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14, 2015

선교사의 삶과 인격 / 김명혁 목사

선교사의 인격과 삶 /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빌리 그래함 박사가 오래 전에 “전도의 전략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라는 말을 했다. “선교의 전략도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목회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필요한 것은 신앙과 소명과 영성과 지성과 감성과 재능과 더불어 ‘인격’과 ‘삶’이라고 생각한다. 은사 때문에, 삼손의 경우처럼, 사역을 망치는 경우도 있고, 지성과 감성과 재능 또는 재력 때문에 실수와 실패의 길로 가는 경우도 있다. 

1. ‘인격’과 ‘삶’을 겸비한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을 훌륭하게 수행한 예는 수 없이 많다

5세기 이후 아이랜드와 스콧트랜드와 영국을 복음화한 세 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표적인 공통점은 겸손하고 부드러운 ‘인격’과 착한 ‘삶’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아이랜드를 복음화했던 패트릭은 온유와 자비의 사람이었고, 스코트랜드를 복음화했던 콜럼바는 그의 이름 콜럼바(‘비둘기’)가 암시하는 것처럼 사람들과 동물들에 대해 부드러움과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던 온유의 사람이었고, 영국 노덤브리아를 복음화했던 아이단은 인자와 긍휼과 착함의 사람이었다. 콜럼바(Columba)의 온유한 성품과 인격을 역사가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콜럼바는 자기를 적대하는 자를 저주하며 싸울만한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동시에 불쌍한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까지도 자비를 베풀었던 인자한 성품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Latourette, Thousand Years, p.54). 브루스 교수는 콜럼바가 깊은 참회와 영적 변화의 과정을 거쳐 인자한 성품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며 콜럼바는 폭풍에 상처를 입은 학을 치료해준 일을 비롯하여 동물에게까지 많은 사랑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쇠약해져서 쓰러져 있을 때 말이 찾아와 슬퍼했다고 했다. (Bruce, The Spreading Flame, p.388). 

아이단(Aidan)은 인자와 긍휼과 착함의 사람이었다. 아이단의 선임 선교사가 아이오나에서 영국 노덤브리아에 파송되었는데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자기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노덤브리아 사람들은 도무지 길 들일 수 없는 완고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도저히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임 선교사가 된 아이단은 노덤브리아 선교의 실패는 그들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교사의 잘못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선교사는 모름지기 노덤브리아 사람들의 무지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알맞은 선교를 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아이단의 선교는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비결을 역사가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아이단이 소유했던 인자한 성품과 엄격한 신앙 생활의 모범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그의 선교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표했으며 노예들을 구속해 주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종사했다. 노덤브리아 사람들이 길들일 수 없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함께 모여 아이단의 설교 듣기를 즐겼다.” (Bruce, The Spreading Flame, pp. 406.).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뜨거운 기도와 함께 제주도 도민을 향한 부드럽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을 쏟아 부으므로 그들의 복음 사역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기풍 목사는 산 속 동굴 안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때려 눕힌 일도 있었다. 이기풍 목사의 성공적인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의 기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 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두 개의 새벽 별들이었다.” (필자의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pp.78,80). 

2. 선교사와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여건이 온유와 겸손의 ‘인격’이고 착한 ‘삶’인 것을 이미 주님과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해왔다. 세 가지 모토가 기독교 복음의 중심과 기초가 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세가지 모토에 약점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만’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말씀만을 강조한 나머지 말과 지식에 치우치게 되었고,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행함을 등한시 하게 되었고, 은혜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소홀이 하며 감정만 강조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인격과 삶을 약화시켰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마치 인본주의요 자유주의 인 것처럼 착각을 하기까지 했다. 예수님은 본래는 말씀이었지만 우리들을 위해서 인격과 삶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의 인격과 삶이 되셨다는 말이다. 온유 겸손한 인격과 착한 삶이 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물론 말씀도 하셨지만 우리를 위해서 용서와 사랑과 희생과 죽음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누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데오빌로 각하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예수님은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행하셨고 말씀 하시기 전에 먼저 사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라고 지적했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제자들더러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은 착한 행실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삶이라고 지적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이것은 사회 복음이 아니라 전도 복음이고 영광 복음이다. 사도 행전은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설교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된 것을 기록하지만 사실 그 길을 미리 예비한 것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부드러운 인격과 착한 삶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도르가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이미 복음 전파의 준비가 욥바에 마련되었고 고넬료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이미 복음 전파의 준비가 가이사랴에 마련되었다. 도르가의 착한 행실과 고넬료의 착한 행실이 하나님 앞에 상달된 제사가 되었다. 도르가와 고넬료의 착한 행실은 사회 복음이 아니었고 제사 복음이었고 전도 복음이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이전에 착한 사람이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행11:24). 디모데는 목회자 이전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훌륭한 인격을 지닌 착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인도주의적 인격이 아니라 목회자와 선교사가 지녀야 할 필수적인 자질이었다. 사도 바울은 후에도 디모데를 칭찬하면서 디모데만큼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깊이 생각할 인정과 사랑이 많은 착한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빌2:20). 

바울은 마지막 편지 마지막 장에서 착하고 선하고 인정과 사랑이 많은 디모데를 보고 싶어 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9).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속히 오라”(딤후4:21). 

사도 바울의 선교의 길을 평탄케 한 사람들로는 자기 자신들을 돌보기 전에 시간과 물질과 자신들의 몸까지 제물로 드렸던 너그럽고 착한 사람들인 디모데와 루디아와 브리스길라와 스데바나와 에바브로디도와 오네시보로와 누가 등이 있었는데 저들은 모두 부드러운 인격과 착한 삶을 지녔던 사람들이었다.

3. 지금 한국 교회와 선교지 교회에 필요한 것은 유창한 설교보다 정통 신학보다 뜨거운 체험보다 상처 입은 자를 품을 수 있는 겸손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격과 착하고 선한 사랑의 삶을 지닌 목회자와 선교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에 예수님 닮은 인격과 삶을 나타내 보여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인격과 삶을 더듬어 살피면서 주일마다 설교를 했다. 프랜시스, 브레이너드, 길선주, 이기풍, 최권능, 조만식, 이승훈, 유관순, 주기철, 손양원, 장기려, 한경직 등등 우리들에게 주신 신앙의 선배들의 인격과 삶을 더듬어 살피면서 얼마나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는지 모른다. 

여기서 한국 교회와 사회는 물론 세계에 깊은 복음적 감화와 감동을 끼친 한경직 목사의 겸손한 인격과 착한 삶의 일면을 살펴본다. 한경직 목사는 말이나 지식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이 아니라 겸손한 인격과 착한 삶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이다. 조향록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말이 설교하는 설교가 아니고 겸손과 기도의 인격이 설교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한숭흥 교수가 지적한 대로 한국 교회 안에 거의 모든 전도 운동과 자선 운동은 모두 한경직 목사의 손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한경직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며,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모든 사람의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사는 마음입니다.”(“예수님의 마음”). 
영락교회의 집사인 이우근 부장판사도 한경직 목사의 설교는 삶으로 설교하는 설교라고 지적했다. “사자후 같은 명 설교도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감동적인 웅변도 할 줄 모르던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는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 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에 소매가 닳아 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에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가장 안락한 아파트에 살 수 있었는데도, 바보같이 그것을 마다하고, '월셋방에 사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산꼭대기 20평짜리 교회사택에 들어갔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은 그의 말이나 지식이나 체험이 아니었고 그의 겸손한 인격과 착한 삶이었다. 
시인 고훈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기리며 "가난한 목자, 사랑의 목자, 작은 예수"라고 목이 메어 불렀다. "아무 말 없으셔도 무슨 일 안 하셔도 당신은 우리의 힘이셨습니다. 한 사람을 만인만큼 소중하게 만인을 한 사람 대하시듯 어떤 요구에도 거절 못하시고 누구의 의견에도 손들어주시고 단 한 사람에게도 섭섭함 주신 일 없으신 한국의 성자여, 한국의 작은 예수여! 모든 것 가지고도 아무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여. 우리가 오늘 여기 이토록 슬픈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 같은 목자는 하나도 없는 이 텅 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 입니다." 
김용기 장로는 한경직 목사의 인격을 높이 존경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 길은 한경직 목사님이 걸어오신 발자취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믿는다"고 지적했다. 
김준곤 목사는 "그분에게서 발견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따사로운 햇볕 같은 온화하고 인자한 인간성이다” 라고 지적했다. 
신현균 목사도 한경직 목사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기리면서 "1977년 8월 14일 오후 나는 한경직 목사님을 뵙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내 볼을 적셨고 또 내 손을 잡고 위로하는 말씀 한 마디에 내 심령은 크게 위로 받았으며 한없는 용기가 샘솟았다”고 회고했다. 
정진경 목사는 "그 분은 어떤 물욕이나 명예욕이나 사사로운 욕심도 없는 깨끗하고 청빈한 삶을 사셨습니다” 라고 지적했다. 
손봉호 교수는 한경직 목사처럼 청렴하고 철저하게 절제하는 성화된 삶을 산 사람은 "전 세계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평했다. 
평신도인 박호성 장인숙 부부는 한경직 목사의 청빈한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숙연한 행복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남한산성에서 뵈올 때에는 팔목이 헤진 쉐터를 입고 계셔 가난한 할아버지를 뵙는 것 같아서 그 검소함에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목사님을 생각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한경직 목사님과 같이 있으면 주님을 가까이 느끼며, 그 분을 닮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오늘날 선교지와 한국 사회에서 복음이 무시를 당하고 있는 중요한 원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주님 닮은 인격과 삶을 제대로 지니고 있지 못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극히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다음과 같은 ‘순교자의 노래’를 자주 부르면서 주님의 ‘인격’과 ‘삶’을 지닐 수 있기를 간절하게 소원한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그리고 금년도의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선교사의 인격과 삶”(마5:16)

<2006세계선교대회 선교전략회의(200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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