirit…in the believer’s experience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Christ and Spirit)(I Corinthians 15:45-last Adam, life-giving Sprit,  The Christ and  the Spirit: Christology Vol.1, p139).

 

우리는 동일한 견해를 다음 자료들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는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다” (스미디즈,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201쪽), “고전 15:45의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개핀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 하고 있다. 이것은 …경륜적, 기능적, 종말적 동일시이다” (차영배, 성령론-구원론 부교재,  49쪽). ‘주는 영이시다’(박형용, ‘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권) 28-39쪽).

 

결론적으로,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이후 삶속에서 영적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음으로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이 되는데 있어서 ‘생명주는 영’(고전15:45)을 바로 이해하고 체험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부활한 인성이 포함된 신성한 영’은 많은 성도님들에게 가려져 있었거나 잘못 이해 되어 왔습니다.

 

앞에서 검토한 바에 따르면, 생명주는 영은 <부활한 인성이 포함된 아들 하나님> 또는 <영적인 몸을 입으신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도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 전체>이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그분의 인성을 벗어 버리셨다고 이단적으로 믿지 않은 한, 생명주는 영을 위와 같이 ‘인성-신성의 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 생소하나 철저하게 성경적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러한 생명주는 영에 대한 바른 인식과 체험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끝

 

추가로 다뤄야 할 두 가지 남은 문제들:

 

  1) 칼빈과 렌스키는 위 인용문에서 우리가  중생할 때 생명주는 영을 소유했음을 강력하게 암시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생명주는 영’과 ‘보혜사 성령’이 각기 다른 두 영들이라면 우리는 두 영들을 어떤 식으로 각각 체험하는가 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또한 두 영을 같다고 보더라도 추가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 만일 우리가 생명주는 영을 영접한 것이라면 인성 신성 모두를 포함하신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칼빈의 주장처럼 인성은 제외된 예수님의 신성만 내주 하시는 것인지도 더 연구와 검토가 필요한 과제들입니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비중 있는 주제들이나 반드시 빛가운데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껴져서 주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시간을 가지고 하나씩 최선을 다해 정리해 나가고자 합니다.


http://www.localchurch.kr/truth/15125




부활의 사실이 말하는 것(정용섭 목사)

부활의 사실이 말하는 것

고전15:35-49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사실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간혹 잊고 살지만, 인간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일은 이 죽음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잘 살아보려고, 오래 살아 보려고 애쓰는 모든 수고가 안타깝지만 죽음의 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세력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천수를 다 누리다가 노환으로 죽기도 하고, 한창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3일에는 미국 론 브라운 상무장관을 비롯한 33명의 고급관리들을 태운 미공군기가 크로아티아 두브로부니크 공항 상공에서 추락하여 탑승객 전원이 죽었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이처럼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숨어 있으면서 아무 때나 찾아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죽음을 막거나 그 시간을 늦출 수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죽지만, 죽음에 대한 의식은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에게도 미미한 정도의 의식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실존적으로 절실하게 의식하고 체험하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역설적이지만 이 죽음의 사실을 전제하는 데 있습니다. 영원히 살것 처럼 행동하는 건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로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만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건강할 때, 젊을 때는 죽음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불치병에 걸리거나 늙어서야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만, 우리는 평소에 이 죽음을 보다 절실한 문제로 안고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가장 멀리 밀어놓는다는 건 지혜로운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간혹 어떤 사상이나 사이비 종교가 죽음을 예찬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행위는 자기를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 그곳의 고승들은 월남의 민주화를 위해서 분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일본의 무사들도 그런 전통이 있습니다만, 그들은 정신적 수양에 따라서 몸이 완전히 불에 탈 때 까지, 혹은 칼로 자신의 배를 기엌 자로 갈라낼 때 까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버텨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종교적 확신에 따라서, 정치적 이유에서, 혹은 염세적 사상에 따라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아름다운 건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이유있는 죽음이라고 해도 죽음은 그것 자체로 참혹하며 무자비합니다.

성서는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어느 구절에도 죽음의 미학이 없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순교당한 이들이 많지만 그들도 역시 죽음을 아름답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두려워해서 배교하는 걸 거절했을 뿐이지 죽음 자체를 아름답다거나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고전15:55절에서 말하기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지적하면서, 죽음의 무자비한 힘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아무리 엄청나고 난폭하고 두려워할만한 힘이라 하더라도 성서는 그것에 굴복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힘에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게 아니라 더 큰 힘에 사로 잡혀 살아가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부활입니다. 부활의 희망만이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그 절망으로 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아 예수의 부활사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되돌아봄으로써 이 죽음의 세계에 굴복하지 않고 생명의 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게 무언지 배워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쓴 고전 15장은 이른바 ‘부활장’입니다. 우리는 1절 부터 58절에 이르는 긴 구절을 읽으면서 부활에 대한 논의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선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이 무언지 꼼꼼히 따져들어갑니다. 바울이 부활을 단순한 선포로 처리해 버리지 않고 변증적으로 설명해 들어가는 이유는 부활사건이 사실적으로 설명될 수 없고 관념적으로 접근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부활은 30년 전에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딛고 돌아왔을 때 온 세계에 TV 방영이 되었던 것 처럼 사실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 지상적 삶이 끝났을 때 참여하게 될 생명의 세계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언어로 직접적인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우리 몸이 다시 산다, 그때가 되면 모든 이 세상의 고생이 끝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사시사철 배부르고 따뜻하게 자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지낼 수 있는 그런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유적으로 부활을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바울은 35절에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부활을 비유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씨의 비유가 있습니다(36-38). 부활을 굳이 이 세상적인 사물로 비유한다면 씨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씨는 그 안에 놀라운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만 씨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썩게 되면 그 안에서 생명이 솟아나 커다란 풀이나 나무로 자라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도 그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지금 육체는 흡사 씨와 같습니다. 우리 육체가 썩는다고 해서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보다 놀라운 생명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부활이 무언지, 어떤 모습을 갖는지 사실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만 씨의 비유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바울은 이 세상에 모든 사물의 형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39-41).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가 다르며, 또한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듯이(40)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영광과 죽은 다음 부활했을 때의 영광이 다르다고 합니다. 우리가 단순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부활의 세계 까지 결정하려고 한다면 물고기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비유를 통해서 부활은 이 지상적 삶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라는 사실을 전하고자 합니다.

고전 15장에서 많은 것들이 설명되지만, 바울이 말하려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부활은 육의 몸으로 부터 영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사건이 바로 부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몸을 떠나 그저 허공을 떠다니는 상태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동양 무속신앙에서 말하는 귀신과 같은 상태를 가리켜 영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부활하게 된다는 건 우리가 몸을 떠나 귀신 처럼 존재하게 된다는 것도 아나라‘영적인 몸’, 영적인 존재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부활이 바로 영적인 몸을 입는 것이라 할 때 부활 이전의 우리는 육적인 몸에 같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이지 못한 우리이기 때문에 영적인 부활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육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 개개인의 경험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육적인 것들을 가리켜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42,43절)이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주변에 썩을 것들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썩지 않을 것이 있나 살펴보십시요. 부활절을 빛내고 있는 이 꽃들도 며칠만 지나면 썩습니다. 인간의 몸도 역시 죽은지 사흘만 되면 썩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도, 아무리 강철 같은 튼튼한 육체도 결국 썩을 운명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두번째의 요소는 욕된 것인데, 이는 곧 천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별로 고상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인격을 도야해도 역시 고상하지 못합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의 인격은 천한 곳으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니다. 세번 째 요소는 약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갈대 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약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도 역시 상처받기 쉽습니다. 아주 사소하게 싫은 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조금마한 칭찬만 들어도 우쭐대는 게 바로 우리입니다. 이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소용돌이 치며 살아갑니다. 아무리 자신을 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매우 많은 부분에서 약합니다. 권력에 약하고 여자에 약하고 돈에 약합니다.

바울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게 부활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썩지 아니할 삶, 영광스러운 삶, 강한 삶, 바로 영적인 삶으로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부활이며, 2천년 동안 예수의 부활사실에 비추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희망하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삶의 차원을 향해 끊임 없이 매진해야 합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부활신앙이 지향하는 삶의 차원입니다. 이런 삶, 이런 생명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으로도 도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선진국 보다 열배 높은 복지생활이 보장된다고 해도 그것이 오늘 바울이 말하는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으로 다시 살 수 있게 하지 못합니다. 이런 영적인 몸은 오직 부활의 세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걸 바라보며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요즘 우리 현대인의 삶은 영적인 것을 소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소홀할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얼마나 교만한 세상인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육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런 것들을 최고의 우상으로 섬기는 세상입니다. 육적인 것에 대한 자랑에 파묻혀 사는 그들은 영적인 삶을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이들은 부활신앙을 웃음거리로 생각하고 있으며, 영적인 가치를 무시합니다. 이런 세계 속에서 영적인 가치를 외치는 교회는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아무도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년 일년 동안 한국 교회는 평균 0.1% 정도 성장했다고 합니다. 이런 정도라면 정체라기 보다 오히려 감소라 보아야 합니다. 이런 통계가 몇년 동안 계속되었고, 이런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90년대, 특히 9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 많은 이들이 신앙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말들 합니다. 이렇게 된데는 교회 내외적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그중에 하나가 현대인의 삶이 철저하게 육적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소득이 높아지면서 삶의 위기의식을 상실하고, 반대로 소비와 즐기는 일에 몰두하게 되므로써 교회가 외치고 있는 영적인 삶을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개인 GNP 1만 달러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현상을 훨씬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육적인 것에 대한 그런 수고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인생살이가 힘들어지고 고달파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매우 즐거운 것 처럼 살아갑니다만 속으로는 매우 피곤해 합니다. 겉으로는 매우 강한 것 처럼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만 속으로는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곧 육적인 것의 속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활신앙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게 바로 중요한 부활신앙은 장차 우리가 참여하게 될 미래의 새로운 생명, 영적인 생명을 희망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는 걸 뜻합니다. 과연 우리가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질문해 봅시다. 우리가 과연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돌아봅시다. 육적인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지 돌아봅시다. 예수를 믿는 우리도 역시 죽음으로 부터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을 안고 오늘 이 시간, 이 시대 속에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고전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