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ugust 17, 2015

가정교회에 대한 신학적 연구에 대한 반론 / 정을기

[반론] 최은수 목사의 가정교회에 대한 신학적 연구에 대한 2010/12/01 (수)

최은수 목사의 “탈선과 방황의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식 가정교회에 대한 신학적 연구”에 대한 반론

I. 들어가는 말 몇일전 집에 배달된 크리스챤 투데이에서 최은수 목사가 쓴 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선정적이고 무자비할 정도로 휴스턴 서울 교회의 가정교회 시스템과 최영기 목사를 난도질(?)하는 기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문사 웹싸이트에 들어가서 전문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최은수 목사의 비판에 많은 문제점과 왜곡된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본인은 2002년 휴스턴 서울 교회가 주최한 가정 교회 세미나에 참석하였고 2주간에 걸친 탐방기간 동안 가정 교회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목장 모임들에 참석하여 직접 보고 듣고 여러 목자들과 개인적인 면담을 통해 동 시스템이 현대교회에 가장 적합한 교회 조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신약성서 신학을 전공한 목사로서 가정 교회 시스템이 성서적, 복음적, 역사적인 면에서 신학적으로 건전한 시스템이라는 진단을 한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문제는 이 제도를 어떻게 개교회의 Context에 맞도록 Adjust해서 정착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각 교회 담임 목사들이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본인도 2002년 봄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에 부임한 이래 가정 교회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해 많이 struggle하면서 애를 쓰고 있다. 때로는 정착의 어려움 때문에 회의도 오지만 그러나 이 제도가 성도들에게 가장 유익을 가져오는 시스템중 하나라는 확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최 은수 목사의 문제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기도 해야 겠지만 이로 인한 부정적인 여파가 교계 특히 가정 교회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교회에 상상외로 크게 미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일로 정말 바쁜 시기이지만 반론을 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고 두 번째는 최은수 목사의 글중 문제가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논증하고 세 번째는 최은수 목사의 문제점을 다루기로 한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가정 교회에 대해 바른 판단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글이 되기를 바란다.

II. 교 회

1. 교회란?

세상에는 두 개의 영적인 공동체가 있다. 사단을 머리로 하는 세상과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이다. 인간은 사단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교회로 소속이 옮겨진다. 예수님은 자기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 자백한 모든 죄를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씻으시고 죽은 영적인 생명을 성령으로 다시 살리신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성도 두사람 이상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모임이 교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 교회의 존재

목적 교회가 목표로 하고 추구해야 할 일은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는 영적으로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그들을 교회안으로 이끌어 드리는 전도와 선교를 통한 영혼 구원이다. 두 번째는 교회안으로 들어와 구원받은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는 일이다.

3. 교회의 조직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다. 베드로등 사도들의 전도로 하루 3천명, 5천명씩 주님께로 돌아온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중에는 과부들도 섞여 있었다. 당시 과부들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유대교 성전 당국에서는 이들에게 구제금으로 하루 동전 두닢씩을 주었다. 이는 두끼 식사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교회로 가게 되자 성전 당국에서는 이들을 출교시키고 구제금 지급을 중단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가 대신 과부들에게 매일 구제금을 지급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행정적으로 구제 대상 과부들에 대한 자료 정비가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구제를 하다보니 구제에 빠지는 과부들이 발생하게 되고 이로 인해 교회안에서 원망의 소리들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사도들은 구제의 일을 담당할 사람들 즉 집사들을 교인들로부터 천거받아 안수하여 이들에게 구제의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따라서 집사는 목회자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교회의 행정적인 부분들을 맡아 목회자들을 돕는 봉사의 일을 위해 선출된 자들이다.

4. 성도들의 양육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영적인 양육을 위해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 하는자, 목사와 교사같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주셨다 (엡 4:11).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나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도록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이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었을 때 이루어 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는 것 즉 예수님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이다. 이 지식은 매일의 삶가운데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얻게 되는 지식으로서 이 지식이 증가하면서 성도들의 삶이 변화 즉 성장한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체험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 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고 사용되었다.

그러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적합한 훈련 방법이 무엇일가? 고민하던 목회자들이 제시한 방법이 소그룹 모임을 통한 제자 훈련이다. 구역예배 모임, 순 모임, 목장 모임등 명칭은 다르지만 다 같은 맥락에서 제시된 소그룹 제자훈련 시스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하야 할 것은 성도를 변화시키는 분은 시스템이 아니라 성령님이라는 것이다. 성령님은 교회의 훈련 시스템을 사용하신다. 시스템은 성령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에 어떤 시스템이 성령님이 역사하시기에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인가를 기도하는 가운데 찾아서 그 시스템으로 교회를 조직하여야 한다.

그때 성령님은 가장 효과적으로 준비된 시스템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는 성령님과의 동역 (고전3:9)이 된다.

5. 휴스턴 서울 교회의 가정 교회

최영기 목사는 기존의 제시된 제자훈련 방법에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성도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은 늘어 가는데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 목회자중 하나였다. 그는 예배중심적인 모임, 성경 공부 중심적인 모임 보다는 삶을 나누고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open하여 서로 나누고 합심하여 함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모임의 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본 시스템이 가정 교회 시스템이다.

그는 가정 교회를“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집에서, 6-12명이, 매주 한번 이상 씩 모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 (예배, 교육, 교제, 전도와 선교 )을 다하는 공동체"로 정의한다. 그는 이 시스템으로 교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시스템이라는 증거가 가정 교회 모임등을 통해서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모임에 영적인 생기가 돌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마음이 하나가 되어 기도하여 응답받고 성도들의 삶이 변화하는 모습등은 성령님께서 Powerful하게 역사하신다는 증거로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최 목사는 이 시스템을 여러 교회들과 나누게 된다. 그리고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

그런데 가정 교회에 대한 비판도 일어났다. 그중의 하나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목회자도 없는 성도들의 모임에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성서적이냐는 질문이다. 물론 성서적이다. 교회가 성도들의 모임이고 그 중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 신학을 한 목회자가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목회자로부터 훈련받은 평신도가 교회에서 제공하는 자료와 지침에 따라 자기가 맡은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은 잘못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성숙한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목장 모임에서 성도들 이 서로의 마음을 열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문제들을 꺼내 놓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비를 넘어 목장 식구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삶을 진솔하게 나누고 서로 돌보는 장으로 발전되었을 때 성령께서 powerful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장이 마련되고 목장은 성령으로 충만한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이루어짐을 경험한다.

따라서 가정 교회 시스템은 지금까지 제시된 여러 시스템보다 한 단계 진보된 귀한 시스템이라는 평가를 받아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고 본다.

III. 최 은수 목사의 주장과 반론

1. 주장 : “최영기 목사는...‘가서 제자를 삼아’라는 부분을 ‘제자를 만들지 않는 교회는 교회간판을 내려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성경은 적용의 독특성과 보편성이 있다. 이 본문은 이 둘 다를 포함한다. 백번 양보해도 이런 식의 주장은 논리적 비약이다.”

반론 : 마28:19절의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은 20절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고려할 때 최은수 목사의 말대로 독특성과 보편성 둘다 포함하고 있는 명령으로서 11제자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주신 명령이다. 즉 Normative한 명령이다. 그렇다면 모든 족속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일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의 주요한 사역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제자를 만들지 않는 교회는 교회 간판을 내려야 한다"는 말은 표현이 좀 과격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주관적인 성경 해석의 오류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 주장을 "다분히 자의적이며 주관적인 성경해석의 오류이고...논리적인 비약"이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 참고 : 성경은 Normative (규범적)한 요소와 Cultural (문화적)한 요소가 섞여 있다. Normative한 요소는 진리적인 요소를 말하는 것이고 Cultural한 요소는 특정 시대와 문화와 지역적인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Normative적인 말씀이다.
이 말씀은 진리로서 불변하는 말씀이다. 그러나“거룩한 입 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Cultural한 것이다. Cultural한 말씀은 그 시대에 그 지역 문화에 맞추어서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문화가 다른 곳에서는 그 지역 문화에 맞추어서 adjust할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입 맞춤대신 악수를 하는 것이다.

2. 주장 : “아울러 최영기 목사는 교회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 비신자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찾아 갈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자신의 교회에서는 기존신자들의 유입을 가능하면 막으려 한다고 하면서...목회의 순수함이 느껴져 좋아 보이지만...순수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반론 : 최은수 목사는 보편성과 독특성을 말하면서 독특성을 보편성의 기준에서 계속 비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최 영기목사의 주장은 독특성의 기준에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최 영기목사의 주장은 right or wrong 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최 영기목사의 독특성적인 주장을 보편성적으로 해석하려는 최 은수 목사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비판하는 태도가 정당하지 못하다.

현실적으로 교회생활을 오래한 사람치고 주변에 대부분 신자들만 있는 것이 현실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불신자의 경우는 주변이 대부분이 불신자들이다. 따라서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인데 그 말의 의미는 제쳐두고 말 꼬리를 잡아 비판하는 태도라든다 "기존 신자의 유입을 가능하면 막으려 한다"는 것이 "목회의 순수함이 느껴져 좋아 보이지만.... 순수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라고 자의적으로 상대방의 의도까지 의심하는 해석을 하여 인신 모독적인 공격을 하는 것은 선의적인 비판이라기 보다는 독소적인 악의가 포함된 비판같아 마음이 아프고 공감하기 힘들다.

3. 주장 : “최영기목사는 마가복음 3장13절-15을 통해 ‘'듣고’'가 아닌 ‘'보고’' 배우게 하는 가르침을 주장한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를 통해 보고 배우도록 하시기 위함이라고 단정한다. 이런 식의 해석을 보면서 그의 가정교회에 대한 전제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그의 해석이 전혀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전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본문, 즉 텍스트를 이용하는 습관은 좋지 않다. 최영기목사는 ‘'보고’'를 통해 삶을 강조 하는데, 실제로 예수님은 12제자를 부르시고 먼저 ‘'듣도록’' 하셨다."

반론 : 최은수 목사의 주장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자신이 최 영기목사에 대한 부정적인 안경을 쓰고 계속적으로 잘못되었다고 공격하는 동일한 오류에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은수 목사는 최 영기목사가 가정 교회에 대한 presupposition을 가지고 성경을 eisegesis 했다고 주장하는데 오히려 최은수 목사가 최 영기목사에 대한 부정적인 안경을 쓰고 최 영기목사의 주장을 eisegesis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최 영기목사는 어디에서도 "보고"와 "듣고"의 둘 중에서 “보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가 "듣고"보다 더 powerful한 교육 방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교육 효과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에게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훨씬 교육 효과가 크다는 것은 상식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고사성어도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비상식적인 기준으로 공격하는 것은 비 이성적이며 비정상 적인 행동이다.

* 참고 : Eisegesis란 신학적으로 Exegesis (석의)에 반대되는 말씀이다. Exegesis 는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을 밖으로 해석하여 내는 것이라면 Eisegesis는 내 생각을 성경 본문에 집어 넣어서 해석하는 것이다.

4. 주장 : “최영기 목사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성경해석의 절정은 에베소서 4장11절-12절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이 본문을 통해 목회자의 역할과 목자와 집사를 포함한 평신도들의 사역을 구분한다. 최영기목사는 이것이 ‘'성경적인 분담의 사역’'이라고 강변한다. 더 나아가 그는 ‘'많은 전통적인 교회가 힘을 잃고 있는 것은 이러한 성경적인 사역의 분담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무리한 주장을 하는데는 ‘'성도’'라는 말과 ‘'봉사’'라는 그리스어가 집사 용어와 같다는데 있다. 아무 전제없이 정상적인 시각에서 본문을 살펴보자. 11절은 예수께서 어떤 사람들을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로 교회에 주셨다고 하신 말씀이다. 12절은 주님께서 자신이 부르신 사역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운 사람들을 잘 교육시키고 준비시키게 하셨으며, 봉사의 사역이 중단없이 진행되도록 하셨으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설해 나갔다는 말씀이다. 이 구절을 통해 어떻게 목회자와 평신도의 사역 분담을 논할 수 있겠는가? 최영기목사는 ‘'목회자들에게 할 일을 다 빼앗겼기 때문’'에‘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보람있는 사역’'을 찾을 수 없다고 억지를 부린다. 가족교회 논리를 합리화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억지로 풀어도 된다는 말인가!”

반론 : 이 부분은 중요하기 때문에 한 문장으로 되어있는 엡 4:11-16절 성경 본문을 살펴 보면서 다루기로 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1-16 본문에서 주동사는 11절 “주셨다”이다. 주님께서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즉 교사를 주셨는데 그 이유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만들어 봉사의 일을 하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면 성도들이 어떻게 온전히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됨”을 통해 이루어진다.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는 “아는 것” 으로 번역된 “Epignosis"라고 하는 단어이다. 헬라어에서 "안다"는 단어로 “Gnosis”와 “Epignosis” 두 단어가 쓰였다. “Gnosis”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고 "Epignosis"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짜장면 메뉴를 아는 것은 “Gnosis”이고 짜장면을 먹어보고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Epignosis”이다. 따라서 신앙의 성장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아가는 방법을 통해 성장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르는 것이다. 본문은 사역자와 성도를 구분하고 있다. 사역자의 임무는 성도를 온전하게 만들어 교회안에서 봉사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사역자들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만드는 일이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을 통해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으로 성장하도록 훈련받아 온전하게 되어 교회를 섬기며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성도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역자들에 의해 온전한 자들로 훈련받고 교회안에서 봉사의 일을 맡아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을 해야 한다. 운동 경기로 비유하면 사역자는 감독 코치이고 성도들은 선수라는 말이다. 그런데 만일 사역자들이 성도들을 온전한 자들로 훈련시켜 봉사의 일을 맡기지도 않고 오히려 성도들이 해야 할 봉사의 일을 맡아서 한다면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이는 마치 감독 코치가 선수들 대신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것과 같다. 이런 측면에서 최영기 목사가 전교인 봉사자화의 기치를 내걸고 전 성도들이 봉사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해서 일을 맡기는 것과 가정교회를 통해 전 성도들이 삶을 나누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도록 돕는 것은 지극히 성서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사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은수 목사는 12절의 “성도들”을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운 사람들”로 해석하면서 이를 집사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봉사라는 그리스어가 집사 용어와 같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ergon tou diakonias, 봉사의 일”은 일반적으로 교회안에서 봉사하는 일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집사의 일”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전 성도”가 아닌 “집사”을 온전하게 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이 목회자들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여성 명사인 diakonias (봉사)는 남성명사인 diakonos (집사)와 구분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은수 목사가 “봉사의 일”을 “집사의 일”로 번역하는 것은 분명한 오역이다. 더 나아가 본 pericope (단원)의 context에서 볼 때 “성도들”은 전 교인을 가리키는 말이지 일부 교인 즉 “집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는 일부 성도가 아닌 전 성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은수 목사는 봉사를 집사로 오역한 본문을 근거로 전 성도를 봉사자로 훈련시키는 최 영기목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바른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전 성도들이 교회의 지체로서 몸된 교회를 섬기도록 훈련시키는 최 영기목사를 “억지로 성경을 푸는 목사”로 폄하하고 있다.

5. 주장 : “상충되는 논리를 주장함으로 스스로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최영기 목사는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우리는 당시의 교회 형태가 가정교회였음을 발견’'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가정교회라는 전제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성경의 중요한 언급들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사도행전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한 후 삼천명정도가 회심하였다. 2장46절에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는 말씀이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Temple Courts)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모일 수 있는 곳이었다. 적어도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울러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교회의 집회처가 특정인의 가옥이 되었다는 점은 최영기목사가 주장하는 가정교회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반론 :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그런데 그 다음에 “집에서 떡을 떼며”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글 성경에는 단수로 “집”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원문을 보면 “te kata oikon, from house to house”로 되어 있다. 그래서 킹 제임스 성경은 “from house to house”로 NIV에서는 “in their homes”로 번역을 했다. 이 말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전에서 전체적으로 모임을 가졌지만 그들의 집에서도 모였다는 것이다. 또 한 집에서만 모인 것이 아니라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면서 모였다. 이 모임은 교회 전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모임이 아니고 소그룹 모임이었다. 그럼 그곳에 모여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떡을 땠다. “떡을 땠다”는 표현은 성찬식을 행했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어법이다 (행 20:7; 고전 10:16). 그리고 그들은 식탁의 교제를 나누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가졌다. 따라서 각 가정에서 돌아가면서 모인 모임들은 오늘 날의 구역 모임이나 가정 교회 모임등으로 보아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초대교회 당시 가정 교회 형태로 각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주장은 비 성서적이 아니며 지극히 성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은수 목사는 “최 영기목사가 성도들이 성전에 모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했는데 만일 그 주장이 맞다면 최 영기목사가 담임하는 휴스턴 서울 교회는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최 영기목사는 엄연히 휴스턴 서울 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가정교회 성도들은 휴스턴 서울 교회에 소속이 되어 활동하고 있고 교회 중심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모습과 전혀 다른 점이 없다.

6. 주장 : “2.2. 가정교회의 태생적 탈선의 두 번째 유전인자 : 역사성의 치명적 오류 첫째로, 역사성의 치명적 오류는 신약적 원형교회를 추구하는데서 기인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신약성경시대로 돌아가자’' ‘'신약교회의 회복’' ‘'성경적인 교회의 회복’' 등의 모토가 자주 등장한다. 교회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필자에게 이러한 말들은 가장우려가 되는 표현들이다. 왜냐하면 2천년 교회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아니면 하나의 운동차원에서 위험하게 외쳐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정신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도가 초래할 혼란이 문제다. 기독교의 생명은 역사성이다. 역사성이 제외된 성경은 허구나 미신에 불과 할 것이다.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는데 드는 대가 치고는 너무나 크고 치명적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세계최초의 교회가 세워지면서 성령없이 교회 없다는 등식을 갖게 되었다. 성령께서 함께하지 않았다면 역사적인 교회는 일찌감치 명멸했을 것이다. 16세기종교개혁이후‘'오직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정신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로마카톨릭이 성경과 교회 모두에게 동등한 권위를 부여함으로 초래된 교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종교개혁가들이 ‘'오직성경’' 이라는 원칙을 중심으로 바로 잡고자 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의 ‘'오직성경’' 원칙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더불어 생명력을 유지해 온 교회의 역사를 무시하고 원시적인 신약교회로 돌아 가겠다는 발상이 결코 정상일 수 없다.”

반론 : 기독교의 생명이 역사성이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최은수 목사의 주장은 3가지 측면에서 진단되어야 할 기독교를 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편견적인 주장 때문이다. 기독교가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성서적(biblical), 복음적 (Evangelical), 역사적(historical)으로 진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2천년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많은 부분이 왜곡 되었다. 그러면 이 왜곡된 부분을 누가 바로 잡았는가? 바로 개혁자들이었다. 무엇으로 바로 잡았는가? 성경으로 바로 잡았다. 개혁자들은 역사를 통해 물려받은 교회의 유산이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외친 것이다. 카톨릭 교회에 의해 왜곡된 비 성서적인 많은 부분들이 종교개혁을 통해 많이 바로 잡혔다. 그러나 아직도 더 개혁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개혁하자는 구호와 함께 현대의 오염된 신앙에서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호는 교회가 성경에 더 가까운 교회가 되기 위한 “개혁적인 구호”이지 최은수 목사의 말처럼 “원시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아니다. 그리고 최은수 목사는 “오직 성경”을 주장하면서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가장 우려되는 표현”이라느니 그럼 “원시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냐”라고 비판하는 것은 최은수 목사의 논리에 모순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최은수 목사의 주장대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외쳐서는 안될 우려되는 구호라면 종교 개혁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운동이다. 따라서 최은수 목사는 과거의 개혁자들은 옹호 하면서 현재의 개혁자들은 전통에 도전하는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매도하는 자아적 모순에 빠져있다. 그리고 최은수 목사는 “성경에 더 가까이 가자”는 구호를 마치 전통에 도전하는 위험한 행동으로 보고 개혁에 대한 주장을 포스트모던이즘적인 측면에서 보는 아주 위험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7. 주장 : “신약성경의 원형교회는 소위 평신도가 아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전문사역자(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체계를 잡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오시기 전부터 하나님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을 예비하셔서 장로들을 지도자로 삼아 체계있게 유지케 하셨다. 예수님의 사역당시에도 수많은 회당들이 존재 하였고, 중앙조직인 대산헤드린공의회를 비롯하여 각지에 소 산헤드린 공의회가 있었다. 이 역시 장로들이 지도자였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기독교회로 수 많은 회심자들이 유입되었는데,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다수의 장로들도 포함되었다. 역사적 교회의 탄생을 위해 예수님은 12사도를 가까이에서 훈련시키셨고, 70여제자들을 비롯하여 사역자들을 예비하셨다.

반론 : 최은수 목사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원형교회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전문사역자(목회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산헤드린과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장로들이었다. 이들은 오순절 교회의 탄생과 함께 교회에 들어와 예수님께서 교회의 탄생을 위해 예비해 두신 12사도와 70여 제자들과 함께 교회 지도자들의 위치에서 일사분란하게 체계를 잡아 나갔다. 그런데 이 주장은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설득력이 없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크게 3부류가 장악하고 있었다. 사두개파를 중심으로 한 제사장 그룹,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룹, 백성들의 대표격인 장로 그룹이다. 이 3그룹이 중심이 되어 산헤드린을 구성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유대교에서 출교하기로 결의한 자들이었다 (요 9:22). 마 16:2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주인공들중 한 부류가 장로들이었다 (마 26:47, 57, 27:12, 20, 41 and pars). 그런데 이런 장로들을 하나님께서 교회의 지도자로 준비시키셨다는 주장은 받아드리기 곤란하다. 아마도 최은수 목사는 행 15장에 나오는 교회 장로들을 염두에 두고 이런 주장을 펴는지 알 수 없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장로들은 유대교에 소속된 장로들과는 다르다.

8. 주장 : “이 당시 초기형태의 삼중직제가 있었는데 사도, 선지자, 교사등이다. 이들은 카리스마틱한 성격을 띄고 있었다. 초대교회가 빠른 속도로 팽창하면서 후기형태의 삼중직, 즉 감독(목사), 장로, 집사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신속하게 바뀌었다. 초대교회 당시 이 직분들은 모두 목회직의 성격이 강했다. 다시말해 감독, 장로, 집사 모두 소위 가정교회가 아닌 역사적 지역 교회의 담임사역자로 섬겼다는 사실이다.”

반론 : 최은수 목사는 “초대교회에서는 집사도 역사적 지역 교회의 담임사역자로 섬겼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성경 어디에도 집사가 지역 교회의 담임 사역자로 섬겼다는 기록은 없다. 최초로 집사를 선출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이다(행 6:1-6). 선출 목적은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전하는 사역을 제켜놓고 과부들을 구제하는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느껴 평신도들중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7명을 뽑아 과부들 구제하는 일을 위임하여 사도들을 돕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집사는 교회에서 봉사의 직분을 가지고 담임 목회자를 돕는 평신도이지 담임 목회자가 아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바울은 감독(목사)와 집사를 구분하여 자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최은수 목사의 주장은 비성서적인 위험한 주장이다.

9. 주장 : “종교개혁가들은 최대한 신약교회의 모델에 충실하면서 목사, 장로, 집사직을 도입하였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회들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직분의 구조적 틀이다. 종교개혁의 대원칙인 모든 직분의 평등성이 근간을 이룬다. 하지만 교회의 질서를 위해 기능적으로 신학을 수련하여 전문 목회자가 되는 목사와 여타의 직분이 구별되었다....휴스톤 서울교회식 가정교회는 이런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향이다. 최영기 목사의 왜곡된 주장과는 완전 다르게, 신약 교회의 탄생을 위해 전문사역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무시하거나 왜곡해서는 안될 일이다.”

반론 : 최은수 목사는 목사, 장로, 집사직을 신약교회의 직분의 구조적 틀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 3중적 구조를 Normative한 구조로 보고 이 구조를 허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휴스톤 서울교회식 가정교회와 관련된 논란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최영기 목사님이 다른 것도 아닌 교회의 구조(Structure)를 건드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첫째 이 3중적 교회의 구조가 과연 신약 교회의 Normative한 구조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성경은 목사-장로-집사의 3중적 구조보다는 오히려 목사(감독, 장로)-집사의 2중적 구조를 더 빈번하게 말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집사를 선출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평신도 장로를 세우는 장면은 어느 곳에도 없다. 오히려 장로가 목회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구절들이 많이 나타난다.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로 표현하고 있고 (벧전5:1) 바울은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한 후 장로를 세워 교회를 목회하게 하였으며 목회서신에서는 목사에 대한 언급은 없고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는 장로에 대한 언급은 있다. 그래서 침례교회의 경우 목사, 감독, 장로를 목회자에 대한 다양한 표현으로 보고 장로제도를 받아드리지 않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최은수 목사가 목사-장로-집사의 3중적 구조의 틀을 normative한 직분의 구조적 틀로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가정 교회 제도가 기존의 교회 구조를 허무는 것으로 보고 해체주의까지 운운하며 공격하는 것은 무지하고 독선적인 행동이 아닌가? 그리고 최은수 목사는 교회 구조가 normative한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cultural한 산물임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교회 구조가 Cultural한 것이라는 증거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현재 개신교회의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개신교 안에는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오순절등 여러 교단들이 있다. 그런데 각 교단마다 자체적인 교회 구조가 있다. 만일 교회 구조가 normative한 것이라면 개신교는 하나의 교단에 하나의 교회 구조로 통일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조를 깨는 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여야 한다. 그러나 개신교안에서 어느 교단도 타 교단이 우리 교단과 교회 구조가 다르다고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는다. 교회 구조는 cultural한 것으로서 각 교회의 형편에 맞도록 조직되는 것이 성서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 구조를 normative한 것으로 보는 교회가 있는데 바로 카톨릭 교회이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개혁을 하고 나간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 즉 이단이라고 하며 카톨릭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최은수 목사는 본인은 부인할지 모르지만 지금 카톨릭 교회가 개신 교회를 보는 동일한 시각으로 최 영기목사를 보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IV. 최은수 목사의 문제점

1. 접근 방법의 문제점

가정 교회는 기독교 교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화를 위한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접근이 되어야 한다. “제자를 만들어라”는 주님의 명령이다. 그러나 어떠한 교회 구조로 성도들을 제자화 시킬 것인가는 Context에 따라 달라진다. 구역 모임, 순 모임, 소그룹 모임, 부흥회, 세미나등 다양하다. 가정 교회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최은수 목사가 가정교회만을 들어 공격하는 것은 서울 침례 교회가 교회의 조직 (목사-장로-집사)이 없는 소그룹 모임을 가정교회라고 호칭함으로 교회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이고 그 후에 모임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교회 조직이 만들어 진 것을 감안할 때 조직의 유무가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교회의 조직을 갖추지 못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그 잣대로 교회를 판단하는 최은수 목사의 잘못된 교회관이 문제인 것이다.

2. 교회 구조에 대한 오해

교회 구조는 Normative한 것이 아니라 Cultural한 산물이기 때문에 Context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예를 들어 요한 웨슬레에서 시작된 구역 방식이 잘 맞는 지역이 있고 사랑의 교회의 순 모임의 제자훈련 소 구룹을 선호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휴스턴 서울 교회의 가정 교회식 모임이 크게 효과를 발휘하는 지역도 있다. 문제는 어느 시스템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은수 목사는 가정 교회 제도를 규범적으로 보고 최 영기목사가 교회 구조를 건드렸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허무는 일을 한다고 공격하고 있다. 이는 교회 구조를 규범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무지에서 나온 주장이다.

3. 논쟁의 방법의 문제점

최은수 목사의 주장은 가정교회가 성서적, 역사적, 정통적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논쟁의 대상을 가정 교회에 대한 문제점으로 제한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는 최 영기목사의 개인적인 신앙과 인격적인 부분들까지 논쟁의 대상으로 삼아 공격하고 있다. 이는 논쟁자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4. 잘못된 성경 해석

최은수 목사는 이미 살펴 본대로 본인식 성경 해석으로 얻은 결론을 가지고 바른 성경 해석위에서 사역하는 최 영기목사를 공격하고 있다.

5. 최은수 목사의 도덕성 문제

1> 최은수 목사는 스스로 왜곡한 자료를 가지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다. 그는 “최영기 목사는 ‘성경이 없으니까 직접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라고 주장한다. 이 또한 초대교회 역사에 대한 무지요 왜곡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말은 최영기 목사가 초대교회가 아니라 중국 지하교회의 실상에 대해 말하면서 한 말이다. 그런데 최은수 목사는 최 영기목사가 중국교회 context에서 한 말을 초대교회 context에서 한 말로 둔갑시켜“초대교회 역사에 대한 무지요 왜곡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2> 최은수 목사는 “최영기목사는 ‘신약 성경시대에는 모든 성도가 다 평신도이고, 모든 성도가 다 목사였다’고 단언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최 영기목사의 저서 어디에도 이런 말은 없으며 본인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즉 최은수 목사는 없는 말을 만들어 상대방을 공격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3> 최은수 목사는 윤석전 목사에 관한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 상당 부분을 할애하면서 윤 목사가 이단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최 영기목사가 윤목사의 이단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처럼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최영기 목사는 남침례교 총회 세미나 강사로 초청된 윤 목사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윤목사의 기도시간에 대한 간증적인 말을 듣고 나도 기도 많이 해야겠다는 도전을 받았다는 말을 한 것뿐인데 이를 마치 신앙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최교수가 선한 양심을 가진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인지 심히 의심스럽게 하는 부분들이다.

V. 나오는 말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최 은수 목사의 주장은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어 진실과 거리가 멀고 잘못된 성경 해석과 신학적인 지식의 부족 그리고 개인적인 도덕성의 문제점까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런 글이 대중 매체인 기독교 신문에 게제가 되어 최영기 목사개인의 명예와 휴스턴 서울 교회 그리고 교계에 끼친 피해는 심각하다고 본다.

최 은수 목사가 교계의 영적인 지도자로 존경을 받고 있는 최 영기목사의 명예 홰손에 대한 부분을 인정하고 이를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것은 개인적인 일로 본인의 양심에 맡기겠지만 가정 교회 제도를 도입하여 성도들을 제자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많은 개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찬물을 끼얹고 악영향을 끼친 행동은 모든 교회앞에 사죄하고 주님앞에 회개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최 은수 목사 스스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허점 투성이인 이런 선정적인 글을 사전에 검토없이 무분별하게 게제한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사도 교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일에 대하여 사과하고 앞으로 좀 더 신중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2010. 11. 18

정을기 목사, Ph. D. 정을기 목사는 Texas Fortworth에 있는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하였으며 (M-divbl, Ph.D.) 동 신학대학원에서 4년간 신약개론을 강의하였고 지금은 North Carolina, Charlotte에 있는 온나라교회 담임이다.
(www.onnarachur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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