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20, 2018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약 2:1, 14-17), 어떻게 봐야 하나?/ 변종길 교수(고신 신약학)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약 2:1, 14-17), 어떻게 봐야 하나?

/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2011년 11월 10일 고려신학대학원 경건회 설교에서

현재 한국교회에서 논란이 되는 이슈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믿음과 행함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생각되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많이 논의되지만, 야고보서 2장도 빼놓을 수 없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야고보서 2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 핵심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 2장은 ‘행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맞습니다. 야고보는 성도의 실생활에 대해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믿음과 분리된 행함, 믿음과 관계없는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관심은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참 믿음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디서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하게 네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을 외모로 취함으로 갖는 문제

1절은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도 비슷합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그러나 이런 번역은 오해를 초래하기 쉽습니다. 너희는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행함’에 대해 말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 2장은 ‘행함’에 대해 말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외모로 취함으로 가지지 말라.”가 됩니다. 여기서 ‘믿음’이 목적어입니다. 곧, 야고보는 여기서 우리가 ‘믿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외모로 취함으로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차별함으로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아공화국의 L. 플로어(Floor) 교수가 1-13절을 ‘외모로 취함이 없는 믿음’, 14-26절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본 것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1-13절은 “faith without ...”, 14-26절은 “faith with ...”가 됩니다.

따라서 야고보서 2장은 “참 믿음이 무엇인가?”,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외모로 취함이 없는 믿음 곧 차별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가난한 자라고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과 행함, 말함과 행함의 대비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을 ‘믿음’과 ‘행함’의 대비라고 생각합니다. 14절의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는 말씀에 대해, ‘믿음’과 ‘행함’이 대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안 되고 ‘행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곧 <믿음> + <행함>이 야고보가 말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게 아닙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levgh/, 말하고) 행함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믿음이 있노라고 ‘말함’과 실제로 ‘행함’ 사이의 대비입니다. 말하는 것은 거짓될 수 있고 속일 수 있습니다. 말뿐인 믿음,거짓된 믿음, 죽은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고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16절 끝에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ei[ph/, 말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에서도 ‘말함’과 ‘줌’의 대비입니다. 곧 ‘말뿐인 믿음’과 실제로 ‘행함이 있는 믿음’ 사이의 대비인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그 자체가’(kaq! eJauthvn)는 ‘자기 안에서’(in itself), ‘스스로’, ‘원래부터’란 의미입니다.그리고 ‘죽은 것’(nekrav)은 형용사로서 죽은 상태(dead)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중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속 죽은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믿음이 있었는데, 나중에 행함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보태지지 않아서, 첨가되지 않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죽은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곧 원래부터 참 믿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거짓 믿음이요 헛된 믿음이며 말뿐인 믿음이었습니다.

26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 ‘죽은 것’(nekrav)도 형용사로서 계속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은 처음부터 죽은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곧 한 번도 산 적이 없었던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처음부터 죽은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산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참 믿음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것은 ‘믿음’에 ‘행함’을 플러스 하라는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이신칭의, 야고보서는 이행칭의(?)

21절에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여기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았다”고 하니 참 당혹스럽습니다. 어찌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고 누누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왜 서로 다르게 말하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안 좋게 보았습니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신칭의’를 주장하고, 야고보는 ‘이행칭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서로 주장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바울과 야고보는 각기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이 다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어는 같지만 그 의미가 다릅니다.

우선, ‘의롭다 함 받는다’(dikaiovomai)는 용어의 개념이 서로 다릅니다. 바울은 이 용어를‘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법정적 용어입니다. 이에 반해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곧 의롭다 함 받은 사람이 그의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는다, 분명히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22절 끝에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했는데, 이것을 야고보는 ‘의롭다 함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둘째로, ‘행함’ 또는 ‘행위’(e[rga)의 개념도 다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 받으려는 노력, 공로’라는 의미로 ‘행위’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야고보는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행함’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 행함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며, 믿음의 열매가 드러나는 것으로서의 행함입니다. 그래서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각자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상의 차이를 무시하고, 단어가 같다고 의미도 같은 것으로 보면 큰일 납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아기가 ‘마마’라고 하면 어머니(mother)란 뜻입니다. 그러나 궁중에서 임금을 보고 ‘마마’라고 하고,중전과 왕자를 보고 ‘마마’라고 부르면 다른 뜻입니다. 왕족이나 궁중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또 의사가 어떤 사람을 보고 ‘마마’ 걸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천연두’란 뜻입니다.

이처럼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뜻이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마마’라는 단어가 나타나면 무조건 ‘어머니’란 뜻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전혀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역사학자가 조선실록을 보고서 조선시대에는 대신들이 임금을 보고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말이며 그런 사람은 학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여기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들과 야고보가 사용하는 용어들의 의미상의 차이를 고려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합니다. 큰일 납니다.

우리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바울과 다른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와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바울에게 단지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했습니다. 가난한 자 구제에 힘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구제에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구제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 돕는 일을 힘썼습니다.

참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

우리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 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바로 이해하고 굳게 붙들고 힘 있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구제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서민들을 돕는 일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곧 야고보가 강조했던 것이고, 또한 바울이 힘써 행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곧 참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이며 참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미래의 한국교회를 짊어지고 나갈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담당할 한국교회는 바울이 힘써 행했고 야고보가 강조하였던 바대로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고 돌아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우리 한국교회는 다시금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서 우리 사회를 환하게 밝히는 등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희망과 꿈을 가지고 힘써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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