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27, 2018

현대인의 우상/박성혁

🎯현대인의 우상

/ 박성혁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인 막스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경제적인 성공과 종교 사이에는 연관이 있음을 밝혔다. 그는 17세기에 대표적인 두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경제가 활짝 피고, 당시 대표적 가톨릭 국가로서 세계 강국이었던 스페인의 경제가 몰락한 사실에 주목했다. 베버는 그 이유를 두 종교(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노동에 대해 취했던 생각의 차이에서 찾았다.

칼빈주의에서는 노동이 예배로 여겨졌다. 반면 가톨릭에서는 노동을 신성시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부지런함과 절약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직업을 소명으로 본 칼빈주의는 힘든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청교도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고 절약함으로써 자본이 축적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자본주의가 창안된 것이다.

베버의 연구에 따르면  현대의 직업인이란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자본주의를 낳았지만, 그 자본주의가 이제는 프로테스탄트의 최대의 적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를 파괴하고 있다. 이미 18세기에 코튼 마더라고 하는 학자는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 그는 한 저서에서 “종교는 번영을 낳았고 그 딸은 어머니를 파괴했다”고 썼다. 여기에서 종교는 프로테스탄트를, 그 딸은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잘 경계하지 않으면 소명의식은 번영을 낳을 것이고 그 번영이 결국 소명 의식을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명 의식은 과거 근대 자본주의가 발흥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초기 청교도에서 소명 의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부지런히 살고 그 세상에 대해 죽게 만들었지만, 후기 청교도에서는“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해서 성공했다”고 말한다. 오스 기니스의 말처럼 소명에 대한 오해때문에 번영의 교리가 생겨났고, ‘건강과 부의 복음’이라는 어리석은 이단이 생겨났다.

유명한 정치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은  미국 여행을 하면서 들은 설교에 대해 이렇게 썼다고 한다. “그들의 설교를 들으면 종교의 주된 목적이 내세에서의 영원한 복락을 얻는 것인지,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획득하는 것인지 종종 혼란스럽다.”코튼 마더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후의 일이다. 오늘날 이슬람권이나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박해받으며 믿음을 지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도로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대형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으면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지 모른다.

베버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간에,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이전 시대에는 부지런함과 절약이 미덕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소비가 미덕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듯이, 생산과 소비라는 바퀴가 굴러가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붕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조짐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잉태했던 정신이 사라진다면 그런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강력한 우상숭배의 유혹의 도전을 받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강력한 유혹이 되어왔던 우상은 바로 풍요에 대한 욕망이었다. 사사시대의 특징적인 죄악도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는 것이었다. 아합 시대 때 활동했던 엘리야도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비를 내리는 자가 누구이냐?”는 논쟁을 벌였다. 바알과의 논쟁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다. 가나안 신화에서 바알은 폭풍우의 신으로서 비를 내려주는 자다. 가나안 신화를 믿는 자들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는 바알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물질에 대한 욕망은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다. 오히려 물질이 풍족한 우리 시대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더욱 부추긴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맘몬이라는 단어는 아람어로 부를 의미하는 단어다.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도 이런 이름을 가진 신이 없었다. 다시 말해 맘몬은 어떤 신의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단어에 이전에는 없었던 힘과 의미를 부여하셨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는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부(富)가 어떤 우상보다 더 강력한 도전이다. 예수님은 돈이 하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신다.돈은 우리가 선하게 혹은 나쁘게 사용할 때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능력으로 존재한다. 주님은 청중에게 하나님이나 맘몬 가운데 한 주인만을 선택하라고 요구하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데 대해,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맘몬이 우상숭배의 위험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은 깊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그런 사실을 외면하려 한다.

오스 기니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돈을 이용하든지,맘몬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맘몬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 맘몬을 섬기는데 하나님을 끌어들이고 있다. 야웨를 섬기면서도 바알을 의지하려고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맘몬을 포기할 생각도 없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 눈과 발이 가는 곳, 마음이 가는 곳은 맘몬의 신전이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주님의 말씀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맘몬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돈을 이용하는 자들이다. 맘몬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무시해선 안 된다. 맘몬을 경멸할 필요는 없지만 사랑해서도 안 된다. 맘몬은 그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숙제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돈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오스 기니스는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가장 강렬하게 사랑하는 것을 좇아서 그것이 귀결되는 종착역인 영원이나 죽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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