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October 30, 2018

루터의 직업 소명론

<루터의 직업 소명론>

/ 최주훈 목사(루터교)

목사만 거룩한 성직자인가? '가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자주', 목사를 높디 높은 거룩한 성직으로 여기는 분들을 만난다. 교인들이 그렇게 목사를 높여주면 그것이야 고마울 법도 한데, 목사 스스로 '나만 거룩하다'고 폼 잡는 분들을 보면 눈살부터 찌푸려진다. 개신교 신학에서 모든 직업은 거룩한 하나님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직업(Beruf)은 소명(Berufung, Calling부르심)이다. 종교개혁의 추동력으로 신학적으로 ‘칭의론’을 꼽지만 실상 일반인들에게 힘을 주었던 루터의 가르침은 '모든 신자의 만인사제직'이었다. 만인사제설이 신자들에게만 해당된 한계가 있다면, 거기서 배태된 열매인 직업소명론은 교회 밖의 일반인들에게 거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영적계급(주교 사제 수도사)과 세속계급(영주 기사 평민 노예)으로 출신성분과 직업을 나누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런 계급적 구분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평면에 놓는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진리는 만인사제설의 골자이다. 물론 앞서 언급했다시피 언제나 루터의 이 교설은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게 한계다. 그러나 이와 병행해서 가르쳐졌던 직업 소명론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담을 넘어선다.


‘신의 부름’이란 뜻의 ‘소명’(Berufung)이란 말은 중세 시대엔 영적 직무에 속한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지만 루터는 이를 세속직업에 확장시키고, ‘직업’(Beruf)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 세속 직업도 역시 하나님의 소명이다.

루터에게 직업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직무를 명령하며 주신 일자리이다.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주신 일종의 positioning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진 직업엔 목적이 있다. 그것은 자기 생계를 위한 것 뿐만 아니라 이웃을 먹여 살리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성직이다.

이하는 루터의 글과 사회학자 W. Conze의 말을 인용해 본다.

“그러므로 한 여종이 주인의 명령과 직무에 따라 마구간에서 똥을 치우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천국으로 가는 직선로를 제대로 찾은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 직무가 무엇이지, 자기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성자나 교회당으로 가는 이들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직진하는 자들이다.” (루터 WA10,309)

“루터가 가르친 기독교적 일과 직업 개념은 '재화를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가르친다. 일을 통해 소비지출과 자기 복락을 위해서만 노력하며 사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루터 역시 이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거기 그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기독교적(루터) 일의 개념은 자기 마음이 돈과 재화에만 의지하며 만족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현대 경제사회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루터는 가르친다. '일과 직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의 명령에 따라 이웃을 위한 사랑실천의 장이다.' 이런 루터의 일과 직업개념은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현대의 개념과 반대편에 서 있고,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끊어진 다리 저편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루터의 시각으로 보자면 현대 직업사회는 전혀 기독교적(achristlich)지 않고, 심지어 적그리스도적(Anti-christlich)이다.....”(W.Conze, Art: "Arbeit", in:Geschichtliche Grundbegriffe. Historisches Lexikon zur politisch-sozialen Sprahe in Deutschland, Bd.I, Stuttgart 1972, 166)

여기서 질문 하나 해 보자. 그렇다면 모든 세속 직업은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성직인가? 그렇지는 않다. 루터가 세속직업을 거룩한 소명이며 성직이라고 주장하는 전제 조건이 있다. 앞선 인용구에서 언급된 바, ‘자신의 일이 이웃의 유익을 도모하고 섬기는 일’이 되어야 한다. 루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곧 이웃사랑의 일과 직결된다는 것을 항시 힘주어 강조했다.

그 때문에 ‘각자 자기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는 일이 곧 세상을 예배(Gottesdienst)로 가득 채우는 길’로 루터는 가르친 것이다<루터의 탁상담화, in: Johannes Schilling(Hg.), Luther zum Vergnügen (Stuttgart: Phillpp Reclam jun., 2008), 37.>.

물론, 루터의 직업 소명론을 현대적 관점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상존한다. 왜냐하면, 루터 당시 직업이란 거의 대부분 혈통이나 가문에 따라 이어지는 태생적이고 고정적인 카테고리였지만, 현대의 직업은 언제라도 이동 가능한 유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직업 소명론이 갖는 가치는 퇴색되지 않는다. ‘부익부 빈익빈’,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는 식의 암울한 논리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통용된다. 그러나 자기 배만 불리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직업관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섬기는 직업관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이런 현대 사회의 음지를 직시하고 저항하는 기독교적 시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 내부적으로 본다면, 목사'만' 영적 직무고, 목사만 하나님의 소명 받은 하나님의 사자(?)라는 식의 논리로 교권을 수성하고, 갑질하는 자들에겐 경종을 울리는 개혁 정신의 무기가 된다.

우린 모두 모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거룩한 신자들이다. 어느 직업이든 이웃의 이익을 도모하며 서로를 높이며 섬기는 일을 추구한다면, 특정 직업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거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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