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15, 2018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소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소고

- 절대적 권능과 작정적 권능이 자유의지에 미치는 영향


 김영수 장로 / 고신대 前사무처장
 부산부평교회 

🎯들어가는 말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학습(study) 효과로 얻은 지적 기능을 말하며, 따라서 이해한다(understanding)는 지식과는 조금 다르다. 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다(believe in God)는 믿음과는 분명히 별개이다. 그러나 자신이 학습한 지식을 바로 이해하고 믿는다면 얼마나 좋겠는 가만은, 학습하고 연구한 것을 믿지는 않지만 가르치기만 한다면 그 지식은 머리에서만 머물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기독교적 학문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이제 21세기라는 종말론적 시점에서 과거 보수적 또는 개혁주의 적 신학 입장들도 비판을 받아야 하며,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자들이 있다. 그 일례로 과거의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도 오랜 세월(1647년)이 흐른 지금에는 수정 내지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모대학 J 모교수의 주장 역시도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성경의 해석이나 중심 사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야 말로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많은 교육자, 신학자들이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 실로 자신은“믿지 아니한다.”라고 하는 우려의 현상들이 우리 주변에도 있지 아니한 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어디까지나 시대의 스승이나 학자는 혼탁한 신학 사상이나 이론(異論)들의 논란에 대해 상당한 책임감을 가지고 그때마다 적절하게 성경원리를 설파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문적 이념이나 철학, 신학사상이 도전을 받거나 위기를 맞았을 때, 정반대의 현상들이 우리교회에서 쟁점(issue)으로 부상하면 조정하고 정리해 주는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끝까지 보신에만 집착돼 견해를 표명하지 않고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심산(꿍꿍이)은 또 다른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인데 그것이 안타깝다. 그러면 누가 중심에 서서 올바른 가치관이 확립되고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뿌리 내리도록 할 것이냐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강의실에서 외친 기독교적 우주관과 세계관 확립은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 된다. 이런 경우는 지식인의 심각한 방종이며 타락의 한 형태이다. 바로 이런 일들은 시대의 조류에 편성한 기독인의 신앙 결핍 증상인 내적 자유의지의 부적절한 사용 및 우유부단함이라고 본다. 

대주교 토마스 그랜머(1489~1566)가 화형에 처하겠다는 위협을 받자, 약해져서 개신교 신앙을 부인하다가 다시 곧 회개하고 장렬하게 불길로 뛰어들어 순교를 하였음을 상기 해 본다.

보헤미아 출신으로 개혁자이며 순교자인 프라하의 제놈(1365~1416)은 콘스탄틴 공의회에서 심리적 압박을 못 이겨, 처음에는 개신교 신앙을 부인했다가 곧 회복해서 자신을 휘감는 불길 속에서 몸이 불타는 가운데, 부활의 찬송“만세 할렐루야”를 부르고 사도신경의 성부, 성자, 성령과 관계된 조항을 세 번 반복해서 외치면서 순교를 했다.

반드시 학자나 시대의 스승이 아니더라도, 기독인의 일상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뜨뜻하지 못한 이런 삶은 솔직히 나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남의 작은 티는 잘 찾아내면서, 진작 자신의 들보는 죄책감도 가지지를 아니하는 개과천선하지 못한 점을 회개하고 뉘우쳐야 된다고 생각한다. 

로마의 19대 황제 율리아누스(331~363)는 황제가 되기 전에는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실제로 교회를 위해 엄청난 일들을 도모했다. 이후 황제로 옹립 즉위된 후 그는 고의적으로 교회를 헐고 훼방하는 등 타락과 배교의 길을 걸어갔다. 마지막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숨이 넘어가는 순간“오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가 이겼다.”고 하는 유언을 남김으로서 그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타락과 배교의 전형이라는 오점을 남겼다. 고려파라는 이즘을 가진 우리교회의 스승을 포함한 기독인인 우리는 적어도 불신앙이거나 자존심, 고집 같은 것 때문에 타락과 배교(backslide and apostasy)의 길을 걸어가는 제2의 율리아누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해본다.

🎯섭리(攝理 providence)의 어원

섭리는 그 어원이 창세기 22장 8∼14절, 아브라함이 100세에 약속의 기업으로 얻은 이삭을 모리아산 꼭대기까지 사흘 길을 가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고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어린양을 준비해 두었다는데 근거하고 있다.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했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이 바로 '섭리'라는 개념이다. 라틴어 역에서 이 문구를 '데우스 프로비데트(Deus providet)'라 하여 섭리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창조사(創造事)와 계약사의 중간 영역에 배려되어 있고, 이점에서 섭리론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결단이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요한복음5:17)고 말씀하셨다. 섭리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통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의 뜻을 이루는 하느님의 활동 행위(사역)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v. i.)에 나타난 섭리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해, 그리고 무오(無誤)한 예지와 자유롭고 불변한 하느님 자신의 뜻에 따라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의 활동과 사물들을 유지 감독하고, 처분 지배해서 그의 지혜와 권능, 정의와 선 및 은혜의 영화로움을 찬양하게 하신다."고 했다. 

계몽기 이후의 근대 신학에서는 '이신론'의 형태를 취했는데, 여기서 자연신학이 섭리신앙의 대용품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역사주의 신학에서는‘인간 중심의 섭리론’으로 기울어져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20세기부터는 다시 성경의 섭리신앙을 새로운 형태에서 해석,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자유의지(free will)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힘, 능력을 말한다. 서양철학은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양립 가능론과 양립 불가론으로 나누어지는데, 양립 불가론은 다시 결정론과 비결정론으로 나뉜다.

자유의지는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으로서 외적인 제약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내적 동기나 이상에 따라 어떤 목적을 위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중점적으로 논하면서, 인간 행위의 책임 한계성과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1. 어거스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45~430)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전능하시다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하나님은 악의근원이 아니다.”라고 논증했다. 그의 논증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다.

본질적인 자유

어거스틴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 이성적이기 위해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녀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선과 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인간은 나쁜 행동이나 좋은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은 악의 근원이 아니다.”라고 논증한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성적이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로도 해석되나, 진위나 선악을 구별하여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성적이기 위해서는 자유의지를 부여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닌다는 것은 선이나 악을 선택하는 것을 비롯해서 무엇이던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이 아닌 악, 그리고 순종이 아닌 불순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점이 바로 간교한 뱀에게 여자가 대답한 말로서“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3)”고 함으로써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에서 과일을 따 먹지 말라고 하였음에도, 불순종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 중 한쪽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possibility)을 열어 둠으로서 신의 명령을 어긴 엄청난 일대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분석

어거스틴이 가능성을 열어둔 자유의지를 설명할 때, 합리성을 내세워 추론의 과정을 통해 선택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자유의지를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합리성은 나쁜 일을 하도록 선택하는 자유를 비롯해서 선택의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는 논리는 합당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를 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입장에서“비록 세상에 악이 존재할 찌라도 악이 존재하는 세상의 선이,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선보다 더 위대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음악의 불협화음이 더욱 아름다운 소리로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불협화음의 단순 이해는 둘 이상의 음이 동시에 울릴 때, 심미적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아 조화롭지 않게 들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음율(음악의 소리와 가락)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소리를 발산하게 되면 합창이나 사중주와 같은 소리를 내게 되는 위대한 음악으로 변화되는 것과 같다는 의미가 된다.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에 반대했던 흄의 입장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병을 일종의 건강의 결핍”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말장난하는 것처럼 보였다. 병은 어떤 것의 결함 때문에 생길 수도 있지만, 병자의 고통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다. 그리고 지진이나 역병과 같은 자연의 악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인에게는 어거스틴의 견해가 궁금증을 풀어주는 해답이라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점이 어거스틴이 말하고자 한 사상의 중심인데, 하나님은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였고 자유의지를 부여함으로써 무엇이나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과 악 중에서 그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로서 자신의 이성적인 생각에 의해 선한 행동이나 악한 행동 중 하나를 임의로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담을 신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게 한 것은 또한 그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게 했다.”는 것으로, 따라서 악이 없는 세상은 인간이 없는 세상일 것이며, 이성적인 존재는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아담과 이브의 경우처럼 우리의 도덕적 선택에는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다.  

이전 사조와 어거스틴의 사상

플라톤 은 저서 ⌈Gorgias⌋ 에서“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의 부재에서 생긴다.”고 주장했다. 이후 어거스틴도 “악은 그 자체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의 부족이나, 결함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장님이기 때문에 겪는 악은 “앞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며, 도둑은 “정직하지 않다는 점.”이라고 설명하였다.

이후 서기 500년 경 보이티우스가 저서 ⌈철학의 위안⌋에서 어거스틴의 악에 관한 이론을 활용한다. 반면 1130년 아벨라트(Pierre Abelard, 1079~ 1142)가 보편논쟁의 중심에서 “악이라는 존재는 없다.”는 사상에 반대한다. 따라서 자유의지 논쟁은 계속 이어져 갔다.

2) 펠라기우스 입장

본질적 자유 논쟁

BC 4세기경 어거스틴(354~430)과 펠라기우스(360~420)의“자유의지”논쟁이 시작된다. 어거스틴은 인간의‘원죄 교리’를 주장하면서 펠라기우스에 반대한다. 반면 펠라기우스는 원죄교리를 거부했다.“아담은 자신이 자기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죄를 범했다.”고 가르쳤다. 그는“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고 보시기 때문에 단지 그 사람을 선택하는 것.”뿐이라고 가르쳤다. 

이상은 “악”에 대한 변증들이지만, 시대와 환경에 따라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은 조금씩 달리한 점이 발견된다. 어거스틴은 본질적 자유를 논증하면서 “왜 신이 이런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악이나 결함이 생길 수 있는 이성을 창조해야 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절감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악이 존재하는 세상의 선이,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선보다 더 위대하다.”는 주장을 편다.

2. 보이티우스∣ 신은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과 행동을 예견한다.

1) 신의 예견⋅예지는 가능한가?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과 행동을 예견한다.∣

로마제국의 쇠퇴 후 동고트족(Ostrogothi)이 이탈리아를 지배 하든 때 출생한 보이티우스(Anicius Boethius 480~525)는 기독교를 믿는 로마제국의 귀족 출신이다. 그는 7세에 고아가 된 후 한 귀족의 집안에서 양육되었다.

보이티우스는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과 행동을 예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1250~1270)가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므로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 선다."는 보이티우스의 견해를 동의 한다.

보이티우스는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자유 의지를 지녔다고 할 수 있는가?"의 물음에 대한 답변하는 방안의 해결책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래 사건의 결과에 대해‘어떤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논제를 대략적으로 기술한 바가 있었다.

보이티우스는 말하기를 "우리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결과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신이신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므로 써 "신은 영원한 현재에 살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현재를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똑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과거⋅현재⋅미래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다." 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앉아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당신의 자유를 멈추도록 방해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에 대해 신이 알고 있다는 것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유행동을 멈추게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고 주장한다.

보이티우스는 "신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과 행동을 예견한다." 는 주장을 다시 설명해 보면, 신은 영원한 현재에 산다. 그리고 신은 현재인 것처럼 미래를 잘 안다. 나는 오늘 영화를 보러 가지 아니할 자유가 있다. 신은 내가 오늘 영화 보러 갈 예정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신은 우리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까지를 예견한다.“ 는 논리를 폈다.

오늘 날 어떤 사상가들은“나는 오늘 영화를 보러 갈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음으로, 모든 것을 아는 신조차도 내가 영화를 보러 갈 것인지는 알지 못하고 또한 알 수도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3.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

1) 구원관에 대한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논쟁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관계

당시 1520년 로마 교황청은 작센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에게 루터를 로마로 추방해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이런 결정적 위기에서 루터를 구한 자가 바로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umus, 1466~1536)였다. 에라스무스는 폭넓은 학식을 겸비한 자로서 교회의 부패를 척결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신약성경 헬라어 판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루터는 수도사의 배와 교황의 왕관을 공격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선제후는 루터를 교황청에 넘겨주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잉글렌드의 헨리 3세(1491~1547)까지도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에라스무스에게 요청하고 압박을 가했다.

이에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라⌋는 소책자를 발간하고 로마가톨릭교회가 견지하는 전통적 반 페라기우스 교회 편에 섰고 중재자 역할도 끝냈다.

1525년 12월 루터의 저서는 에라스무스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이에 1525년 루터는 인간의 의지에는 자유가 없다는 '노예 의지론' 을 출간하게 된다.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모두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루터는 복음적이고 신앙적인 입장에서 비판하였고, 에라스무스는 계몽적이고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가톨릭교회의 성서해석과 여러 부정과 부패를 비판했다.  

이들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가장 잘 더러 난 것은 “인간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이뤄지느냐.”아니면“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 필요한가.”라는 상호 관점의 논쟁이었다. 이 논쟁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서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을 드러내고 설명하려고 한 반면, 루터는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과 타락을 강조함으로써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로 말미암았음을 주장한다.

에라스무스의 반박 

에라스무스는 1524년에“자유의지에 관한 설교”(Diatribe concerning the Freedom of the Will, 원제는 De libero Arbitrio)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루터의 주장에 반박을 시도한다.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를 정의하기를 “영원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협동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인간의지의 능력”이라고 하였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나,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에 협동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며, 선행적(先行的)인 하나님의 은혜에 협동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에 능동적으로 참예하는 이를 구원으로 이끄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1차적 요소이고, 2차적 요소인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적으로 함께 역사해야 한다고 하는 에라스무스의 소위 신인협동설(Divine human Synergism)은 멜랑톤(Melangchthon)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신인협동설은 요한 웨슬리의 구원관에도 영향을 미쳐, 선행적 은총(Preventing Grace)과 인간의 협력으로 구원이 이뤄진다는 주장을 펴게 된다.

루터의 입장

루터는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선택으로 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였음을 강조한다. “ Bondage of the will”(원제 De serve arbitrio)을 발표하여 인간의 의지는 타락하여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어떤 역할도 이를 부인한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의를 무익하고 한갓 공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4. 칼빈

하나님의 섭리

칼빈 신학의 특징은 전문 용어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명료하지 않고 모호성이 있다. 그는"하나님께로 부터 오지 아니한 것은 무엇이든 칭찬할 가치가 없다."(Ⅲ.14.2.) 고 단정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거듭나지 못한 자들 가운데도 칭찬할 만한 것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모든 덕의 능력과 효과를 성령 하나님께 돌리기 때문이다.(Ⅰ.13.18.) 그러면서도 그는 "거듭나지 않고는 성령께로 서 온 것을 지닐 수 없다" 고 말한다.(Ⅱ.3.1.)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초점을 맞춘 권능의 신학으로 성결과 위엄, 신실과 은혜, 사랑과 자비의 신학이어야 한다고 상기시키면서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위로도 소망도 확신도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모든 질의와 궁금증에 대해 때로는 정확하게 답변해 주지를 못하며,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을 주저하기도 한다. 그는 성경이 가라하는 곳까지 가며, 멈추라고 하는데서 급정거를 하는 것처럼 즉시 정지한다. 그러므로 조직적이거나 논리적이거나 자신의 사견을 중심으로 상황을 전개하지 않는다.  

칼빈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신경에 서명하라는 페트루스 카롤리(Peter Caroli)의 요구를 거부했다. 칼빈이 니케아 신조의 문구를 자유롭게 비판했다는 점을 상기 해보면, 국한되고 한정되는 것은 “성경”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칼빈이 어떤 교권이나 권위 앞에서도 이에 순응하지 아니하고 서명을 거부한 데에는 교리, 신학, 신조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세기에 들어서 많은 신학자들이 자신의 소견으로 신학을 고정시키려는 듯한 태도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섭리

칼빈 교리에 있어서 섭리(providence)란, 하나님이 세상 또는 우주에서 행하시는 항구적 보편적 행위를 뜻한다. 섭리는 예정교리로 대변된다. 하나님은 창조자이며, 영원한 통치자요, 보존자이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밀한 명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깊이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시고 자신의 은밀한 의지로 결정 하신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Ⅰ.18.1)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하나님이 그렇게 뜻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뜻이 만사의 원인이므로, 나는 그분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일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원천으로 파악했다. 그 섭리의 권능을 성령님께 다스림을 받는 선택된 자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유기자(deserter, 遺棄者)들도 순종하지 아니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Ⅰ.18.2.)라고 한다. 

칼빈은 “참으로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과 대치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아니한다.”고 결론 짓는다.((Ⅰ.18.3.) 고 말하면서 “인간의 지혜는 무엇이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유순함(docility, 배우려는 태도)으로, 그리고 적어도 오류를 찾으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칼빈은“우리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분이 먼저 아버지로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그분을 ‘아버지’로 보는 사람들은 그분의 ‘전능하심’에 의존하며 위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일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원칙으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 어느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절대적 권능(potentia absoluta)과 작정적 권능(potentia oridinate)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개념을 배척하는데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절대적 권능’을‘작정적 권능’에 대한 위협으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대한 위협으로, 따라서 성경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께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따라서 칼빈 신학에 있어서 권능(potentia)은 절대적 이거나 독단적이지 않았다.

물은 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가? 하나님께서 인간과 자연을 대상으로 친히 내리신 결정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전화선 전주는 왜 똑바로 서있는가? 하나님께서 그것이 그 자세를 유지하도록 적극적으로 붙드시기 때문이다.(Ⅰ.16.4.) 섭리는 일반적일 뿐만 아니라 특수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눈, 예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손 또는 영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칼빈에 있어서 절대적(absoluta)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최종적인 권능이다. 하나님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실제로 행하시는 것이 아닌 그리고 성경에서 하신 계시를 떠나서 인간이 가설을 세우는 것은 위험하고 무익하다고 단언한다.

칼빈에 있어서는 이런 개념들에 비추어 하나님은 작정적 권능 - 친히 정하신 권능에 의해서 섭리⋅예정⋅성례⋅성육신 등 모든 신학적 주제를 다루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작정적 권능은 신실하신 목적과 선하신 뜻과 일치하는 권능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숙명론(fatalism)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은 뜻하시는 바를 행하시지만, 그분이 뜻하시는 것은 결코 독단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칼빈은 하나님을 역사의 주재(主宰, preside)로 보았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과 거역하는 자들을 함께 쓰셔서 일하신다고 보았다.(Ⅰ. 16. 4) 또한 그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왕으로 계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칼빈은“ 중략 -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자유의지의 위대한 능력을 받았지만, 죄를 지음으로써 그 능력을 상실했다.(Ⅱ.2.8) 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필연적으로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다. 인간의 의지는 여전히 작용하지만, 이제는 악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선택된 자와 거듭난 자, 특별히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선행을 할 능력을 부여하기에 충분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칼빈은 징계조차 아버지의 손길이라고 보았다. 징계가 없는 사람, 즉 그런 아버지에게서 단절되어 있는 것이 곧 지옥이다. 실제로 칼빈은 지옥을 단순한 공식으로 정의했다. 주권적 권능에서 아버지의 자비를 빼면 지옥이다.(Ⅲ.25.12)라고 말한다. 바로 작정적 권능이 빠진 절대적 권능은 지옥이라는 개념이다.

1) 결정론과 결정성의 차이

칼빈은 결정론(determinism)을 배척하고 결정성(determinateness)을 수용한다. 그가 말하는 결정(determination)은 모든 사건들의 결정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중략, 빗방울 하나라도 하나님의 확고한 명령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Ⅰ.16.5)고 주장한다.

결정론은 행위들이 행위자 바깥에 있는 상황과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숙명론은 미리 정해진 필연적 법칙에 따라 일어나므로 인간의 의지로서는 바꿀 수가 없다는 이론인데, 즉 일정한 인과관계에 따른 법칙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우연이나 선택의 자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어떤 상황과 조건 발생이 행위자 바깥에 의한 것으로 본다는 이교적 사상이다. 인과관계가, 한 현상은 다른 현상의 원인이 되고, 또 다른 현상은 먼저의 현상의 결과가 되는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 결정성은 하나님이 결정해 놓으신 것을 의미한다. 결정성은 사건들이 행위자에 의해 발생하든 그렇지 않든, 강제에 의해 발생하든, 자의에 의해 발생하든, 외적 요인들에 의해 조건지어지든, 내적 요인들에 의해 조건지어지든, 단일하고 일원적이며, 또는 결정된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결정이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3세기 제논은 자연에 담겨져 있는 원인들은 항구적 관계를 갖고 있고 서로 친밀한 관계 하에 서열 지어있는 원인들 - 로부터 필연을 궁리해 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유의 지배자요 통치자이시다. 하나님은 영원의 저 끝에서 부터 자신의 지혜를 친히 행하실 바를 작정하셨고, 이제는 그 권능으로 친히 작정하신 바를 이루신다.(Ⅰ.16.8) 그러므로‘우연이나 운’은 이교적인 사고에서 나온 용어이다. 따라서 인간사에는‘우연이나 운’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인간이 생각하는 정신의 역량으로 보기에는 “만물이 우연에 의해 되어 진 듯하나”(Ⅰ.16.9) 하나님이 결정해 놓으신 것으로서의 결정성은 “비록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거나, 그 독특한 본질상 필연적이지 않더라도 반드시 발생한다.”(Ⅰ.16.9 후반)는 것이다. 

칼빈은 결정론을 부정하나, 결정 또는 결정성에 의해 다른 가능성들이 말살된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을 본다. 이는 그가‘상대적 필연과 절대적 필연’같은 개념들이나 ‘이론상의 결과와 실제상의 결과’같은 개념들을 구분할 때 찾으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런 개념인 듯하다.(Ⅰ.16.9 후반)

🎯맺는 말

섭리와 자유의지의 상충 점

이제 어떤 결말을 내리지 않아도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보이티우스의 주장,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 흄의 생각들, 그리고 칼빈의 신학을 보면서 이미 우리는 스스로 정립된 결론을 도출했다.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칼빈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능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선하시며 자비하신 하나님의 뜻과 구분하거나 뗄 수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능과 아버지의 의지가 모두 필요하다. 만일 하나님의 의지에서 권능(potentia)을 떼어 낸다면, 전택설(Supralapsarianism, 타락전 선택) 의 경향을 띠게 되고, 권능에서 의지를 떼어 낸다면 후택설(Infralapsarianism, 타락후 선택)의 경향을 띠게 된다. 이 둘을 함께 생각할 때에 비로소 역동적인 -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해하면서, 선택 또는 작정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온전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생각하게 된다. 

중세에 있었던 논쟁 중에서“예정은 하나님의 지적행위인가, 아니면 의지의 행위인가?”에서, 만일 지적 행위라고 하면 인간의 책임이 그대로 보존된다고 보았다. 그러면 인간이 일종의 공동 행위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설명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리고 만일 선택이 하나님의 의지의 행위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보장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의 책임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중세의 논란이었다.

둔스 스코두스(Duns Scotus, 1265~1308)는 “하나님이 먼저 은혜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에 영광을 위해서 선택했다”는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사상을 배척하면서 그 순서를 뒤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칼빈은 스코투스의 입장에 서서 영광을 위한 예정이 은혜를 위한 예정의 원인이라고 동의한다.((Ⅲ.22.9.)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생하다고 주장한다. 칼빈은“하나님의 의지가 철저히 자유로우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본성에 충실하게 일치하신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서로 마찰되거나 충돌되는 상충 점은 없다. 절절히 조정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범주 안에 속해있다고 봐야 한다.

위대한 개혁자 스승들의 특징은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고 외롭지만 험난한 길을 도도히(陶陶, 매우 화평하고 즐겁게) 걸어갔다. 저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였으며, 감격하고 감명을 받게 되다 보니, 성경이 뜻하는 바의 본질 훼손과 도전에 대해서 왜 죽기로 살기로 막으려고 했겠는가의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감동을 체험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본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불명한 주장들에 대해서는‘아니요’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면서, 논박 이상의 공박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혹자는 우리시대의 훈장, 글방 선생들이 개혁자들과는 대조적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어떤 오류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묵인한다는 것은 동조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한 시대에 있었던 각종 현상들의 오류에 대한 책임은 그 분야를 수학하고 전공한 가르치는 자들에게 일차적으로 무거운 책임이 부여된 것이다. 

오시안더(Andreas Oslander 1496-1552)가 “영원한 고로스가 인간이 되시기 위한 형이상학적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을 때, 칼빈은 오시안더에 대해 정신나간, 터무니없는, 술취한, 어리석은, 잠꼬대 같은 생각이라는 등의 표현으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맹공을 퍼부었다는 점을 연상해보면, 지식인의 침묵은“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고 한 규범을 어긴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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