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4, 2018

예정/김효성 목사

4. 예정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셨고 또 하시는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은 예정과 창조와 섭리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 중, 예정(豫定)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세상의 모든 일과 특히 사람들의 구원을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예정하심

하나님은 만세 전에 세상의 모든 일들을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5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자신의 뜻의 계획에 의해 모든 일어날 일들을 자유롭고 불변적이게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이지 않으시며 피조물의 의지가 침해되지도 않으며 또한 제2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함이 제거되지도 않고 오히려 확립된다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불변적 작정과 의지에 대해 명백하고 충분하게 증거한다. 시편 115:3,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이사야 14:24,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 . .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37:26,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이사야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萬代)를 명정(命定)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이사야 46:10-11,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내가 말하였으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다니엘 4:35,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성적으로도, 사람이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자세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생각한다면,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완전한 계획을 가지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모든 일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그 일들이 확실히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하며, 이 확실성은 단순히 우연이나 인간의 자유에 근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진리도 그의 영원한 작정을 후원한다. 우주의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의 진행과 미래를 인간의 자유나 불확실한 우연에 맡겨두셨다고 상상하는 것은 그의 선하심에 명백히 배치된다.

 

 성격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우선,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적이다. 창조와 섭리는 논리적으로 작정 후에 그리고 시간 세계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은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그것은 피조물의 어떤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그의 절대적 행위이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은 불변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확고히 정해진 계획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도덕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행하신 어떤 전횡적 행위가 아니고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고 선한 뜻에 근거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지극히 거룩하고 선하다.

하나님의 작정의 진리는 세상의 숙명론 혹은 결정론과 다르다. 숙명론은 세상의 모든 일이 미리 결정된 어떤 운명이며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그것을 변경할 수 없다고 믿는 매우 소극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사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작정은 인간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들과 그것들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한다. 잠언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에스겔 36:37,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요한계시록 22:12,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또 성경은 사람편에서 볼 때 세상에 우연한 일들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한다. 룻기 2:3, “[나오미의 며느리 모압 여자 룻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열왕기상 22: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아합]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범위

하나님의 작정의 범위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작정은 우주의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로마서 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심지어 인간의 죄 문제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죄와의 관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성경은 사람들의 죄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시킨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과 작정 밖에 있지 않다.

창세기 45:8, [요셉이 형들에게 말함]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사무엘상 2:25, “[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누가복음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로마서 9:17, 22,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은 흔히 ‘허용적 작정’이라고 표현된다. 이 말은 피조물의 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 속에 있으나 죄의 책임은 하나님께 돌릴 수 없음을 나타낸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의 원인자가 되실 수는 없다. 죄는 오직 피조물에게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존재와 그 활동들도 그의 예정 속에 두셨으나, 마귀를 마귀되게 한 자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마귀 자신이다. 마귀는 스스로 타락하였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셨으나 그 허물과 책임은 하나님께 돌려질 수 없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도 마찬가지이다.

 

목적

하나님의 작정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작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이사야 48:11,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1:6, 12, 14, “[예정과 구속과 중생은] 그의[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것]이 주[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창조와 구속과 심판의 궁극적 목적도 그러하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이사야 43:7, 21,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들의 구원을 예정하심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사람들의 구원을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 4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었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예정되었다,” “이렇게 예정된 이 천사들과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불변적으로 계획되어진 것이며 그들의 수는 매우 확실하고 명확해서 더해지거나 감해질 수 없다.”

 

선택

사람들에 대한 예정은 선택과 버려두심의 두 요소로 구성된다. 예정의 첫 번째 요소는 선택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5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중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들을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목적과 그의 은밀한 계획과 기쁘신 뜻에 따라 오직 그의 값 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고; 신앙이나 선행들이나, 혹은 그것들 가운데서 끝까지 견딤이나, 혹은 피조물 안의 다른 어떤 것을 조건들로나 그를 그것으로 이끄는 원인들로 미리 아심이 없이 하셨으며; 모든 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셨다.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밝히 증거한다. 요한복음 6:39, “내게 주신 자.”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 . .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주신’이라는 헬라어들은 완료시제이며 하나님의 선택이 확정되어 있음을 보인다.55)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작정된 자’(테타그메노이 τεταgμένοι)라는 헬라어도 완료시제이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에베소서 1:3-5,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 .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성격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행하신 일이다. 에베소서 1: 4, “창세 전에 . . .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선택은 불변적이다. 요한복음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하나님의 선택은 또한 주권적, 무조건적이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예수께 오는 자 곧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께서 예수께 주시는 자 곧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께 주시는 자 곧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가 예수께 나아와 믿는다. 요한복음 10:26,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양이 아닌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었다. 로마서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로마서 9:15, 16,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만일 선택이 사람들의 회개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미리 아심(豫知)에 근거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된 많은 구절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말씀이나, 베드로전서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라는 말씀은 소위 예지 예정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의 호의’를 나타내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다른 명백한 구절들이 주권적 선택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선택 안에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구원의 수단들도 포함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6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셨을 때 그의 뜻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계획에 의해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들도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나 택하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救贖)되고; 정한 때에 활동하시는 그의 영에 의해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養子)가 되고 거룩해지고 그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된다. 오직 선택된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救贖)되거나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양자(養子)가 되거나 거룩해지거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특히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죄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디모데후서 1:9,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택은 택함받은 죄인들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케 하시는 사역과 인간편에서 전도, 회개와 믿음, 순종 등의 자발적 행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점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해 오해하기도 한다.

 

타락과의 관계

선택과 타락의 관계는 어떠한가?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창세 전이므로 타락 전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을 선택하셨을 때 그들을 죄 없는 상태의 사람들로 보셨는가, 아니면 타락할 자들로 보셨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선택을 창조와 타락의 허용보다 앞에 두어,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셨을 때 그를 무죄 상태의 사람들로 보셨다는 견해를 전택설(前擇說, supra-lapsarianism)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선택하지 않고 버리심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간주한다. 이 견해는 바울의 토기장이의 비유(롬 9장) 등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진리에 근거하며 그 진리에 비추어 다른 견해보다 더 논리적이게 보이고 천사들의 경우에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이 견해는 죄 없는 사람들의 일부를 영원한 멸망에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조화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다른 한편, 선택을 창조와 타락 허용의 작정 후에 두어,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셨을 때 그를 장차 타락할 자로 보셨다는 견해를 후택설(後擇說, infra-lapsarianism)이라고 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선택하지 않고 버리심은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로 간주된다. 이 견해는 선택이라는 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의 선택이므로 타락을 전제해야 한다고 본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에 비추어 논리적으로 약해 보이는 점이 있으나 전택설의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 같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후택설을 취하는 것 같다. 3:7,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지나쳐버리시고 그들의 죄로 인한 수욕과 진노에 이르도록 작정하셔서.” 개혁파 신학의 주류는 후택설이다. 그러나 전택설과 후택설의 문제는 하나님의 깊은 신비에 관계되는 것 같다.

 

다른 파들의 견해

선택에 대한 다른 파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루터파는 루터의 바른 견해를 저버렸다. 루터 자신은, 칼빈과 동일하게, 인간의 전적 부패와 더불어 하나님의 절대적, 이중적 예정을 믿었다. 그러나 루터파 전통은, 그들의 일치신조에 진술된 대로, 어거스틴의 절대 예정의 교리도, 신인(神人)협력설(semi-Pelagianism)도 부정한다. 루터파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중생에서의 성령의 주권적, 단독적 사역을 긍정하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이 은혜를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17세기 초 화란에서 정죄된 알미니우스파(Arminianism)는 로마 천주교회의 입장이었던 신인협력설로 돌아갔다. 그 파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부정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 후에 나타난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Wesleyan Arminianism)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긍정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사역으로 인해 모든 사람의 원죄의 죄책과 무능력이 제거되어 이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구원 사역과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알미니우스주의의 오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56) 이들은 다 하나님의 주권적, 무조건적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다.

 

버려두심

하나님의 예정의 두 번째 요소는 버려두심(reprobation)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그의 피조물들 위에 가지는 그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위해,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지나쳐버리시고 그들의 죄로 인한 수욕과 진노에 이르도록 작정하셔서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송하게 하기를 기뻐하셨다.

버려두심의 교리는 천주교회, 루터교회의 다수, 알미니우스주의, 웨슬리주의 등의 심한 반대를 받아왔으나,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도르트 신조 등이 밝히 주장하였다. 칼빈의 설명과 같이, “선택 자체는 버려두심과 대조시키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기독교강요, 3. 23. 1).

 

증거

선택은 논리적으로 버려두심을 내포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가 나머지 사람들을 내버려두셨다는 것을 내포한다. 뿐만 아니라,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성경의 많은 말씀은 버려두심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다. 출애굽기는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고 증거한다(출 4:21; 7:3; 9:12; 10:27; 11:10). 신명기 2:30, “여호와께서 그[헤스본 왕 시혼]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여호수아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사무엘상 2:25, “그들[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느니라.” 이사야 6:9-10,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 6번이나 인용되었다.57)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마태복음 13:11, “천국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로마서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데살로니가후서 2:11-12,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2:8,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유다서 4,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정죄]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두 측면

버려두심에는 두 측면이 있다. 즉 지나쳐 버리심과 정죄하심이 그것이다. 지나쳐 버리심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정죄하심은 적극적 행위인데, 하나님께서 지나쳐 버리신 자들을 그들의 죄에 대해 공의로 정죄하시고 벌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적(法廷的) 행위이며, 그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은 그의 진노와 형벌 아래 있게 된다. 사실상,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아래 있었으나,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되고, 나머지는 그들의 죄 가운데 그냥 버려져서 그 죄의 형벌을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할 것밖에 없고, 하나님의 지나쳐 버리심을 받고 정죄된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 선택된 자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의 영광이, 버려진 자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이 드러난다.

유기의 진리는 두려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코 불평거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다 버리셨을지라도 인류는 불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기의 진리는 비록 기쁨을 주는 진리가 아닐지라도 모든 신자가 마땅히 믿어야 할 진리이다.

결론적으로, 예정의 교리는 사람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사람 자신에게서 나왔느냐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느냐라는 근본적 문제에 관계된다. 역사적으로 이 문제는 어거스틴주의 혹은 칼빈주의 신학 체계와 기타 신학 체계들을 구분하는 주요 논점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사색적 문제나 지엽적 문제가 아니고, 실제적 문제요 근본적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어떤 이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가? 구원의 능력이 참으로 하나님께 있는가?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또한 이 심오하고 신비한 교리가 바르게 가르쳐지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예정의 진리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준다. 이 진리는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을 찬송하게 하고 하나님의 공의 앞에 두려움을 가지게 하며 또 그에게 참된 겸손과 흔들리지 않는 위로를 준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한 결심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불변적 예정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의롭고 선한 삶을 위해 부지런하고 성실히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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