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사실이 말하는 것
고전15:35-49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사실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간혹 잊고 살지만, 인간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일은 이 죽음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잘 살아보려고, 오래 살아 보려고 애쓰는 모든 수고가 안타깝지만 죽음의 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세력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천수를 다 누리다가 노환으로 죽기도 하고, 한창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3일에는 미국 론 브라운 상무장관을 비롯한 33명의 고급관리들을 태운 미공군기가 크로아티아 두브로부니크 공항 상공에서 추락하여 탑승객 전원이 죽었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이처럼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숨어 있으면서 아무 때나 찾아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죽음을 막거나 그 시간을 늦출 수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죽지만, 죽음에 대한 의식은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에게도 미미한 정도의 의식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실존적으로 절실하게 의식하고 체험하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역설적이지만 이 죽음의 사실을 전제하는 데 있습니다. 영원히 살것 처럼 행동하는 건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로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만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건강할 때, 젊을 때는 죽음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불치병에 걸리거나 늙어서야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만, 우리는 평소에 이 죽음을 보다 절실한 문제로 안고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가장 멀리 밀어놓는다는 건 지혜로운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간혹 어떤 사상이나 사이비 종교가 죽음을 예찬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행위는 자기를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 그곳의 고승들은 월남의 민주화를 위해서 분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일본의 무사들도 그런 전통이 있습니다만, 그들은 정신적 수양에 따라서 몸이 완전히 불에 탈 때 까지, 혹은 칼로 자신의 배를 기엌 자로 갈라낼 때 까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버텨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종교적 확신에 따라서, 정치적 이유에서, 혹은 염세적 사상에 따라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아름다운 건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이유있는 죽음이라고 해도 죽음은 그것 자체로 참혹하며 무자비합니다.
성서는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어느 구절에도 죽음의 미학이 없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순교당한 이들이 많지만 그들도 역시 죽음을 아름답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두려워해서 배교하는 걸 거절했을 뿐이지 죽음 자체를 아름답다거나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고전15:55절에서 말하기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지적하면서, 죽음의 무자비한 힘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아무리 엄청나고 난폭하고 두려워할만한 힘이라 하더라도 성서는 그것에 굴복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힘에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게 아니라 더 큰 힘에 사로 잡혀 살아가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부활입니다. 부활의 희망만이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그 절망으로 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아 예수의 부활사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되돌아봄으로써 이 죽음의 세계에 굴복하지 않고 생명의 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게 무언지 배워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쓴 고전 15장은 이른바 ‘부활장’입니다. 우리는 1절 부터 58절에 이르는 긴 구절을 읽으면서 부활에 대한 논의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선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이 무언지 꼼꼼히 따져들어갑니다. 바울이 부활을 단순한 선포로 처리해 버리지 않고 변증적으로 설명해 들어가는 이유는 부활사건이 사실적으로 설명될 수 없고 관념적으로 접근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부활은 30년 전에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딛고 돌아왔을 때 온 세계에 TV 방영이 되었던 것 처럼 사실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 지상적 삶이 끝났을 때 참여하게 될 생명의 세계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언어로 직접적인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우리 몸이 다시 산다, 그때가 되면 모든 이 세상의 고생이 끝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사시사철 배부르고 따뜻하게 자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지낼 수 있는 그런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유적으로 부활을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바울은 35절에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부활을 비유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씨의 비유가 있습니다(36-38). 부활을 굳이 이 세상적인 사물로 비유한다면 씨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씨는 그 안에 놀라운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만 씨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썩게 되면 그 안에서 생명이 솟아나 커다란 풀이나 나무로 자라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도 그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지금 육체는 흡사 씨와 같습니다. 우리 육체가 썩는다고 해서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보다 놀라운 생명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부활이 무언지, 어떤 모습을 갖는지 사실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만 씨의 비유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바울은 이 세상에 모든 사물의 형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39-41).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가 다르며, 또한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듯이(40)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영광과 죽은 다음 부활했을 때의 영광이 다르다고 합니다. 우리가 단순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부활의 세계 까지 결정하려고 한다면 물고기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비유를 통해서 부활은 이 지상적 삶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라는 사실을 전하고자 합니다.
고전 15장에서 많은 것들이 설명되지만, 바울이 말하려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부활은 육의 몸으로 부터 영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사건이 바로 부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몸을 떠나 그저 허공을 떠다니는 상태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동양 무속신앙에서 말하는 귀신과 같은 상태를 가리켜 영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부활하게 된다는 건 우리가 몸을 떠나 귀신 처럼 존재하게 된다는 것도 아나라‘영적인 몸’, 영적인 존재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부활이 바로 영적인 몸을 입는 것이라 할 때 부활 이전의 우리는 육적인 몸에 같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이지 못한 우리이기 때문에 영적인 부활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육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 개개인의 경험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육적인 것들을 가리켜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42,43절)이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주변에 썩을 것들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썩지 않을 것이 있나 살펴보십시요. 부활절을 빛내고 있는 이 꽃들도 며칠만 지나면 썩습니다. 인간의 몸도 역시 죽은지 사흘만 되면 썩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도, 아무리 강철 같은 튼튼한 육체도 결국 썩을 운명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두번째의 요소는 욕된 것인데, 이는 곧 천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별로 고상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인격을 도야해도 역시 고상하지 못합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의 인격은 천한 곳으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니다. 세번 째 요소는 약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갈대 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약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도 역시 상처받기 쉽습니다. 아주 사소하게 싫은 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조금마한 칭찬만 들어도 우쭐대는 게 바로 우리입니다. 이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소용돌이 치며 살아갑니다. 아무리 자신을 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매우 많은 부분에서 약합니다. 권력에 약하고 여자에 약하고 돈에 약합니다.
바울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게 부활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썩지 아니할 삶, 영광스러운 삶, 강한 삶, 바로 영적인 삶으로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부활이며, 2천년 동안 예수의 부활사실에 비추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희망하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삶의 차원을 향해 끊임 없이 매진해야 합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부활신앙이 지향하는 삶의 차원입니다. 이런 삶, 이런 생명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으로도 도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선진국 보다 열배 높은 복지생활이 보장된다고 해도 그것이 오늘 바울이 말하는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으로 다시 살 수 있게 하지 못합니다. 이런 영적인 몸은 오직 부활의 세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걸 바라보며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요즘 우리 현대인의 삶은 영적인 것을 소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소홀할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얼마나 교만한 세상인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육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런 것들을 최고의 우상으로 섬기는 세상입니다. 육적인 것에 대한 자랑에 파묻혀 사는 그들은 영적인 삶을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이들은 부활신앙을 웃음거리로 생각하고 있으며, 영적인 가치를 무시합니다. 이런 세계 속에서 영적인 가치를 외치는 교회는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아무도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년 일년 동안 한국 교회는 평균 0.1% 정도 성장했다고 합니다. 이런 정도라면 정체라기 보다 오히려 감소라 보아야 합니다. 이런 통계가 몇년 동안 계속되었고, 이런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90년대, 특히 9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 많은 이들이 신앙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말들 합니다. 이렇게 된데는 교회 내외적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그중에 하나가 현대인의 삶이 철저하게 육적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소득이 높아지면서 삶의 위기의식을 상실하고, 반대로 소비와 즐기는 일에 몰두하게 되므로써 교회가 외치고 있는 영적인 삶을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개인 GNP 1만 달러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현상을 훨씬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육적인 것에 대한 그런 수고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인생살이가 힘들어지고 고달파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매우 즐거운 것 처럼 살아갑니다만 속으로는 매우 피곤해 합니다. 겉으로는 매우 강한 것 처럼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만 속으로는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곧 육적인 것의 속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활신앙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게 바로 중요한 부활신앙은 장차 우리가 참여하게 될 미래의 새로운 생명, 영적인 생명을 희망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는 걸 뜻합니다. 과연 우리가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질문해 봅시다. 우리가 과연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돌아봅시다. 육적인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지 돌아봅시다. 예수를 믿는 우리도 역시 죽음으로 부터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을 안고 오늘 이 시간, 이 시대 속에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고전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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