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23, 2016

시편, 교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 / 로널드 B. 알렌(RONALD B. ALLEN)

🌷The Psalms, the Church, and the Worship of God / 시편, 교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

3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편이 - 하나님을 사랑하는 - 믿음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적 영향력의 중심에 서 있었음과 동시에, 이 시들이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헌신과 공동체의 예배에서 공통적인 핵심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없다. 오직 우리가 속한 현대 사회에서만이 시편의 역사적 명성이 빛을 잃은 듯 보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교회는 시편을 사용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예술과 시의 기쁨을 찾는다.

스코티쉬(Scottish) 교수의 시편 주석 중 한 권에는 그가 성장하는 동안 예배 시간에 시편이 계속해서 사용되었음을 보았다는 말이 나온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는 말한다:

주일에 남자 아이들이 킬트(Kilt: 고지대에 사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입는 세로 주름의 짧은 치마)를 입는 것은 스코틀랜드의 관습이었다. 그날 나는 시편 147편 10절의 말씀으로 찬양을 한 것이 떠오른다. 물론 그것은 기도 책자(The Prayer Book Version)에 나온 말씀이었다.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찬양하며 나는 킬트가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는 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역주: 귀여운 아이들에게 짧은 치마를 입혀 다리를 드러나게 하여 예배드리는 모습을, 하나님께선 사람의 다리를 보고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에 비추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는 내용).

147편 10절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다리와 유사한 말(Horses)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법한 내용이 나온다.
나는 시편과 진실한 만남을 가져보지 못했거나, 시편의 아름다움(Beauty)이나 영적인 것에 대해 과소평가 하는 사람은 시편을 사랑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물론 이 사실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원리다. 안타깝게도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많은 성도가 시편을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편의 흐름을 잡아낼만한 자기 자신만의 레이더(Radar)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단순히 어깨를 으쓱할만한 일이 아니라 이상의 대단한 무언가다. 바울은 교회와 자신의 집, 교외의 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음악에 대해서 말할 때, 자기 자신을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시(시편)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세 종류의 음악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적으로 살필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시편’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그들의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을 통해 노래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들에게는 옛 언약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성취된 것을 본 것보다, 시편으로 찬양하는 것이 더 즐거웠을 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즐거움에 있어서 말이다.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무엇이 이 오래된 시들로 하여금 성경의 중심에 큰 부분을 차지하게 만들었을까? 왜 시편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인정받아야 하는 것일까?
바로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시편에 관심 갖고 지켜봐야 한다. 특히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더 집중해야 한다!

✔영감(Inspired)
첫째,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감 되었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시 147:19)

수없이 많은 성가, 종교 음악, 찬송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때부터 기록된 찬미의 노래들이 있는데 –사실 너무 많은 음악 장르가 있다- 그 모두가 영적이고 분명한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찬양들은 우리에게 직접 말하고 우리를 관통하며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시편만이(그리고 다른 성경적인 음악과 찬양들만이) 하나님의 영 안에서 말해질 수 있다. 그렇게 성령 안에 있는 남녀의 노래야말로 성경의 언어로 이야기하듯 부르는 노래인 것이다. 이 사실은 그저 많은 믿음의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시편은 모든 영적 노래 가사들보다 더욱 영감으로서 불려지는 노래이다.

✔실재(real)
둘째, 시편 안에는 가장 높은 곳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의 열망과 소원뿐만 아니라, 가장 낮을 곳에 깔려 있는 고통과 고독, 허무함에 대한 감정들이 평행선을 그리며 나타나 있다. 이런 표현 양식은 히브리 시의 특징이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시편은 거룩한 단념(divine abandonment)과 영적 환희(spiritual exaltedness)의 감정 모두를 깊이 있게 표현하고 있다. 시편은 모든 음악의 양식들 위에 실재하고 있다.

✔영향력(pervasive)
셋째, 시편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곡되었다. 처음으로 성서에 시편을 기록한 사람은 모세인데(시 90편), 그는 주전 15세기 중반에 이 시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바벨로 포로기를 마치고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던 주전 5세기에도 시편이 기록되었다(시 147편).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 90:1)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예루살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시 147:2)

나아가 우리는 시편을 제외한 나머지 성경의 많은 이야기를 근거하여 시편이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몇 몇의 예를 들어보자면, ‘처음 기록된 시편’은 출애굽기 15장에 묘사된 홍해에서의 승전가(the Victory Song of the Sea), 사무엘상 4장에 묘사된 한나의 노래, 사사기 5장에 묘사된 드보라의 노래, 요나서 2장에 묘사된 요나의 노래, 하박국 3장에 묘사된 하박국의 노래, 이사야 12장에 기록된 천 년의 노래(the Psalm of the Millennium)이다.
시편은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between the Testament)에 유대 시인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사해 사본(쿰란 문서) 사이에서 발견된 문서를 통해 시편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입증 되었다. 신약성서 역시 히브리 시의 형식을 따르는 시편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성모의 노래(the Magnificat of Mary)와 요한계시록(특별히 4장과 5장을 보라)에 묘사된 예배의 모습은 시편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에 묘사된 시편의 형식은 다른 말씀들의 형성에 있어서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예술성(artful)
넷째, 시편은 사랑스러운 예술로써 표현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시 3:3)

분명히 시편은 은혜로움과 아름답고 학적인(scholar)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윗이 다수의 시편을 쓰던 때보다 훨씬 전에 퍼져있던 학적인 형식이다. 그것은 화려한 기교가 아닌 표제를 붙여 표현하는 단순한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히브리 성서보다 몇 세기나 앞서 기록되었던 다른 고대 근동의 유산물들을 가지고 있다. 이집트학의 세계적 석학인 케네스 키친(kenneth Kitchen)은 고대 이집트의 시들을 연구하는 중이다. 그는 가장 오래된 시편이라고 믿는 작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그 작품은 무려 주전 3000년의 작품이다. 그것은 명백하게 단순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 시는 훗날 이집트, 셈족의 시에 나타나는 평행 형식과는 다르다. 그가 말한 시기로 볼 때, 이 시는 다윗이 활동하던 때보다 무려 이 천 년 전에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성경의 시편은 언제 기록되었든 간에 문학적 예술성을 보여줌을 알 수 있다.

✔음악성(musical)
다섯째, 시편은 노래로 불리기 위해 기록되었다. 시편은 음악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 150:3)

영단어인 “시편”(Psalm)은 헬라어 psalmos에서 유래된 말인데, “반주와 함께 노래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를 돌아보자. 시편을 읽을 때 문자만을 읽고 있지 않은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시편이 노래로 불러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
나는 성전에서 연주된 완성된 음악이 어떤 형식인지 모른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정리된 음악’(music police)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허락된 단 하나의 형식만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사실을 알 뿐이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의 예배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모든 악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설령 이방인들에 의해 디자인되어 생산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절의 히브리인들은 이웃나라 사람들의 악기를 개조하여 거룩한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탄의 악기’라는 말은 하나님을 위한 예배에 쓰임 받지 못한 악기를 지칭하는 말일 뿐이라고 주장해 온 것이다. 대부분의 시편 말씀은 음악을 예배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신앙 공동체를 위해 사용되었다.

✔치유(healing)
여섯째, 시편은 아픈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로해 왔다. 낙심하거나 실의에 빠졌을 때, 외롭고 절망적일 때, 그들을 돕고 이정표를 제시해 줄 성경의 말씀이 있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희망을 제시할 말씀, 삶의 위로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말씀,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위로 받고 있는 말씀은 바로 시편이라고 나는 믿는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요 나의 빛이시니”(시 27: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8)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찬양으로 충만(filled with praise)
일곱째, 시편은 가장 슬픈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인도하고 가장 기쁜 마음이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히브리 성경에서 시편은 테힐림(Tehillim)이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복수형 명사는 ‘찬양하다’는 뜻을 가진 할랄(halal)에서 유래했다(역주-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의 할렐루야도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시편의 많은 시가 찬양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찬양’의 개념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시편은 우리가 하는 찬양을 묘사하는 시로 불리기도 한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46:1)

이를테면 시편 100편과 같은 시편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소리쳐 부르라고 독려”하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그의 행한 일 때문이다. 시편 40편과 같은 다른 시편에서는 찬양을 묘사하는데 인도자인 다윗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일하심과 기도에 대한 응답을 찬양하고 있다. 슬픔을 노래하는 시편의 주를 이루고 있는 요소 역시 ‘찬양의 언약’(vow of praise)이나 ‘찬양의 낭독’(recital of praise)이다. 시편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위대한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의 중심은 항상 찬양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예수 중심(Christ-centerd)
여덟째, 시편은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우리에 대해 독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

나는 시편에 담긴 예언의 말씀에 근거하여 두 권의 책을 쓰고 있는데,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관한 것이다. 이 책들은 다양한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포함하고 있는데,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나머지 부분을 보강하였다. 사도들은 시편에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을 말하면서, 그가 시편의 중심이라는 것, 그가 시편에서 찬양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가 시편의 예언적 메시지가 지향하는 목표라는 것을 선포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땅에 거하시는 동안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에 관한 책을 읽으며 그것에 깊은 의미를 두고 살아가셨다.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위대한 사명(A great commission)
우리에게 있어서 시편은 정말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21세기의 예배를 만들어 감에 있어서 우리의 혁신과 열망은, 단지 새로운 것으로 찬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구약시대부터 전해져오던 오래된 찬양까지 사용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회의 소중한 재산이 될 성경적 예배 음악을 새롭게 만들어 가려는 열정을 이어가자.
시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찬양은 무궁무진하다. 결코 우리의 찬양에 있어서 삼천 년 동안 이어 내려온 음악의 양식이 포기될 수는 없다. 시편의 찬양과 악기들은 가장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형식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들이 걸어온 모든 역사를 통해 주어진 고전적인 방식으로도 노래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우리는 시편으로 찬양해야 하고, 또 찬양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말을 기억하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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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B. 알렌(RONALD B. ALLEN)
신학 박사(Th.D), (D.D) 달라스 신학대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 성서학 교수

나의 감사 / 손양원 목사

나의 감사 (시편 100:1-5)
/ 손양원 목사

연년이 한번씩 맞는 감사일을 당하여 금년에는 시편 제 100편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다.

Ⅰ.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감사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오직 내게는 여호와 하나님 이 외에는 어느 아무것도 없음을 감사한다. 여호와는 나의 모든 것이다. 희노애락오욕(喜怒哀樂惡慾)은 모두가 그에게 있어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1. 감사하기는 내 모든 실정에, 즉 굶주릴 때, 슬플 때, 억울할 때, 고난 당할 때, 병날 때에 애원할 데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불신자는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 아마 제 답답으로 해서 그대로 쓸어지지 않을른지 모른다. 불쌍한 일이다.

2. 또 다른 종교가 있다고 하나, 이 역시 별별 헛된 신이 많아서 어디를 향해서 찾는 것이 옳은지 모르고 있을 것이니, 이런 것을 볼 때에 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나의 감사는 비할 데가 없다.

3. 그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주를 창조하신 대주재(大主宰)이시요,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신 까닭이다. 그런즉, 하나님 한 분을 찾게 되는 것은, 온 우주 만유를 얻게 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이는 부자와 혼인하면 그 주인의 전 소유를 차지하는 것과 같다.

Ⅱ. 이러한 여호와가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감사

1.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지어주신 내 아버지이다. 창세기에 보면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자 하시었으니, 즉 영혼은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육체는 우리 구주 예수님의 육체와 같이 만들었으니, 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육체는 얼마나 잘 만드셨는지 모른다. 세브란스 박사는 말하기를, 미국의 유전(油田)에서 쓰는 기계 공장보다 이 육체는 더 이상하게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이 구조야말로 오묘 막칙(莫則)하다. (예화 ① 소와 다른 짐승과 비교, ② 이 육체와 만유 관계, ③ 관상 이야기)

2. 더구나 나병을 가지신 여러분이라도 이러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은가? 시편 27편 10절에 보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하셨다.

3. 이러한 하나님이 내 부모가 되시었으니,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우월감 만족감으로 꽉 차서 불행과 불만이 없다.(걸인 아기와 부자집 아가씨)

Ⅲ. 여호와께서 나의 왕이 되어주신 감사

세계 각 민족마다 민족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것을 자랑한다. 나는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고 있는 천국의 백성된 것이 감사한다. 나는 남북빙양(南北氷洋) 극한지대(極寒地帶)에 나지 않은 것도 감사하고, 적도직하(赤道直下) 열대지방(熱帶地方) 나라에 나지 않은 것도 감사하다. 얼굴이 새까만 흑국민(黑國民)이 되지 않고, 또 얼굴에 아무 빛이 없는 백인도 되지 않고, 노아의 장손이요, 지구의 원색인 황인종으로 난 것도 감사할 일이다.

동방의 오랑케 국민으로 나지 않고, 북방의 되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 동방예의지국 한국인으로 나게 된 것도 여호와께 감사할 조건이다. 더구나 여호와 통치 하에 있는 천국 백성이 된 것은 무엇에 비할 수 없는 감사의 조건이다. 세레네라는 신 앞에 씌어져 있다는 3대 감사를 들어보면 ① 야수(野獸)가 되지 않게 하시고 사람이 된 것이요 ② 사람이 되되 여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남자가 된 것이요, ③ 사람이라 하되 야만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헬라인으로 나게 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상 세 가지 감사에는 ②는 여자에게는 섭섭한 말이요, ③은 야만인들이 듣기에 거슬리는 말이다. 헬라인에게만은 제일 좋겠으나, 그러나 나는 그 헬라인보다도 천국 민족으로 중생한 것이 나의 제일 자랑하고 싶은 감사한 마음이다. 또 지혜와 권세와 웅장함을 자랑하든 큰 나라도 망한지 벌써 오랬으나 여호와의 천국 왕권은 영원무궁하여, 영세 불망할 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진실로 감사할 일이다.

고대에 유명하던 큰 나라 애굽, 앗수리아, 베벨론, 헬라, 로마 등 동양의 요(堯) 임금, 순(舜) 임금 때 나라들은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려우나, 오늘의 우리 천국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나리이니 어찌 감사하지 않은가? 한국의 독립도 귀하나 우리가 얻은 천국은 더 귀하다. 「야마도 다마시」를 자랑하던 일본국도 패망하였고, 세계를 대상하여 호령하던 독일도 넘어졌으나, 오직 우리 민족만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 백성이 되자. 영국은 국토를 자랑하고, 미국은 부(富)를 목적으로 하고, 서서는 자유와 정치를 자랑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랑하고 목적하고 나가자. 동양 상고 시대에는 요순(堯舜)의 통치로 만족했고, 유대 민족은 아브라함의 자손된 것을 우세하게 여겼으나, 나는 오직 만왕의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세계에서 그 통치를 받는 천국 백성됨을 자랑하고 감사한다.

Ⅳ.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 되어 주심에 대한 감사

여호와는 나의 영육과 금생과 내세의 목자이시다. 나는 이러한 여호와가 「나의 목자 되시어 푸른 풀밭과 잔잔한 시냇가에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한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목자가 되시어 나를 안위하시고, 보호하시고, 권고하시며, 지도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이 시편 23편은 옥중 6년간에 기도의 소원이었으며, 만족한 감사였다. 내가 아무 염려 안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이 무엇이랴」에서였다. 과연 여호와께서는 지혜시요, 능력이시요, 대 보호이시니 무엇이 부족하겠느냐 함이다.

금년같은 대 풍년이 든 것도 농부가 잘 심고, 잘 매고, 잘 가꾼 까닭인가? 아니다. 그보다도 여호와께서 햇빛으로 애호 육성하심이다. 농부들이 비료를 잘 해 주어서 그렇게 되었을까? 그보다도 비, 거름이 더 힘이였던 것이다. 과연 억조창생이 제 지혜와, 제 힘으로 사느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여러분 우리는 이상 네 가지 큰 감사를 잊지 말자. 그는 우리들의 하나님이시요, 우리 아버지시요, 왕이시요, 또 목자시니 이런 것을 깨다를 때에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Thursday, September 22, 2016

💥천사 케루빔(Cherubim)💥

💥천사 케루빔(Cherubim)💥
                                                     
무시무시한 아기 천사?

영어사전에서 'cherub(케루빔의 단수형)'라는 단어를 찾으면 '귀여운 아기 천사'라는 뜻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의 케루빔은 귀엽기는커녕 무시무시한 존재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날 때 케루빔은 '불칼'로 무장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을 막았다(창세기 3:24).

케루빔이 성서에 다시 언급되는 부분은 언약궤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다. 언약궤는 나무상자에 금을 입히고,위에는 '속죄소'라 불리는 순금 뚜껑을 덮었다. 그 뚜껑 위에 두 케루빔의 조각상이 있었다.

인간의 형상에 팔 대신 날개를 단 두 케루빔은 날개를 쭉 뻗고 있어 서로 닿을 듯했다고 전한다(출애굽기 25).

속죄소 위, 날개 사이의 간격이 바로 하나님이 머무는 신성한 공간이다.

구약성경에는 "그룹(케루빔)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라는 문구가 여러 차례 나온다. 언약궤는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에 케루빔 조각상과 함께 안치되었다(열왕기상 6:23~29).

바빌론이 성전을 파괴한 뒤에도 사람들은 케루빔을 기억했다. 바빌론에서 타향살이를 하던 선지자 에스겔은 케루빔이 등장하는 신비스런 환상을 보았다. 그는 케루빔에 관해 상세히 묘사했다.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그룹들에게는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째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에스겔 10:12, 14).

(언약궤 위의 케루빔과는 차이가 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무시무시한 천상의 존재를 다 케루빔이라는 용어로 부른 듯하다.)

에스겔 1장에서 그는 환상 속에서 본 것이 '생물'이라고 단언한다. 케루빔은 천사의 한 종류일까? 성경에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 언급된 천사들은 대부분 인간과 아주 비슷한 모습이며, 언약궤 위의 형상과도 다르고 에스겔이 보았다는 기이한 존재와도 다르다. 그러나 케루빔이 천상의 존재라면 천사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후대의 종교 작가들은 천사들의 여러 종류와 천국의 궁전에서 맡고 있는 일을 상상으로 그려냈다. 케루빔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사랑스러운 아기 천사를 가리키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출처: 주님의 교회)

✔창조 신학이 근본이다 / 장창수 선교사

창조 신학이 근본이다
- 일원론으로 본 세상

기독교의 성경만 우주의 창조를 기록한다(창 1:1). 창조주는 한 분이다.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주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참신이란 뜻이다. 그리고 창조 기사는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이 직접 다스린다는 일원론(一元論: monism)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창조주 하나님인 여호와(창 2:4)는 인격적 신(神)이다.

시작과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은 먼저 특정한 목적을 정하고 그다음 계획을 세웠다. 이 목적과 계획에 따라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의 세계를 창조했고 또다시 말씀으로 창조하며 이들을 채워 나갔다. 추상적인 주제(主題 : theme)인 창조 목적이 형상적인 소재(素材 : material)라 할 창조 세계를 통해 잘 설명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영적 세계를 물질세계로 표현시키는 행위로 초월(超越 : transcendence)과 내재(內在 : immanence) 사이 조화로운 관계를 설명한다. 창조 기사는 이원론(二元論 : dualism)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적인 이해를 위해 초월과 내재를 분리시킬 수 있다.

창조된 우주와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내도록 돕는 구조와 기능을 가진다(롬 1:19~20). 즉 자연 계시가 특별 계시를 설명한다. 자연 계시를 잘 이해한다면 하나님과 그의 창조 목적도 알 수 있다. 단 두 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는 너무나 중요하다. 창조 기사가 성경의 나머지 계시들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유감스럽지만 교회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영향을 받아 창조 기사의 중요성을 덜 인식했다. 논리 영역은 물론 역사 영역에서도 초월과 내재 사이 관계를 강제로 분리시켰다. 창조 신학의 일원론이 무시되었다. 그 결과 창조 신학도 거의 무시되고 창세기 3장부터 기독교 신학이 출발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완강하게 부정한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추어진 작정과 목적 그리고 의지를 제일 처음 드러냈다. 창조 신학의 내용을 알 수 있다면 나머지 계시들의 방향과 목표가 무엇인지도 알려진다. 창조 기사는 재해석되어야 한다.

창조 세계는 유기체이다

우주와 만물은 모두 하나의 창조물에서 기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1~5)."

첫째 날 하나님은 원형적 우주(창 1:1)와 비물리적인 빛(3~4)을 창조했다. 원형적인 우주는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그러나 성령이 물 위에 운행했다. 그리고 둘째 날부터 원형적 우주에서 우주와 지구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이 차례로 창조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유일한 주재자(主宰者)란 뜻이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 29:11, 렘 31:7 참조)."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시 22:28)."

하나님은 질서의 신(神)이다(고전 14:33).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우주는 서서히 안정적인 구조를 드러내며 질서 정연하게 존재했다. 이 구조 안에서 우주와 만물은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이 점에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시될 수 없다.

만물의 주재자인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라는 몸의 머리였고 창조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그 몸을 유지하며 보존하고 섭리하며 통치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첫날 비물리적인 빛을 창조했고 아울러 성령이 창조된 세상 위에 늘 운행하도록 조치했다. 이미 존재하기 시작한 사단의 존재와 그 활동을 억제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창조 세계가 유기체와 같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서도 잘 증명된다. 창조 과정은 주기성(週期性)을 보여 준다. 첫째 삼일과 둘째 삼일 모두 우주, 하늘과 바다 그리고 뭍(육지)의 순서로 창조가 진행된다. 첫째 주기인 첫 삼일 동안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었다면 둘째 주기인 두 번째 삼일 동안 그 시공에 거주할 피조물들이 차례로 창조되었다. 두 주기들은 서로 유기적이다.

창조의 날들이 지날수록 창조 세계도 점점 더 완벽해졌다. 여섯째 날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최고 걸작인 인간이 창조되었다. 6일간의 창조 행위는 인간을 위한 창조 과정 자체였다. 인간은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로서 창조주를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것이다. 인간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완벽해야 했다.

넷째 날 창조물인 우주의 천체들도 결국 인간을 위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창 1:14)." 태양은 일과 쉼을 결정해 주는 주야를 인류 사회를 위해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사계절, 일자와 연한까지 정해 주어 덕분에 인류 사회는 규칙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

태양의 주기적인 운행 덕분에 인류 사회는 이 지구에서 평화롭게 생존할 수 있다. 그리고 태양의 에너지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생명을 보존 내지 유지시켜 준다. 이 덕분에 인류 사회는 활동에 필요한 양식을 늘 얻을 수 있다(창 1:29). 태양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태양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생물들을 '각 종류대로' 창조하였다(창 1:12, 21, 24, 25). 창조 세계는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이다.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 있듯이 우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부분들이 있다. 이 부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맡은 역할과 기능을 소유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것들은 아무리 작은 것도 무용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각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각 은사대로', '각 기능대로', '각 역할대로', '각 사명대로' 또는 '각 직분대로' 만물이 지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각 종류대로'란 표현은 '자연도태',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을 주장하는 무신론적 진화론(進化論: evolution)을 완전히 부정한다.

진화론적 사고는 두 가지로 나뉜다. '어느 것이 더 강하냐 또는 더 크냐?'라는 상대적 이분법과 생물들 사이 천적 관계를 주장하는 대립적 이분법. 이런 사고에 의하면 피조물들 중 상대적으로 작은 것들이나 약한 것들은 존재 의미와 목적을 못 가진다. 또는 천적 관계로 어느 한 쪽은 다른 쪽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 세계는 오로지 강자(强者)와 승자(勝者)만의 소유물이다.

학자들은 진화론으로 인류 사회를 분석한다. 모든 사회적 현상이나 인류의 역사를 상대적 또는 대립적 이분법에 따라 재평가한다. 우생학이나 인종 개량학 그리고 공산주의 등등은 모두 진화론의 결과물이다. 영웅인 강자와 승자만 높게 평가되고 나머지는 약자나 패자로 무시된다. 사람들에게 승리와 성공만이 유일한 가치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 차이가 너무나 크다. 앞에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모든 만물은 생존의 의미와 목적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에 것은 나타난 현상이나 결과에 근거를 두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앞에 것은 미천한 것도 중요하게 보지만 뒤에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이들이 서로 다른 것은 창조 세계의 타락 이전과 이후 사이 차이에서 나온다.

타락 이후 아담의 통치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에게 넘겨졌다. 사단은 자연 세계는 물론 인류 사회에서 하나님의 반대자로 등장하며 하나님이 세운 모든 조화를 무너트린다. 이 때문에 이원론이 맞고 일원론이 틀린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런 방해와 반대는 일시적이다. 유일한 창조주인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고자 여전히 세상을 통치한다. 그러므로 창조 신학은 인류 사회를 위해 여전히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6일 창조 과정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통섭적인 관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며 다른 것들을 무시하는 그런 학문적, 과학적 연구 방법은 성경이 처음부터 권하지 않는다.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은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이 달성할 창조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지어졌다. 창조 기사는 통섭적 과학 방법을 주장한다.

신국론이 창조 신학의 중심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6일째 날 마지막 창조물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은 창조 결과를 은혜로 받고 누리면서 하나님에게 감사하면 되었다. 창조주는 피조물 인간으로부터 이런 영광과 찬송과 명예를 받길 원했다(시 102:18, 사 43:7, 21 60:21, 61:3, 엡 1:6, 14, 21).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독특한 방법으로 창조해야 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절)."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닮았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아니다. 인간은 복사본으로 하나님과 비슷하지만 같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신의 통치권(창 1:28)을 넘겼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처럼 문화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처럼 되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설 것이다(엡 1:4~5).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용어는 인간 존재의 출발은 물론 그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려준다. 문화 사명을 잘 수행하도록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은사와 능력을 인간에게 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용어가 품는 신학적 의미이다. 신의 일을 맡은 인간은 신의 성품에도 참여한다(벧후 1:4 참조).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처럼 이성, 지식, 도덕, 감성 그리고 예술 면에서 은사를 소유한다. 이로써 불완전한 인간은 세 단계를 거쳐 완전함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문화 사명을 수행하는 인간 그리고 마침내 아들로 인침을 받은 인간. 이것은 신약성경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칭의, 아들로 살아가는 성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아들로 인정받는 영화.

문화 사명은 세 분야로 구성된다. 문화 사명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한 것이다(하나님과 사람 사이 관계, 신앙과 종교 영역). 이 사명은 인간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을 명한다(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 윤리와 사회 인문과학의 영역) 그리고 자연은 문화 명령을 수행할 또 다른 무대이다(자연과 사람 사이 관계, 자연과학의 영역). 이것들이 신앙 삶을 구성한다. 신앙은 윤리나 과학을 배제시키지 않는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도 분리될 수 없다. 결국 신학과 각종 과학은 모두 하나님나라를 위한다.

지금까지 기독교와 신학은 앞의 두 가지 관계만 중요하게 보았다. 셋째 관계는 비교적 무시되었다. 물질세계를 저급한 것으로 보는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 때문이다. 오늘날 환경오염과 파괴의 원인은 바로 이원론에 있다. 그러나 창조 신학은 하나님의 통치가 자연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의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을 명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창 1:26). 기독교는 자연 세계의 보존과 유지 그리고 관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다른 관계들과 동등하게 자연과의 관계도 강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학은 세상의 학문이나 과학을 배척해선 안 된다.

하나님은 인류가 효과적으로 문화 사명을 수행하도록 별도의 조치를 취했다. 안식일을 정하고(창 2:1~3) 에덴동산을 창설했으며(8~15절) 선악과 규례를 주었고(16~17절) 그리고 가정을 세웠다(18~25절).

일주일 중 마지막 날 인류는 쉬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며 창조 기사를 묵상해야 한다. 육적 쉼이 영적 쉼을 겸할 때 진정한 쉼이 된다. 이로써 인류는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늘 창조주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찬송과 영광과 명예를 돌릴 것이다. 이를 잊는다면 인간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미천한 짐승처럼 살 것이다.

에덴동산은 문화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근거지이며 동시에 출발점이다. 문화 사명은 에덴동산의 영역을 세상으로 점점 더 확장시켜 나감으로 훌륭하게 수행된다.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 영역도 세상으로 확장되어 가며 하나님나라가 저절로 이 세상에 건설된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장소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훈련받는 곳이다. 여기서 배우고 습득한 후 에덴 밖에서 실천할 수 있다.

선악과 규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류가 문화 사명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 사명이라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길을 따라 수행하여야 한다. 일만 중요하지 않다. 정해진 길을 따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조건으로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며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이를 창조 언약(창 2:17)이라 한다.

이런 삶과 사명 수행을 통해 인류는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완전한 순종자만이 하나님이 마련한 완전한 낙원에 이를 것이다. 이 낙원의 기업을 얻는다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완성인 영화 단계이다.

그러나 순종은 영화(榮華: glorification)에 달하는 조건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이미 낙원 에덴에 살고 있다(칭의, justification). 그런 무조건적인 은총을 받은 인류는 문화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짊어진다(성화, sanctification). 그러나 노력의 정도에 따라 받을 상급의 정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가정 제도는 문화 사명을 위해 꼭 필요하다. 문화 사명을 수행할 일꾼들은 가정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제도, 부부 제도 그리고 가정 제도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신성하다. 최초의 가정은 바로 교회와 학교와 정부 노릇을 했다. 가장이 목사, 교사 그리고 왕의 역할을 맡는다. 구약시대로 말한다면 가장이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 같은 존재이다. 가정은 인류 사회라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로 교육장과 훈련장이다. 이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일꾼들이 배출된다.

남녀 관에서 창세기 1장과 2장 사이 차이가 발견된다. 보편적 창조 기사를 말하는 창세기 1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든 면에서 동등한 존재이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며 수평적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 창조를 기록한 2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지 않다. 남자는 가정의 가장(家長)으로 왕적 존재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 관계는 수직적이며 종속적이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가정에선 창세기 2장의 가르침을 그러나 가정 밖 사회에선 창세기 1장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성경적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창세기 3장에 기록된 하와의 저주(16절)를 예로 든다. 그러나 본문도 가정을 배경 한다. 즉 가정 안에서 여자는 남편의 감독 아래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 밖 사회에서 남녀 사이 성적 차별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문화 사명의 수행과 은사 면에서 여자를 남자와 차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명이 수행되는 인류의 문화 영역은 너무나 다양하다. 효과적으로 사명을 수행하려면 남자와 여자 사이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자의 우월성은 현대사회 이전 농업 시대 절대적이었다. 그 시대 육체적인 힘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화 시대 몸의 힘보다 머리의 힘인 지식이 더 중요해졌다. 여자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다원화 시대 여자가 활동할 수 있는 분야들은 참으로 많다. 이 모든 일들을 남자들만 감당할 수 없다. 학자들은 여성의 노동력이 나라의 발전과 성장을 좌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전 인류 사회는 한 사람의 유능한 리더에 의존했다. 그러나 오늘날 다원화 시대 유능한 전문가들은 참으로 많다. 이젠 조직원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최대한 끄집어내는 리더가 필요하다. 이 리더십에 권위적인 남성보다 모성적인 여성이 더 적합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남녀 관은 이런 시대와 사회를 미리 내다보고 있다. 인류 사회도 일인 지도자만 고집하는 권위주의보다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평등주의를 요구한다. 이제 인류 사회는 여성 지도력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해 교회와 성도가 노력해야 할 다섯 가지 일들이 있다. 성경 말씀의 고수, 문화 사명 수행, 주일 성수, 교회의 보존 그리고 경건한 가정의 육성이다. 이들은 그대로 창조 신학의 가르침들이다. 이들에 힘쓴다면 교회는 산 위에 켜진 등불처럼 만인 위에 비출 것이며 성도는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나라도 인류의 문화 영역에서 더 빨리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교회도 인간 사회도 모두 사는 길이다.

결론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의 종국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류를 대리자로 세워 자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시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다. 창조 기사가 말하는 신국론(神國論: doctrine of God’s kingdom)은 모든 신학들의 목표이며 방향이다. 모든 신학들은 신국론과 분리되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엡 1:4~5)이 이를 증명한다. 시간상으로 선택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예정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이다. 그리고 예정에 따라 이루어진 선택의 목적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예정을 성취하고 완성시키는 방법이다. 피택자들로 표현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세움을 입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거룩한 신분 획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양자 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각각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택 이후에도 성도의 삶에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그리스도를 닮은 형제들로 그를 세우기 위함이다.

피택자들은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둔 형제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의 아버지이다. 결국 하나님의 가정이 곧 하나님나라이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진면목이다. 창세전 세워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즉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창조주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창조 후 인류 사회는 바로 하나님의 가정의 상징이며 모형으로 하나님나라였다.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통치를 전 세계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인류의 사명이었다. 문화 사명은 바로 이를 목표했다. 지금까지 살핀 대로 창조 기사가 말하는 신학적 주제들은 결국 하나님나라라는 제 일차적인 주제와 긴밀히 연결된다. 창조 신학은 이런 논리적인 진리 체계를 보여 준다.

하나님나라는 세상 문화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사실은 부활주인 예수님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계 1:5 참조)." 만물의 으뜸이라면 지금도 예수님이 세상 역사를 주관한다.

비록 보이는 차원은 아니라도 영적 차원에서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져야 한다. 이것은 문화 영역에서 실현된다. 이를 위해 부활주 예수님도 은사들을 나누어 주며 신자들을 돕는다. 먼저 예수님은 성도의 인격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하나님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그 영역이 세상으로 확대되도록 일한다. 이 점에서 신약시대 교회는 창조 기사의 에덴동산 같고 구약시대의 가나안 땅과 같다. 그리고 신약시대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거점이며 출발지이다.

결론적으로 헬라인의 이원론은 창조 신학에 안 맞는다. 성도는 히브리인의 일원론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일원론과 이원론은 모든 면에서 하늘과 땅 사이만큼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특히 세계관과 역사관과 가치관 면에서…인류 삶의 내용과 성격은 이들에 의해 결정된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일원론을 택하여야 한다.

사단이 아직도 활동함으로 이원론이 맞는 듯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품꾼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의 시험은 성도들에게 연단의 기회가 되지만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에게는 파멸케 하는 유혹이 된다. 결국 사단은 자기 일로 참주인인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줄 뿐이다.

기독교와 성도는 이원론에서 나온 대립적 또는 상대적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 그 대신 일원론에 근거를 둔 논리적 이분법에 따라 사고해야 한다. 일원론적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은 결국 성도들에게도 유익하다(롬 8:28).

그러나 사물을 상대적으로 또는 대립적으로 판단하는 이분법은 사물의 다른 면들 중 어느 하나를 버리게 만듦으로 성숙한 그리고 지혜로운 판단을 방해한다(창 3:6~24). 흑백논리에 따라 산다면 편협한 인간이 된다. 이로 인해 신앙 삶의 내용인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모두 파괴된다. 이것은 바로 사단의 전략이며 그가 원하는 바이다. 이원론과 그에 따른 사고방식은 참으로 위험하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사고로 살아야 한다. 옛사람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사람의 사고방식을 따름으로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사실은 창조 기사의 신학이란 다른 신학들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줄 뿐 성취나 완성을 보여 주지 못한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를 자신의 대표자로 세운 뜻과 목적이 실패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취소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였다(창 3:15).

예수는 둘째이면서 마지막 아담(고전 15:45~47)이 되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중생하여야 한다고 말했다(요 3:1~16). 오늘날 이것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성취된다. 기독론, 구원론과 성령론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의해 하나님나라는 성취 내지 완성된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열쇠이다. 진실로 예수님은 인류의 참소망이다(딤전 1:1). 마라나타!

장창수 / 러시아 시베리아 주재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