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 기독교 강요, 2권1장,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온 인류가 저주를 받음, 원죄론
율법 아래서 조상들에게 나타나셨고,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구속주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제 1장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온 인류가 저주를 받았고
원시 상태에서 부패하였음, 원죄론
특정한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도 그 목표를 자기 자신의 가치와 탁월함을 아는 데에다 두었고,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도 그저 헛된 자신감에 부풀려지고 교만으로 우쭐해지는 것밖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첫째로, 창조 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바를 생각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롭게 우리를 계속해서 보살피시는가를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본래 부여받은 상태대로 흠 없이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의 탁월함이 얼마나 위대하겠는가를 알고, 동시에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 가운데 우리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요, 우리는 그것을 누리는 것뿐이며,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의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는 데 있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의 모든 자랑이나 자신감이 사라져서 우리가 정말로 낮아지고 수치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높이 올리셔서 덕을 향하여 열심을 갖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도록,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다(창1:27).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위대한 고귀함- 이것이 우리를 짐승들과 구별지어준다-이 우리의 미련함 밑에 파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성과 지성을 부여받았으므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삶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지정된 그 복된 불멸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의 본성적인 자기 도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필 때에 추구해야 할 지식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한 모든 신뢰를 제거하고, 우리로 자랑할 모든 기회를 없애며, 우리로 굴복하도록 이끄는 그런 지식인 것이다. 지혜와 올바른 처신이라는 참된 목표에 진정 도달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자기 가신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갖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충분히 선하고 복된 삶을 스스로 이어갈 수 있다는 정말 허망하기 그지없는 사고가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지지를 얻고 있다. 사람의 골수에 박혀 있는 교만을 부추겨 주는 간사한 이야기만큼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없다.그리하여, 거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가장 치켜세우는 발언을 하는 사람이 가장 환영을 받고 박수를 받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자기 홀로 도취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사실 그 가르침에 동의하는 자들을 철저히 속여 처절한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런 선생들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자기를 아는 지식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악의 무지 속에 빠져들 뿐인 것이다.
자기를 아는 지식의 두 가지 면
육신적인 판단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의 지성과 정의로움을 확신하고서, 덕의 의무들을 담대히 시행하고, 악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스스로 모든 힘을 기울여 탁월한 것과 존귀한 것들을 위해 수고를 다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살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신뢰할 만한 것을 자기에게서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살필수록, 더 낙담하게 되고, 마침내 그런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고,자신의 삶을 올바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 자기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져야 마땅한 지식을 생각할 때에, 그 지식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첫째로,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목적으로 창조함을 받았으며 또한 어떠한 목적으로 고귀한 은사들을 부여받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지식을 통해서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각성하여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또한 미래의 생명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둘째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능력들을- 아니 오히려 능력의 결핍을- 가늠해야 한다.이러한 결핍을 깨닫게 되면, 그는 극도의 혼란 속에 엎드러질 것이고, 말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첫 번째 지식을 갖게 되면, 사람이 자기 의무의 본질을 깨닫게 되고, 두 번째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의무를 시행할 자기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아담의 타락의 역사가 보여 주는 죄의 본질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그의 순종을 시험하며 그가 과연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 나무의 실과를 먹는 한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고, 또한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즉시 죽으리라는 끔찍한 경고를 주셨는데, 이것이 아담의 믿음을 입증하고 실행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대체 무엇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자초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추리할 수가 있다. 교만이 모든 악의 시작이라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언은 지극히 올바르다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묘사하는 유혹의 본질을 근거로 좀 더 충실한 정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여자가 신실하지 못하게 뱀의 간계에 이끌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불순종이 타락의 시작이었다는 것이 이미 분명히 드러난다. 바울도 역시,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고 가르침으로써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롬5:19). 그러나 이와 동시에 유념해야 할 것은,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권위에서 반역한 것은 그가 사탄의 유혹에 사로잡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가 진리를 멸시하여 거짓에게로 돌아섰기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자세가 다 흔들리는 법이다.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하나님의 위엄이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도 온전히 남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신앙이 타락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야망과 교만이 감사치 않음과 더불어 일어났으니, 이는 아담이 자기에게 허락된 것만 해도 풍족하고도 남는데 부끄럽게도 그 이상의 것을 탐하여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를 제쳐버렸기 때문이다.흙으로 지어진 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도 모자라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를 탐하였으니, 이 얼마나 몹쓸 악행인가!
그런데, 아담의 반역은 그저 단순한 배반이 아니었고, 거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비열한 모욕이 결합되어 있었다. 이 첫 사람 아담 내외는, 하나님께 거짓과 시기와 악의가 있다고 떠드는 사탄의 비방에 그대로 동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신앙으로 인하여 야망이 생겨났는데, 이 야망이 완악한 불순종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를 내동댕이치고 정욕이 이끄는 대로 아무렇게나 자기 자신을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르나르는 진정으로 말하기를,그때에 첫 사람 아담 내외가 사탄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그 말을 들어서 죽음이 임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우리에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지 않았더라면,아담이 절대로 감히 하나님의 권위에 대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정욕들을 통제하는 최고의 장치가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곧,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함으로써 의를 실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며, 또한 행복한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마귀의 참람한 말에 휩쓸려서,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통 소멸시키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죄의 오염
아담이 그 지으신 분과 연합하여 있고 또한 그에게 매여 있는 것이 그의 영적 생명이었던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곧 그의 영혼의 죽음이었다. 그가 하늘과 땅의 자연 질서 전체를 부패시켰으니, 자신의 반역으로 자기의 모든 후손을 멸망에 몰아 넣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피조물이 다 --- 탄식하며”(롬8:22), 썩어짐에 굴복하는 것이 자기의 뜻이 아니다(롬8:20). 이렇게 된 원인을 찾자면, 피조물들은 사람이 사용하도록 창조되었으므로, 사람이 받을 형벌의 일부를 피조물들이 마땅히 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하늘의 형상이 말소된 후에, 아담 혼자만 이 형벌- 처음 그에게 주어졌던 지혜와 덕과 거룩함과 진리와 정의가 사라지고, 그 대신 지극히 추한 더러움과 몽매함과 무능력과 불결함과 허망함과 불의가 생겨나게 된 사실-을 당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후손들 역시 동일한 비참 속에 얽혀 들어가 거기에 잠기에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물려받은 부패성인데, 교부들은 이를 “원죄”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하였다. 여기서 “죄”란 그 이전에 지녔던 선하고 순결한 본성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옛 교부들이 이 주제에 대해서 명확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354-420)가 일어나 아담이 죄를 지어서 자기 자신만 잃어버린 바 되었을 뿐 그 후손들에게는 전혀 해가 미치지 않았다는 불경스러운 허구를 주장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지를 못한 것이다.
선한 사람들은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사악함을 본받았기 때문에 부패한 것이 아니고 모태로부터 결함 있는 상태를 타고난다는 것을 힘써 입증하였다. 이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수치의 극치였다. 다윗의 증언이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불순한 씨에서 내려온 우리들 모두가 출생할 때부터 죄에 감염되어 있는 것이다.
죄의 오염은 모방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님
우리는 부모의 불순함이 자녀에게 전달되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날 때부터 이미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아담은 그저 인류의 시조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인류의 뿌리였고, 그리하여 그의 부패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부패한 상태 속에 있게 되었다.이 점은 사도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 것처럼(롬5;12),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회복되느니라(롬5:17).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아담의 죄가 모방에 의해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도 우리에게 그냥 모범으로만 제시되었다는 것인가? 만일 그리스도의 의가 – 그리고 의로 말미암아 생명이- 전달에 의해서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면, 곧 그 두 가지가 – 의와 생명이 –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었는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며, 또한 아담을 통해서 끼어들었던 죄와 사망이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거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그리스도)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는 말씀은 결코 애매한 진술이 아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신자들의 믿음을 강건하게 하고자,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전15:22). 모든 사람이 모태에서부터 이미 저주받은 상태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바울의 진술(엡2:3)은 성립할 수가 없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본질”이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질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더렵혀진 상태의 본질을 뜻하는 것이다. 하늘의 재판장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6) 따라서 사람이 거듭나기까지는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모두에게 닫혀 있는 것임을(요3:5)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악하고 부패한 상태로 출생한다는 사실을 친히 명확하게 선포하신 바 있다.
죄의 전달
썩은 뿌리에서 썩은 가지들이 나온 것이요,그것들이 그 썩은 상태를 거기에서 나온 다른 작은 가지들에게로 전달시킨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녀들이 부모 안에서 부패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이 그런 질병의 상태를 자기 자녀들에게 다시 옮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에게서 시작된 부패가 조상들에게서 그 후손들에게로 영속적으로 흘러내려가는 방식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이다.전염의 기운이 육체나 영혼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염의 기원은 바로, 첫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주신 은사들을 지니고 있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의 후손 모두를 위한 것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자녀들이 경건한 부모들에게서 부패성을 물려받는다는 것이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고전7:14). 자녀들은 부모들의 영적 중생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적인 혈통을 물려받는다. 죄 있는 불신자든, 죄 없는 신자든 상관없이, 사람은 죄 없는 자녀가 아니라 죄 있는 자녀를 낳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왜냐하면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자녀를 낳기 때문이다.
원죄의 본질과 정의
원죄란, 영혼의 모든 부분들에 펴져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만들고 또한 성경이 말씀하는 “육체의 일”(갈5:19)을 우리 속에 일으키는 바 우리 본성의 유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자주 죄라 부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거기서 나오는 것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당 짓는 것, 분열함과 이단 등(갈5:19-21)-을 가리켜 “죄의 열매”라고 부르는데, 성경은 흔히 이것들을 “죄들”이라 부르고 바울 자신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다음 두 가지를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의 본성의 각 부분이 다 타락하고 부패하여 있으므로, 이런 크나큰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정죄를 받고 유죄를 선고 받은 상태에 있으니, 이는 그 하나님에게는 오직 의와 무죄와 순결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의 범죄 때문에 지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마치 우리는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아담의 죄책을 떠맡아 지게 된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 속에 얽혀들어 갔기 때문에 아담이 우리를 죄책이 있게 만들었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에게서 우리에게 떨어진 것이 형벌만은 아니다. 그가 우리에게 부여한 오염이 우리 속에 거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형벌을 받아 마땅한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주 죄를 가리켜 “다른 사람의 것”이라 부르면서도,동시에 죄가 각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께서도 친히 지극히 웅변적으로 이를 증거해 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즉, 모든 사람이 원죄 속에 둘러싸여 있고,또한 그 얼룩들로 더러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갓난아기들이라도 모태로부터 정죄를 지고 출생하며, 다른 사람의 죄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책을 지는 것이다. 그 아기들의 불의의 열매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씨가 그들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그들의 본성 전체가 죄의 씨앗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오로지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울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당연히 죄로 여겨지는 것이다. 죄책이 없다면 정죄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두 번째로, 이러한 부패성은 절대로 우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마치 불타는 용광로에서 불꽃과 화염이 계속 튀어나오며, 샘에서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오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열매들-육체의 일들-을 맺는다는 사실이다. 원죄를 가리켜 “우리 속에 거하여야 할 원시의 가 결핍된 상태”로 정의한 자들은 그 위력과 힘에 대해서는 효과적으로 표현하지를 못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선이 결핍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온갖 악을 풍부하게 산출해 내기 때문이다. 원죄를 가리켜 “정욕”(concupiscence)이라고 말한 자들은 아주 적적한 용어를 사용했다 하겠다.여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지성에서부터 의지에 이르기까지, 영혼에서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이 정욕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것으로 더러워져 있다는 것이다. 좀 더 간단히 표현하자면, 전인(全人)이 정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죄는 전인(全人)을 부패시킴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담이 의(義)의 근원을 저버린 후에 죄가 그 영혼의 모든 부분들을 장악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그저 천박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을 뿐만 아니라, 말로 다할 수 없는 불신앙이 그의 정신의 최고 보루를 점령하였고, 교만이 그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바울은 부패가 한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어느 부분도 그 치명적인 질병에 저촉되지 않은 채 순결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음을 가르침으로써 모든 의심을 제거하고 있다. 바울은 부패한 본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눈에 보이는 감각들의 제멋대로인 충동들을 정죄하는 것은 물론 특히 정신이 몽매함에 넘겨졌고, 마음이 부패에 넘겨졌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엡4:18).
로마서 3장 전체가 원죄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1-20절). 그런데 “새롭게 됨”에 대한 묘사에서 그것이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옛 사람과 육체와 대조를 이루는 영은 영혼의 저급한 감성적인 부분을 교정시키는 은혜를 뜻하는 것뿐 아니라, 영혼의 모든 부분의 충만한 개혁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유혹의 욕심을 버리라고 말씀할 뿐 아니라, 우리더러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라”고 명하며(엡4:23), 또한 다른 구절에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롬12:2). 이로 불 때에, 영혼의 탁월함과 고귀함이 특별히 빛을 발하는 그 부분이 손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너무나도 부패하여서, 그것이 고침을 받고 새로운 본성을 입어야 할 형편이 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전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홍수를 만난 것처럼- 완전히 죄에 압도되어서 죄에서 벗어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으며,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 죄로 물들어 있다. 바울의 말처럼, 육신의 모든 생각이 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롬8:7), 육신의 생각이 곧 사망인 것이다(롬8:6).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꽤들을 낸 것이니라”(전7:2). 사람이 멸망 상태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탓인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허망함 속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본성적”이라는 용어의 의미
우리는, 사람이 본성적 오염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였으나 그렇게 된 것이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부패성이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하며, 그리하여 그것이 처음부터 심겨져 있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사람에게 가해진 어떤 본질임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것을 “본성적”이라 부르는 것은,아무도 그것이 악한 행실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유전의 법칙을 통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엡2:3).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지으신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사람에게 그렇게 적의를 품으셨겠는가? 하나님은 그의 지으신 것 자체를 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지으신 것이 부패한 상태를 대적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손상된 본성 때문에 하나님께 본질적으로 가증스러운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과연 옳다면,사람이 본성적으로 부패하였고 타락하였다고 말하는 것도 지극히 옳은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29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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