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16, 2015

성령 하나님

성령은 누구신가?

질문: 성령은 누구신가?

대답: 성령의 정체에 대해 잘못된 견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을 단순히 신비적인 힘으로 봅니다. 다른 이들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만 가능한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힘으로 봅니다.

그럼 성경은 성령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성령은 인격체이시며 생각, 감정, 그리고 의지를 지닌 존재라고 합니다.

성령이 하나님 되심은 여러 성경 구절에 나타나는데 사도행전 5:3-4도 포함이 됩니다. 이 구절에서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인 것에 대해 베드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령을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인격을 소유하였기에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예를 들면 성령의 무소부재하심이 시편 139:7-8에 나타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또 고린도전서 2:10-11에는 성령의 전지함이 나타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게다가 성령은 생각, 감정, 의지를 지닌 거룩한 인격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생각하고 아십니다 (고린도전서 2:10). 성령은 슬퍼하시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4:30). 성령은 우리를 위해 탄원하십니다 (로마서 8:26-27). 성령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리십니다 (고린도전서 12:7-11).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의 제 삼의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위로자와 상담사로 일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 26; 15:26).

방언의 은사는 무엇인가? 오늘날도 이 은사가 적용되는가?

질문: 방언의 은사는 무엇인가?

대답: 방언은 성령 강림절 (사도행전 2:1-4)에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사도들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지역 사람들의 말로 전달했습니다.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사도행전 2:11). 그리스어로 방언은 “언어”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언어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서 바울은 놀라운 은사들을 소개하면서 말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린도전서14:6).

사도 바울과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의 성격을 보면, 그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듣게 되어 유익이 되나, 그 방언이 외국어인 사람들에게는 방언이 번역되지 않는 이상 방언은 무용한 것이 됩니다.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 (고린도전서 12:30)은 그 방언이 자신의 모국어가 아니더라도 그 방언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통역하는 자는 그 방언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방언이 뜻하는 바를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고린도전서 14:13).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14:19).

그럼 오늘날은 방언의 은사를 어떻게 얘기합니까?

고린도전서 13:8을 보면 방언은 결국 그칠 것이라고 합니다. 13:10에 있는 “온전함”이 올 때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언과 지식의 말씀이 “그칠 것이다”와 방언이 “그치게 된다” 가 다른 시제로 표현되었음을 지적하고, 방언은 예언과 달리 그 “온전함”이 오기 전에 모두 사라질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아닙니다. 또 어떤 이는 아사야 28:11과 요엘 2:28-29를 증거로 들면서 방언은 다사올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4:22에서 방언은 믿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사인이 된다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 거부했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미 심판하셨기에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파괴했을 때), 방언의 은사는 그 때 멈추어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런 해석도 불가능하지 않지만, 방언은 멈추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방언이 이미 그쳤다는 성경말씀도 없습니다.

방언이 오늘날 교회에서 유용한 것이라면, 성경 말씀에 부합하여, 실제적이며 지식의 언어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10). 또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6-12). 또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신 말씀과 부합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린도전서 14:27-28).

그리고 고린도전서 14:33의 말씀과도 상충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시려고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은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데 있어 주권적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11).

상상해 보십시오. 선교사가 외국어를 학원에 가서 배우지 않고도, 성령에 의해 즉석으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약성경처럼 방언이 쓰인다면 말할 것도 없이 더 많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대다수의 신자들의 모습이 위에서 언급한 성경 말씀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볼 때, 방언의 은사는 이미 그쳤거나 혹은 아주 희소하게 쓰인다고 결론 내릴 수 있겠습니다.

성령 세례는 무엇인가?

질문: 성령 세례는 무엇인가?

대답: 성령 세례는 우리가 구원 받는 순간 하나님의 영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다른 신자들과 하나되게 하는 일로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성령 세례에 대한 핵심적인 구절은 고린도전서 12: 12-13과 로마서 6:1-4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은 말하길,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6:1-4 에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장은 특별히 하나님의 영을 언급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 위치하게 된 신자들을 말하고, 고린도전서 12장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말해줍니다.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를 견고히 하려면 이것들을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고린도전서 12:13는 다 성령을 마신 것 같이 모두가 세례를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둘째, 성경 어느 곳에도 신자들이 성령과 함께, 성령 안에서, 혹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거나 받으려고 해야 한다는 부분은 없습니다. 이는 모든 믿는 자들이 이러한을 경험을 했음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셋째, 에베소서 4:5 도 성령 세례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성령 세례는 “믿음이 하나”이고 “아버지가 하나”인 것 처럼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 세례는 두 가지 일을 합니다.

(1)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리를 연합 시킵니다. 그리고,(2)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동참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되었다는 것은 그와 함께 새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4).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2:13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이 적절히 기능하도록 영적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게 되는 초석입니다 (에베소서 4:5).

성령의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것은 죄악 아래의 삶을 떠나고 새 생명을 가능케 하기 위해 세워진 기반입니다 (로마서 6:1-10, 골로새서 2:12).


성령을 훼방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질문: 성령을 훼방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대답: 성령을 훼방한다는 말은 마가복음 3:22-30과 마태복음 12:22-32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훼방은 일반적으로 신성 모독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죄나 하나님과 관련된 사항들을 평가 절하하는 것들도 신성 모독입니다. 또한 하나님에게 악한 것을 전가시키거나 그 분의 선함을 부인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12:31의 “성령 훼방”은 보다 구체적입니다. 마태복음 12:21-32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성령을 힘입어 기적 베푸셨던 일을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에게 속한 일이었다고 합니다(마태복음 12:24). 이에 대해 마가복음 3:30에는 성령을 모독했다고 예수께서 아주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신성모독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이 아닌 귀신에 사로잡혔다고 고소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이 특수한 사건인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오늘날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기적을 성령이 아닌 사단의 힘이라고 증거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근접한 예로는, 구원 받고 삶이 변한 사람의 기적을 성령의 거함에 의한 영향으로 보기보다 사단의 힘으로 귀착시키는 것이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는 성령에 대한 훼방은, 사함받지 못하는 상태- 즉 불신가운데 계속 있는 것입니다. 불신가운데 죽은 사람에게는 용서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성령의 계속되는 감동을 무시하는 것도 사함 받지 못하는 신성모독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기록된 것을 기억하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같은 장에서 더 나아가면,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용서받지 못받는 유일한 조건은 “그를 믿는 자마다”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기사를 행하는 은사가 오늘날에도 가능할까?

질문: 기사를 행하는 은사가 오늘날에도 가능할까?

대답: 첫째,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적을 행하시는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지 않으시고, 말씀도 않으시고, 기적과 기사를 행하시지 않으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 질문은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에 쓰인 대로 기사를 행하는 은사가 오늘날 교회에도 아직 행해지는지 묻는 것입니다. 또 이는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기사에 대한 은사를 주실 수 있느냐는 능력을 의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오늘날 그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령이 그의 의사에 따라 은사를 자유롭게 주신다는 것을 온전히 인지합니다(고린도전서 12:7-11).

사도행전과 에베소서를 보면 대부분의 기적은 사도와 그들과 함께 했던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2:12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리스도의 모든 신자들이 표적, 기사, 기적들을 베풀도록 예비 되었다면, 그 표적, 기사, 기적들은 사도를 구별하는 증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22은 예수님은 기적, 기사, 표적들로 인정 받았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그들이 행했던 기적들로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사자로 표적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4:3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기적들로 인해 복음이 “증거”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은 성령의 은사를 제일 우선적인 주제로 다룹니다. 본문을 보면 일반적인 크리스찬도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12:8-10; 28-30).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흔한 경우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표적과 기사들로 사도를 인정했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능력을 행하는 은사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경우는 예외이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그 사도들과 함께 있었던 자들을 제외하고는, 성경 어느 곳에도 한 신자가 능력 행하는 은사를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초기교회에는 우리가 오늘날 보는 완성된 성경책이 없었다는 사실을 염두할 때 (디모데후서 3:16-17), 예언, 지식, 지혜의 은사들은 초기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꼭 필요한 은사였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사람들이 새로운 진리와 함께 하나님의 계시들을 소통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에 모두 나와 있어, 과거의 계시적인 은사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적어도, 신약에 기록된 정도 만큼의 기사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매일 놀랍게 사람들을 치유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음성이든,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든, 혹은 감동과 느낌을 통해서든 여전히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기적, 표적 그리고 기사들을 여전히 행하시며, 때로 한 신자를 통해서 이루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꼭 성령의 은사가 아닐 수 도 있습니다. 왜냐면 능력을 행하는 은사의 주 목적은 복음이 진리이며 또 사도들을 하나님의 참된 대사로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늘날 능력 행하는 은사는 멈추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왜 더 이상은 신약에 기록되었던 것 만큼 발생하지 않는지의 토재는 마련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질문: 언제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대답: 사도 바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12:23 말하길,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9은 성령을 소유하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에베소서 1:13-14는 성령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구원의 보증이 된다고 합니다.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날인)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세 구절을 보면 성령은 구원의 순간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고린도 신자가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다 한 성령을 마셨다고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심하게는 로마서 8:9에 성령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소유는 구원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가 됩니다. 또 성령을 구원의 순간에 받지 못한다면, 성령은 구원의 날인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1:13-14). 이 사실을 성경의 많은 부분은 구원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순간 보장되었다고 분명히 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성령 사역들이 혼한스러워하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 혹은 성령의 내주하심은 구원 받는 순간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현재 진행형입니다. 성령 세례는 구원 받는 순간 주어진다고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신자들도 있습니다. 이는 가끔, 성령 세례가 구원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성령을 받는다” 행동과 혼동될 때 발생합니다.

그럼 결론적으로 성령을 어떻게 받습니까?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서 받습니다 (요한복음 3:5-16). 그럼 언제 성령을 받습니까? 우리가 믿는 그 순간 성령은 나의 영원한 소유가 되십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

질문: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

대답: 이 시대에 말하는 성령 충만을 다룬 핵심 구절은 요한복음 14:16일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약속하시길 성령님이 믿는 자 안에 거하실 것이고 또한 영원히 내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내주)과 성령 충만함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영원한 내주하심은 어떤 특별한 믿는 자를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를 지지하는 많은 성경구절들이 있는데, 첫째, 성령은 예수 안에서 모든 신자에게 예외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물은 그리스도 안의 믿음 이외에 다른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37-39) 둘째, 성령은 구원 받을 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3은 성령은 구원 받을 때에 주어진다고 말하며, 갈라디아서 3:2도 성령의 인치심과 거주하심은 믿을 때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셋째, 성령은 신자 안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미래 영광을 입증하는 보증금 같이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2; 에베소서 4:30).

이는 에베소서 5:18에 있는 성령 충만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 온전히 순복해야 그 분이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실 수 있는데, 이 상태가 바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로마서 8:9과 에베소서 1:13-14 은 성령께서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근심하시기도 하시며 (에베소서 4:30)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님을 이렇게 계속 나두면,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한 성령님의 일하심과 능력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내 인생의 모든 부분을 성령님이 장악하시도록 자유롭게 해드리는 것 그래서 나를 인도하시고 주관하게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성령님의 능력이 나를 통해 나와서 내가 하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 풍성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함은 외부적인 행동들 뿐만 아니라, 행동을 주관하는 제일 깊은 생각과 동기들도 다룹니다. 시편 19:14은 말하길,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죄는 나를 성령 충만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것들을 뜻하며, 순종은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 모든 길들입니다. 에베소서 5:18의 명령대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데에 초점을 두어야 하지만,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가 성령충만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나의 순종만이 성령이 내 안에서 자유롭게 일하시도록 합니다. 우리는 죄성을 지닌 피조물이기에 항상 성령 충만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내 삶의 죄를 즉각적으로 다루어야 하고, 성령충만하고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위해 새롭게 헌신해야 합니다.


내 영적 은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질문: 내 영적 은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답: 내 영적 은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줄 어떤 마법같은 공식이나 은사 테스트는 없습니다. 성령님이 결정하시는 데로 나누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7-11). 신자들에게 흔한 문제는 자신이 받은 은사에만 전념해서 우리가 은사를 받았다고 믿는 그 영역내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려고하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것에서 그분을 순종하며 섬기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부르신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은사 혹은 은사들을 우리에게 갖추어 주실 것입니다.

영적 은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영적 은사 테스트만을 완전히 의지할 수 없지만 내게 가능한 은사들을 이해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확인도 내 은사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사람들은 나의 섬김을 통해 나 자신은 당연시 여기거나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사용되어지는 은사들을 발견해줄 수도 있습니다. 기도도 또한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영적 은사들로 준비되어있는지 아시는 단 한 분은 그 은사를 주시는 자 성령님이십니다. 기도를 통해 내가 어떤 영적 은사들을 가지고 있는지 성령님께 여쭈어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낳은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는 교사로 부르시고, 가르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또 섬기는 자로 부르시고, 돕는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나, 내 특정한 은사가 은사를 받지 못한 부분에서의 섬김을 제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영적 은사를 아는 것은 유익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내 영적 은사에만 매달려서 내 은사가 아닌 곳에서의 섬김의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까? 네 옳지 않습니다. 헌신된 것은 특정한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라면, 필요한 일에 쓰이도록 하나님께서 필요한 은사로 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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