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되어 인용되는 인기 구절 (2):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는 야고보서 2장 24절 말씀은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문제와 관련하여 종종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왜곡 되어 인용된다. 칭의라고 하는 신학 용어는 쉽게 말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죄 없는 자로 여긴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언뜻 보면 칭의를 위해서는 사람의 행함도 필요하다고 가리키는 것 처럼 보이는데, 그러려면 성경에서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항상 ‘칭의’를 뜻하는 것이어야 할텐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야고보서의 이 말씀을 가지고 쓰여진 좋은 글들이 많이 있는데, 국어로 쓰여진 것 중엔 개인적으로 쏙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이번 기회에 나름대로 정리한 것을 적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야고보서 2:24에서 사용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δικαιόω)라는 표현은 칭의 말고도 다른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 되고 있다. 그리스어 사전(Strong 혹은 Thayer)을 보면 대략 다음 두 가지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A) 올바름(의로움) 혹은 정당함을 증시하다.
(B) 올바르다(의롭다)고 판결하다 혹은 여기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장 35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쉽게 말하자면, ‘지혜는 그 결과를 통해 옳다 함을 얻는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옳다 함을 얻는다'(δικαιόω)는 표현은 야고보서 2:24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무작정 (B)의 의미를 대입해서 읽으면 ‘지혜는 그 결과를 보고 올바르다는 판단을 받는다’는 어리숭한 문장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A)를 대입하면, ‘지혜는 그 결과를 통해 올바른 것임을 증시한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24은 크게 나눠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a) 행함으로 올바른 자리에 있음을 증시하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b) 행함으로 칭의를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이상의 두 가지 가능한 의미 가운데 무엇이 바른 것인지 알기 위해서 전체 문맥을 살펴야 함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혹시 의미가 불명확한 구절이 있다면, 그와 관련된 성경 곳곳의 더 명확한 말씀들에 비춰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살펴 볼 때, (a)가 바른 의미임을 별 어려움 없이 알 수 있다.
야고보서 2장의 문맥
야고보서 2장은 그 시작부터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1절)라고 하여, 믿음 없는 사람들이 아닌, 믿음이 있노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중반에 가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며 ‘행함이 없는 믿음’을 논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고 설명하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행함을 일으키지 못하는 믿음’ 곧 믿음의 질(質)에 관한 지적임을 알 수 있다.
믿음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믿음이 있음을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 비유에서 ‘돌밭에 뿌려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즉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은 아니나,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과연 계속해서 18절을 보면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함으로써, 행함의 문제를 논하는 이유가 행함을 통한 믿음의 증시를 가르치기 위함 것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단순한 지적 동의(mental ascent) 같은 것, 마치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로마 황제가 그 옛날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것을 듣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듯이 그렇게 복음을 믿는, 소위 ‘역사신앙'(historical faith)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 나라의 의를 따른 열매를 맺는 ‘구원의 신앙'(saving faith)이 있다. 야고보서는 자기 신앙이 어떤 종류의 신앙인지 살필 것을 경고하고 있다.
21절 부터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로 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창세기 15장 6절)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 나서 비로소 칭의를 얻은 것이라기 보다는 과거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을 증시한 것이라고 23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야고보서 2장 전체의 문맥을 보면, 야고보서 2:24의 의미는 앞서 제시한 (a)와 (b) 중 (a)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24 말씀을 가지고 칭의를 논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행위가 칭의에 어떤 식으로라도 관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야고보서 말씀을 왜곡 인용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와의 조화
성경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가? 우리가 위에서 내린 결론은 성경이 전체로서 가르치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가? 물론이다. 야고보서에서 언급된 창세기 15:6 기록을 놓고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3–5)
우리가 일을 아니할지라도 즉, 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명백히 적고 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을 통해 나타난 완벽한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우리의 믿음에 무슨 가치가 있어서, 우리가 잘 믿어서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passive obedience) 그리고 완벽한 순종 (active obedience) 때문에 용서하심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9–10)
우리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함께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 혼자만의 행위로 인해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8–19)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효를 통해서이며, 거기에는 사람의 그 무엇이 조금이라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임을 성경은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28)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5–11)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3:26)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이처럼 성경 전체를 통한 명백한 가르침들로 볼 때에도, 앞서 제시한 야고보서 2:24의 두 가지 의미 중 두번째 것이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24 말씀을 가지고 칭의를 논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행위가 칭의에 어떤 식으로라도 관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야고보서 말씀을 왜곡 인용하는 것이다.
우리 구원에 관한 도리를 오직 성경에서 찾는다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음으로 가능하고,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공로가 조금도 개입할 수 없으며, 그 은혜를 입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지 사람의 행위가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동질의 신앙이 아니다.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믿음이 있으며, 통상 그 성격에 따라 앞서 언급했던 역사신앙 말고도 기적신앙(miraculous faith, 기적을 경험 혹은 발휘하고 추구하는 신앙), 현세신앙(temporal faith, 믿는 것 같지만 시험과 어려움 앞에서 돌아서는 신앙) 등으로 지칭하는 것들이다. 사도 바울 역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헛된 믿음”이 있음을 시사하였다 (고린도전서 15:2).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야고보서에서 배우듯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음으로 그 참됨을 증시하는 신앙이다. 과연 그 나라의 열매는 나의 힘으로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15:4).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고 (로마서 1:16), 그 능력은 사람의 열심이 아닌 성신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16).
그러므로 복음을 믿노라 하는 사람에게서 그 나라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실천적으로 조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침내 영광에 이르도록 부르신 구원의 그 길을 “두렵고 떨림으로”(빌립보서 2:12) 좇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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