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무엇인가?
/ 정용섭 목사
요일 4:7-12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로 요한 공동체도 역시 자체적으로 풀어야할 많은 숙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신학적으로 여러 의견들이 분분한 상태인데 아직 기독교 교리가 확실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초기 기독교에서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심적인 논란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신이라고 한다면 인간성은 포기되어야 하며, 인간성을 강조하면 신성이 약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예수는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라는 명제로 정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신성만 강조하는 이들과 반대로 인성만 강조하는 이들은 결국 이단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요한 서신을 비롯해서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기에는 그들이 매우 큰 세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인간 예수님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해명함으로써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합니다.
그 매개는 '사랑'입니다. 요한이 정의하는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의 논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은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습니다. 16절에도 똑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말은 매우 아름답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추상적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명제가 추상적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냥 좋아하는 것, 보고싶은 것, 그래서 소유하고 싶은 것이 사랑일까요?
사랑에 대한 개념 정리도 천차만별이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도 역시 천차만별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 명제가 기독교 신앙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자칫 하나님을 인간 관계 안으로 축소시킬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미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7절)라는 말씀이나, 뒷 부분으로 가면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은 걸 보면 이렇게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사이의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말은 옳지만 그 역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제 사랑은 하나님이 나타나는 여러 계시 중의 하나이지 유일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사랑'을 규범적 윤리로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힘이 들고, 억울하게 생각되더라도 사랑하자고 말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이대면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과 십리를 함께 가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요구 앞에서 우리는 몇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는 이런 말씀을 단지 비유로만 간주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늘 마음의 부담으로 느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약간씩 사랑을 실천하면서 흡사 이 말씀에 충실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실제로 자기의 모든 삶을 부정하고 희생하면서 자학적으로 이 말씀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 반응에서 우리가 선택할만한 것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실제로 마더 데레사 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행한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런 태도로는 기업을 운영할 수도 없고, 예술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적당하게 자선을 베풀면서 자위하거나 또는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도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자유와 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여러 태도는 흡사 충효사상처럼 '사랑'을 규범으로 간주하는 데서 벌어지는 삶의 왜곡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랑은 생명이다
요한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생명을 얻게 하는 게 곧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대로 행동하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어린 소녀가 첫사랑에 빠질 때 느끼는 것 같은 열망 말입니다. 그런 욕망과 열망은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파괴하는 쪽으로 나가기 쉽습니다.
간혹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동반 자살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욕망이 자식을 파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타깝지만 교회의 신앙생활도 그런 경향을 보입니다. 자기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때문에 눈물을 흘려보았는가, 하고 감정적으로 접근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 사랑이 감상주의적 차원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성의 특징이라 할 '한'에 이런 '센티멘털리즘'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정치, 사회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문제를 감상적 차원에서만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을 좋게 보면 '신바람'이라거나 '흥'이 난다고 볼 수 있지만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냄비근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늘 합리성과 이성에 의해서 냉정하게 행동하는 게 무조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감정과 낭만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요소도 결국 이성과 합리의 바탕에서 추구되어야만 삶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요한을 비롯해서 신약성서는 기독교 신앙을 감정을 중심으로 한 열광주의 범주에서 다루지 않고, 다룬다고 하더라도 아주 부분적으로만 다루고, 근본적으로 매우 논리적으로 제시합니다. 즉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말하려는 모든 교리의 핵심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주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생명은 산다,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는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숭고한 인간의 행위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당장 내일 죽는 사람에게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재물이 그를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아픔을 나누고 실제로 서로 도우면 살아가야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죽음의 운명에서 건져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죽을 운명에서 살리신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를 통한 생명이야말로 참된 사랑입니다. 인간들의 달콤하고, 그러나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확실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야말로 사랑의 리얼리티라고 한다면 사랑은 곧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행위이며 그분의 능력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을 분이기 때문에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발생한 생명과 사랑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소유이거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며, 바로 그 하나님의 존재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억지로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없듯이 사랑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에게서 보인 일종의 도덕적 불안감은, 또한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기를 합리화하는 위선은 사랑을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는 데서 야기됩니다. 본인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만한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를 감당해야 할 책임감으로 여기는 데서 오는 일종의 정신 분열적 현상입니다.
사랑의 통로
그렇다면 우리의 무능력에 안주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요한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우리도 서로 사랑해야합니다."(11절).
이런 구절 자체는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일단 그 말은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은 우리는 그 생명의 열매로서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양자, 즉 생명과 사랑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 자는 당연히 생명의 원리에 따라서 그 생명을 나누게 되지만, 그 생명의 열매인 사랑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는 흡사 자녀들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철부지 아들을 무조건 감싸는 게 사랑이 아니듯이 우리의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체적인 삶에 대한 통찰력이 우리에게 갖추어질 때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경우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를 들었듯이,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들을 엄하게 다스렸듯이 사랑은 단지 달콤함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명의 확산입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깊이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었는가에 의해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중에 생명의 충만을 느끼게 되고, 그 생명의 충만을 주변과 나누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곧 영성이며, 사랑입니다.
피리를 통해서 소리가 나가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나가면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 자체가 아니라 피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울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소리가 우리를 통과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만 하면 소리가 음악을 만듭니다. 좋은 피리는 공명을 잘 시키는 것처럼 우리의 영성이 좋게 준비되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소리가 울릴 것입니다. 그 음악이 곧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끝으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2절).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생명의 충만이 자기의 삶을 통해서 주변으로 퍼지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이 난폭한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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