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1, 2018

회심과 회개

1. 회심과 회개의 구분

먼저 성경이 말하는 회개(悔改, Repentance)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회심(回心, Conversion)과의 차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회개와 회심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누리는 구원(救援, Salvation, redemption, deliverance)을 제공하는 뿌리입니다.

보통 구원은 크게,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구원,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구원, 그리고 영화(榮化, glorification)의 구원으로 구별합니다.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2. 칭의의 구원과 회심

로마서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in Christ)'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으로 구원를 얻는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공로가 칭의의 구원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칭의'는 법정 용어로서 한자로 부를 칭과 의로울 의를 사용하여 흔히 '의롭게 됨'이라고 이해되지만, 더 정확한 성경적인 의미는 '의롭다고 부름 혹은 불리워짐'입니다.

칭의의 구원은 불신자가 성령의 은혜로 마음을 돌이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옛 사람을 버리고 전인격적인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어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칭의의 구원에는 아래와 같은 좀 복잡한 절차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인(불신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전에 먼저 선택하시어 불러주시고(소명), 거듭나게 하시고(중생), 죄인 임을 깊이 깨달아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고(회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믿음), 이에 따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연합), 이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부르시고(칭의), 자녀로 삼아서(양자), 하늘 나라 백성(성도)이 되게 하십니다.

칭의의 구원에서 마음을 전적으로 돌이키는 것 곧 '회심'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합니다.

회심은 성령께서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인정하여, 전인격이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심은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게 될 때에, 진심으로 죄를 누우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로 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회심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마귀에게서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한 사람이 소속되었던 신분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회심의 주체가 누구인가?

칭의의 구원을 얻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자난 2천 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산앙(학)의 논쟁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섭리)만이 칭의의 구원을 주실 수 있다는 칼빈주의, 그리고 복음을 듣는 인간이 자유 의지를 통해 결단해야만 칭의의 구원를 받을 수 있다는 알미니우스주의로 나뉘어 집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 혹은 신앙(Reformed theology or belief)은, 철저하게 칭의의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불순종으로 전이된 원죄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부패한 영과 몸을 가지게 되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결코 이를 수 없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찾아 오셔서 마음을 돌이키도록 하실 때에,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로 돌이킬려는 마음 곧 회심으로 반응하게 하게 되기에,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게 하는 칭의의 구원은,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한 인간은,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 오셔서 회심하게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가 없기에, 개혁주의 신앙은 철저하게 칭의의 구원에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을 인정하는, 칼빈주의의 견해을 따라 갑니다.

이것이 세상의 다른 종교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새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신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그 어떤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찾아 오셔서 계시하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믿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4. 칭의의 구원과 회심은 단회적인 사건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칭의의 구원은 단회적(일회적) 사건이기에, 또한 앞에서 말씀드린 칭의의 구원에 이르는 여정(과정, process)도, 구원을 받는 자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한 번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회심 또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에 일어나는 오직 한 번의 단회적인 사건임을 꼭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일단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탯줄을 끊고 태어나면, 완전한 인격체를 가진 한 사람으로 인정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회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다시 칭의의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전심으로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면,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동행하사며, 하나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끝까지 함께 하시며 도우시고 인도해 주셔서, 영화의 구원에 이르도록 지켜주십니다.

5. 성화의 구원

일단 회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면, 다음 단계의 구원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만나고 깨달으며, 점점 죄를 멀리하고, 조금씩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를 겪게 되는데, 보통 이것을 '성화의 구원(redemption of sanct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성화는 새로 태어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이 닮아서, 거룩해 져가는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가 처음엔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세월과 함께 천천히 몸이 자라고 생각이 성숙해져서 성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성경은 왜 성도에게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성화의 구원'을 또 이루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칭의의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요구합니다. 비록 죄인이 성령님의 은혜로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지만, 여전히 원죄로 인해 타락한 마음의 상태 곧 죄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칭의의 구원이 불완전한 구원이가하고 묻게 됩니다.

칭의의 구원은 죄인에서 의인으로, 혹은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신분적 변화 곧 존재론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칭의는 그 단어의 의미에 담겨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죄가 없다고 여기시고 의롭게 불러주시는 것이지, 실재로 구원받은 성도의 모든 죄를 제거되어 깨끗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님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에 그의 십자가 보혈이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죄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지만, 죄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또다른 별명이 '용서받은 죄인(forgiven sinner)'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자녀로 태어날 때 곧 칭의의 구원을 받을 때에, 모든 죄가 완전히 한 번에 제거 되었다면, 죄를 짓지 않으며 살아야 하거나, 죄를 짓고 싶어도 지울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칭의의 구원을 받은 후에도 바울의 고백처럼, 여전히 죄는 우리 마음에 있어서 왕 노릇하며 우리를 범죄하게 합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깊은 고민, 곧 성화의 구원을 이루라고 재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요구와, 이를 거부하고 옛 모습으로 되돌아 갈려는 죄된 본성과의 갈등으로 영적 싸움을 겪게 됩니다.

6. 성화의 구원과 회개

성화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온전히 '회개(repentance)'하는 것입니다.

죄에는 원죄(origin sin)와 자범죄(actual sin)가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전이된 원죄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범죄를 짓게하고, 그 결과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칭의의 구원이 원죄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면, 성화의 구원은 자범죄로 부터의 벗어남을 말합니다. 회심이 칭의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돌이킴이라면, 회개는 성화을 이루게 하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크게 보면 회심 안에 회개와 믿음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매일 삶 속에서 짓는 죄에 대한 후회, 안타까움, 좌절, 자책, 하나님께 대한 죄송한 마음을 포함하여, 다시 짓지 않아야 겠다는 결단으로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매일 삶 속에서 범하는 자범죄를 벗어나기 위해서 애써는, 반복적(repetitive)이고 지속적인(continuous) 의지로서, 오직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은 회심이 칭의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일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것과 대조됩니다.

따라서 회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 있는 성도가, 자원하여 행하는 자범죄에 대한 고백과 돌이킴입니다. 성도는 회개를 통하여 죄를 점점 멀리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됩니다.

7. 칭의의 구원과 성화의 구원은 결국 하나

먼저 성화의 구원은 칭의의 구원에 기초하고 있으며, 성화는 일평생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점진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단번에 주어지는 칭의의 구원과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성화의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이 함께 붙어있습니다. 바른 칭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죄에 민감해지며고 멀리하여, 천천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만약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은 사람이, 아무런 죄책감없이 예전의 삶을 계속 유지한다면, 그것은 가짜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참된 칭의는 반드시 성화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은 칭의의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말씀이 진리로 와서 닿고 이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칭의의 구원 곧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 났기 때문입니다.

8. 성화의 구원은 완성될 수 있는가?

성도가 일평생 살면서 참된 회개를 통해서 성화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면, 완전히 죄를 제거하고 성인이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이것은 회개의 횟수와 정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첨예한 의견이 있는데, 절대 완전한 성화가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회개를 통한 완전히 성화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장로교 계열)는 전자를 지지하고, 반면에인간의 자유 의지에 초점을 맞추는 알미니우스주의(감리교 계열)는 후자를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칭의의 구원을 이룬 후에도 부패한 마음이 그대로 있기에, 완전한 성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회개를 통해 죄의 강도와 빈도를 줄이고 약하게 할 수는 있지만, 죄된 육신을 벗고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인격체가 되기까지, 이 땅에서 완전한 성화는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를 통한 성화가 부질없는 짓인가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참된 칭의의 구원은 반드시 진정한 성화의 구원으로 나아가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화를 성도가 의식적으로 이루고자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오셔서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이미 성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성령께서 이끄시면 자신의 의지를 드려 반응하게 되고, 성화의 길을 자연스럽게 걷게 됩니다. 그랴서 일단 적은 순종으로 나아가면 더 큰 은혜가 임하게 되고, 이에 힘입어 더 나은 성화의 길을 걷게 될 때에, 다시 더 큰 은혜가 임하는 영적 선순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스스로의 의지를 드려서 꾸준히 성화되어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 행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섬기고 교제해야 합니다.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갈때에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성화가 늦게 진행된 다고 해서 스스로 심한 자책감을 갖거나, 성화가 느리게 진행되는 약한 지체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화의 구원은 성도의 성격, 믿음의 색깔, 여건이나 환경, 받은 달란트, 성령의 은사 등에 따라서 모두 다르기에, 획일화하거나 계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의 믿음이 달랐고, 베드로와 바울의 믿음의 색깔과 순종이 같지 않았습니다. 다만 서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도록 기도해 주고 필요를 채워주고 섬길 때에, 함께 성화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고 확신합니다.

9. 그러면 성화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회개를 해야 하는가?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진솔한 회개가 필수적이라면, 어떻게 회개해야하는가하는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청교도 신앙을 계승한 18세기 스코틀랜드 존 콜쿤(John Colquhoun, 1748~1827)은, '참된 회개'라는 저서에서, 회개의 여섯 가지 실천 요소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냥 참조하시고 절대로 이대로 회개해야 한다고 부담을 갖지 마십시오. 그냥 회개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 혹은 태도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참된 회개의 실행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의롭다는 교만이 무너지는 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를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겸손함을 가진다.
자신이 얼마나 비열하고 가증하며 혐오스러울 정도로 죄를 사랑하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의 모든 면에서 의를 행하지 못하는 무능력자임을 절감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회개의 첫걸음이다. 

둘째, 이어서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며 애통한다.

이 슬픔의 대상은 단지 자신이 죄로 인해 겪게 될 심판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교훈을 거스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려 대적하며 커다란 죄를 하나님께 범했는지를 아프게 탄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못 박은 자이며, 자신의 심령 안에서 거룩한 양심을 일깨우던 성령 하나님을 근심케 한 자라는 사실 앞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울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통함으로 탄식한다. 

셋째,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해 왔던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와 쓰라린 애통함은 모든 죄를 미워하고 혐오한다.

죄를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거스르는 극악한 것으로 여기며 이를 혐오하고 더럽고 가증한 것으로 여긴다.
죄를 범하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부패를 보고 분노하며 정죄한다. 곧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혐오하는 죄가 자신 안에 뿌리 깊게 있음을 탄식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상이, 마치 알몸이 백주에 드러나듯이, 낱낱이 드러남에 낯이 뜨듯하고 수치심을 피하지 못한다. 

다섯째, 이제 하나님 앞에서 백일하에 드러나는 자신의 죄과와 악함을 감히 감추려 시도하지 않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죄의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것은 하나님에게, 사람들에게 행한 것은 사람에게, 공적으로 지은 것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지은 것은 사적으로 행한다.
그리고 유의할 것은, 죄의 고백은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 죄의 시인이다. 

여섯째, 끝으로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회개를 잔정한 회개가 되게 하는 참된 본질이다. 왜 회개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인가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를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율법적 회개에 지나지 않는다.
정녕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알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은 자라면 그의 회개가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살펴서 그것에 감사의 심령으로 순종한다. 이 모든 일을 기쁨으로 신속하게 그리고 삶 전체 영역에 걸쳐서 행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9,10)

10. 회개와 징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죄된 본성이 살아있는 그대로 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뿐이기에, 성도는 모두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때문에 수시로 죄에 넘어지고 때로 알고도 짓습니다. 그럴 때마다 회개하면 됩니다. 또 성령이 내주하여서 죄에 대해서 매우 민감해지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죄까지도 대신 간구해주기도 합니다. 차츰 자범죄를 짓는 횟수는 줄게 되고, 정도는 약하게 됩니다. 조금씩 주님을 닮아 자라가면서, 작고 연역하지만 부분적으로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럼에도 자범죄를 온전히 회개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계속 짓는다면, 심판이 아닌 징계가 반드시 따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4,8)

만약 자범죄를 끝까지 자백 회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다”고 즉,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아직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혹시라도 자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징계가 아닌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 아닌가 염려한다면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자범죄도 죄의 본성(하나님을 거역하는 습성)에서 기인되긴 했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본성을 죽이는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범죄를 지어도 반드시, 죄를 지을 때마다 당장이 아니라도 성령의 강권적 간섭으로 언젠가는 회개하게 됩니다.

비록 자범죄를 지었다고 해서 이미 거듭난 신자에게 심판은 절대로 임하지 않습니다. 회개해도 용서 받지 못하는 죄들이 있다고 가르치는 구교(카톨릭)의 가르침은 잘못된 진리입니다.

여기에서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이라는 좀 어려운 신학적용어가 등장합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성도의 견인 곧 바른 칭의의 구원은 반드시 성화와 영화의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한 번 성도는 영원한 성도입니다.

그래서 비록 성도가 잠시 실족하여 징계를 받더러도 이로 인해서 절망하거나, 칭의의 구원에서 끊어질까 불안해 하지 않어야 합니다. 오히려 징계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합니다.

다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순종으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며, 하늘의 상급을 쌓는 것이 지혜로운 믿음입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주신 최고의 상급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복된 삶으로, 칭의의 구원을 기뻐하며, 성화의 구원에 매진하는 우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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