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15, 2016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 박도술 (보스톤 필그림교회)

성경본문: 마태복음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만남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리 저리 얽히고 섥히며, 때론 사랑하다가 때론 죽도록 미워하는 지경에도 이릅니다. 좋은 만남이고 좋은 관계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만남이고 얽혀 버리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서로 원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예수님의 말씀 중 제일 실천하기 힘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되는데 감정이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떨어져 있거나 혹은 생각이 나지 않으면 괜찮은데 막상 보면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믿지 않는 분들을 만나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예수 믿었는데 지금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화하는 상대자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저에게 20년전 30년전 가슴속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바로 엊그제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누구 때문에 상처 입어서, 누구 때문에 돈을 떼어서, 누구 때문에 심한 배신감을 입어서… 이유는 다양하지만 한결 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원수의 대상은 친구이든 가족이든 같은 교인이든 너무도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고, 저마다의 가슴 속에 상대방의 잘못을 아직도 깊이 새기고 지워지지 않는 기록처럼 보관하며 살아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늘 의심과 손해의 구름이 그들을 둘러싸고 원망과 부정의 목소리가 그들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아파오고 저며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모습은 말을 안 했다 뿐이지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적인 삶에서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고 잠잠히 놔두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로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적 가르침(impractical idealistic teaching)일까요? 정의를 부르짖고 공평함을 주장하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종상해법이 훨씬 맞아 보입니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공평하다고는 할테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한들 우리는 몇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선은 그렇게 시행했을 때 우리 모두가 장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상대방에게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살점 한 파운드를, 이빨 하나를 피 한방울 흘림 없이, 그리고 다른 기관의 손상 없이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더 큰 문제는 우리의 보복의 속성이 꼭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곳에 사용되는 말이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에게 이만큼 손해를 받았으니, 모욕을 이만큼 받았으니 나는 갑절 이상으로 되갚아주겠다는 심리입니다. 이빨 하나가 아니라 이빨 전체를, 눈 하나가 아니라 얼굴 전체를, 사람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 가족 전체를, 도시 하나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망하도록 하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꼭 동종상해만을 구별했던 구약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법이 상당히 인간적인 구석이 있기는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실적인 부분과 상당히 동떨어져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것도 시험입니다. 원래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믿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면 시험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우리 자신의 죄된 본성이 자꾸 충돌하기 때문에 시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우리의 본능을 따라 시험에 져서 신앙의 불구자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하지 아니하느냐?”(마태복음 5장 46-47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습이 예수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를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흐르고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의 피를 따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실천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그런 신앙인이 되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가 어렵다 말고, 힘들다 말고 주님께서 능력 주시는 대로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시고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삶 속에 직접 적용해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가 누구인지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말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은 잡은 생선을 구워다가 가져다가 베드로를 먹이고 그 유명한 대화를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을 치라.”(요한복음 21장 15절) 지금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베드로는 한때 천국 열쇠를 받을 만큼 큰 신앙고백도 하긴 했지만, 예수님 편에서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심지어 십자가를 질 때도 자신을 부인하고 철저히 침묵했던 베드로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고 그 배신감 때문에 다시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제자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주님의 양떼를 칠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히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을 뵐 낯도, 그럴 자격도 전혀 없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마치 ‘너는 나를 배신하였지만, 너를 원수처럼 여기지 아니하고 용서하노라. 너를 여전히 사랑하노라. 그리므로 네 양떼를 네게 맡기노라.”는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이미지를 받았지만, 우리 안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장 23-24절) 그리고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되셨습니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에베소서 2장 14-17절)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전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만큼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사랑 아래 있는 자격 없는 우리의 모습을 먼저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조지 허버트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부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상처나 고통을 감추고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용서하지 않아 과거 속에 여전히 묻혀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 멈춰 선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용서를 통해 우리가 과거로부터의 자유함을 누리고 우리에게 예비된 미래의 축복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용서하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는 원망도 우리에겐 큰 짐입니다. 용서는 어렵지만, 일단 하게 되면 그 짐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빚진 자의 모습(마태복음 18장 21-35절)과 같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현재 시가로 한 50만불 정도 되는)를 빚진 한 사람이 도저히 빚을 갚을 길 없었습니다. 임금은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다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이 사람이 울면서 다 갚겠노라고 했을 때, 임금의 마음 속에 갑자기 그 사람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임금에게 진 빚은 제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한 5000불 정도되는)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그 빚을 당장 갚으라고 아우성입니다. 친구가 꼭 갚겠노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을 임금의 신하들이 보았습니다. 임금이 다시 그를 붙잡고 책망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임금은 화가 나서 다시 탕감한 빚을 다 갚도록 그를 감옥에 넘겨 버렸습니다. 우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구요?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의 대상에 따라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합니다. 우리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정의를 핑계 삼아 우리는 용서를 잊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 말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장 35절)       

우리는 날마다 주기도문은 암송합니다. 주기도문 중에 “하나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먼저 용서의 책임을 부각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려고 하면 우리는 형제에 대한 용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처럼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를 실천하실 수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용서도 대단한 신앙의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더 큰 믿음은 우리에게 손해를 입히고, 모욕과 수치를 주었던,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이유 없이 깎아 내리고 늘 하는 일에 반대했던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되갚아 주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44절은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믿음의 아버지를 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살아 생전 보물처럼 노트를 쓰곤 하셨습니다. 다른 일엔 일체 비밀이 없으셨지만 오직 노트에 대해서는 함구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 되어서야 비로서 그는 노트를 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노트에 적힌 것은 가족들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이름이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생각했던 아들은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아버지의 노트를 보고 있구나." 그의 모습을 본 어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이 노트를 아세요?" 어머니는 그 노트를 들고 한 장 한 장씩 넘기면서 추억에 잠기시는 듯 했습니다. "이건 너희 아버지의 기도 노트란다. 매일 밤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리곤 하셨지." 청년은 다시 낯선 이름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분들은 누구신가요?"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신 분들이란다. 아버지는 매일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올리셨지." 생각만 해도 힘이 드는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기회입니다. 다음으로는 원수를 위해 숯불을 쌓는 실제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부터 21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 하시느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가 배고플 때 오히려 먹이고 마시게 하는 행위는 원수의 양심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집안에 불을 피우고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화로에 숯불이 꼭 필요한 데, 하필이면 원수가 숯불을 달라고 찾아왔을 때 그 화로에 가득 숯불을 채워 줌으로 인해 그것을 머리에 이고 가는 그가 가는 동안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얼굴이 화끈거림으로 인해 오히려 자기의 친구로 만들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꾸 상식과 본능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따라 이런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 중에는 아직도 여러분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던 과거의 원수들 때문에, 혹은 아주 가까이 있는 원수들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발 아래 있는 저희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용서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때늦은 회한이 아닌 말이 나왔을 때 용서를 구하고 다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 머리에 숯불을 쌓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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