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2, 2018

삼위일체는 관념적이다?

삼위일체는 관념적이다!?

삼위일체 교리가 어렵게 다가오는 이유는 ‘내가 진짜 설명 잘 해. 정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줄께.’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선배나 목사님이나 심지어 탁월한 저자의 책의 이야기를 들어도 솔직히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개념들이 잔뜩 나열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란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책을 뒤적거렸더니 ‘본질은 하나이나 위격은 셋이다.’와 같은 아리송한 말들만 적혀있으니 말이죠. 본질은 느낌적 느낌으로라도 어떻게든 느껴보려고 하겠는데, 위격은 또 뭘까요? 사실 본질과 위격 등과 같은 표현들은 존재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이해가 되는 표현들입니다. 우리 오래된 선배들은 여러 이단 사상들에 반박하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철학적 사상에 불순하게 물들어서 성경에 있지도 않은 어려운 말들로 오히려 하나님을 아리송하게 만든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아무런 쓸모도 없고 인간 관념의 결과물일 따름이다!”라고 과격하게 주장하는 것은 좀 보류해봐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이유로, 그리고 주로 철학적 용어로 설명된다는 이유로 삼위일체 교리를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심지어 성경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하시지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삼위일체 교리를 지킨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

삼위일체 교리는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을 인간의 유한한 머리로 최대한 이해하고, 부족한 언어로 최선을 다해 표현해 본 결과입니다. 오류와 오해를 최소화하고 이해한 진리에 가장 근접한 방식으로 정통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이 확립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짚고 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셨다는 사실입니다.삼위일체 교리가 만약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상상의 산물이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없죠. 이 글의 주된 내용이 될 텐데요, 오래된 신앙의 선배들에게 귀를 기울여보면 난해하고 오묘한 사상을 고안해냈다며 자신의 천재적인 지성을 뽐내려고 삼위일체를 떠들어댔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분들의 숙제는 말씀을 통해, 사도들에게 전해 들은 바를 통해 형성된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하나님을 알았고, 구원자 메시야 예수님을 알았으며, 오순절에 강림하셔서 교회를 강타하시고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신 성령님을 경험했습니다. 문제는 이 세 분의 사역과, 세 분에 대한 성경의 묘사와 세 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하는가였습니다. <그러니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이 생각해 낸 신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신 모습, 조금 어려운 표현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모습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는 인간의 노력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부터 고백해 온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적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건조한 논리적 진술도 아니었고, 신학적 유희도 아니었으며, 신학자들의 밥벌이 토론거리도 아니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시리우스처럼 너무 멀어 갈 수 없는 항성의 구성요소를 수학적으로 파악하거나, 아르마딜로 같이 신기한 동물의 생태를 관찰하거나, 신대륙에서 발견한 처음 보는 인류의 문화와 언어를 수집기술하여 백과사전화시키거나, 소멸한 마야 문명을 발굴과 고증을 통해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진술들을 한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으로 삼위일체를 파헤치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재진술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곳에서 커다란 종교회의를 열어 당시 있었던 이단적 가르침을 배격하고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신앙고백 형태로 기록하여 교회의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수록하니 한 번 눈여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이시요, 성부이시며,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며,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요, 빛에서 나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며, 나신 분이요, 만들어지지 않으시고, 본질에 있어 성부와 하나이신 분임을 믿는다.

그를 통하여 만물이 만들어졌으며, 그는 사람인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 나셔서 사람이 되셨다. 우리를 위하여 그는 본디오 빌라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죽으시고 장사되셨다. 그는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셨다. 성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는 주님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이시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한 한 세례를 믿는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다가올 세상에서의 생명을 믿는다. 아멘.[1]”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도신경에 비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일히 나열하지 않아도 표현 방식에서 특정 성경 구절들이 떠오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니케아 신경도 읽었으니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는지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죠.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니케아 신경이 대규모 종교회의까지 열어서 기록되어야 했던 것은 아리우스라는 이단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문제 삼았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었죠.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피조된 존재라고 주장했죠.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일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고민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요.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사실 삼위일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일을 하신 것을 알고 인정하며 위대한 인물로 그리는데서 그친다면 삼위일체에 대한 고민을 시작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저히 오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하셨으며, 항상 곁에서 그분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나중에 그렇게 믿었다는 데서 문제가 불거집니다. “아니 그냥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뭐야, 이젠 자기가 하나님이래???”라면서요. 게다가 문제를 더 심화시키는 건,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으로 밝히신다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자 오신 예수님, 이제 우린 진퇴양난의 선택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하고, 삼위일체에 대한 고민은 필수가 됩니다. 삼위일체는 골치아프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사변적 궤변이라고 생각한다면, 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적이 없다고 믿거나 그것은 거짓이라고 믿는다면, 단지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살아가신 모든 목적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예수님의 존재를 다르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 구원의 방식과 이해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 자명합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포함한 예수님의 신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가르침은 우리의 구원 자체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다시 니케아 신경을 보면서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해보죠. 두 번째 문단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한 후 세 번째 문단에서 우리 구원과 예수님의 관계를 고백하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하늘이 갈라지는 것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인간 중 최고의 인간이라거나, 천사와 하나님 중간 위치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지만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설명은 아무리 예수님을 높이는 것 같아도 사실 우리의 죄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실 수 있는 구원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혀 죄가 없으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의 제사를 통해 완전히 그 진노를 누그러뜨리시고 그분의 의를 우리의 의로 여기시기까지 기뻐하셨다는 이해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인정하였을 때, 돌이켜 예수님께서 창조 시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고백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집니다. 우리 눈에 둘이었던 존재가 하나라는 사실을, 그리고 하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구원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니케아 회의 때 성령을 가지고 딴지 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니케아 신경에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갔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시라면 성령님 또한 그러십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취득하신 구원 사역을 우리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교회 전체에 실제 적용하는 일을 하십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주신 하나님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면상 마무리를 지어보겠습니다. 다음 기회도 있으니까요. 지난 두 차례에 걸쳐 저는 핏대 세워가며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를 아름답다고 여기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가 아름다우십니까!?’라고 주장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지적 유희를 즐기는 편이라 사색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상당히 관심이 갑니다. 그래서 온갖 어려운 개념들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난해하게 설명할수록 더 흥미가 갑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이해하고 싶어지나봅니다. 그런데 솔직한 고백이지만 그렇게 복잡하다고 해서 연구 대상이 그리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난제’로 접근하며 문제 해결 과정을 즐기는 것에 불과하다 할까요. 이런 자세로 삼위일체를 대하면 삼위일체 교리는 결코 우리 무릎을 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삼위일체가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지를 기억하는 가장 기초적인 이해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구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실제 초대 교회 선배들도 그랬고 말이죠.

온 땅과 세상을 창조하시고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시고 먼 우주로 휴가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수수께끼로 남겨두시고는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처럼 인간의 시초를 찾기 위해 우주여행을 해서 찾도록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처음에는 한 분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구원 계획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죠. 아브라함이라는 한 가족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이 땅에 드러났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셨지만 지성소나 특정 장소에만 간혹 임재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먼저 다가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직접 오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기로 하신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신 순간부터 부활 전까지 당신의 신성을 인성 안에 감추시고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외부에 존재하시는 초월자였던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 속으로 자신을 던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당신의 영을 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구원을 적용시키셨습니다. 죄 가운데 살던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실질적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택배기사가 되어주셨습니다. 단지 외부에 존재하는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역사 속 어느 시점에 구원 사역을 성취하신 분으로 존재하신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오늘 여기서 교회 전체와 나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세 분은 분명 다르십니다. 하지만 세 분은 분명 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 구원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가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이 죄인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셨는지를 깨닫게 되어 그 은혜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나를 위해, 이 땅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셨고, 구원을 시행하셨고, 구원을 적용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전혀 그러실 필요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온전히 협력하시어 한치의 오차와 오류도 없이 우리의 구원 사역을 지금까지 이루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래오셨듯이 성부 하나님과 그분과 함께 아직도 육신을 입고 계신 성자 예수님과 언제나와 같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녹아버릴 마지막 날 뿐 아니라 이어지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해가실 것입니다. 구원을 주재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구원을 이루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구원을 전달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구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드러남이며 하나님의 자신을 내어주심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이렇듯 삼위일체 교리는 무미건조한 논리적 진술이 아닌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 완전히 내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찬양하고 전 존재로 예배하며 믿음으로 고백하는 적절한 부름말이 됩니다. 사랑하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의 영혼에 우리 구원을 위해 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일들이 그 어떤 것보다 더 아름답게 여겨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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