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삼대 절기의 영성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유월절(Pascua), 오순절(Fiesta Pentecostal), 장막절(Fiesta Tabernaculo)이며 이 절기들은 모두 출애굽기에 나타난 것들이다. 그만큼 출애굽기의 영성은 우리 신앙 생활에 본질적으로 참 의미 깊은 것이고 아울러 그 절기들의 의미를 우리 생활에 잘 적용할 때 순수한 신앙의 본질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유월절은 애굽시절, 장막절은 광야 시절, 오순절은 가나안 시절과 관련이 있다. 유월절(Pascua- 뛰어 넘어 간다는 뜻)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는 과정(4월 1-15일 사이)에서 하나님의 애굽 왕 바로에 대한 10가지 재앙들(피개이파악독우메어장) 중 9가지 재앙들이 내리는 기간이었던 1-14일까지 거룩히 정결한 어린 양을 제물로 준비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기간을 보내다가 마지막 14일 저녁부터 15일 아침 해가 떠 오르는 새벽까지 각 가정에서 모두 문지방과 인방에 어린 속죄양의 피를 발라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가정을 표시함으로써 장자의 죽음으로부터 보호받은 것을 기념하기념하는 절기를 말한다(“유월절의 영성” 참조).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한 삶을 살았던 백성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어린 속죄 양은 물론 하나님의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 주신 사랑(요3:16)에 의해 성육신하셔서(요1:12) 후일 “세상 죄를 지고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을 나타내고 또 그 분의 찢어지심(뼈가 꺽이지 않고)과 흘려져 발라진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의 속죄를 위한 희생의 수난(이53장)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우리가 성도가 된 것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 내용에 있어서 출애굽기의 유월절 사역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유월절이 이스라엘을 참 이스라엘 되게한 결정적 사건이었으므로 그때로부터 이스라엘의 캘린더(calendario-달력은 ‘월력’이므로 캘린더에 어울리지 않으나 우리말에 다른 말이 없으므로..)에서 1월 1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을 기준으로 모든 것이 재편성된 신앙의 새 달력, 캘린더의 의미이다. 이런 달력을 갖고 있는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큰 복 받은 사람들인가.
🔹두번째는 오순절(칠칠절)이다. 히브리어로 “펜타”로 ‘다섯 번째의” 라는 뜻으로 50일(10x5)을 의미한다. 오순절은 출34:22절에서 “칠칠절, 곧 맥추절의 초실절을 지키고”에서 나오며 이스라엘 백성이 마침내 출애굽, 광야 생활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 첫 곡식을 심고 첫 소출을 거두고 나서 드린 추수감사의 의미가 담긴 절기이다. 이것은 또한 7주간을 지낸 후(7x7=49)의 다음 날이란 의미도 있다. 백성들이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돌아와 곡식을 뿌려 경작한 소산을 거두면서부터 그동안 광야생활 중에 내리던 만나가 그쳤고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했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고 광야에서 훈련, 인도하시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으며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정착한 삶을 누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을 기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에게 있어야할 모든 면을 아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도우시며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에 자비로우시며 성실하신 분이심, 그 분의 구원의 충분성(salvacion plenaria)을 보여 준다.
그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전체에서 구체적으로 완성되고 보여진 것이기기도 하다. 예수님의 유월절 전 마지막 저녁에 유월절의 어린 희생양처럼 죽으시고 유월절을 마친 첫 날 새 벽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소식을 처음 전해 듣고 제자들에게 전한 것, 또 성령의 강림도 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본격적으로 강림하사 성령의 시대를 열어 주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도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도 이러한 온전한 구원, 충만한, 총체적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선하신 목표이고 놀랍게도 이 세 절기들, 그 날자들과 깊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세번째는 장막절(초막절 – Fiesta Tabernaculo)이다. 일년 농사가 끝나는 때이므로 수장절이라고도 불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40년의 광야생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레 동안 초막(booths)에 거하게 됨으로 초막절(레23:42,43)이라고도 불린다.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유월절 역사에 의해 해방된 백성으로서 천막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각종 도우심으로 무사히 광야생활을 하면서 가나안에 입국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도 백성들에게 성막(Tabernaculo)을 주시고 그 성막을 백성들의 진 중앙에 위치하고 하시고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며 경배를 받으시고 가르치시며 인도하신 것을 기리는 절기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마치고 40일 동안(40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런 의미에서 생활하다 그 마지막 부분의 한 주간을 장막절로 지키며 그 때에는 각 가정이 텐트를 치거나 또는 나무로 간단한 집을 짓고 지붕에 종려나무(palmera)와 감람나무(olivo)를 가지들을 얹어 그늘을 만들고 광야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광야생활동안 훈련하셨던 것들을 몸으로 체험하며 기억에 되살리고 그것을 모르는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도 하면서 영적 회복과 부흥의 시간을 가진다. 우리도 오늘날 세속화되고 다른 것으로 바쁜 삶 속에서 신앙의 본질적 역동성을 잃어 버리기 쉬운 현실에서, 적어도 교회에서는, 이런 기회를 어떻게든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다음으로, 이 세 절기들을 연속해 보면 애굽의 바로의 속박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생활을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다사 돌아갔다는 것으로 요약해 볼 때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있어야 했고 그것이 정상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라고는 하지만 불순종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에(누구나 영적으로 적어도 한 번 이상 씩은 탕자의 삶으로 전락되었던 경험이 있는 같은 사람들이었기에) 애굽도 광야도 가나안도 필요해서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왜 있어야 하는지 다만 그 이유를 깨닫는 데에 엄청난 세월(약400년)이 걸렸을 뿐이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가 가나안에 계속 있지 못했던 시간들은 일종의 외도에 해당하는, 불필요하게 잃어버린 시간들에 해당되지만 물론 그렇다고래서 마치 가나안이 아닌 애굽에 있었던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래서 하나님마저도 이스라엘의 통치에 그 부분에 관해서 만큼은 실패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전혀 아니다. 하지만 좀 더 가나안으로 인도함 받았고 “이곳이 바로 그 땅”임 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후의 신앙의 역사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약속된 땅이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을 400년 이상이나 타향에서 험한 나그네 인생을 살고나서 다시 돌아 오는 과정에도 40년이나 걸린 역사의 이면에는 거기에 못지 않은 무엇인가 중요한 뜻이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또 그만큼 중요한 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가나안 땅과 함께 가지셨던 아름답고 선하신 계획(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더욱 의미 있는), 그것을 신자가 잘 깨닫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받는, 가치 있는, 백성이 되는 일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람이 첫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 선택 받은 것은 가나안이라고 하는 특별한 장소에서 그 자신의 일신상의 안위보다는, 예수님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통해 태어날 신앙의 백성(이스라엘)이 온 세계 모든 민족들을 위해 존재하는 제사장 백성의 역할을 하도록 타자를 위한 삶(vida para otros)에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갈 때에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위해, 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그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때부터 제시해 주신 삶이고 하나님께서 그 삶을 축복하시고 사용하실 것 임을 보장하신 삶 임을 의미한다. 물론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에게는 선택권이 있어서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인간 공로(행위- 때로는 인간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로 인한 실패도 있을 수 있는)에 의한 의가 아닌,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그의 의로 보셨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인간 행위가 아닌(no por obra), 하나님의 은혜(sino por gracia)를 믿음으로 인한 구원 개념은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개념이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옳다(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다) 생각된다.
문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명(使命)과 소명(召命)이 있는 삶에 피조물 인간이 얼마나 잘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뒤 늦게나마 이런 부분을 새롭게 정리해 볼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앞으로 남은 시간에서라도 이러한 절기적 신앙의 회복과 함께 순종하며 더욱 귀하게 쓰임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려 드리는 삶이 되기를 기원한다.
출처:리빙스톤침례교회 자료실
http://www.livingsbc.org/bbs/board.php?bo_table=library&wr_id=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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