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있는 신앙과 지·정·의의 올바른 역할
/ 양승훈 교수
네가 여호와 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분의 명령들과 그분의 규례들을 지키고, 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렇게 하실 것이다. (신 30:10, 바른 성경)
지성, 감정, 의지의 바른 균형이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 가운데 특히 지성, 감정, 의지의 균형과 조화 문제가 참으로 중요하고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는 영적인 혼란이나 침체, 무기력함, 열매가 없는 것 등의 좋지 못한 일 대부분은 지, 정, 의의 올바른 기능과 조화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올바르게 정리해두는 일은 강단에서 올바른 교리가 끊임없이 선포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먼저 지성, 감정, 의지의 본래 기능을 올바르게 설명하며 이해하고, 다음으로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성도 개개인과 교회가 더 온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일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부디 부족한 제 글을 통하여,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영혼의 안개가 걷히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치우쳤던 부분을 개선하여, 더욱 균형 있는 신앙으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지성, 감정, 의지의 본래 기능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이시며, 사람을 당신처럼 인격을 소유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인격적이라는 말은, 어떤 존재가 지각하고 인식하며 사유하는 지성과 인지한 대상에 대해 반응하고 느끼는 감정,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를 실제로 나타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당신에게 속한 이러한 고유한 기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러한 인격은 피조 세계를 통틀어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존귀한 특징입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사색하고 사유하는 동물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에게만 있는 그러한 기능과 특징이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라고 해도, 우리는 지성, 감정, 의지가 무엇인지 지나치게 사변적으로 접근하는 일을 주의해야 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상가, 철학자, 지성인들이 사람의 이 고유한 기능에 대해 여러 각도로 탐구하고 추론했지만, 아직도 그것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그 문제를 밝혀내려고 열심히 노력하나, 여전히 출구 없는 미로에서 제자리를 뱅뱅 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말씀을 따라 이 기능들을 사용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2:13~14).
2. 죄로 인해 본래 기능이 망가짐
(1) 본래의 기능이 어떻게 어그러졌는가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본래의 이 고귀한 기능은 모두 어그러지고 말았습니다. 죄는 가공할 위력으로 사람의 모든 부분에 파고들어 모든 것을 오염시켰습니다. 단지 신분상의 변화가 아닌, 실제적인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먼저, 죄는 우리의 지성에 파고들어, 우리의 지성만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에 사로잡힌 지성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학문 체계를 세워가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진리를 탐구하여 얼마간 성과를 낸다고 해도, 실제 진리이신 하나님에게까지는 이를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죄로 어두워진 지성은 수많은 오류를 양산하면서도 도리어 그것을 옳다고 하는 데 이르고 맙니다(롬 1:21~23).
또한, 죄는 우리의 감정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 중심으로부터 미워하고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기분이 언짢고 두려워 피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자기를 즐기며 세상의 쾌락을 기뻐하고 가까이하는 쪽으로 마음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의 의지도 장악하여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불구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죄가 우리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고 썩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전적부패의 교리’라고 부르는 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사람이 완전하게 부패한, 추악한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2) 교회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위험한 오류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구원받은 성도라고 해도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죄의 흔적과 매일 싸워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은 종종 지, 정, 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잘못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와 교회는 정말 아차 하는 순간에 생각지도 못했던 이러한 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a. 지성만 강조함
먼저 죄가 사람을 사로잡아 지성만 강조하게 되면 지성주의, 자유주의, 교조주의와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배우고 익히기보다, 오직 학문적인 성취를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의 지적 욕구만 채우려는 죄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사람의 감정과 의지를 경시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머리만 엄청나게 크고 팔다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기형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참으로 응급조치가 절실하고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그대로 가다가는 싸늘한 심장을 가지고서 자기 발로는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영적인 위선자가 될 뿐입니다. 죄에 물든 손으로 허겁지겁 집어 먹은 그 수많은 지식에 새까만 죄의 독이 옮겨 묻은 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사람의 영혼은 살찌기는커녕, 점점 중독되어 바짝 말라가게 됩니다. 점점 더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고, 눈뜬장님처럼 되어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을 자세히 살피니, 이는 그 안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으나, 너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요 5:39~42, 바른 성경).”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는 구약 성경에 통달하여서 그 교훈을 백성에게 가르치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높은 학식은 예수 그리스도께 이르지 못했고, 도리어 그 학식 자체가 그들의 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놀랍게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 심지어 예수님을 적대하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지적으로는 상당히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학식은 있었지만, 정작 그 학식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지혜로움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 결과, 그 모든 학식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발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경고를 줍니다. 우리는 논쟁 그 자체를 위해 지식의 칼을 벼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혼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고도 철저하게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참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믿지 않는 자에게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자기 지성을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성취를 목표로 사용한다면, 스스로 어리석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교회는 차갑고 냉랭한 영적인 얼음 창고처럼 변해갈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은 오직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르게 예배하며,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여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지식은 오히려 우리 눈을 가려버릴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게 되어, 그 모든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자기 궤변을 합리화하는 도구로써 악용될 것입니다. 스스로 속으면서도 속는 줄 모르는 이러한 위험에 관하여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에 대한 신학적 지성주의라는 오류를 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교리를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고 그를 향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생각으로 교리의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믿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완전히 정통적인 신학자일 수 있으면서도 전혀 영적 생명은 없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교리의 체계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교리가 복되신 그분을 감추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분이 구주이십니다. 구원을 행하시는 분이 그분이십니다.”1
이처럼 지성만 강조하는 생명 없는 지성주의에 빠지면, 신앙이 단순히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그 이상이며 전인격을 수반한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학문 자체에 빠져 그 학문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지혜에 취하는 큰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책 1,000권을 읽었다고 해서 내 믿음이 그 1,000권만큼 되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은 지성만으로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b. 감정만 강조
이에 반해, 신앙적인 감정만 열렬하게 추구하는 오류에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오류에 빠지면 자기감정이 상하지 않는 데 열을 올리게 됩니다. 옳고 그름을 지성을 사용하여 찬찬히 헤아려보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은 은혜가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 그냥 덮어 놓고 막무가내로 열심과 헌신을 쥐어 짜내는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오류에 치우친 교회에서는 신앙주의, 신념주의, 감상주의, 열광주의, 신비주의, 경건주의, 자아몰입, 모호한 신앙이 성행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교리 파괴, 이단 허용, 교회의 세속화와 상업화, 새로운 감성적인 기독교라는 흉측한 괴물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오류에 감염되면, 바른 교리를 따라 지적으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아가는 지극히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일을 영적이지 못하다고 여겨, 무조건 매도하고 보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 내가 만난 하나님, 나의 체험에 취하여, 기록된 말씀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내 감정과 체험을 시험하며 분별할 당위성과 필요성조차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런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어서 아예 그런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니 각자의 신앙고백이 다 제멋대로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의 강도가 믿음의 척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대부분이 이러한 오류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깊이 파고든 이러한 병폐에 관하여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매우 강하고 진지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분명하게 이 경우에 속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주 높이 칭송하였으며, 고기나 물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밤낮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며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주를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2
이처럼 사람은 마음에 새겨진 수많은 강한 인상, 상상력, 분위기, 각자의 기질 등에 의해, 얼마든지 감정적인 영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대는 감성팔이식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감상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교회로 들어와 세상에서 하던 그대로 행하여 교회를 점점 감정주의의 오류에 치우치게 합니다.
그들은 교회가 마땅히 내 감정을 달래고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할이며 존재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성경의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 세상의 온갖 것들, 즉 내적 치유, 자존감 높이기 등의 자기를 위로하고 숭배하려는 세속 심리학이 진리의 탈을 둘러쓰고 버젓이 들어와 교회를 장악해버렸습니다. 예배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을 따라 온전하게 드리는 예배가 아닌, 그저 내가 듣기 좋은 가르침, 나를 힘이 나게 하는 가르침을 전하는 예배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감정주의의 오류에 치우쳐, 죄에 물든 자기감정의 만족과 평온을 추구하는 인간 중심적인 심리치유 기관 정도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c. 의지(행위)만 강조
바른 지성과 바른 감정에서 나오지 못한 의지적인 행위는 헛되고 무의미합니다. 사람이 이런 오류에 휩쓸리면 자력구원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또한, 내가 무엇무엇을 이루었고 기도와 금식을 얼마만큼 했다는 업적주의에 이르고 맙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분을 온 마음으로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의지적인 행위와 선택의 결실은, 바로 자기 의와 교만인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오류는 무지한 경건주의로 사람을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은혜를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열정과 의지적인 노력으로써 구원의 확신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선행과 봉사와 같이 외적으로 약간의 선한 모습만 나타나면, 신앙의 동질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경향이 계속 발전하면 결국 종교 통합까지 추구하는 거대한 재앙에 이르게 됩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배우고 아는 것보다도, 의지적인 노력과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3. 균형 잡힌 참된 신앙
지금까지 죄로 인해 나타나는 다양한 오류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으로 말미암는 지, 정, 의 사이의 균형은 어떠해야 합니까?
(1) 지성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쓰여야 합니다. 사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실제로는 이 사실만큼 간과되는 것도 없습니다. 지성으로 하나님을 바로 알아간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배우고 연구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를 통해 하나님의 도덕적인 아름다움, 그분의 거룩함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배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칭의, 양자, 성화, 종말, 재림, 천국, 지옥, 심판 등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여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일을 지지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유일한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참되신 분을 알게 하시고, 또 우리가 참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하신 것이니,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시다(요일 5:20).”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이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해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연구하였다. 그들은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과 이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실 때, 그 영이 무엇을 가리키며 어느 때를 가리키고 있는지 살펴보았다(벧전 1:10~11).”
“갓난아이들처럼 영적이고 순전한 젖을 사모하여라. 이는 너희가 이 젖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는 것이다(벧전 2:2).”
또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말씀이 올바르게 가르쳐지고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언제나 말씀을 가르칠 것을 강조하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하며 율례와 법규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스 7:10).”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을 네 마음에 있게 하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나, 언제나 이것들을 말하여라(신 6:6, 7).”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여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설득하였다(행 18:4).”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담대히 말하며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을 강론하며 설득하였다(행 19:8).”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자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과연 이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행 17:1).”
“내가 갈 때까지 너는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그들이 마치 의를 행하고 자기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처럼 날마다 나를 찾고 나의 길을 알기를 즐거워하며 내게 의로운 규례들을 묻고……. (사 58:2)”
또한, 알지 못하는 죄, 즉 무지를 책망하면서 지성을 사용하여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분별하라고 촉구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지금쯤은 너희가 선생이 되어야 마땅한데, 다시 누군가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요소들을 가르쳐야 할 형편에 있어, 젖만 먹고 단단한 음식은 못 먹는 자들이 되었다. 젖을 먹는 자마다 의의 말씀에 익숙하지 못한 자이니, 이는 그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히 5:12~13).”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라(딤후 2:15).”
“그러므로 우리가 들은 것에 철저히 조심하여, 우리는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더욱 철저히 조심해야 한다(히 2:1).”
지성을 통해 올바르게 앎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지성을 통하여 그릇된 것을 앎으로써, 수많은 이단과 오류와 속임에 속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정도에 그치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지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밝히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각을 갖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얼마든지 지성을 사용하여 교리를 배우고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운 그 교리적인 지식이 우리의 보물이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생생하게 알고 사랑하는 곳까지 우리를 인도할 수 없다면, 그 많은 지식은 실로 헛됩니다. 그런 일은 이방인이나 바리새인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자기 지혜를 믿고 의지하면서도,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고 자기 죄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지성소가 아닌 성전 뜰만 밟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교리가 우리 주님의 영광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격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교리를 배움으로써,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영적인 시각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 모든 지식이 여러분을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고 경외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어두움에서 빛이 비출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 속에 비추셨다(고후 4:6).”
우리는 올바른 교리적 지식을 따라 이 빛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런 지식은 살아 숨 쉽니다(히 4:12). 단순한 지적인 이해는 우리 인격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살아있는 지식은 우리의 전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이는 영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고후 3:18).”
우리는 바로 이러한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을 참되게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지식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하지 못하는 한, 아무 쓸모 없습니다.
(2) 감정
바른 지식에서 나온 올바른 깨달음은 감정에 건전한 영향을 끼칩니다. 바른 교리적 지식은 머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반드시 가슴까지 온전하게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운 바의 뜻을 곰곰이 헤아려보면서 묵상하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가슴으로 경탄하지 않은 교리는 금방 잊힐뿐더러, 신앙의 견고한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왓슨은 묵상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묵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머물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강퍅하고, 기억은 쉽게 사라지므로 묵상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묵상은 진리를 마음 속에 깊이 새겨준다. 진지한 묵상은 영구히 지속될 황금이나 대리석으로 글자를 새기는 것과 같다. 묵상 없이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는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묵상이 없기 때문에 이 시대 설교의 대부분은 유산한 태와 메마른 젖가슴처럼 되고 말았다.”3
또한, 그는 연구와 묵상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음에 적용하지 않는 묵상은 단지 공부하는 것에 불과하다. 연구는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묵상은 진리를 영적으로 증진시키는 것이다. 전자를 금맥이라고 하면 후자는 금을 찾는 것이다. 연구는 따뜻하게 하고 영향을 주는 겨울의 태양이라고 하면 묵상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사랑의 눈물을 흘리도록 하는 것이다.”4
단순하게 교리를 많이 이해하는 것과, 실제 삶 속에서 진리로 인해 굳건하며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교리적인 지식이 우리의 감정을 새롭게 하지 못한다면, 단순한 지적인 계몽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로는 삶의 거센 풍랑과 환난이 몰려오면 맥없이 쓰러져버리게 되고 맙니다. 견고한 교리의 반석 위에는 감화된 감정이 꼭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줄 수는 있어도, 단순히 아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지는 못합니다. 단지 지적으로만 아는 진리에 우리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그저 학문 또는 지적 체계로써만 받아들이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감정에 대해 수없이 강조합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 6:5).”
“여호와를 기뻐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실 것이다(시 37:4).”
“나로 하여금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주께서 꺾으신 뼈들이 기뻐 뛸 것입니다.” (시 51:8)
“만군의 여호와시여, 주님의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여 기진하며,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즐거이 외칩니다(시 84:1, 2).”
“백성아, 항상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라(시 62: 8).”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구절이 성도가 가져야 마땅한 생생한 감정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신앙의 감정은 반드시 올바른 교리적 지식을 밑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진리를 묵상하면서 진리 자체의 감화를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정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진리 안에서 다시 분별되고 절제되어, 다른 형제∙자매의 덕을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지 못하고 혼자만 도취되는 것으로 그치는 감정은 참된 신앙의 감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글의 성격상 지성과 감정을 분리하여 다룰 수밖에 없지만, 사실 이 둘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안다면,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죄를 안다면, 그것을 혐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사랑, 두려움, 기쁨, 슬픔, 애통, 기쁨, 경외, 찬양, 갈망, 열정, 갈급함 등과 같은 우리의 정서를 조금도 경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정 없는 지식과 지식 없는 감정은 둘 다 동일한 죄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의지
지성을 사용하여 연구하고 배운 내용이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가슴에 적용되면, 의지는 그 내용을 실제로 실천하고자 하게 됩니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감화되었다면 바른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며 가르치자 백성들은 울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통해 하는 선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교훈과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교훈을 따라, 모든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난 자식들을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율법에 따라 행하겠습니다(스 10:3).”
이처럼 참된 지식은 반드시 참된 감정으로 이어지고, 그 감정은 의지를 움직입니다. 물론, 참된 지식과 감정의 영향이 아닌 자기 의지로 얼마든지 외적인 종교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속기 쉬운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는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의지를 움직이는 내적인 힘은 우리 자신이 아닌, 경건과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아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자원하여 행하게 하신다(빌 2:13).”
우리는 분명히 자발적으로 의지를 움직여 행동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의지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엮여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 안에서 매일 새롭게 하셔서, 우리가 기쁨과 감사함 속에 주어진 일을 자유롭게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의지적인 행위는 그리스도의 의를 향한 감사와 찬송은 될 수 있어도, 우리 자신의 ‘의’는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에 감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의지를 사용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을 의식하거나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자랑과 교만이 틈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우리의 의지는 신앙생활에 강력한 능력이 됩니다. 은혜로 거듭난 의지의 작용은 단순히 인간적인 수준의 강한 정신력이나 의지력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거듭난 의지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넉넉하게 감당해냅니다. 그런 의지를 사용하는 이에게 주님의 고난과 멍에는 쉽고 가볍게 다가오게 됩니다(마 11:30). 그들은 많은 고난과 환란을 믿음으로 이겨냅니다(행 14:22).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다(요일 5:4).”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오래 참아라. ……(중략)…… 너희도 오래 참아 너희 마음을 굳게 하여라. 이는 주님의 강림이 가깝기 때문이다(약 5:7, 8).”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상 주심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히 11:24~26).”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험을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기뻐하여라. 이는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너희가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려는 것이다(벧전 4:12, 13).”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새롭게 된 의지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불의 세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고문과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돌로 맞으며 톱으로 켜지는 죽음의 자리 앞에서도 우리로 소망 가운데 모든 것을 평온하게 감당하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의지는 세상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고 해도 꺾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합니다(히 11:34~38). 천만인이 에워싸 진을 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시 3:6), 악한 무리를 쳐부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막힌 담을 뛰어넘게 하는 것입니다(시 18:29).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일을 억지로 버티는 것이 아닌, 기쁨과 자원함으로써 넉넉하게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도 진심으로 여호와께 바치고, 자원하여 바쳤으므로 그들이 즐거워하였고…….(대상 29:9)”
“내가 증언하는데 그들은 힘대로 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원하여 힘에 넘치도록 하였다(고후 8:3).”
이뿐 만이 아닙니다. 새롭게 된 의지는 죄를 멀리하며 거룩함을 추구하는 일에 피 흘리기까지 싸우게 합니다(히 12:4).
“우리가 양심의 악을 깨닫고 마음을 깨끗이 씻고 맑은 물로 몸을 씻었으니, 참된 마음과 확신에 찬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인애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니, 너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이다(롬 12:1).”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다. 곧 너희가 음란을 멀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불결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살전 4:3~7).”
이처럼, 참된 지식과 올바른 감정은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여, 사람이 실제 삶 속에서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빛 안에 있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두움 안에 있다(요일 2:9).”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할 법이 없다(골 3:12).”
그러므로 이러한 열매는 결국 우리 신앙의 진실성을 판별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됩니다. 누군가를 긍휼히 여긴다고 하면서 그 사람을 실제로 도와주려는 의지와 행실이 없다면, 그런 감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누군가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 마음을 함께하면서 짐을 나누어 지게 되는 일이 참으로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식과 감정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듯이, 감정과 의지 역시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아는 지식은 그 거룩함을 사모하는 감정을 낳게 되며, 또 그러한 감정은 곧 거룩해지고자 하는 삶의 추구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그분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요일 3: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분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 5:3).”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니,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이 계명을 그분에게서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요일 4:20, 21).”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또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며(엡 4:2)”
“아무것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라(빌 2:3).”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의지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거룩한 분노를 발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진정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생명을 다해 지키며 보존하려고 하게 되듯이, 진정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여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로 작정했다면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이 활개 치는 일을 그냥 못 본 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갈 1:8).”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고 너희에게 편지를 써서 권면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유 1:3).”
이처럼 신앙에는 반드시 이러한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로 결심하셨습니까? 세상에 대한 사랑을 끊고 오직 썩지 않을 하늘나라의 유업을 위하여 달려가기로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여러분을 구원하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어떠한 고난과 환난도 믿음으로 이겨내기로 마음을 새롭게 하셨습니까? 평생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하여 끝까지 전진하시겠습니까? 그분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거룩한 죽음으로써 그분 곁에 가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참된 신앙이란 단순히 말만 앞세우는 것이 아닌, 이러한 균형 있는 모습이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나는 신앙입니다.
4. 이 모든 것은 성령의 도우심과 우리의 추구로써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일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하나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귀는 환경과 잔재하는 죄성을 통해 우리가 온전한 신앙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게 끊임없이 훼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넘어지고 요동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온 마음을 다해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길 원했던 모세의 기도처럼 그분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하십시오(출 33:18). 모든 경건의 능력은 하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옵니다(계 22:1, 2). 그 생명과 능력을 매일 공급받아야지만, 우리는 전심으로 온전함을 향해 달려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주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도록 힘써라(벧후 3:14).”
우리는 그와 같이 균형 있게 전인격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체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한지 전인격적으로 깨달아가면서, 신앙이 더욱 견고해져 가는 것입니다(엡 3:18). 그렇게 진리를 체득하는 사람의 믿음은 굳건해지며, 삶 속에서는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온통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일로 가득하며, 그의 손과 발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따라 힘껏 지성, 감정,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비추어주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우리의 전인격을 매일 새롭게 하여, 우리 삶 속에 더욱 풍성한 열매가 맺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라. 너희가 이런 것들을 행하면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벧후 1:10).”
각주
1 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0권』, 서문강 옮김, CLC, 2000, pp. 242, 243.
2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Religious Affections)』, 정성욱 옮김, 부흥과개혁사 p. 222.
3 토마스 왓슨, 『묵상의 산에 오르라 (The Christian on the Mount: A Treatise on Meditation)』, 조계광 옮김, 생명의말씀사, pp. 146, 147.
4 Thomas Watson, 『Gleanings from Thomas Watson』, Morgan, Penn.: Soli Deo Gloria, 1995, p. 106.
http://reformedguardian.com/archives/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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