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16, 2017

히스기야의 기도 그 이후/이진오 목사

🌷히스기야의 기도 그 이후

/ 인천 더함공동체교회, 이진오 목사

'히스기야'는 남 유다 14번 째 왕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시대에는 북으로 앗수르가 강성하였는데, 주전 721년에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남으로는 이집트가 강성하여 남 유다는 앗수르와 이집트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였고 선지자들은 이방 나라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외쳤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인 '아하스'는 친앗수르 정책을 펴면서 앗수르 왕의 신복이요, 아들임을 자처하였습니다(왕하 16:7). 아하스는 여호와의 성전의 예물까지도 앗수르에 바쳤고 심지어 앗수르의 신 림몬을 스스로 들여와 여호와의 성전에 모시고 우상숭배를 일삼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의 길로 행한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역대기 기자가 제2의 솔로몬으로 묘사할 정도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18:3). 종교개혁을 단행해 아버지 아하스가 들여왔던 우상들을 철폐하였고 바알과 아세라 목상도 찍어 버렸으며 심지어 모세가 들었던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던 것도 부수어 없앴습니다. 이 외에도 십일조를 부활시키고 성전을 정화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등 철저한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가 앗수르의 봉신국임을 자처하며 앗수르의 신들을 들여온 것을 모두 훼파하자 앗수르와의 관계는 당연히 불편해졌고 친앗수르 정책은 철회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히스기야가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았다(18:3)."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18:5~6)"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도록 복을 주셨다(18:7)"고 말합니다.

🔹️히스기야의 기도, 그리고 그때에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함으로 국가적으로 형통한 복을 누리던 히스기야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20:1).

히스기야가 죽게 된 그때는 그의 나이 불과 37~38살 정도 되는 때입니다. 히스기야는 주전 686년까지 통치를 했으니, 15년 생명을 연장받은 것을 생각하면 주전 701년 가까운 시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와 공동 섭정을 하다가 주전 715에 단독 왕이 되었는데 25살에 왕이 되었고 29년간 통치했습니다(18:1).

우리는 히스기야가 눈물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15년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설교나 기도와 관련한 이야기에서 예를 들며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기적을 행해 주신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이성이 다 이해하지 못하는 기적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단지 히스기야가 기도했고 하나님이 들어주셨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하고 하나님의 복을 구하자고 전하기에는 전후에 고려해 살펴봐야 할 내용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이 기도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까지 살펴보면 조금 다른 해석과 적용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기도의 배경과 결과를 전체적으로 살펴봄을 통해 히스기야의 기도와 생명 연장을 통해 이 본문이 정말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교훈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뜻하지 않은 고통을 만난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왕이 되어 14년,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서 또 백성들 앞에서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는 그동안 북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이방에 힘 있는 나라들을 의지하다가 결국 이방 민족 앗수르에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앗수르의 봉신국을 자임하기까지 한 아버지 아하스의 정책을 바로잡았습니다. 또 종교개혁을 단행하며 우상숭배를 근절시켰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시키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고 현실화시켰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개혁 조치에는 친앗수르 정책을 편 아버지 정권에서 이를 지지하며 엄청난 정치적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우상숭배와 관련해 생계를 유지하며 살던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이제 겨우 나라가 안정되고 맘 편히 살 수 있을 바로 그 때,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히스기야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가정환경이 좋든 나쁘든, 머리가 좋든 나쁘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정을 이루고 직장 생활을 하고 뜻하는 것을 이루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인생입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이제 조금 살 만하다 싶을 때 뜻하지 않은 청천벽력 같은 고통이, 절망이 우리에게 닥쳐올 때 누군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히스기야의 나이 이제 겨우 37살입니다.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죽을 것이라고 했고 그러니 집을 정리하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벽을 향하여 앉아, 심히 통곡하며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하나님 제가 그래도 주님의 뜻을 좇으려고 애쓰지 않았습니까? 조금이라도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떼를 쓰며 매달립니다.

매정하게 말하면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기를 구한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사는 것이 뭐 대단하다고, 죽으면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가는데 이 더럽고 복잡하고 죄 많은 세상 일찍 가는 게 오히려 복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입장이 되어 보면 그렇게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고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비단 병뿐이 아닙니다. 열왕기서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죽은 사람, 전쟁의 어려움 등 여러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기도하고 간구하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닥쳤을 때, 또 바라는 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당연히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옵소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도 모두 간구와 간청으로 무엇을 달라 하는 내용입니다.

📍둘째, 응답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기도가 기도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자연 만물을 주관하시고 순리대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한둘이겠으며, 하나님께 매달리고 싶은 사정이 있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정에 이끌려, 누군가를 편애하여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역사는 뒤죽박죽이 될 것이고 인간들 안에는 하나님이 공평과 정의를 말하면서 스스로 공평하지 않다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기도할 권리가 있고 아니, 어쩌면 기도를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지만 그 기도가 요구한 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께서 인간이 기도한 대로 다 들어주시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저주하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스포츠 경기를 하면서도 누구나 이기기를 구하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때는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만한 이유가 있고 역사적 섭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때는 그의 공평과 정의, 사랑과 은혜의 성품에 위배됨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 것은 극히 예외적이었는데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와 뜻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섬기며 우상숭배 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화를 내시며 멸망시키고자 할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회개하며 울며 금식하며 떼를 쓰니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십니다. 이는 모세의 기도처럼 공의로운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필연적 응답입니다.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히스기야가 연장받은 15년의 생명은 그저 히스기야라는 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역사를 거스르고 자연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 응답 후에 더욱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히스기야는 15년 생명을 연장받은 것을 통해 본인은 15년 더 사는 복을 누렸지만, 남 유다는 이로 인해 멸망의 길로 가는 단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엄밀히 말해 히스기야의 기도와 이에 대한 응답은 복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저주로 작용하였습니다.

열왕기하 20장 15절은 '그때에'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를 문병하기 위해 편지와 예물을 들려 사람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기쁘게 사신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신들에게 왕의 보물고와 무기고를 열어 모든 것을 보여 주며 자랑하였습니다. 심지어 나라 안에 모든 것 중에 사신들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국가 기밀,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 것들을 거침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이런 태도에는 히스기야의 자만심과 교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한 것은 반앗수르 정책에 기인합니다. 북방 지역에 떠오르고 있는 바벨론과 화친하는 것을 통해 앗수르를 경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도 유다가 얼마나 부강하고 힘이 있는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외교적으로는 유다에 유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를 방문한 이사야는 오늘 보여 준 모든 것을 바벨론에 빼앗기고 심지어 왕의 후손들까지도 바벨론에 끌려가 환관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은 어처구니없게도 "내 때에 일어날 일이 아니니 다행이라(왕하 20:19)"는 식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던 때와 너무나 다른 태도입니다. 기도 응답에 대한 교만, 외교적 자신감에 대한 교만이 영적인 눈을 어둡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실제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돌아오는 일로 벌어지고(대하 33:11), 115년 이후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는 것으로 현실화됩니다.

또 열왕기하 18장 13절은 히스기야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로 쳐들어온 기사를 기록합니다. 이때는 히스기야가 생명을 연장받는 그해나 그 다음 해 가량입니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들을 환대하고 바벨론과 연계해 앗수르를 압박한다 생각한 앗수르 왕이 안 되겠다 생각하고 쳐들어온 것입니다. 다행히 이 전쟁은 하나님이 앗수르 군사들을 몰살시키시고 산헤립을 죽이심으로 크게 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에게 은 300달란트, 금 30달란트를 여호와의 성전 예물까지 모두 긁어 바쳐야 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성전 문의 금과 모든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서 바쳤습니다. 앗수르의 부하들에게 말할 수 없는 조롱을 들어야 했습니다. 왕의 사정이 이럴진대 백성들의 어려움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생명 연장으로 인한 가장 비극적인 상황은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열왕기하 21장 1절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12세에 왕이 되어 55년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므낫세가 얼마나 악독했는지 북 이스라엘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과 아세라 등 온갖 우상들을 끌어와 여호와의 성전에서 버젓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을 불에 태우는 이방 제사를 했고, 백성들을 죽여 그 피가 강을 이루었습니다. 므낫세의 악독함은 이후 요시야에 의한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지 않고 유다를 멸망시키게 되었습니다(23:26).

이런 므낫세가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히스기야가 15년 생명을 연장받은 기간에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 응답보다 순종이 중요하다

히스기야는 37살 너무나 좋은 나이에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렸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사 뜻을 돌이켜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었습니다. 히스기야는 15년이나 덤으로 인생을 더 연장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연장받은 히스기야는 교만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고 창고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무기고에는 무기가 가득하니 교만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함에서 멀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우리의 눈물 어린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을 받을 때 그때가 중요합니다. 그로인해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공평과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역사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내 기도를 들어주셨을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겸비하고 더욱 낮은 마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반면,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에 순종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먹을 것을 달라고 떼쓰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메추라기 떼를 보내 고기를 먹게 하시지만, 그 고기를 입에 넣고 씹기도 전에 심히 큰 재앙이 임하였습니다(민 11:33). 또 왕을 달라고 사무엘에게 떼쓰는 백성들에게 왕을 주시지만, 그 왕으로 인해 그들이 고통 받고 결국 멸망케 되었습니다.

때로는 응답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응답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 우리는 자칫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작은 열매도 잃어버리고 영원에 대한 구원도 상실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와 자연을 순리대로 인도하심을 믿고 내 욕심, 욕망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좇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바른 믿음이요 태도입니다.

이 믿음과 태도로 살아가는 한 주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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