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부활
사도 바울은 본장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의 문제에 대해 증거한다.
1-11절, 복음의 내용인 그리스도의 부활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은 먼저 복음에 대해 말한다. 이 복음은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바요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바요 그 가운데 선 바이었다. 기독교 복음은 시대마다 수정보완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이미 고정된 내용으로 사도들을 통해 세상에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복음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오늘날도 교회가 전파하는 바는 바로 이 동일한 복음이다. 복음의 목적은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죄와 그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므로 구원이 필요하며, 그러므로 복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굳게 믿는 자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라는 말은 진실하고 확고한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임을 보인다.
[3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3-4절은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증거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내용이다. 사람이 이 복음의 내용을 믿을 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게 된다. 복음의 첫 번째 중요한 내용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성경대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예표된 바라는 뜻이다. ‘위하여’라는 원어(휘페르uJpe;r)는 여기에서 ‘대신하여’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은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속죄(贖罪)의 진리이다. 기독교 복음은 속죄의 복음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소식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길이다.
[4절]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의 두 번째 중요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확실한 사실이고, 그가 사람으로서 가장 슬프고 비참한 처지인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다는 것과, 그의 부활이 무덤으로부터의 부활 곧 그가 묻히셨던 무덤을 비우시고 부활하신 사건임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매우 기본적인 내용이다(롬 10:9-10). 그의 부활이 중요한 까닭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모든 것을 확증하기 때문이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무죄성(無罪性)과, 그의 모든 말씀들의 진실성과, 그가 친히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고, 가장 중요하게 복음의 핵심적 사실인 그의 속죄사역을 확증하고, 그럼으로써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성을 확증하는 것이다.
[5-8절]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대부분]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한다. 복음서들과 달리, 여기서는 남자들만 언급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증인들이다. 첫째로 그는 게바 곧 베드로에게 보이셨다. 둘째로 그는 열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셋째로 그는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 지금까지 대부분 살아 있고 어떤 이들은 죽었다. 이것은 놀라운 증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은 수십 명이 아니고 수백 명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살아 있었다. 넷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야고보에게, 다섯째로 그는 모든 사도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이 정도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서 충분하지 않는가? 이 정도의 증인들을 확보한 사건이라면 믿을 만한 사건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사건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죄와 형벌의 대속자이시며 기독교는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진리가 아닌가? 오늘 우리는 성경의 이런 증거들에 근거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
[9절] [이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자임이로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마지막 증인으로 자신을 언급한 후 자신에 대해 잠시 간증한다. 앞절에서 그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표현한 이유를 말한다. 그는 자신이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곧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말한다.
[10절]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바울이 되었다. 바울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바울만의 고백이 아니고 모든 목사들과 성도들의 고백이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말했었다(고전 4:7). 우리가 오늘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충성할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11절]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바울은 자신이나 다른 사도들이나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과 그의 몸의 부활을 증거하였음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사도들이 증거한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처음부터 교회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고 그 복음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었다. 속죄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얻을 기본적 신앙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복음 신앙, 속죄 신앙을 가지자.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삼일 만의 부활의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또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죽음이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적 신앙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그리스도의 부활은 게바 즉 베드로와 열두 제자와 5백여 형제들과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에게와 바울 자신 등 수많은 증인들에 의해 증거된 사실이다. 그의 부활은 그의 구주 되심을 확증하고 우리의 미래의 부활도 확증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우리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섬기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인 됨과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깨닫고 그를 믿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12-19절,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확증함
[12-13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그것은 부활이 인간의 이성으로 불가능하여 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다 썩고마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며(사 26:19; 단 12:2; 마 22:23-33; 히 6:1-2) 기본적 진리를 부정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교회의 중대한 문제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많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된 사실이며 복음의 핵심적 내용임을 증거함으로써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을 반박하고 부활 진리를 확증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예이며 증거이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14-15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 매우 중요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사도들의 전파하는 내용은 헛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파하는 중심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포함하였기 때문이다(행 1:22; 2:32; 3:15; 4:33; 5:30-32). 또,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헛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의 진실하심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즉시 허위로 판명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사활(死活)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을 포함하여 모든 사도들은 다 거짓 증인으로 판명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거짓 증거는 십계명의 제9계명을 어기는 중죄(重罪)이다. 그러나 핍박을 참고 순교까지 당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짓 증인이며, 기독교가 역사상 유래 없는 거짓말에 근거한 사기(詐欺)이며, 기독교 신자들이 거기에 속아넘어간 가련한 영혼들인가? 순교의 피로 인쳐진 기독교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면, 세상에는 믿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를 의심하는 것은 증거들의 부족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무관심과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처럼 중요하고 확실한 만큼, 그것에 의해 확증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16-19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요지를 반복하면서 두 가지를 덧붙이고 있다.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그의 부활로 확증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는 그의 말이 거짓이 되며 또 그의 무죄성(無罪性)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되심이 부정될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그의 속죄가 부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죄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 곧 죽은 자들이 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믿고 소망 가운데 죽었으나 그 소망이 헛되기 때문이며 더욱이 그를 위해 고난과 핍박과 순교를 당한 자들은 아무런 보상과 위로가 없는 헛된 죽음을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全) 역사를 뒤엎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렇게 부정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실로 확실하게 증거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은 돈, 부귀, 영화, 명예, 권세, 쾌락 등 이생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길어야 백년 동안만 가치 있는 것들이며 영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부활에 있고 영원한 천국에 있다. 그 진리,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고난도 받고 순교도 감당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이생뿐이라면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순교까지 당한 사도들과 주의 제자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세가 있고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고 영원한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다는 확증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 영광을 소망하자. 사람은 육신의 죽음으로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혼은 불멸하고 장차 부활이 있다. 불신자들은 수치스런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우는 형벌을 받을 것이지만, 신자들은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생할 것이다.
20-34절, 부활의 순서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잠자는 자가 깨어 일어나듯이 죽은 자도 깨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유한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부른 것은 그의 부활이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복된 부활을 기대하고 소망한다.
[21절] [이는]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말미암음이로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롬 5:12). 사람의 범죄로 죽음이 왔기 때문에 사람이 죗값을 받음으로 죽음을 극복해야 했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왜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 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그는 사람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참으로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다.
[22절] [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얻을 것임이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고 범죄하였고, 그의 범죄로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엡 1: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영적으로 연합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전 12:13; 요 15: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다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다(요 3:16).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까닭은 그리스도 때문이며, 곧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때문이다. 그의 대속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39).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성취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실패치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된다.
[23절]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부활에는 순서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이시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곧 그의 재림 때에 그에게 붙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의 근본 진리이며 거기에 우리는 소망을 둔다. ‘그에게 붙은 자’라는 원어(호이 투 크리스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곧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뜻이다(롬 1:6). 그에게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 재림 시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다(살전 5:16). 이 말씀은 세상에는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도 있음을 암시한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인류는 두 부류로 나뉠 것이다.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던 자들이다.
[24절]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나중’이라는 말은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의 부활이 있은 후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다. 그때 악인의 부활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악인의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표현하셨다(요 5:29). 다니엘서에는 그것이 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을 입을 부활로 묘사되었다(단 12:2). 요한계시록은 모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보좌 앞에서 심판받는 장면을 증거하였다(계 20:12). 악인의 부활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또 그때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실 때이다. 마귀의 권세 아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의인들을 핍박하던 세상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계 11:15).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은 이미 시작된 교회 시대가 끝나고 영광스런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됨을 말한다. 지금도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중생한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요 3:5; 골 1:13; 계 1:6), 주님의 재림으로 이 나라는 아버지께 바쳐져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완성될 것이다.
[25-26절]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하나님의 ‘모든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그 도구인 세상의 악한 정권들을 가리킬 것이다(엡 6:11-12; 단 10:20-21). 그는 모든 원수를 다 복종시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전투에서 노련한 대장이시다. 그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모든 원수를 복종시키실 것이다.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장례식은 그의 세상 생활의 종말이다. 인류 전체로 말하면, 세월이 지나갈수록 세상에는 공동묘지나 무덤들만 늘어간다. 그러나 사망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극복되었다. 그것은 원리적으로 이미 정복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시 그것은 실제적으로 정복될 것이다. 그때 의인들은 영광의 부활로, 그리고 후에 악인들은 심판의 부활로 부활할 것이다.
[27-28절]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아버지께 복종하셨다. 히브리서 5:8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다(마 26:39; 빌 2:8).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라는 말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려’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세상과 인류에게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있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게 지금 있어 보이는 것도 다 없어질 수 있다. 마지막 심판 날에 그것들은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가?’라는 질문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29-32절]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凡人)처럼(카타 안드로폰)[인간적 동기로]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받는다는 말은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것은 아마, 촬스 핫지의 주석대로, 비세례교인이나 학습교인이 세례받기 전에 죽었을 때 그의 가족이 그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았던 초대교회의 한 잘못된 풍습을 가리킨 것 같다. 그 풍습은 비록 잘못된 것이었지만 부활 신앙에 근거하였었다. 바울은 그것을 들어 그들의 부활 소망을 증거하려 한 것 같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바울의 전도생활이 죽음의 위험이 가득한 삶이었음을 증거한다. 그는 날마다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위험한 생활을 피하지 않는 것은 부활의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초월할 자가 누구인가? 그러나 부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 ‘맹수들’은 바울을 죽이려는 무리들을 가리킨 듯하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한다면 누가 죽음의 위협을 감수하겠는가? 쾌락주의자들의 좌우명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이다. 그들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심판도 부정하는 자들이며, 부활 소망이 없는 자들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도 다 쾌락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과 내세가 있음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현세를 근신하며 조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산다.
[33-34절]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호밀리아이)[교제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교제는 영향이 있다.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과의 교제는 악한 교제이며, 악한 교제는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 우리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이제는 선하고 의롭게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은 그렇게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부활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시 살 것이다. 이 영광스런 부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경건하고 죄 안 짓는 삶, 헌신과 희생의 삶, 현실의 역경을 초월하며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인내하는 삶을 살 수 있다.그러나 악인들의 부활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우는 심판의 부활이다.
35-49절, 부활의 몸
[35-38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몸이 썩어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살 것인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은 자연계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사람은 벼나 밀을 직접 심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의 낟알 곧 씨를 땅에 뿌리고 그것이 땅에 심겨 썩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그것에게 각각의 형체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벼와 밀의 낟알이 썩은 후에 싹이 나고 자라 각각 벼와 밀의 형체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은 죽어 그 몸이 땅에 묻혀 썩지만, 장차 그 몸이 부활할 것이다.
[39-41절] 육체(사르크스)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또한]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형체들]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짐승들과 새들을 흙으로 지으셨다(창 2:7, 19). 물고기들도 흙으로 지음받았다고 보인다(시 104:29). 그러나 그 육체들은 다 동일하지 않고 각각 다르다. 생명 세계의 육체들도 다 다르고, 해와 달과 별들의 형체들도 다 다르고 하늘의 것들과 땅의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고 하늘의 것들 간에도 영광이 서로 다르다. 해와 달과 별들은 그 크기와 밝기에 있어서 각기 다르다.
[42-44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죽은 자의 부활도 부활 전 상태와 다를 것이다. 그러면 부활 전의 사람의 몸은 어떠하며 부활 후의 사람의 몸은 어떠한가?
첫째로, 부활 전의 몸은 썩을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썩지 않을 몸이다. 사람이 범죄한 후 모든 피조물과 피조 세계가 시들고 쇠하고 마침내 썩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다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죄씻음의 구원의 결과인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몸인 것이다. 죄악성이 다 제거되었기 때문에 썩지 않아야 마땅하다.
둘째로, 부활 전의 몸은 욕된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아름다운 몸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지혜롭고 의롭고 아름다웠으나, 범죄함으로 그 의와 영광을 상실했고 슬픔과 고생이 많은 세상 속에 살면서 그 얼굴과 몸이 보기 흉해졌다. 어린 아기들의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또한 사람의 내면적 불결과 악함은 겉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부활은 본래의 아름다움의 회복이다.
셋째로, 부활 전의 몸은 약한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강한 몸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수록 인간의 몸이 참으로 약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인간의 몸은 작은 부분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아프다. 문명이 이토록 발달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 몸은 조금 춥게만 자도 감기에 걸리고 한번 감기에 걸리면 적어도 몇 일 동안 아파야 낫고 심지어 감기로 죽기까지 한다. 종합병원들의 수많은 환자들과 또 이 세상의 많은 장애인들은 인간의 몸의 연약성을 잘 증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할 때에는 더 이상 병이 없는 건강한 몸을 가질 것이다.
넷째로, 부활 전의 몸은 육의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신령한 몸이다. ‘육의 몸’(소마 프쉬키콘)은 타고난 죄성 즉 죄악된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몸이라는 뜻일 것이다.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콘)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몸, 죄성이 없는 몸’을 가리킬 것이다. 또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체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성을 초월하는 몸을 의미할 것이다(요 20:19).
이와 같이, 성도의 부활체는 현재 우리의 몸과 현격하게 다를 것이다. 그것은 썩지 않고 아름답고 강하고 신령한 몸일 것이다.
[45-46절]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프쉬케 조산)[산 존재]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사람 아담과 그 안의 모든 사람들과 대조하여 마지막 아담으로 죄 없는 인성(人性)을 입고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와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셨음을 암시한다. 그로 인해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는 마지막 아담이시며 그 후에 또 다른 이가 올 필요가 없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는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 ‘살려주는 영’ 혹은 ‘생명을 주는 영’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인류의 대속(代贖)을 이루셨고 지금 성령으로 죄인들에게 그 속죄를 적용하여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일을 하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죄로 인해 죽은 인생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영이시다. ‘먼저는’은 첫 사람 아담을 가리키고, ‘그 다음에’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첫 사람 아담은 육적 생명을 가진 존재이었고,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존재이시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러하셨지만, 부활 전에는 그 사실이 육신의 생명에 가리워 있으셨으나 부활 후에는 그것이 밝히 드러나셨다.
[47-49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곧 주(主)]21)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입자].22)
첫 사람이 땅에서 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음을 의미한다. 첫 사람은 육이 먼저 지음 받고 그 후에 영혼이 지음을 받았다. 그는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이었다. 그러나 둘째 사람 곧 주께서는 본래 신성(神性)을 가지신 영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 영이신 그가 때가 되어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사람의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그의 근본은 육이 아니며 영이고, 땅이 아니며 하늘이었다. 그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흙에 속한 자’는 아담을 가리키고, ‘흙에 속한 자들’은 부활 전의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하늘에 속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장차 부활할 성도들을 가리킨다. 모든 인류는 흙에 속한 아담과 같지만, 장차 부활할 성도들은 하늘에 속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을 닮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흙에 속한 자’ 곧 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장차 ‘하늘에 속한 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의 형상은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영적인 몸이다. 그것이 모든 성도들이 장차 입을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이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은 현격히 다를 것이다. 현재의 몸은 썩을 것이지만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것이며, 현재의 몸은 보기 흉하지만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울 것이며, 현재의 몸은 약하지만 부활의 몸은 강할 것이며, 현재의 몸은 육체의 욕구와 죄성이 있지만 부활의 몸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영적인 몸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복된 부활의 몸을 사모하자.
50-58절, 부활의 개가(凱歌)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血)과 육(肉)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썩을 것]은 썩지 아니한 것[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은 현재의 몸을 가리킨다. 성도의 부활체가 단지 영은 아닐 것이지만 현재의 몸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현재의 혈과 육의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썩을 몸이기 때문이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51-52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이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변화할 것임이라].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 있는 자들의 변화는 우리가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는 비밀과 같다. ‘잠잔다’는 원어(코이메데소메다)는 미래시제이다. 우리가 다 죽을 것이 아니지만, 이미 죽은 자들이나 주의 재림 시 살아 있는 자들이나 간에 마지막 나팔에 다 변화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부활과 변화의 사건은 마지막 나팔소리에 맞추어 일어날 것이다. 마태복음 24:31에 보면, 예수께서는 “저가[인자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서도,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했다. 나팔은 예비신호이다. 마지막 나팔은 예비신호의 끝이며 본 사건의 시작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끝날 때 죽은 성도의 부활과 살아 있는 성도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홀연히’라는 원어(엔 리페 오프달무)는 ‘눈 깜짝할 사이에’라는 뜻이다(KJV, NASB, NIV). 성도들의 부활과 변화는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나팔소리가 날 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53-54절] [이는]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입어야 하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입어야 함이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0절에 말한 대로,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갈 모든 성도는 죽은 자나 산 자나 간에 주의 재림 시 다 변화를 받아야 한다. 이 부활의 시간이 오면 사망의 확실한 패배가 증명될 것이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이사야 25:8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상 사망처럼 강력한 승리자가 없지만, 그때가 되면 그것이 패배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사망보다 더 강한 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생명이다. 성도의 부활과 변화는 사망에 대한 영원한 승리이며 세상으로부터 사망의 영원한 추방이다.
[55-56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무덤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전통본문)23)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의 권세는 죄 때문이다. 또, 죄가 힘을 가지는 것은 율법 때문이다. 죄가 없다면 사망이 힘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 범죄하였고 온 세상이 죄로 가득함으로 사망이 또한 온 세상을 주장하였고 율법 때문에 죄는 죄로 드러나고 정죄된다. 인류 6천년 역사는 사망과 무덤이 지배해왔다. 모든 사람은 죽었고 무덤에 묻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시, 곧 죽은 성도가 부활하고 산 자들이 변화될 그때에 그 기록이 깨질 것이다. 사망은 더 이상 인간을 괴롭히지 못하고 무덤은 더 이상 사람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최종적 원수인 사망에 대한 개가(凱歌)가 아닐 수 없다. 부활과 영생의 개가보다 더 감격적인 것은 없다.
[57-58절]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드러난 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사망 아래 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사망에 대한 승리를 감사한다. 구원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다. 그것은 사망에 대한 영원한 승리이다. 성도는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으나 부활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끝으로 두 가지의 권면을 한다. 첫째는, 우리가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들, 특히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약속들을 확신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성도들의 복된 부활과 영광의 천국과 영생에 대한 소망은 성경말씀에 근거한 것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들이다. 우리는 그 믿음과 소망에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우리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주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며(요 6:29),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막 16:15),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마 16:18), 복음 사역자들을 훈련하며 파송하는 일이다(딤후 2:2). ‘더욱 힘쓰는’이라는 원어(페리쑤온테스)는 ‘풍성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주의 일에 항상 더욱 힘쓰는 자, 즉 주의 일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시간과 몸과 물질과 재능을 풍성히 드리며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부언하기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였다. 주의 일을 위해 풍성히 참여하고 수고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나를 위해 쓰거나 단순히 세상을 위해 쓰는 것은 내가 죽고 세상이 불탈 때 헛될 것이다. 그러나 주의 일은 사람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헛되지 않다. 주께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2:12).
모든 성도는 주의 재림 시 순식간에 다 변화할 것이다. 죽은 자들은 살아날 것이며 살아 있는 자들은 변화할 것이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하여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이 될 것이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두려운 권세자인 사망의 쏘는 것과 무덤의 이기는 것은 끝날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죄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결과로 부활과 영생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망은 영원히 패하고 무덤은 더 이상 슬픔과 두려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이다. 이것이 죄사함의 구원의 결과인 부활과 영생이다. 여기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부를 개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며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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