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15, 2018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데이빗 던렙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나는 내 자신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배한다. - C.H.스펄전')


/ 데이빗 던렙
 
성경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우리들을 항상 논쟁이 아닌 경배로 이끈다.

      이글거리는 아프리카의 태양이 사람들로 혼잡한 아랍 시장을 내리쬘 때, 한 여자가 바쁘게 상인들과 흥정하고 있다. 번잡한 인도(人道)에는 자기들의 상품을 내다파는 가게점주들이 길을 메우고 있고, 근처에선 아이들이 놀고 있다. 강한 향료 냄새가 코를 찌르고,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섞여서 소음처럼 들린다. 인산인해를 이룬 더러운 거리 가운데 한 임신한 여인이 건너편 길로 건너가려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무슨 엄청난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즉시 여러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가 통제력을 잃고선 시장을 향해 질주해오고 있다. 경고의 말을 할 새도 없이 말들은 이 가련한 여인을 가공할만한 힘으로 짓밟아버리고, 자신이 한 일을 깨달은 마부는 가까스로 말들을 제어한다. 땅바닥에 누워있는 여인을 바라보면서, 그 마부는 무정하고 무심한 말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건 알라(신)의 뜻이야.” 그리곤 가던 길을 갔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행위는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종종 불의하다. 그들의 태도는 “일어날 일이 일어날 뿐”이라는 식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숙명론적인 생각이다. 그처럼 두려운 하나님을 누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분이라면, 어떻게 그분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

      감사하게도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그런 식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을 무한히 전능하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무한히 좋으신 분으로 계시한다. 하나님의 선하심, 공정하심, 자비하심,은혜로우심, 그리고 그분의 수없이 다양한 속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한 주권적인 행위를 이룬다. 하나님의 주권은 종종 재난과 시련의 형태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때에도 사랑, 미쁘심, 그리고 깊은 동정이 없이는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은 목적 없이 나타나는 것 같이 보여도, 그분의 방법은 항상 완전하다. 그분은 우리가 능히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주권적인 뜻에 대해 경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주권은 바른 교리를 사랑하는 모든 신자들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속성, 즉 사랑, 공의, 신실, 그리고 불변하심 등과 상충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점에 대해서 오류에 빠져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부차적인 것이며 그 모든 것 위에 주권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불일치가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인 사랑(요일 4:8-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을 훼손할 수도 없거니와 훼손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서 국제 표준 성경 대백과사전의 편집 책임자인 제임스 오르 박사(Dr. James Orr)는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높였는데 이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사랑이 아닌 주권적인 뜻에 지나치게 둔 것이 오류를 낳았습니다.”(James Orr, 교리의 발전(The Progress of Dogma), (Grand Rapid: Eerdmans, 1952), p292.)라고 썼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

      하나님은 선하시고 또 선을 행하신다는 성경적인 원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에도 적용된다.하나님의 본질과 그분의 거룩한 목적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한 본질에 반하는 행동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선하심, 은혜로우심, 긍휼히 여기심 등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과 뜻을 떠받치고 있다고 계시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메아리치고 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는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 18:25).

      고통과 고난이 하나님의 신성한 뜻일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비와 다함없는 사랑”으로 대하신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에 대해 “주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애 3:32-33)고 설명한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함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연결해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른다. 섭리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선을 위한 신성한 돌보심, 유지, 사랑, 그리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 백성들의 선을 위함은 섭리의 이중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들의 선을 희생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시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영광을 희생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선을 위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우리의 선이 불가분의 관계가 되도록 영원한 목적을 계획하셨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지혜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그분의 무한한 지혜에 뿌리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들이 그분의 신성한 목적을 성취하는 완전한 계획 속에 포함되도록 한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의 주인이시다. 사람은 자신의 통제 밖의 환경으로 인해 좌절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일이 하나님에게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를 좌절시킬 수 있는 상황이나 어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는 그분의 제한받지 않는 전능성에 의해 진행되고그분의 무한한 지혜에 의해 다스려진다. 시편 기자는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시 147:5)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길은 지극히 완전하다. 하나님의 행위에는 흠이 있거나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 하나님의 결정에는 개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 모든 길은 완전한 지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우리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경배와 순복의 자세로 무릎 꿇을 뿐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주님, 주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시 104:24)라고 썼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성경적 범위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교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만 하는 진리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셔서 가장 높으시고 가장 위대하신 분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그분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에 따라 만물을 운행하신다(엡 1:11-모든 것을 자기가 뜻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자기의 계획을 따라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또는 '우리가 상속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영원하시고, 자존하시며, 자족하시며, 불변하시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또한 모든 만물 가운데 홀로 비교할만한 것이 없으신 분이시라고 정의한다.

“주님은 온 땅을 다스리는 가장 높으신 분이시고,어느 신들보다 더 높으신 분이십니다.”(시 97:9) 

      하나님은 무한하시기에 그분의 통치는 절대적이어야만 한다. 그분의 통치는 그분의 창조 세계의 모든 것, 즉 모든 환경, 모든 상황, 모든 사건에 대한 전적인 통치를 포함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인간의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일으키신 것이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 통치자들을 세우시거나 폐하는 일에 대해서도 전적인 권리를 주장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한 성품에 따라 자신이 원하시는 일들을 행할 권리가 있으시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하시고자 하시면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다”(시 115:3).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은 대부분 사랑, 자비, 정의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완전한 통제권을 행하시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람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존엄성과 결정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러한 선택에 대한 책임도 아울러 주신다. 그러한 결정들이 때로는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과 고통에 이르게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허락하신다. 하지만 신성한 전능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사람들이 내리는 모든 결정들을 아시며, 신성한 주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러한 선택들을 취해서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이루도록 사용하신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결정과 행위에 대해 전적인 통제권을 가지시며, 동시에 사람들은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다.

      신성한 지혜가 최선이라 여기시는 지점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비할 바 없는 목적을 이루도록 사람들의 결정들을 다스리신다. 홀로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의 선택과 그에 따르는 고통을 취하셔서 그분의 주권적이고 완전한 뜻을 이루어내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된 행위가 최악의 상태가 되어 끔찍한 결과를 내도록 그냥 방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개입하시고 다스리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인간의 자유 의지의 범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주권적이시라면, 그렇다면 인간에겐 자유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행동하도록 허락할 때에만 인간은 행동할 수 있으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욕구를 거절할 수가 없다. 이 견해는 성경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인상을 준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권적으로 허락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사람이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목적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면 사람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빌라도와 나눈 대화에서 우리 주님이 친히 언급하신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책망하는 투로 말하면서 “내게는 너를 놓아 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 형에 처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나를 해할 아무런 권한도 네게 없었을 것이다”(요19:10-11)라고 대답했다. 빌라도는 자유를 주도록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했다.우리 주님은 빌라도를 바로 잡아주시면서 자유를 주도록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위에서 주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는 성경에서 너무도 자주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본다. 이 능력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잠언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너희가 깨닫기를 싫어하며, 주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내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 탓이다”(잠 1:29-30).

하나님은 만사가 그저 그렇게 진행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주권적인 통치를 행하신다. 하지만 이러한 통치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어떤 사건들과 다른 목적들을 허락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의 두 가지 측면을 조심스럽게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때문에 인간 의지의 죄악된 결과들을 결코 하나님 탓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죄에 대한 유혹,육신의 행동, 전쟁, 탐욕, 살인, 그리고 죄 때문에 발생하는 참혹한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때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4: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무한한 주권과 인간의 책임 양자를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리고 이 무한한 주권 가운데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이러한 진리 가운데 어느 하나를 손상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두 사이에 합당한 성경적인 균형은 엄격하게 유지되고 지켜져야만 한다.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작가인 A.W. 토저 또한 이 점에 대한 성경적인 균형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도덕적인 선택을 하는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권적으로 판결하셨고, 인간은 태초부터 선과 악에 대한 자신의 선택을 결정했다. 인간이 악을 행하기로 선택했을 때, 이로써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루었다. 영원한 판결은 인간이 내려야만 하는 선택이 아닌, 인간이 결정을 하는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결정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절대적인 자유 가운데 의도적으로 제한된 자유를 주신 것이라면, 누가 그분의 손 아래 머물겠으며, 또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이지 않으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자신의 피조물에게 도덕적 자유를 줄 수가 없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럴 염려가 없으신 분이시다.'(A.W. 토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New York, NY: Harpers and Row Publishers, 1961) p.118., 생명의말씀사 역간)

노만 가이슬러 박사는 좀 더 명료하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주권과 적대적이지 않다.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를 가진 피조물로 창조하심으로써 인간에게 주권적으로 자유를 주셨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주권적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존재하는 모든 순간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도록 허락하신다.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 방해를 받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자유에 의해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또 인간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의 자유 의지를 훼손함 없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다.'(노만 가이슬러, 복음주의 신학사전.(Grand Rapids, MI: Baker, 1986). p428.)

학자이자 은사있는 설교가인 C.H. 스펄전은 이 진리의 양면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자유를 가진 존재이며, 책임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죄는 순전히 고의로 짓는 죄이다. 따라서 죄는 전적으로 사람에게 달린 문제이지 결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목적은 이루어지고, 그분의 뜻은 심지어 마귀들과 부패한 인간에 의해서도 성취된다. 나는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그것을 믿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나는 내 자신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배한다.'(C.H. 스펄전, Metropolitan Tabernacle Pulpit, vil 16, (London: Passmore & Alabaster, 1907). p.501.)

      마지막으로 하나님 주권의 교리는 사람에게 변명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신학 체계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하나님에 의해 강제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도 못한다. 이는 그분 자신이 인간에게 은혜로 주신 자유 의지를 억지로 훼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전자가 후자에게 억지로 힘을 행사하지 않는 형태로 함께 공존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지극히 높으신 영원한 목적에 따라 다스리신다. 따라서 장래의 어느 날우리는 완전한 자유 가운데서 전혀 강요받지 않은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해온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선함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롬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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